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돌에 새기는 시

겨울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다. 공원의 나목은 동안거에 들어가 묵언 수행 중이다. 나무가 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움이라면, 나무들 사이에 서 있는 시비(詩碑)는 인간이 앉힌 예술적 조형물이다. 산 속에서 만난 작은 절집처럼 조화롭다. 경주 황성공원에는 박목월의 '얼룩송아지' 노래비, 김동리 문학비, 고려시대 문인 오세재 문학비가 있다. 이러한 비는 황성공원을 문화적 향기가 서린 곳으로 만들어 준다. 그 기념비는 고도 경주의 전통과 문화를 나타내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목월과 동리의 고향 경주에는 곳곳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보문단지 안 목월의 친필을 새긴 시비는 초승달 같은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조형물이 시를 받쳐주지 못하는 듯하다.

조선시대에도 많은 비를 세웠다. 대부분이 지방 관리들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다. 목민관의 선정에 진정으로 감사하며 세운 비가 과연 몇이나 될까. 자신의 재직을 기념하기 위해, 혹은 억지춘양으로 세워진 것이 대부분이리라. 모양이나 형식도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비석은 세월이 지나면 당대를 증언하는 역사가 된다. 또 기록성이 종이보다 훨씬 낫다. 우리처럼 전란이 잦았던 나라는 돌에 새겨진 글자 하나가 매우 소중하다. 조선시대 추사가 밝혀낸 진흥왕순수비도 북한산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 지자체에서 추진하는 기념비나 시비도 훗날 이 시대를 증언하는 좋은 사료가 될지도 모른다.

고창 선운사 입구에 미당의 시비가 있다. 시비는 작고 소박하다. 미당의 친필이 새겨진 시비 '선운사 동구(洞口)'는 동백꽃과 함께 명성이 높다. 시와 시비, 선운사와 동백꽃의 이미지가 상승 작용을 하며 관광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다. 시비 건립이 유행이다. 시와 조각의 만남은 특별한 감성을 유발하는 기제가 된다. 공공장소에 세우는 시비는 접근성과 친근감이 있어야 한다. 권위를 벗어던지고 시민에게 다가가려는 몸짓을 드러낼 때 비로소 시가 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수성못의 이상화 시비, 월광수변공원의 이설주 시비, 비슬산 유가사의 일연선사 시비 등이 모두 자연석 비다. 돌이 흔한 나라여서 그런가. 시비도 예술 작품이다. 굳이 돌에만 시를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술의 생명은 규범을 배반하는 데서 출발한다. 전쟁추모비, 새마을비 같은 계몽적이고 관료성이 물씬 풍기는 기념비는 시민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 공공의 예술품은 당대의 시대 정신과 꿈을 대변한다. 공원을 산책하다 만난 시비 앞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 수도 있으리라. 길을 걷다 마주친 시 한 구절은 마음의 오솔길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작은 길에서 만나는 지금의 시비들은 너무 무겁고 거창하다.

이경희 달서여성인력개발센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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