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두바퀴로 달리는 경북도 명품길 2천km] 의성(義城), 의기로운 요채

최치원 문학관, 화전리 산수유마을, 빙계서원·계곡, 금성산 고분군

경북 명품자전거 탐사대원들이 의성의 대표적인 산사인 고운사에서 자전거여행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북 명품자전거 탐사대원들이 의성의 대표적인 산사인 고운사에서 자전거여행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고운사~사촌마을~빙계구곡~산수유 마을~산운마을~금성산 고분군까지, 의성 최치원 길 65Km.

꼬물꼬물 할때 무덤덤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갔다. 밭두렁 틈새에 횡하니 반쯤은 파헤쳐진 무덤가였다. 깡소주 한병과 마른북어를 앞에두고 강제로 절을 시켰다. 처음 맞닥뜨린 할아버지 산소의 기억은 그저 그렇게 멍했다. 1950년 여름! 금성면 어느 논둑에서 논매던 18세의 어린 청춘은 영문도 모른채, 앉았다 일어서기와 손가락 10개 펴기만을 확인한채, 총을 든 트럭에 실려갔다.

그 길로 총알받이로 한국전쟁터의 최전선으로 끌려갔고, 그 청춘은 3년뒤 총상으로 한다리를 잃은 절름발이로 목발을 짚은채, 다시 의성군 금성면 탑리로 돌아왔다. 그 참담함을 본 노인은 불같이 화를 내고, 부지갱이로 그 청춘을 쫓아냈다. 그 청춘은 나의 아비가 되었고, 원한 맺힌 풍파를 세차게 겪은 아비는 당신의 피붙이를 데리고, 보란듯 다시 의성군 금성면을 찾았다.

최치원의 호를 딴 의성 고운사는 681년 의상대사에 의해 건립되었다.
최치원의 호를 딴 의성 고운사는 681년 의상대사에 의해 건립되었다.

아비는 아무런 말없이 한참동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린 나는 영문도 모른채, 그냥 고개만 연신 쥐어박고 아비의 눈물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할아버지다. 절 해라!" 의성(義城)은 할비와 아비와 그 피붙이의 고리가 얼킨곳이다. 이제 그 할비도, 그 아비도 사라져버린 지금, 의성군 금성면 탑리는 늘 애잔하다.

회한과 눈물과 슬픔은 강하게 어린 나의 뇌리에 박혔다. 나의 아비가 그렇게 작게 보였던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슬픔은 승화되어 큰 울림으로 나의 핏속을 지금껏 세차게 돌고있다.

◆최치원의 역사가 숨어있는 고운사,문학관

소멸 후보 도시 제1호! 1960년 중반, 인구 20만의 손꼽히던 도시가, 2050년 소멸 가능 도시 후보 1위의 불명예를 안았다. 인구 5만명, 65세 노령인구 39%, 역피라미드의 대표적인 도시. 마늘과 논농사외에는 딱히 마뜩한 먹거리도 없는 도시로 전락했다. 그 의성이 다시 꿈틀댄다.

강력한 재생사업을 통해 이미지를 변신하고 젊은이를 불러모은다. 읍내에는 여럿 젊은 모험들의 성공기가 이어지고 있다.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의 최적지로도 걸터 앉았다. 그 의로운 성채는 변하고 있고 변해야 한다.

도시는 이미지를 먹고 산다. 인물이던 상징물이건 먹거리건. 의성은 신라말 유학자인 최치원의 이미지를 소환했다. 의성은 최치원을 시작으로 조문국까지의 선(線)의 실타래로 얽매어져있다. <토황소격문>, <시무책10조>등을 통해 신라말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최치원은 말년에 의성에 정착한 후 해인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호를 딴 고운사(孤雲寺)는 681년 의상대사에 의해 건립되었다. 의성의 대표적인 산사다. '가운루(駕雲樓)' '우화루(羽化樓)'는 그를 잘 상징하는 두 누각이다. 자전거는 고운사로 길게 난 숲길속에서 서서히 발돋움을 한다. 일주문앞에서 심호흡을 머금고 의성땅을 호작질 해보려고 한다.

신라말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최치원은 말년에 의성에 정착한 후 해인사에서 생을 마감했다.최치원문학관에서 경북 명품자전거 탐사대원들이 인증샷을 남기고 있다.
신라말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최치원은 말년에 의성에 정착한 후 해인사에서 생을 마감했다.최치원문학관에서 경북 명품자전거 탐사대원들이 인증샷을 남기고 있다.

