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백범일지 읽고 역사학자 길로…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유학자는 잘 알아도 독립유공자 최다 배출 몰라…그래서 안동 선택했죠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은 평생 독립운동 연구에 천착해왔다. 역사 속에서 통합을 이끌어낸 인물들을 학교교육에서 적극적으로 부각시켜야 통일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은 평생 독립운동 연구에 천착해왔다. 역사 속에서 통합을 이끌어낸 인물들을 학교교육에서 적극적으로 부각시켜야 통일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희곤 관장.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희곤 관장.

까까머리 중학생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했다. 겨울에는 내복 입은 학생들만 골라내 운동장을 몇 바퀴씩 뛰게 했다. 추위조차 못 이기는 약한 정신력으로 어떻게 이 땅을 침탈했던 일본을 이기겠느냐는 꾸짖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김구 선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히 '백범일지'(白凡逸志)는 꼭 한 번 읽어봐야 한다고 호소했다. 소년에게는 그게 평생 붙들고 살아야 할 화두가 됐다. 독립운동사 연구의 권위자인 김희곤(59'안동대 교수)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이 사학도의 길을 걷게 된 계기였다. 제68주년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김 관장을 안동에서 만났다.

◆역사학자 외길 인생

"선생님으로부터 백범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대구 시내 헌책방을 모두 뒤졌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정적(政敵)이었던 김구 선생의 책을 모두 회수해버리는 바람에 일반서점에서는 '백범일지'를 찾기가 어려웠거든요. 대구 대봉동 헌책방에서 운 좋게 한 권을 구해서 읽은 뒤에는 책상 앞에 태극기를 붙여놓고 공부했더랬지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인데 말이죠. 그런데 벌레가 표지를 갉아먹은 그 책이 나중에 알고 보니 귀하디 귀한 초판본이더군요. 허허허."

사실 당시 김 관장에게는 책 한 권 사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술자였던 선친의 수입은 아들 삼형제의 학비를 대기에도 벅찼다. 그도 경북중학교 재학 시절 서구 비산동에서 학교까지 걸어 통학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경북고 졸업 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아 1년간 과외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 겨우 대학에 진학했다.

김 관장은 그나마 장남이라 나은 편이었다. 두 동생은 중'고교를 제대로 마치지도 못했다. 속절없이 아프기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학교수인 김 관장보다도 훨씬 살림살이가 낫다고 한다. 큰동생은 법무사(김정곤), 둘째 동생은 의사(김명곤)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인간 승리의 표상들'이라는 게 조금은 목이 멘 듯한 김 관장의 칭찬이었다.

"그 어려웠던 때에 저희 형제가 다행히도 삐뚤어지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의 가르침이 컸던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귀국했던 어머니는 '조선인'으로 살아야 했던 경험을 통해 저희에게 자존감과 자립심을 길러주셨거든요. 물론 두 동생한테는 항상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우리 근현대사 전공자가 드물었던 시절에 그가 해외 독립운동 분야를 파고든 데에도 어머니의 영향이 있는 듯했다.

그는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사 전문가로 꼽힌다. 경북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곽단체', 박사학위 논문으로 '중국에서의 독립운동단체 연구'를 썼다. 이후 천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이사,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편찬위원장, 한국근현대사학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안동대에 부임하고 보니 거대한 '옥돌'이 이 땅에 묻혀 있는 줄을 지역 분들도 잘 모르고 있더군요.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대해선 해박하지만 독립운동의 발상지이자 전국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사실은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일반인 대상으로 역사 강연회를 열었는데 우려와 달리 1천200명이 넘게 오셨어요. 자리를 메우려 동원했던 학생 200명은 아예 앉지도 못했습니다. 주민들의 지적 목마름을 확인한 것이죠. 독립운동기념관이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안동은 독립운동의 세계적 모델

2007년 문을 연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은 임하면 천전리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에 반변천이 흘러서 '내앞마을'로 이름붙여진 곳이다. 의성 김씨의 600년 세거지로, 퇴계 학맥을 이은 학봉 김성일 등 안동을 대표하는 집안 중 하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주민 상당수가 의병을 일으키거나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만주 서간도(西間島) 항일운동의 중심이었던 김동삼과 동생 김동만, 김대락과 아들 김형식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현재 기념관 자리는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었던 '협동학교' 터였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의 초대 관장인 그는 1999년 기념관 건립을 처음 제안했다. 사업 추진이 확정된 2005년부터는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 밑그림을 그렸다. 1996년부터 1년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한 것도 도움이 됐다.

