매일신문

[네비게이션]에피소드, 음성안내

네비게이션만 있으면 낯선곳도 내 손안에…

디지털 치매는 디지털 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 기억력이나 계산 능력 등이 크게 떨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휴대전화 사용이 보편화하면서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거나, 노래방 기기 자막을 보지 않고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외지에 차량을 가지고 가면 고속도로TG, 구멍가게, 음식점 등을 찾거나 주유소에서 약간의 기름을 넣으면서 길을 물었지만 요즘에는 제주도에 여행 가는 사람도 네비게이션만 달랑 떼어 가방에 넣고 갈 정도로 카 네비게이션 시스템(navigation system)은 삶의 동반자가 돼 버렸다.

네비게이션이 많이 보급되면서 '길치'가 늘고 있는 것도 디지털 치매의 한 종류다. 직장인 정현경(27'여)씨. 부산 출신으로 서울에서 학교를 나와 대구가 생소한 그는 3년 전 대구에 왔을 때 가장 먼저 차를 구입하면서 네비게이션을 장착했다. 직업의 특성상 대구시내 뿐 아니라 대구 인근까지 많이 다녀야 하지만 길을 몰라 선택한 게 네비게이션이다.

네비게이션 덕택에 정씨는 초행길도 어려움 없이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네비게이션 없이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길치가 됐다. 3년 동안 대구시내 구석 구석을 다녔지만 네비게이션에 의존하지 않고 찾아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한번은 네비게이션을 켜지 않고 단골 거래처로 가다 길을 헤맨 적도 있다. 자주 가는 길이라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도로 이정표 보는 훈련이 안 돼 있어 길을 잃었다. 그는 "불편하더라도 네비게이션 없이 운전했으면 지금쯤 대구 지리를 웬만큼 익혔을 것이다. 네비게이션에 의존하다 보니 자주 가는 길도 익히지 못하게된 것 같다"고 말했다.

자동차 여행을 좋아하는 김현수(40)씨는 네비게이션을 구입한 뒤 길눈이 어두워진 경우다. 몇달 전 그는 새로 난 도로가 표시되지 않은 지도 때문에 1시간30분 거리를 3시간에 걸쳐 둘러간 경험을 한 뒤 네비게이션을 차량에 설치했다. 10여년 동안 지도를 보고 국내 유명 관광지를 두루 다니다 보니 친구들 사이에서 '인간 네비게이션'으로 통했지만 기계 네비게이션에 의존하다 보니 감각이 무뎌져 한번 간 길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게 됐다.

김진홍(37)씨는 최근 네비게이션 고장으로 곤혹을 치뤘다. 지난 10월 군위의 한 낙시터로 가는 도중 네비게이션이 작동을 멈췄다. 자주 가는 길이기 때문에 네비게이션 없이 갈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지만 산길 하나 잘못 넘었다.

'엉뚱게이션'이라 말이 있을 정도로 네비게이션 안내가 부실해 운전자들을 황당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지난달 친구 결혼식 참석차 대구에서 의성으로 출발한 조성호(32)씨는 잘못된 네비게이션 안내로 낭패를 당했다. 네비게이션 안내를 따라가다 보니 의성 대신 구미의 어느 산골짜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조씨는 급기야 네비게이션을 끄고 길을 물어 물어 예식장을 찾아갔다. 그러는 바람에 결혼식에도 늦어 신랑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조씨는 "네비게이션이 길을 엉뚱하게 안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네비게이션 문화가 발달하면서 음성 안내도 독특해 지고 있다. 엠앤소프트는 맵피 사용자에게 기본 음성 안내 외에 사투리'애기'애교'형님 목소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사투리의 경우 지역 경계를 넘을 때마다 해당 사투리로 바뀐다. 강원도에 들어서면 '300m 앞 우회전 하시래요', 충청도에 가면 '안녕하세유, 여기는 충남이에유'라는 안내 음성이 나온다. 애교 목소리는 젊은 아가씨가 '자기야. 아항, 거기 아니야!', '자기 과속하면 미워!'라며 아양을 떤다.

인기 연예인들의 목소리를 녹음한 것도 있다. 박명수는 과속을 했을 때 '야야야! 속도 줄여. 죽고 싶어'라며 호통친다. 노홍철의 출발 멘트는 '좋아 가는 고야~', 현영은 비음 섞인 목소리로 '어머 자기 졸려요? 잠깨세요', 개그맨 김미려는 '김 기사 운전해~'라고 한다. 연애인 안내 목소리는 인터넷 상에서 공유되고 있다.

한편 네비게이션 업체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운전자들이 가장 듣고 싶은 연애인 음성 안내자로 최화정'이금희씨가 꼽혔으며 네비게이션 없이는 운전을 할 수 없다고 응답한 사람이 23%나 됐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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