금새, 최치원 문학관이다. 2019년에 개장한 거대한 목조건물이다. 화려함과 웅장함이 돋보인다. 그런데 정작, 2,000원 입장료를 내는 관람객보다 근무자가 더 많은 형국이다. 광활한 주차장, 성궐같은 기념관 등 겉멋보다 차라리 애쌀있고 세심한 기획이 매우 아쉽다. 신라의 최치원을 소환해도 제대로 했으면 어땠을까? 도시에 스토리를 심는 데는 조밀한 노력이 절대적이다.

헛풍선같은 껍데기로는 늘 한계다.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두바퀴는 달린다. 그래도, 여기는 최치원의 혼백이 노니는 곳이니. 사촌마을이 인근이다. 안동김씨, 풍산류씨의 집성촌인 사촌마을은 김자첨의 유허가 남아있다. 500년 된 만년송과 약 500그루의 방풍림, 그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만취당은 게으른 여행자에게는 자전거로 한바퀴가 딱이다.

의성 화전리 산수유마을. 봄에는 노란 꽃으로 물들이지만 가을에는 산수유 열매로 빨간 옷으로 갈아입니다.
의성 화전리 산수유마을. 봄에는 노란 꽃으로 물들이지만 가을에는 산수유 열매로 빨간 옷으로 갈아입니다.

◆봄에는 노란색, 가을에는 붉은색인 산수유마을

의성의 들과 산은 온화하다. 호전적이지 않다. 구무산(676m)등지에서 발원한 남대천(南大川)은 미천(眉川)과 합쳐져 의성의 곳곳을 휘감고 돌아서 위천으로 흐른다. 높낮이도 별로없고 들판도 잔잔하여 여유롭고 나른한 오후를 즐기기에 더할나위 없는 동네다.

안온한 논밭길을 약 15키로 정도 달렸을까? 꽃내음이 살살 몰려온다. 덩달아, 가슴도 살살

뛴다. "영원 불멸의 사랑" 이라는 꽃말을 지닌 '산수유 마을'이다. 전남 구례보다는 작은 규모이지만, 30년전 부터 약 3만그루의 산수유가 4Km에 걸쳐서 논두렁, 도랑둑, 밭두렁을 온통 노란물감으로 뒤 덮었다.

샛봄, 산수유가 만개할 무렵이면 사람반 꽃반이다. 사방팔방이 노란천국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도보객들은 화전리 숲실 화곡지까지 가는길을 중도에서 포기한다. 딱 이때 자전거는 신기(神技)를 발휘한다. 전망대까지 갯바람에 쓸려가듯 신바람나게 후미진 곳까지 제대로 쏘 다닌다. 물씬 온몸으로 감상한다. 가을의 산수유 마을은 빨간 옷으로 갈아 입니다.

노랑 나부랭이의 들꽃들을 위안삼으며 달리면 되니. 정오를 넘어서자 슬슬 뱃고동이 친다. 사실, 시골땅 모퉁이에서 제대로된 먹거리를 만나는 것은 참 어렵다. 그런데, 산수유 마을 초입에 왠 냉면, 찜 전문집 간판이 있다. 삐끔 들어가니 주인장이 분주하다. 직접 면발을 뽑아내고 비법 육수를 만든다고 한다. 후회없을 거라는 강한 권유에 자전거팀 열댓명이 자리를 잡았다.

소면같은 가느다란 면발을 한번 휘휘 돌려 혀끝에 닿자 다들 탄성으로 바뀌었다. 쫄깃하고 탱글한 면발과 살짝 달짝지근한 매운 소스의 조합은 의외의 행운이었다. 냉면을 딱히 즐기는것은 아니지만, 손으로 빚은 만두와 간만에 흐뭇한 맛의 향연을 즐겼다. 광고를 많이 해 주겠다니, 젊은 주인장이 연신 겸연쩍어한다. 가게 간판을 쳐다보니 냉면, 찜 "본점"이라고 적혀있다. 의성 산수유마을 초입 그 주인장의 자부심에 박수를 보낸다.

