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강점기 화가 이쾌대의 그림 중에 친형 이여성을 그린 것이 있다. 그림 속 이여성은 작은 좌탁 위에 책을 펴 놓고 앉은 모습이다. 한 손은 턱을 괴고 있고, 다른 한 손은 책 위에 놓여있으며 시선은 책을 향해 있다. 그를 둘러싼 벽면은 모두 검은 색이며 군데군데 거미줄까지 보인다. 이처럼 어두운 배경과는 대조적으로, 책 읽는 이여성의 모습이나 그가 앉은 방바닥 색은 밝게 처리되어 있다. 그의 머리카락은 한 올 흐트러짐이 없으며 의복은 정갈하다. 그래서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여성이 만들어내는 강하고 밝은 기운이 어두운 배경을 조금씩 지워가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여성은 식민지라는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만들어내려 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 바로 '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1935)이다. '숫자조선연구'란 말 그대로 조선의 현 상황을 숫자, 즉 통계수치로서 나타낸 것이다. 일제는 조선 강점 후 조선의 모든 상황을 수량화, 즉 통계수치로서 나타내는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전체 인구 중 문맹률은 얼마인지, 농업 종사자의 비율은 얼마인지 등 사회 전반에 관한 수량화가 이루어져야 통치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데에 숫자로 조선발전 정도를 제시하는 것은 참으로 유효한 방법이었다.
이여성은 '숫자조선연구'에서 이처럼 일제가 만든 방대한 통계조사를 재활용하여 일제의 조선통치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책은 총 5권이며, 집필에는 4년의 시간이 걸렸다. 전 인구의 80프로가 문맹으로, 그나마 글을 읽을 줄 아는 20프로 중 한글만 아는 사람이 16프로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이었다. 이런 조선에서 한문과 한글을 섞어서 표기한 재미없고 어려운 통계 분석표를 읽을 사람은 극소수 밖에 없었다. 읽을 독자가 별로 없으니 책을 만들어 돈이 될 리도 없었다. 숫자조선에 정통한 이여성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여성은 묵묵히 책을 만들었다.
한 명이 읽건 백 명이 읽건 독자 수는 그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책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한 명의 조선인이라도 그 책을 읽고 조선의 현실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책을 읽은 한 명의 앎이 다른 한 명에게도 전해지고, 그렇게 전해지다 보면 그 앎이 모여서 변화의 힘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그 책 한 권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당장 바꿔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긴 시간을 내다 본 작업이었다. 식민지의 깊은 어둠 속에서 이여성은 그렇게 빛을 밝혀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연구하는 연구자 상당수가 '숫자조선연구'의 통계분석을 참조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수 십 년 전 이여성이 남긴 조선 상황에 대한 기록이 후대 연구자들에게 과거 역사를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긴 시간을 내다본 경제학자 이여성의 투자는 적중했다. 그의 투자가 적중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투자 목적이 개인적 이익 창출이 아니라 공공의 선(善)의 실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북북부연구원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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