"베트남 한 농촌마을의 변화를 다룬 강좌가 하버드대에서 인기가 높았습니다. 저는 안동을 떠올렸지요. 특히 내앞마을은 독립운동의 세계적 모델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안동은 최초의 항일의병인 갑오의병(1894년)이 일어난 곳이자 해방까지 독립운동이 중단없이 이어진 곳이거든요. 또 우리나라는 아일랜드와 함께 지배-피지배 민족 사이의 역량 차이가 없었던 대표적 국가입니다. 그래서 귀국 후 당시 정동호 안동시장에게 도시 이미지를 한 번 바꿔보자고 제안했던 것이죠."

그의 꿈은 착착 이뤄져 가고 있다. 이제 안동은 '유교문화의 산실'일 뿐만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앞장서 실천했던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단순한 전시만으로는 안 된다는 그의 '고집' 덕분에 마련된 연수원에는 늘 안동의 기개를 배우려고 찾는 이들로 붐빈다. 전시관은 경북도청 이전에 맞춰 2015년 '경북독립운동기념관'으로 거듭난다.

"지금 시행하고 있는 연수프로그램이 15개가 넘습니다. 어린이부터 교사, 공무원까지 대상도 다양합니다. 역사체험극도 해보고 독립군가도 배우면서 선조들의 조국애를 되새깁니다. 옛날에는 비석을 세워 역사를 알렸지만 요즘 누가 전시관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까? 안동을 '보수꼴통'으로만 생각했다는 진보진영 인사들도 이곳을 체험한 뒤에는 눈물을 흘립니다. 천안함 사태 이후 청와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서 저희 사례를 소개했더니 다들 놀라시더군요."

기념관은 20007년부터 '독립운동해설사' 양성반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의 입으로 조상 자랑하는 것을 쑥스러워 하는 지역의 정서를 고려한 김 관장의 아이디어다. 이 과정은 2009년부터 국가보훈처에서 필요성을 인식해 국비를 지원받고 있다.

◆"역사에서 통합 이끌어낸 인물 가르쳐야"

그에게 다가오는 광복절의 의미를 물었더니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은 남북이 분단돼 있는 만큼 불완전한 광복이란 이야기였다. 시대정신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돌직구를 던졌다. 국민을 하나로 묶으려 하는 지도자는 없이 어떻게든 편을 갈라 싸우게 만든다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복(復)은 주역에 나오는 괘(卦)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점으로, 본래 상태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통일된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이 시대의 역사적 과제는 완전한 광복입니다. 하지만 '분리 위의 집권'이란 집권 공식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됐습니다. 보수, 진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의견이 다르면 어떻게 화합할까를 고민해야 하는데 어느 진영의 논리냐만 따집니다. 계속 이런 상태가 이어지면 우리 국민의 체질 자체가 바뀌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는 통일로 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함께 어울릴 줄 아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사 속에서 통합을 이끌어낸 인물들을 학교교육에서 적극적으로 부각시켜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예를 들면 이상용, 김동삼, 안창호, 김구 같은 분들이시죠. 1926년 6'10 만세운동의 주역이었던 권오설 선생의 경우 좌우합작을 책임지셨던 분이고요. 모두 통합의 귀재들로,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1919년 첫 임정 수반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이동휘 국무총리를세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민주화그룹과 독재부역그룹,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진보와 보수로 국민을 분리하고 그 위에서 집권하려는 세력이 있는 한 국민은 계속 분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상태에서 통일은 안 됩니다."

대구경북 독립운동사에 대한 그의 오랜 연구는 자긍심을 갖되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부로 이어졌다.

"대구에서 1927년 장진홍 선생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아는 대구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겨레가 나라를 잃고 힘들어할 때 우리 선조들이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경북인의 덕목은 전통과 보수, 혁신과 진보라는 두 가지 상반된 틀을 하나로 묶어가는 자랑스러운 통합정신입니다. 지킬 가치는 지키되 변해야 할 때는 혁명적으로 변화해온 게 우리 지역입니다."

글'사진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김희곤 관장=195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 서부초교와 경북중'고를 거쳐 경북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8년부터 안동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후 경북지역의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주력해 '안동의 독립운동사' '안동의 독립운동가 700인' '잊혀진 사회주의 운동가 이준태' '제대로 본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이육사 평전' '안동 내앞마을, 독립운동의 성지' 등 20여 권의 저서를 냈다.

또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이름 없이 묻혔던 지역의 독립유공자를 찾아내는 데도 전력을 기울였다. 이만도 선생의 며느리이자 김대락 선생의 여동생으로 뮤지컬 '락'의 실제 인물인 김락 여사,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권오설 선생 등의 활동을 발굴해냈다. 현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이사, 경북신도청포럼 부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등을 맡아 활발한 강연'저술 활동을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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