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령시에서 20년 동안 약업사를 운영하던 황모(62) 씨는 5년 전 약령시를 떠났다. 황 씨의 약업사가 있던 건물에 현대백화점이 들어서게 된 것. 황 씨는 오랜 기간 운영하던 약업사 문을 닫고 인근 중구 남산동으로 가게를 옮겼다. 황 씨는 "한평생 몸담고 일하던 약업사를 접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가겟세가 비교적 저렴한 곳을 찾아 이사를 갔다"고 말했다.
지난 2011년 8월 현대백화점 대구점 입점으로 우려되던 '약령시 붕괴론'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현대백화점 입점으로 주변 건물 임차료가 오르자 한방 관련 업소들은 약령시를 떠나거나 변두리로 밀려나는 신세가 됐다. 현대백화점 입점에 따른 약령시 소멸은 예고된 재앙이었지만 대구시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식 대책만 늘어놓고 있다.
◆현실화되는 약령시 붕괴론
약령시에 대한 위기감은 현대백화점 대구점 입점이 가시화되면서부터 나왔다. 현대백화점 건물 공사가 시작된 2009년부터 개점하던 해인 2011년까지 10개 한방 관련 업소가 문을 닫았다. 모두 현대백화점과 현대백화점 주차장 부지에 있던 한방 관련 업소였다. 약령시 동편과 떡전골목에 있던 5개 업소는 식육점, 식당 등 한방과는 무관한 업종으로 바뀌었다.
현대백화점이 들어서기 전인 2005년 약령시에 있던 한방 관련 업소는 216곳이었다. 2009년까지 5년 동안은 없어진 한방 관련 업소가 단 6곳. 그러나 현대백화점 건물 공사가 시작되고 2년 만에 무려 14곳이 사라졌다. 약령시 붕괴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약업사의 '약령시 엑소더스'가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 약령시 상인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나올 정도다. 약령시 한방 관련 업주 대부분이 영세한 세입자이기 때문이다.
대구시에 따르면 약령시 일대 전체 업소 중 자가(自家) 비율은 36%. 치솟는 임차료가 부담스러운 영세 업소들은 임차료가 싼 곳을 찾아 떠나야 했다. 이들은 주변 골목과 건물 지하'2층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약업사를 40년 넘게 운영한 임모(67) 씨는 "약업사가 득실했던 건물에 다 떠나고 홀로 남았다. 나 역시 가게 규모를 축소했다. 약령시에서 안방 주인 노릇을 해야 할 한방 업소가 뒷방 더부살이 신세가 됐다"고 한탄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 대책
현대백화점이 약령시 남쪽에 들어서고 주변 상권이 활성화되면 약령시에 위기가 닥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009년 중앙로 대중교통전용지구가 지정되면서 약령시 이면도로는 이미 만성적인 교통 체증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대구시는 뒷짐만 지고 있었다. 대구시가 한 일은 현대백화점이 약령시 활성화를 위해 써달라며 준 27억원을 활용한 것이 전부. 이는 옛 제일교회 맞은편에 들어설 한방웰빙체험관 부지 매입비로 사용됐다.
대구시의 허술한 보호막에 약령시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고 있다. 한방 관련 업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자동차가 점령한 약령시 이면도로는 깨지고 부서져 흉물이 되었다. 건강기능식품, 비타민 등 한약을 대체할 수 있는 식품들의 등장은 사람들의 발길을 약령시가 아닌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로 돌렸다.
대구시는 뒤늦게 약령시 활성화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효과가 나타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대구시는 한방에 대한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약령시 한의약박물관' '한방웰빙체험관' '약령시한의약박물관'을 운영하고, '약령시 한약재품질인증센터'와 약용작물 명품화 지원사업을 통해 한약재에 대한 소비자 신뢰 회복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상인들은 대구시의 대책들이 당장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박민규 대구경북연구원 창조산업연구실 부연구위원은 "약령시와 현대백화점이 상생하려는 조치는 현대백화점 개점 전에 대구시가 마련했어야 했다. 대구시는 사후 조치로라도 한약 업소들이 영업을 할 수 있는 혜택들을 제공하고, 한약업소들도 자체적으로 연구개발을 해야 약령시의 오랜 전통이 유지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약령시의 쇠락은 식생활 습관 변화, 한방산업의 침체 등 변화의 흐름에 맞게 약령시가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일어난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 상인은 "현대백화점과 다른 업종의 입점은 오히려 침체됐던 약령시에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면서 "약령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의 바람을 타고 몰려온 소비자들에게 약령시만의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보여주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오준협 대구시 의료산업과장은 "약령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방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현재는 이를 위한 연구 개발과 품질 보증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선화기자 freshgir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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