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헌책

김일광 동화작가

김일광 동화작가
김일광 동화작가

배롱나무꽃이 참 예쁘다.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싱겁게도 나무 둥치를 간질여 보았다. 가지 끝이 약간 간지럼을 타는 것 같았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그 반응이 맞다고, 아니 그렇게 느꼈을 따름이라고' 혼자서 티격태격해 본다.

멀지 않은 곳, 구룡포 아라장터 구경 나선 길에 배롱나무꽃에 그만 마음을 빼앗겼다. 하기야 바쁜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와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걸음을 바쁘게 옮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아라장터, 벼룩시장. 올망졸망한 상품들이 장터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좌판에 나와 앉은 물건들 얼굴이 모두 선하다. 직접 만든 액세서리, 향초, 수예, 헌 옷가지 등등. 보고 있으면 저절로 웃음이 돌고 손이 갔다. 만져보고 놓고, 들어보고 다시 놓고. 참 예쁘다. 사지 않는 게 미안해질 때쯤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이 나타났다. 무료란다. 그 앞에서 우연히 아는 분을 만났다. 장바닥에 나란히 서서 찻잔을 든 채 그동안 안부를 나누었다. 시골 인심이 차만큼이나 맛깔스럽다.

뭔가를 사야 할 텐데 하면서 돌아보는데 한쪽 구석에 책이 쌓여 있었다. 헌책이 까치발을 하고는 손짓을 하였다. 다른 곳과는 달리 지키는 사람은 없고 책만이 삐쭉거리며 앉아 있었다. 헌책을 사러 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주인마저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이 책 저 책 뒤적이다가 한 권을 골랐다. 책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주인이 알아채 주기를 기다리는데 저만큼에서 주인이 달려왔다. 책값을 물으니 엄청나게 싸다. 새 책값의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훑어봐도 새 책과 다를 바 없었다. 그냥 한 권만 사고 말기에는 덤을 마다하는 것만 같았다. 다시 책들을 골라보았다. 볼 만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세 권을 골랐다. 새 책 한 권 값도 채 되지 않았다. 마치 횡재한 기분이었다.

가슴 뿌듯하게 안겨오는 행복감. 책을 사고는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책은 읽지 않아도 사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변화시킨다.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려 본다. 선뜻 믿어지지는 않지만 그럴싸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책을 꽂을 곳이 없었다. 책꽂이마다 꽉꽉 찼다. 한쪽에는 책들이 아예 몇 겹으로 누워 있다. 장서가는 결코 아니지만 사 모은 책이 집 안에 차고 넘친다. 아내는 보지 않거나 다 본 책은 좀 버리자고 잔소리다. 그런데 버릴 수가 없다. 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아라장터에서 사온 책을 책상 위에 눕혀 놓는다. 책이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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