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팔공산은 천상의 화원]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가장 먼저 찾아온 '봄'

봄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먼저 식물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이 바로 겨울눈이다. 사진은 까치박달 겨울눈
봄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먼저 식물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이 바로 겨울눈이다. 사진은 까치박달 겨울눈

이제 그냥 겨울이라 하기엔 어색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시절이 되었다. 풀린 날씨만큼 나무들도 단단한 고삐를 슬슬 풀기 시작할 것이다. 아직 이른 것 같지만 봄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먼저 식물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이 바로 겨울눈이다. 겨울눈은 내일을 위해 지켜야 하는 약속을 품고 있다. 여름에 만들어져서 추운 겨울을 무사히 보내고 봄이 오기도 전에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아주 예민하게 관찰해야 알 수 있다.

그것을 볼 줄 알면 다른 사람들보다 봄을 더 일찍 감지할 수 있다. 먼 산 마루금에 자라는 키 큰 나무들의 가지 끝부분에서 약속은 시작된다. 겨울눈이 잔뜩 모여 있는 나무의 가지 끝은 어느 시점부터 아주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데 그때쯤 미세하게 색깔이 바뀐다. 사람들이 두꺼운 외투를 답답하게 느낄 때 그들도 옷을 벗어 던질 준비를 한다. 그런 겨울눈은 어떻게 생겼을까. 더불어 지난해 잎이 달렸던 자리는 또 어떻게 생겼을까.

작은 겨울눈은 나무마다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지 끝부분과 엽흔(잎이 달렸던 자리의 흔적) 바로 위에 붙어 있다. 털을 뒤집어쓰고 있기도, 투박하게 두툼하기도 하고, 켜켜이 나열된 아린(눈껍질, 겨울눈을 감싸고 있는 비늘같은 조직)속에 꽁꽁 숨어 있는 나무도 있다. 또 어떤 나무들은 아예 겨울눈을 밖으로 노출 시키기도 한다. 어떤 방법이든지 겨울 추위를 이겨내는 건 분명하다.

팔공산에도 겨울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아주 미세하게 겨울눈이 서서히 부풀고 있을 것이다. 꽃과 잎이 아름답고 싱그럽기 위해서는 겨울눈이 무사히 겨울을 보내야 한다. 그렇게 꽃과 잎을 추위로부터 보호하면서 긴 겨울을 이겨내고 있는 겨울눈은 새로운 한해의 시작이다. 봄이 오면 사람들을 감탄케 할 아름다움을 감춘 팔공산의 나무중에 이런 나무들이 있다.

오갈피나무 겨울눈
오갈피나무 겨울눈

◆겨울장미를 피우는 오갈피나무

겨울철 나무에게는 미래와 과거가 동시에 존재한다. 미래는 바로 겨울눈이고, 과거는 지난해 잎이 떨어진 자리, 즉 엽흔이다. 엽흔은 나무에 따라 다 다르게 생겼다. 오갈피나무는 그 엽흔이 아주 특이한 나무이다. 다발처럼 달렸던 지난 전성기의 잎들이 다 떨어진 자리는 꼭 장미꽃이 피어난 것 같다. 가운데 뾰족한 겨울눈을 중심으로 질서정연한 점무늬를 가진 꽃잎이 감싼 모양이다.

영락없이 장미다. 한겨울 어느 나뭇가지를 잘 들여다보면 그동안 보지 못한 새로운 장미를 만날 수 있다. 중앙의 작은 겨울눈은 앙증맞은 꽃과 다섯 장의 잎을 품었다. 꽃은 열매로 자라서 사람들에게 이롭게 작용한다. 다양한 약재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매가 익고 가을이 되고 잎이 떨어지면 겨울이 오고 또 장미를 피울 것이다. 그렇게 오갈피나무는 해마다 작은 겨울장미를 피운다.

느릅나무 겨울눈
느릅나무 겨울눈

◆검은 모자를 쓴 느릅나무

느릅나무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나무이다. 나무를 잘 알지 못해도 이름은 많이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약재로 흔히 사용하던 나무이다. 느릅나무는 아주 일찍 꽃이 핀다. 그래서 오히려 꽃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더구나 크기도 작고 화려하지도 않다. 겨울눈에 들어 있는 꽃은 어느 날 갑자기 피어난다. 겨울눈은 엽흔 바로 위에 달리는데 엽흔보다 큰 편이고 통통하다.

