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식스시그마/정훈 지음/서정시학 펴냄

집 근처를 산책하던 중 책을 펴든 정훈시인. 산업 일선에서 물러난 만큼 이제부터 부지런히 시를 쓸 생각이라고 했다.
집 근처를 산책하던 중 책을 펴든 정훈시인. 산업 일선에서 물러난 만큼 이제부터 부지런히 시를 쓸 생각이라고 했다.

정훈 시인이 등단 24년(1994년 월간 '심상' 신인상 등단)만에 첫 시집 '식스시그마'를 펴냈다.

그는 "오래 묵힌다고 포도주처럼 숙성 되는 것도 아닌데, 긴 세월을 흘려보낸 것이 부끄럽고, 일흔이 넘어 굳이 시집을 내는 것도 부끄럽다"고 했다. 출간소식을 알리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말이 새는 바람에 민망하게 됐다는 말도 했다.

"시집에 묶은 작품 중 팔 할이 이십 수년전에 쓴 것들입니다. 시편들이 제자리 없이 굴러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워 이제라도 '책장' 하나 마련해주자는 마음으로 책을 냈습니다."

정 시인은 오랜 세월 문단을 떠난 이유를 "일하기 바빠서"라고 했다. 그는 1994년 등단한 이래 2000년까지만 해도 대구문단, 대구 시인협회, 대구문화예술관련 일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당시 문단 경력으로 보자면 말석에 겨우 자리를 얻은 정도에 불과했지만, 적지 않은 나이와 사회적 경륜을 바탕으로 한참 '고참 시인'들과 어울리며 대구문학, 특히 시 분야 발전을 위해 뛰어다녔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소프트웨어(시를 열심히 쓰는 일)에는 소홀했지만, 하드웨어(대구문학관, 대구예술발전소, 대구문화재단 등)설립에는 할 수 있는 한 힘을 보탰다'는 것이다.

시집 제목 '식스시그마'는 기업이 어떤 제품을 생산할 때 100만 개 제품 중 3,4개의 불량만을 허용하는 품질혁신을 말한다. 시그마(σ)는 통계적으로 99.99966퍼센트가 양품(良品)이라는 의미로 사실상의 완벽을 추구하는 품질관리 운동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말하는 '식스시그마'는 사람들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현대 문명 혹은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고화질 감시카메라를 은유한다. 더불어 책장 넘기는 소리, 공기 청정기 돌아가는 소리, 희미한 등불에도 잠 못 드는 현대인의 인색함과 까다로움을 꼬집는다.

시집은 4부, 65개 작품으로 구성돼 있다.

15쪽, '네 눈동자가 붉구나'는 상주 향교 전교를 지내신 선친이 어린 아들(정훈 시인)에게 자주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는 수많은 옛 현자들의 삶을 들려주시면서 아직 어린 아들에게 수없이 당부하셨다.

"정직해라, 쉬지마라, 우산재 넘어 그곳(교훈이 있는 옛 이야기 속)에 다녀오너라…,"

시인은 오래된 기억의 편린을 통해 자신이 '오늘 이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 기원을 헤집는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기원'을 바탕으로 오늘의 자신은 물론이고 타자와 소통한다.

그런가하면 46쪽 '돌개바람'은 쉬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돌개바람을 통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우리 삶을 노래한다.

'골목길 지나 빌딩 숲 돌아간다. 실개천 너머 탱자나무 울타리에 눈 찔리며 돌아간다. 호박꽃 파 꽃에 뚝뚝 피 흘리며 돌아간다. 어정칠월 나락 논을 휩쓸며 돌아간다. 돌아가고 돌아가고….'

'어정칠월(七月)'은 음력 7월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음력 7월의 나락 논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 어정거려도 타박 들을 일이 아닌데, 돌개바람(현대인)은 그러지 못하고 종종거리며 휩쓸고 돌아가고 있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시인은 여러 작품을 통해 (바쁘게만 살아온) 자신의 기원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너무 종종걸음만 치지 말고 즐겁게 살자꾸나."

114쪽, 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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