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가난하다보니 나누어 줄 물건이 없고 家貧無物得支分(가빈무물득지분)
대그릇과 표주박과 낡아빠진 질그릇 뿐. 唯是簟瓢老瓦盆(유시점표노와분)
보배가 아무리 많아도 쓰면 금방 바닥나니 金玉滿籯隨手散(금옥만영수수산)
아이들께 청백한 마음 나눠주고 말까 하네. 不如淸白付兒孫(불여청백부아손)
조선조 성종 때 참으로 보기 드문 청백리가 있었다.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1416-1493)선생이 바로 그분이시다. 노촌이 제주목사를 끝내고 돌아올 때,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채찍 하나 밖에 없었다. 노촌은 "이 채찍도 제주도 채찍이다"하고, 관청의 누각에다 걸어놓고 왔다. 제주도 사람들이 이 채찍을 보배처럼 갈무리했다가, 새로운 목사가 부임할 때마다 바로 그 누각에다 걸어놓았다. 세월이 오래되어 채찍이 헤어지자, 그 곳에다 채찍을 그려 사모하는 마음을 붙였다.
노촌이 제주도에서 돌아올 때다. 바다 한 복판에 이르렀는데, 돌연 배가 휘청 기울어진 채 빙빙 돌아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노촌이 말했다. "지금 내 보따리에는 들어있는 물건이 아무 것도 없다. 아래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나를 속이고 내 명예를 더럽히면서 부정한 물건을 가져왔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 게다" 그러자 휘하 사람 하나가 갑옷 한 벌을 꺼내어 바쳤다. 제주도 사람이 "바다를 건너기 전에 드리면 절대 받으시지 않으실 테니, 반드시 바다를 건넌 뒤에 전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노촌에게 선물한 갑옷이었다. 노촌이 갑옷을 바다에 내던지자, 풍파가 가라앉아 배가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다.
이 두 가지 일화와 함께, 노촌의 청백리다운 면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시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바로 위의 작품이다. '아이들에게 나눠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나눠줘 봐야 소용도 없을 터이므로 청백한 마음이나 나눠주고 말겠다'는 내용이다. 청백리로서의 그의 삶과 완전 합치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시는 노촌의 것이 아니라,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노촌이 태어나기 훨씬 전인 고려 때 간행된 이규보의 문집에 이미 이 작품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촌은 채찍 하나까지도 다 돌려주고 돌아왔던 분. 그런 만고의 청백리가, 남의 시가 자신의 시로 둔갑되어 있는 이승의 난데없는 상황을 볼 때마다,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웠을까. 내 것이 아니니 빨리 돌려주라고, 얼마나 소리 높여 외치고 싶었을까. 오늘 밤엔 선생이 나의 꿈에 나타나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지 싶다. (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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