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반항아 모차르트

금동엽 문화경영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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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에 관한 전기나 일화들을 찾아보면 그와 고용주와의 불화가 빠지지 않고 기술되고 있다. 이전 시대의 하이든은 하인의 위치에서 아무튼 고용주의 비위를 맞추려 했지만, 이에 비해 모차르트는 도시 출신의 반항아로서 자신의 고용주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10대와 20대에 초반에 신성로마제국의 공국이었던 잘츠부르크의 영적 지도자이며 통치자였던 콜로레도 대주교후(Prince-Archbishop)의 궁정에서 대주교후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하인으로 일했다. 당시에는 그것만이 그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선택이었으며, 그가 하는 음악회라면 오로지 대주교후의 저녁 여흥을 위한 것뿐이었다. 사실 콜로레도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으로 자신이 관할하는 교구의 개혁을 시도했으며, 가톨릭에서 생겨난 미신적인 관행을 많이 없앤 영적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개혁적인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가는 그저 하인일 뿐이라는 오래된 귀족의 인식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왕가나 귀족들은 궁정 요리사나 일반 하인들에 비해 음악가들이 특별히 유용한 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식은 자신을 천재로 여기는 젊은 모차르트에게는 모욕이었으며, 그는 자신이 훨씬 더 나은 대접과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분노했다.

모차르트의 분노는 빈에 있는 대주교후의 궁정에서 연주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극도에 달했다. 거기서 그는 부름을 받을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부르면 가서 피아노나 오르간을 연주하고 늦게 부엌에서 주방 하녀들이나 하인들과 저녁을 같이 먹어야 했었다. 또 모차르트는 빈의 여러 궁정을 돌아다니면서 콜로레도의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연주하거나 때로는 자기의 최신 작품을 지휘하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이런 과외 연주에 대해 돈을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대주교후는 이는 피고용인의 의무라고 하면서 따로 수당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일련의 부당한 일에 분노한 모차르트는 원색적인 내용의 편지를 가족에게 보냈는데, 대주교후가 주는 주제 선율을 가지고 한 시간 내내 즉흥 변주를 했으며, 그럼에도 대주교후는 즐거움이나 만족감을 표현하지 않고 대신 자기를 거리의 부랑자처럼 대했다거나, 그리고 그가 자기의 얼굴에다 대고 더 나은 음악가가 천지에 널렸다는 등의 폭언을 했다는 것이다. 훗날에 갈등이 커져 대주교후가 더 이상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하자, 모차르트도 그에게 자신도 같이 일하지 않겠다고 받아쳤다.

1781년 6월 초, 모차르트와 대주교후와 그의 집사인 아르코 백작과 수년간의 다툼은 발길질로 끝이 났다. 아르코 백작은 말 그대로 모차르트의 엉덩이를 발로 차 쫓아냈다고 한다. 이후 모차르트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신은 고향인 잘츠부르크를 싫어하며, 더 이상 잘츠부르크와는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런 모차르트의 거부에도 잘츠부르크는 변함없이 그를 사랑하나 보다. 모차르트를 불명예스럽게 떠나게 했던 이 도시는 모차르트라는 브랜드로 향수, 초콜릿, 커피잔, 맥주, 초콜릿 술, 우산, 시계, 티셔츠, 골프공 등 온갖 상품을 팔아 수입을 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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