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철(文史哲)이라고 했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문학적 학문적으로 서로 넘나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날 정객들은 모두가 시문과 역사에 능통했다. 동지를 만나도, 친지를 만나도, 대화가 통하는 여인을 만나도 거침없이 시문을 수창(酬唱)했다.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이었던 정객(政客)이 한국화 한 폭을 그리듯이 문학적 상상력으로 일구어낸 시 한 편을 만난다. 마지막 결구에서 시인의 상상력을 만나는 멋진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가을 구름 몽실몽실 사방 산은 고적한데
소리없이 지는 잎들 온 땅 가득 붉었어라
말 세워 돌아갈 길 묻노니 그림 속이 내 몸인가
秋陰漠漠四山空 落葉無聲滿地紅
추음막막사산공 낙엽무성만지홍
立馬溪橋問歸路 不知身在畵圖中
입마계교문귀로 부지신재화도중
'몸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저자,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으로 고려 말기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새 왕조를 개창했다. 제도의 개혁과 정비를 통해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튼튼하게 다져놓았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가을 구름 몽실몽실 사방 산은 고적한데/ 소리 없이 지는 잎들 온 땅 가득 붉어라/ 시내 다리에서 말을 세우고 돌아갈 길 묻노라니/ 이 내 몸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는지'로 번역된다.
김 거사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전라도 나주 인근에 살던 어떤 식자로 추정된다. 삼봉이 34~36세 시절이다. 이인임을 필두로 한 친원파의 세력에 눌려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 거평부곡에 속한 소재동(消災洞)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고 전하는데, 그 때 쓴 시 28수가 '금남잡영'(錦南雜詠)에 묶여 있다.
시인은 김 거사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어느덧 시냇가 다리 앞에 와 섰다. 올 때에는 집을 찾느라 보지 못한 늦가을 오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쪽빛 하늘에는 비늘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고 사이의 산은 인적이 없이 텅 빈 듯 고요하다. 바람 없는 적막 속에 한 잎 두 잎 소리 없이 낙엽은 지고 있다. '아, 어느새 단풍이 수북이 쌓인 만추의 한가운데에 내가 오똑히 서 있구나'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화자가 한 폭의 그림 속에 홀린 듯이 말을 타고 들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고 보면 '김 거사는 화중지인(畵中之人)이 아닌가!'라고도 하면서….
삼봉 정도전은 1342년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성하여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당시 동문으로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있다.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지만 권신, 이인임 등의 친원파 권문세족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친명(親明)정책을 주장했다가 친원파에게 공격을 받아 회진현(會津縣, 현 전남 나주)에 유배됐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선대 고향인 경북 영주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1383년 함경도 함주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막료가 되었다. 1394년 한양 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했지만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됐다. 유학(儒學)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외교·행정·역사·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저서에 '삼봉집','경제문감' 등이 있다.
【한자와 어구】
秋陰: 가을의 구름 낀 하늘/ 漠漠: 몽실몽실하다/ 空: 한적하다, 고적하다/ 落葉: 낙엽/ 無聲: 소리 없다/ 滿地紅: 온 땅이 가득 붉다/ 立馬: 달리던 말을 세우다/ 溪橋: 시내 다리/ 問歸路: 돌아갈 길을 묻다/ 不知: 알지 못하겠네/ 身在: 몸이 ~에 있다/ 畵圖中: 그림 가운데.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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