엽흔은 무표정한 얼굴 같고 눈썹 바로 위에 얹힌 검은 겨울눈은 꼭 모자처럼 생겼다. 골짜기로 봄바람이 불어오면 검은 모자를 벗고 꽃이 나온다. 수술이 붉은 꽃밥을 달고 먼저 얼굴을 내민다. 암술은 수술보다 늦게 나타난다. 꽃을 감싸고 있는 커다란 모자를 쓴 엽흔의 얼굴은 표정이 없다. 아니 약간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다. 무엇 때문일까? 봄이 더디오는 탓일까? 겨울눈과 엽흔이 한데 어울려 재밌는 얼굴을 한 나무 중에 하나가 느릅나무이다.

초피나무 겨울눈
초피나무 겨울눈

◆누구를 반기는 걸까? 두 팔 벌린 초피나무

누구를 반기는 걸까? 겨울 동안 눈을 다 가릴 정도로 모자를 꾹 눌러 쓰고 개구쟁이 얼굴을 한 초피나무는 양팔을 맘껏 벌리고 누군가를 환영하는 모습이다. 눈이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퇴근하는 엄마나 아빠를 반기는 모습 같기도 하다. 초피나무의 양팔은 누군가가 다가오면 껴안을 것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가시다. 다가오는 이가 겨울눈을 해칠까 염려되어 방어용으로 겨울눈을 보호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맞겠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찔리기 십상이기 때문에 가을철 열매를 딸 때 뿐만아니라 사시사철 가시를 조심해야 하는 나무가 초피나무이다. 진하고 독특한 향기를 품은 겨울눈은 나중에 봄이 되면 잎과 꽃이 나온다. 어떤 나무는 암꽃만 달리고 어떤 나무는 수꽃만 달린다. 그래서 산에 초피나무가 많아도 열매가 달리는 나무는 반도 채 되지 않는다. 겨울눈 속에 열매가 숨어 있는지 아닌지는 꽃이 피어 봐야 정확히 알 수 있는 나무다.

두릅나무 겨울눈
두릅나무 겨울눈

◆알알이 박힌 진주목걸이를 두른 두릅나무

두릅은 봄에 어린 순을 나물로 먹는다. 그래서 두릅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고 나물을 보고 두릅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다. 두릅나무는 키가 그다지 크지 않다. 사람보다 키가 작기도 하고 그보다 크기도 하지만 숲을 이루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서는 작은 편이다. 쪽 곧은 줄기 끝에 겨울눈이 달리는데 특별한 특징이 없다.

오히려 그 아래로 층층이 진주목걸이를 두른 모양을 하고 있는 흔적이 더 인상적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를 두르고 있다. 진주목걸이를 좋아하는 어느 부잣집 부인이 욕심껏 걸친 모습이다. 지난해 잎이 달렸다가 떨어진 자리, 즉 엽흔의 모습이다. 진주목걸이 아래는 가시가 진주알 못지않게 많이 달려 있다. 누군가가 목걸이를 떼어 갈까봐 지키고 있는 것일까. 새로운 잎과 꽃이 태어날 겨울눈보다 이미 할 일을 다 마친 흔적이 오히려 대우를 받는 느낌이다.

까치박달 수꽃 겨울눈
까치박달 수꽃 겨울눈

◆암꽃눈과 수꽃눈이 따로따로, 까치박달

나무 중에는 꽃눈과 잎눈이 따로 달린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겨울눈은 보통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꽃눈을 두 가지로 나눈 경우가 있다. 암꽃눈과 수꽃눈을 따로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나무 중에 하나가 까치박달이다. 봄이 오기 시작할 때 끝이 창끝처럼 날카로운 까치박달의 겨울눈 중에서 먼저 서둘러 터지는 것이 바로 수꽃눈이다. 까치박달은 그렇게 수꽃을 먼저 피우고 차후 암꽃을 피운다.

수꽃눈에는 수꽃만 홀로 들어 있고 암꽃눈에는 암꽃과 잎이 같이 있다. 이렇게 암꽃과 수꽃이 피는 시기를 달리하는 것은 자가수분(제꽃가루받이)을 막기 위함이다. 사람이 근친혼을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까치박달도 근친혼을 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래서 기꺼이 두 가지의 겨울눈을 만드는 일에 양분을 투자하고 시간을 투자한다.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나무이지만 지혜로운 겨울눈을 가졌다. 그런 지혜로 숲에서 늘 번성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김영희 작가
김영희 작가

글 산들꽃사우회 (대표집필 김영희작가),사진 산들꽃사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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