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들의 경주, 그곳에 가고 싶다] <6회>황룡사 폐허 그리고 분황사

'黃'룡 나타나 지은 '皇'룡사 신라 국력 상징이자 '임금의 절'
선덕여왕 불교 통해 난국 해소 묘안…'여왕의 절' 분황사·황룡사 목탑 완성
성골 김용춘 총괄 任 왕실 갈등 해소…팔관회·법회 등 호국 사찰 자리매김
고려 말 몽골군 침입 때 불타 잿더미

황룡사지 너머로 해가 저물고 있다. 몽골군의 방화로 황룡사는 잿더미로 변했지만 남겨진 주춧돌은 천년신라를 다시 소환하고 있다.
황룡사지 너머로 해가 저물고 있다. 몽골군의 방화로 황룡사는 잿더미로 변했지만 남겨진 주춧돌은 천년신라를 다시 소환하고 있다.

빈 들판에 섰다. 토함산을 넘어온 겨울바람이 스치자 매서운 기운이 코끝을 맴돈다. 폐허와도 다를 바 없는 '폐사'(閉寺) 황룡사 빈 터다. 봄이면 파릇파릇한 '청보리가 유혹하고, 가을이면 코스모스와 야생화 천지가 되곤 하던 황룡사지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복원되지 못한 역사는 아련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화려했던 천년제국의 영화를 상징하던 호국사찰 황룡사는 어디에도 없다. 신라의 자랑이라던 장륙존상과 9층목탑도 진흥왕의 '천사옥대'도 찾을 수 없다. '눈을 감고' 천천히 황룡사 터 구석구석을 거닐다보면 고구려 백제와 경쟁하면서 살아남은 신라인의 강건한 기상이 '훅'하고 느껴진다.

전란의 시대였다. '황룡'을 동원해서 민심을 통합하고, 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 등 4대를 이어가면서 왕들이 웅장한 규모의 대사찰을 짓고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9층 목탑을 완성시킨 이유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선덕여왕보다 한 세대 늦은 690년 즉위한 중국 최초의 여왕 '측천무후'도 황룡사 9층 목탑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2010년 개봉한 중국영화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狄仁傑之通天帝國)에 등장하는 목조불상은 당시 낙양(洛陽) 용문석굴 비로자나불을 토대로 120m 높이의 규모로 만든 통천부도(通天浮屠)다.

백제 무왕도 익산 미륵사에 황룡사 9층 목탑에 필적하는 목탑을 먼저 세우면서 경쟁을 촉발했다. 미륵사 목탑은 백제의 몰락과 더불어 불타버렸다. 거대목탑은 부처의 힘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신라 제 24대 진흥왕 즉위 14년(553) 2월, 용궁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고 하는데 그 땅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 그래서 대신 절을 짓고 황룡사(皇龍寺)라 했다.'

황룡사지를 안내하는 표지판
황룡사지를 안내하는 표지판

<삼국유사>는 황룡사 건축을 둘러싼 비화를 신화적으로 전한다. 진흥왕은 영토를 확장하면서 국력이 날로 확장됨에 따라 늪을 메워 궁궐을 확장해 변방 소국의 존재에서 벗어나려고 한 모양이다. 월성과 분황사 사이의 늪을 메워 궁궐을 지으려고 했다. 그 늪에서 황룡이 나오자 궁궐 대신 절을 지었다. 황룡인지 황금빛 잉어가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고구려 백제와의 계속된 영토전쟁으로 온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와중에 궁궐을 짓겠다는 왕의 야심만만한 계획이 민심과 부딪쳤을 것이다. 그러자 왕은 궁궐이 아니라 '왕의' 절을 짓는 것으로 타협을 했을 것이다. 황룡이 나온 절이라면 '黃龍寺'가 돼야 했지만 임금 皇자를 붙여 '皇龍寺'가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황룡사와 신라 삼보.

무한경쟁의 시대였다. 영토를 뺏고 뺏기는 전쟁은 일상이었다. 민족 개념은 아예 없었다. 먼저 쓰러뜨리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불교는 먼저 전래된 고구려와 백제보다 신라에서 더 흥성했다. 신라 땅이 부처의 땅이라 믿은 신라는 불교를 호국(護國)에 활용했다. 국가사찰 황룡사는 그래서 신라 국력의 상징이었다.

백제 또한 최전성기였던 무왕 때 미륵사를 지었고 그곳에 목탑과 석탑까지 갖췄다. 아름다운 미륵사 목탑에 대한 소문은 신라로 전해졌고 신라는 미륵사를 능가하는 절을 짓기로 했다.

황룡사는 진흥왕 때 창건했지만 선덕여왕이 즉위할 때까지 석탑도 목탑도 없었다. 절이 완성되지 않은 셈이다. 선덕여왕은 왜 세상에 없던 규모의 아름다운 목탑을 황룡사에 세우려 했던 것일까?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즉위하자 신라 왕실은 물론이고 백제와 고구려와 당나라도 얕잡아보았고 민심도 뒤숭숭했을 것이다.

