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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 "아들 간으로 새삶…기운 차려 빚 갚아야죠" 간경변증 석정민씨

석정민(가명
석정민(가명'56) 씨는 간경변증 진단을 받고 둘째 아들(28)의 간을 이식받았다. 수술을 받은 지 한 달도 채 안 됐지만 하루 2시간 이상 꼬박꼬박 운동을 한다. 석 씨는 "내 몸이 괜찮아져야 두 아들 장가도 보내고 주변에 진 빚도 갚는다.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하나 둘, 하나 둘."

간경변증(간경화) 환자 석정민(가명'56) 씨는 수시로 운동한다. 간이식 수술을 받은 지 한 달이 채 안 됐지만 그는 매일 병원 주변을 한 바퀴씩 돈다. 부인 김옥순(가명'53) 씨는 "배에 니은 자(ㄴ)로 수술 자국이 크게 남아 있어 빨리 걸으면 배가 많이 아플 텐데 운동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고 고 걱정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아 주변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한고비 넘으면 또 고비

28일 오전 대구의 한 대학병원 로비. 환자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석 씨가 기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약속 시간이 10분이나 남았는데도 먼저 나와 기자를 기다릴 만큼 그는 부지런함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혼자서 사업을 하며 생긴 습관은 병마가 덮쳐도 바뀌지 않았다.

석 씨가 간경변증에 걸린 것을 안 것은 지난해 11월. 원래 B형간염 보균자였던 그는 간 건강을 항상 살펴야 하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침묵의 장기'라고 불리는 간은 무심하게도 그에게 건강의 적신호를 늦게 알려줬다. "여태 살면서 몸이 심하게 아픈 적이 없었어요. 50년 가까이 살면서 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었고요. 그런데 갑자기 물이 찬 것처럼 배가 불룩하게 나오길래 병원에 갔더니 간경화라고 하더군요."

그해 가을 진단을 받고서도 그는 한참 동안 병원에 가지 못했다. 간 이식 수술비용이 없어서였다. 석 씨도 한때는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 20대 후반부터 성실하게 차근차근 사업을 일궈온 결과였다. 부인 김 씨는 "남편은 결혼한 뒤에 대구에 있는 백화점에 작은 자리를 얻어 액세서리 판매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2000년도 말까지만 해도 그의 사업은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골프웨어를 수입하는 무역업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그의 삶도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했다. 당시 외환위기 후유증을 앓고 있던 우리나라에 고가의 골프웨어 시장이 지금처럼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류 수입은 봄에 가을'겨울 옷을 미리 주문해야 하니까 자금 회전이 빨라야 해요. 그런데 옷은 잘 안 팔리고, 계속 현금을 주고 수입을 해와야 하고. 그때 빚을 참 많이 졌습니다."

◆평생 갚아야 하는 마음의 빚

이 사업 때문에 석 씨는 수십억원을 고스란히 날렸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사업을 살려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30년 가까이 살았던 주택은 경매로 넘어갔고,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8만원짜리 집으로 이사했다. 그래도 석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면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백화점 판매원으로 취업했다. 개인파산 신청도 하지 않았다. '남에게 진 빚은 무조건 내 힘으로 갚아야 한다'는 삶의 신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건강이 그를 배신하고 말았다. 간경변증 진단을 받으면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석 씨에게 간을 이식할 기증자를 찾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때 둘째 아들(28)이 "아버지에게 내 간을 드리겠다"고 나섰다. 석 씨는 "네 간은 절대 받을 수 없다"며 버텼지만 아들의 고집 앞에 무너졌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수술비와 병원비였다.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지 않은데다 사업이 망하면서 각종 보험을 해지하는 바람에 4천만원이 넘게 드는 병원비와 수술비 지원을 받을 길이 없었다.

이번에는 석 씨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힘을 모았다. "정민이를 살리자"며 고등학교 선배와 동창들을 상대로 모금 운동을 했고 2천만원 가까운 성금을 모아 석 씨에게 전달했다. 이 돈으로 수술비 보증금 2천만원을 병원에 냈다. 부인 김 씨는 "남편 친구들이 병실에 찾아와 '체육대회 때 성민이 니가 없으니까 운동장이 텅 빈 것 같더라. 빨리 일어나서 같이 공차자'며 성금을 전해주는데 고마워서 눈물이 흘렀다. 그분들에게 죽을 때까지 갚아도 다 못 갚을 마음의 빚을 졌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문제는 남은 병원비와 앞으로의 삶이다. 다음 달 퇴원 전까지 2천만원이 넘는 병원비를 더 내야 하는데 석 씨 부부에겐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부인 김 씨가 틈틈이 백화점에서 일해 일당을 벌어오지만 이 돈으로 생활비를 감당하기도 벅차다. 큰아들(30)은 공무원 준비를 하며 김 씨와 교대로 아버지를 간병하고 있어 둘째 아들의 140만원 남짓한 월급에 기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퇴원을 한 뒤에도 한 달에 30만원 정도 드는 약값을 감당해야 해 이 돈도 석 씨에게 큰 부담이다. "빨리 내 몸이 나아야 주변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는데…. 언제까지 다른 사람 도움만 받고 살 수는 없잖소." 그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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