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중 대구 시내 사람들은 먹고살기 참 힘들었다. 시골이야 그래도 논밭과 산이라도 있으니 초근목피(草根木皮)라도 먹을 건 있었다. 하지만 도시는 피란민들이 모여 온통 사람 투성이 인데다 군인들까지 휘젓고 다녔으니 굶어 죽기 전에 지레 숨 못 쉬어 죽을 판이었다. 생산품이 없으니 군부대 가서 일해주고 끼니를 때우거나 군용물품 장사해서 호구지책 하거나 미군 부대 꿀꿀이 죽(돼지먹이 죽) 얻어와 먹고사는 수밖에 없었다. UN에서 우윳가루를 자주 배급해줘 굶어 죽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이들이라고 마냥 집에서 빈둥거릴 수만 없었다. 어린 축들은 동촌에 가서 풋사과 떨어진 것 주워 오기도 하고 역에서 내다 버린 석탄재 더미에서 '곡수'(코크스)를 캐기도 했다. 나이 좀 먹은 애들은 돈벌이에 나섰다. 특히 피란민들 어린이들은 죽기 살기로 생활전선에 뛰어다녔다. 어떤 애들은 미군 부대나 미군 가정에 남자 식모로 취업해 잔심부름이나 밥 짓고 빨래해주고 돈을 벌었다. 어른들은 이 애들을 "하스 뽀이"(하우스 보이)라고 불렀다. 그다음에는 신문팔이, 아이스께끼 장수 그리고 구두닦이를 많이 했다. 대우실업의 김우중 회장도 이 무렵 학교 다니며 방과 후 신문팔이를 했다. 방천시장을 주무대로 했는데 딴 애들은 해가 저물도록 뛰어다녀도 다 팔지 못했는 데 김우중은 비법이 있어 매일 한 시간도 안 되어 다 팔아 치우는 놀라운 실력을 과시했다.
"슈샤인, 슈샨 보이 슈사인 슈샨 보이, 슈 슈 슈 슈 슈샤인 보이, 슈 슈 슈 슈 슈샤인 보이(헬로 슈샤인 슈사인)./ 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 /아무리 취직 못해 인색하여도/ 구두 하나 못 닦아 신는 도련님은요 어여쁜 아가씨는/ 멋쟁이 아가씨는 노 노 노 노 노 노 노 굿이래요."-슈샤인 보이(1952년 스타레코드사, 이 서구 작사, 손목인 작곡, 박단마 노래.)
당시에 대구에 구두 신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있어도 구두닦이에게 닦는 사람은 없었다. 구두 닦는 사람은 주로 미국 군인들이었다. 경북의대(도립병원), 중앙국민학교, 경북중학교, 대구중학교 등에 UN군들이 주둔하고 있어 구두 닦는 애들은 그 부근을 주로 돌아다녔다. 그 덕에 구두닦이는 영어 명칭인 "슈샤인 뽀이"라고 불렸다. 애들 직업이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주제가가 있는 직종은 구두닦이 하나밖에 없다. 중앙로가 중앙통으로 불리던 그 시절 슈사인 보이 노래는 역전에서 중앙통 좌우로 향촌동, 동성로, 양키시장에서 틈나는 대로, 퇴근 후 대폿집에서 많이 불리었다. 이곳 저곳 전파상 스피커에서도 크게 울려 퍼졌다. 당시는 창법이 다 그러했지만 특히 신카나리아, 백설희, 백난아 그리고 박단마의 간드러진 목소리는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문자 그대로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는 감미로운 박단마의 슈샤인 보이는 죽지 못해 사는 대구 시민들 가슴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구두닦이 애들의 기를 살려주는 가뭄의 단비 역할을 해주는 치유의 노래였다.
내무부가 행정자치부, 행정안전부, 안전행정부, 행정자치부, 행정안전부라는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식으로 짜증나는 이름의 변천을 겪었다. 딴 나라 내무부는 그냥 수십 년 동안 내무부다. 한국에서는 내무부서 하는 일을 제목에 다 나타내려다 보니 이런 코미디를 하는 모양이다. 정부에서 개명한다면 슈샤인 보이는'물광 내는, 불광 내는, 찍새, 딲새 구두닦이'라는 호칭을 써야 하지 않을까? B.B.S 박스의 사장님들 아침 일과를 슈샤인 보이 노래부터 시작함이 어떨까요?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