황룡사9층목탑 모형
황룡사9층목탑 모형

백제 무왕은 군사를 보내 수시로 변경을 침범, 수십여 곳의 마을을 점령하면서 조롱했다. 남존여비사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여왕은 이웃나라의 노골적인 조롱에 대응하고 괄목할만한 치적을 쌓는 것으로 정면돌파의 필요성을 느꼈다.

당 태종이 즉위한 선덕여왕에게 '모란'(牧丹)그림과 씨앗을 보내자 향기가 나지 않는 꽃을 보낸 것은 '여왕즉위에 대한 폄하'라며 쑥덕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모란이 제국의 수도 뤄양(洛陽)을 상징하는 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선덕여왕에 대한 존중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 같다.

낮은 언덕 위에 위치한 궁성 '월성'보다 더 높은 건물이 없던 왕경에서 80m에 이르는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의 치세를 상징하는 기념비가 되었다. 웅장한 규모의 9층 목탑이 완성되자 황룡사에서는 수시로 '팔관회'와 법회, 강연을 여는 등 호국사찰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팔관회가 열리는 날이면 층층마다 연등으로 장식된 9층 목탑은 경주시내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장관이었을 것이다.

장륙존상(역사문화관)
장륙존상(역사문화관)

9층 목탑이 당시 '적국'이던 백제의 목수 아비지를 모시고 와서 3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점은 미스터리다. 또한 목탑건축을 총괄한 이간 '김용춘'은 진지왕의 아들로서 진평왕의 딸로서 왕위계승을 한 선덕여왕과 자칫 '성골'간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골육상쟁의 원수가 될 수도 있었다. 선덕여왕은 불편한 사이인 용춘을 이간으로 임명하고 9층목탑건립을 총괄하게 하면서 왕실의 갈등마저도 해소하는 정치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아비지의 9층 목탑은 50여년이 지난 효소왕 때 벼락을 맞아 불에 타 성덕왕 때 다시 지었다. 경문왕 때 다시 벼락을 맞은 후 중수됐다가 고려시대에도 세 차례 더 벼락을 맞고 중수했으나 고려 말 몽골군의 침입 때 목탑은 물론 장륙존상 전각 등 황룡사 전체가 불에 타 사라졌다.

몽골이 태워버린 것은 목탑과 장륙존상만이 아니다. 금당도 사라졌고 금당벽화로 잘 알려진 솔거의 노송도도 불에 탔다. 천년제국의 영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신라를 고려의 운명도 풍전등화의 처지에 빠진 것이다.

황량한 들판이 황룡사지라는 걸 증명하는 것은 그나마 발굴해 놓은 9층 목탑의 '심초석', '장륙존상' 주춧돌, 금당의 흔적 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천년제국의 영화(榮華)도 덧없는 것이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깨닫는다.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

◆여왕의 절, 분황사

분황사(芬皇寺)는 이름 그대로 향기로운 황제의 절이다. 향기로울 '분'(芬)자와 임금 '황'(皇)자를 절 이름에 썼다는 것에서 분황사가 선덕여왕의 절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넓은 황룡사지에 비하면 작은 법당 하나와 모전석탑 우물과 당간지주만 남아있는 분황사는 왕의 절 치고는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황룡사와 이웃한 분황사는 황룡사의 2/3 정도의 규모를 가진 큰 사찰이었다.

드라마로도 방영된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는 진평왕의 딸 덕만 공주였다. 신라왕실에서는 왕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화백회의'를 통해 왕의 동생이나 조카 등 왕족을 후계로 삼았다. 여왕의 즉위는 전례가 없는 초유의 일이다. 딸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법은 없지만 여왕의 즉위는 혁명적이었다. 왕실은 물론 민심도 동요했다.

부처의 나라 신라는 불교를 통해 난국을 해소하는 묘법을 냈다. '여왕의 절'을 창건해서 여자도 부처를 모실 수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공표한 셈이다.

분황사 당간지주
분황사 당간지주

분황사에 들어서면 벽돌로 쌓은 3층 석탑을 만난다. 국보로 지정된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보탑이나 석가탑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다.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형식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형식이었다. 아마도 자장법사 등 중국유학을 다녀 온 승려들의 조언에 따라 건축됐을 것이다.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장신구와 바느질도구 등이 출토됐는데 아마도 이는 선덕여왕의 공양품 이었을 것이다.

분황사는 선덕여왕의 절이지만 오히려 원효(元曉)대사와 인연이 더 깊다. 국사가 된 자장이 불교계율을 정리하고 승려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면 원효는 신라불교의 대중화에 공이 크다. '의상'과 함께 중국 유학길에 오른 원효는 도중에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후 큰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하고 서라벌로 되돌아왔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가 그것이다. 원효는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신라10현이 된 '설총'을 낳았고 광대처럼 노래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치고 다녔다. 두꺼운 경전을 외우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속 부처를 만날 수 있다는 진리를 대중들에게 몸소 실천하고 보여줬다. 원효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곧 부처의 땅이라는 것을 알려준 그 시대의 '부처'가 아니었을까.

글·사진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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