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상갤러리]대구미술관 2019년 1월 13일까지

나현 '바벨-서로 다른 혀'

나현 설치작품
나현 설치작품 '바벨탑'

늘 그랬다시피 일정이 겹친 비엔날레 관람을 몇 곳 빠트렸다. 그런 곳을 구경 다니는 것도 나의 일이다. 할 일은 해야 되는데 못 그랬다. 그 변명 대신해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비엔날레처럼 큰 전시를 접할 때 내 눈에 밟히는 게 있다. 뭔가 하면 작품 설명이다. 전시장 벽에 붙거나, 인쇄물로 소개되는 그 글들을 보면 참여 작가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인종차별, 노동소외, 권력집중, 미디어횡포 같은 주제는 빠지는 일이 없다. 그 글들을 읽다보면 사회학 개론을 넘어서지 못하는 수준임을 알게 되는데도, 엄청나게 중요한 척해서 기금을 받고 인력을 동원해 전시를 키우는 뻔뻔함이 하늘을 찌른다.

사람들 고민이 그게 전부는 아니다. 키우는 강아지 변이 며칠째 묽다든지, 애인 계정에 누가 댓글로 치근대든지, 이사 온 이웃이 밤마다 음악을 요란하게 트는 게 고민이 아니라면 뭔가. 뭐 고민에도 레벨은 있겠지만, 어느 수준에 올라서면 그건 우리 문제가 아니라 예술가나 정치인의 문제가 된다. 어차피 그들 대부분도 방관자에 머무는 입장인데 말이다.

나현 작가는 미술관에 바벨탑을 쌓았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지는 않다. 그래도 아무나 보고 쌓으라고 하면 절대로 못 쌓을 규모다. 그는 한국 최고의 미술상 최종 후보까지 올라가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비슷한 작품을 쌓았다가 아깝게 미끄러진 바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간에 그는 굉장한 작가다. 만약 누가 내게 전 재산을 건 내기를 제안한다고 치자. 한 세대가 흐른 후 우리나라 최고 미술가가 누구일지 대답하라면, 난 이 작가에게 배팅할 것 같다. 내가 내기에서 잘 된 적은 별로 없으니까 나현 선생에겐 죄송.

작품 겉과 속은 다르다. 밖으로 내보인 스테인드글라스로 화려하지만 동시에 합판으로 짠 속사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치밀한 작가가 노출한 엉성함은 어떤 큰 그림일까? 우리와 너희, 둘 사이에 끼인 존재적 고찰은 작가의 관심사다. 이번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지만 전사자도 생환자도 아닌 행방불명된 병사들의 이야기는 외래종 식물에 관한 유사 도감과 통한다. 워낙 방대한 탓에 산만함 직전까지 이른 전시를 다잡아 놓은 작업은 실내 사운드 설치다. 안에서 울리는 독일 말은 히틀러 이전 시대에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웅변한 것이란다. 공허한 말의 울림은 고민하는 시늉에 집착하는 현대 미술의 주제를 꼬집는다. 그 주제란 곧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관념의 탑과 같다.

윤규홍 (갤러리분도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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