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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문의 한시 산책]어디 가는 배인지는 알 수가 없네(강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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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뜰 때가 지났는데 해는 안 뜨고 江日晩未生(강일만미생)

아득한 십리 강에 자욱한 안개 蒼茫十里霧(창망십리무)
찰싹찰싹 노 젓는 소리 들릴 뿐 但聞柔櫓聲(당문유로향)
어디로 가는 밴지 알 수가 없네 不見舟行處(불견주행처)
*원제: 호정조기우음(湖亭朝起偶吟: 강가 정자에서 아침에 일어나 우연히 읊음)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 보니,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마지막 무애(無㝵) 도인으로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무산 큰 스님의 열반송(涅槃頌)이다. 스님과 나는 서로 옷깃을 스친 정도의 아주 가벼운 인연이 있었다. 스님의 난데없는 사랑을 받아, 두어 번 모시고 산나물 비빔밥을 먹었던 인연. 그리하여 마침내 영결식 전날 설악산 신흥사로 달려갔더니, 설악은 도무지 간 데가 없고 천 길 만 길의 안개가 자욱한 ‘무산’(霧山)만 거기 딱 버티고 있었다. 큰 스님께 세 번 절을 올린 뒤에 밖으로 나와서 다시 쳐다봐도, 그 무수한 설악 연봉 가운데 단 한 봉우리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자욱한 안개 속에서 멀리 뻐꾸기가 뻐꾹뻐꾹 울고 있어, 저기 뻐꾸기가 울고 있는 곳에 설악이 버티고 있겠거니 하며. 그 천봉(千峯) 만 봉(萬峯)을 내 마음대로 상상하다 돌아왔다.
위의 시를 지은 강극성(姜克誠: 1526~1576)도 비슷한 경우를 당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는 강가에 있는 정자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게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 뜰 때가 지났다 싶은데도, 해가 돋을 기미가 전혀 없다. 슬며시 문을 열고 나가 보았더니, 아득한 십리 강변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있어서 도무지 지척을 알 수가 없다. 그 안개 속에서 찰싹찰싹 가볍게 노를 젓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안개 속에 배가 지나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안개가 천 길도 넘고 만 길도 넘다보니, 어디로 가는 무슨 배인지 전혀 짐작을 할 수가 없다. 시야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정말 기이하게도 풍경 전체가 대번에 몽환적인 수묵화로 돌변하는 순간이다. 그 광활한 여백에 어떤 신운(神韻)이 어리고, 선취(禪趣)마저 감돌고 있는 그림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운이 어리고 선취가 감도는 무산 큰 스님의 시조 한편 첨가. ‘해장사 해장스님께/ 산일 안부를 물었더니// 어제는 서별당 연못에 들오리가 놀다 가고// 오늘은 산수유 그림자만/ 잠겨있다, 하십니다’(‘산일(山日)’ 전문).

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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