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성환 교수의 세상보기] 순서만 바꿔도 달라진다

어린아이를 가진 맞벌이에게 아침은 전쟁이다. 출근 전 아이 도우미가 온다. 아이는 울면서 도우미가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밀어낸다. 그리고 출근하는 엄마 아빠에게 매달린다. 매일 이 광경을 목도하면서 출근하는 부모는 도우미가 아이를 괴롭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을 한다. 도우미를 바꾸어 보기도 하지만 아이의 반응은 마찬가지이다.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아이에게 도우미는 엄마 아빠의 출근을 알리는 신호이다. 도우미가 오지 않으면 엄마 아빠는 출근을 하지 않고 자기와 즐겁게 놀아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에게 도우미는 엄마 아빠를 쫓아내는 미운 존재가 된다.

순서를 바꿔 도우미가 오기 전에 부모가 먼저 집을 나간다. 이어서 곧바로 도우미가 들어온다. 부모가 출근한 후 혼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타난 도우미는 그 아이에게 구세주와 같은 존재가 된다. 아이는 도우미를 기다리게 되고, 부모도 안심하고 출근을 한다. 부모의 출근과 도우미의 방문을 순서만 바꾸었는데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부모가 출근을 하고 나면 곧장 도우미가 온다는 것을 아이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말에 일에는 순서가 있다고 했던가.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 경선의 부정투표로 붕괴 상황에 처해 있다. 그 중심에 이정희 전 대표가 있었다. 진보의 꽃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그가 지금은 민주주의 파괴자, 진보 정치 몰락의 주범으로 낙인찍혀 사라졌다. 안타깝다. 서울 관악을 야권연대 경선 여론조사 과정에서 보좌관이 보낸 문자메시지가 여론 조작 의혹을 불러일으키자 그는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당 경선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전면 부정해, 진보당 몰락의 방아쇠를 당겼다. 왜 그랬을까. 당권 유지를 위해, 당권파의 비례대표 이석기와 김재연을 보호하기 위해, 비당권파를 몰아내고 높아진 제3당의 위상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는가. 당원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그의 말은 진정성이 없다. 진보당 당원들도 납득하지 않는다. 그의 의도대로 김재연과 이석기가 등원을 하더라도 국민과 동료 국회의원들이 그들을 인정할까.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그가 일의 순서만 바꾸었어도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사보고서를 부정하고 재조사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보고서를 인정한 후에 의혹이 가는 부분에 대해 정밀 조사를 해서 시비를 가렸어야 했다. 그러면 국민들의 공분을 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권파의 패권적인 나쁜 관행도 쇄신하고, 다수 당원의 명예도 건지고, 이석기는 몰라도 청년 비례대표 몫인 김재연은 구제받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당대표로서의 이정희의 위기관리 능력도 인정받았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국가나 집단의 구성원 전원이 권력자이며, 그 의사 결정이 구성원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체제를 가리킨다. 근대 민주제에서는 의사 결정의 방법으로 구성원에 의한 선거, 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회, 그 의회에서의 토론과 다수결 등이 제도화되어 있다. 민주주의(democracy)는 주의(ideology)나 이념(ism)이 아니라 권력의 존재 양태나 의사 결정 방법을 가리키는 지극히 기술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비되는 용어는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귀족제, 독재(獨裁), 전제(專制) 등이다. 부정투표로 의사 결정 과정을 왜곡함으로써 진보당은 비민주적 세력으로, 이정희는 그것을 옹호하는 나쁜 정치인으로 비치고 있다. 지금 진보당의 위기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정치는 국민을 실어가는 수레이다. 정치인은 그 수레를 끌어가는 사람이다. 수레를 끄는 사람이 불한당 같거나 수레의 방향이 다를 때 국민들은 그 수레를 타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가 의도한 방향으로 수레를 끌고 가려 했다. 결국 그는 당권파를 지키기 위해 빈 수레를 끌고 온 꼴이 되어 버렸다. 마지막에는 그도 그 수레를 버려야 했다. 진보세력은 국민이 안심하고 탈 수 있는 새 수레를 준비해야 한다.

계명대 교수·국경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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