빙계계곡
빙계계곡

◆빙계 8경과 산운마을

이제, 배도 채웠으니 제대로 밟아볼 참이다. 의성의 자랑으로 향한다. 바로, 빙계(氷溪) 8경이다. 한 여름에는 얼음같은 바람이, 겨울에는 온기나는 바람이 나온다는 제 1경 빙혈(氷穴), 풍혈(風穴), 그리고 8경 용추(龍湫)까지 거대한 바위를 따라 멋스런 경치가 파노라마를 이룬다. 감탄사가 계곡에 퍼진다. 여기서 잠시, 계곡 초입의 빙계서원에 들린다. 1556년 신원록이 세우고 이언적등을 봉헌한다는 서원은 색 다르다.

여느 유명서원처럼 화려함은 없으나 장중함이 있다. 무언지 모를 근엄함이 서원의 곳곳에서 배어나온다. 서원의 학당 위에서 내려다보는 빙계계곡은 서릿발같은 선비의 기개를 가르치는듯 하다. 계곡의 원형다리에서 저마다 인증샷을 남기고 계곡길을 따라 또 다른 얘기마당으로 간다.

한국정원의 백미라 불리우는 산운마을 소우당
한국정원의 백미라 불리우는 산운마을 소우당

400년 영천이씨의 집성촌인 '산운(山雲)마을'이다. 금성산을 마주안은 마을은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하여 "대감마을"이라고도 불린다. 마을 초입, 생태공원을 시작으로 슬슬 마을 탐방에 나선다. 학록정사, 운곡당, 점우당, 양산서당. 때마침 한국정원의 백미라 불리우는 소우당 고택에 들어서니 자전거 여행객을 내치지 않고 맘씨좋은 어르신이 이곳 저곳을 허락해준다.

운치만점의 대청마루에 허느적 앉아서 의성의 구름과 하늘을 만끽한다. 다양한 포즈로 사진찍기에 분주하다. 여기서, 약 3키로 정도, 금성산 방면으로 오르면 앙증맞은 수정사다. 두 패로 나눴다. 게으른 사람들은 남고, 호기로운 몇몇은 수정사 탐방에 나섰다. 난, 당연히 게으른팀 소속이 되어 마을 담벼락 투어에 나섰다.

'수정같이 맑다'는 뜻을 지닌 수정사(水淨寺)는 금성산,비봉산 계곡 틈새에서 운치를 선사한다. 그렇게 평화로운 오후는 점점 내려앉는다. 이제 의성의 끝자락으로 달려간다. 강변을 약 10여키로 달리면 거대한 별 세상이 나타난다.

삼한시대 부족국가 조문국 고분군
삼한시대 부족국가 조문국 고분군

◆조문국(召文國), 금성산 고분군

자전거를 타면서 다시 역사 공부를 시작한다. 의성이 옛적 삼한시대 부족국가의 도읍인것을 몰랐다. 조문국, 소문국, 이름도 생소한 부족국가가 존재한 것도 까마득 했다. 그런데, 그 유적들은 거대하다. 산굽이치듯 무덤군들이 이국적으로 펼쳐져 있다. 경덕왕릉을 중심으로 몇 고비나 이어지는 고분군은 금성면 대리, 탑리, 학리에 걸쳐서 약 300여기 이상이 산재해 있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고령의 대가야 고분과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땅거미가 질 무렵, 고분군의 실루엣을 뒤로 하고 자전거는 멈춘다. 신라 최치원에서 시작하여 삼한시대에서 장대한 마침표를 찍는다. 의성은 장대한 이야기 보따리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역사 얘깃거리를 그 짧은 시간에 펼쳐 봤는지!

자전거로 의성을 누비는 내내, 어릴적 아버지의 손을 잡고 찾았던 할아버지와의 짧은 만남이 잠시도 잊혀지지 않았다. 한많은 아버지의 눈물을 살아 생전 제대로 닦아드리지 못한 못남과 회환이 거스름속에 잔뜩 몰려왔다. 의성군 금성면 탑리의 시계추는 오늘도 쉬지 않는다. 할비, 아비, 나, 나의 피붙이 이렇게 4대를 이어 흐른다. 나는 나의 피붙이에게 어떻게 기억될지, 무엇을 남길지 골똘히 생각되는 늦으막이다.

의성, 의로운 성채는 흐르는 역사다. 중단없는 연속이다. 자전거의 두바퀴도 쉼 없다.

글·사진 김동영 여행스케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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