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팔공산은 천상의 화원] 보석처럼 흩뿌려진 숲속의 봄꽃

노루귀·가지복수초·쇠뿔현호색·올괴불나무·생강나무

가지복수초
가지복수초

땅이 녹고 숲이 축축해졌다. 겨울동안 종종 내린 눈과 비가 얼어붙어 있다가 서서히 녹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런 물기들은 흙 아래 풀꽃들에게 충분히 수분을 공급하고 나무들에게는 물관을 따라 물이 콸콸 올라가게 해준다. 뽀송뽀송한 봄보다 눅눅한 봄이 나무와 꽃에게 훨씬 풍요로움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봄에는 숲을 산책할 때 신발에 흙이 묻더라도 그것을 반겨야 한다. 신발 바닥이 깨끗한 봄은 사람에게는 간편하지만 식물에게는 역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일 년 전 이른 봄은 아주 메마른 봄이었다. 겨우내내, 또 봄이 올 때 하늘에서 충분한 눈과 비를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작년 이맘때는 아주 빠삭한 봄을 맞이했다. 올봄은 기대를 좀 해도 될까. 벌써 숲 바닥에는 색색가지 꽃이 피기 시작했고 나무들의 끄트머리와 가지 옆에 달린 겨울눈들도 역시 터지고 있다. 숲의 색이 점차 바뀌어 간다. 꽃이 만발하기 전과 잎이 무성하기 전의 봄 단계를 숲은 이미 진행 중이다.

샛노란 꽃을 가진 가지복수초가 핀다. 개체에 따라 몇 가지의 색을 가진 노루귀도 피기 시작했다. 올괴불나무 꽃눈은 잔뜩 부푼 풍선 같더니 기어이 터진다. 알싸한 향기를 품은 생강나무는 꽃눈 역시 꽃이 비집고 나온다. 선명하고 화사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꽃은 겨울눈이 열리면 눈에 잘 띄는 편이다.

그에 비해 쇠뿔현호색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이렇게 성격이 각각 다른 꽃들이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차지하고서 계절이 바뀌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꽃을 피운다. 먼 산은 아직 겨울 같고 숲은 축축한 낙엽들이 켜켜이 쌓인 그런 계절이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익히 알고 이들을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이른 봄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낙엽과 낙엽 사이에 고개를 내민 꽃들을 찾아서 그리고 가느다란 줄기에 매달린 작은 꽃을 찾아서...

노루귀 분홍색
노루귀 분홍색

◆변신의 귀재, 노루귀

여기저기서 꽃소식이 들려온다. 겨울동안 꽁꽁 얼었던 흙 속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뽀송한 털을 잔뜩 뒤집어쓴 꽃받침이 꽃잎을 감싸고, 꽃잎은 다시 꽃술을 감싸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 매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국 각지의 산에서 비교적 흔하게 자라지만, 시간을 내어 숲속으로 찾아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꽃이기도 하다.

숲을 느리게 걷다가 땅에서 겨우 고개를 내민 꽃을 만나면 꽃과 함께 나의 얼굴도 화사하게 핀다. 노루귀는 땅에서 곧바로 꽃대가 올라오는데 얼굴을 내밀자마자 꽃부터 피우기 시작한다. 겨울동안 세상 구경이 무척 하고 싶었나보다. 귀엽고 앙증맞은 노루귀는 다양한 매력을 보여준다.

노루귀 보라색
노루귀 보라색

다양한 색의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보통 분홍색과 흰색이 가장 흔하다. 종종 보라색의 꽃이 피기도 하고 아주 밝고 진한 자주색의 꽃이 피는 개체도 있다. 꽃 모양은 다 같지만 색깔이 다양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담뿍 받는다. 팔공산의 어느 골짜기 숲 바닥에 지금쯤 보라색의 노루귀가 피었을 것이다.

순도 99.9퍼센트의 황금같은 가지복수초
순도 99.9퍼센트의 황금같은 가지복수초

◆순도 99.9퍼센트의 황금같은 가지복수초

밤사이 황금을 훔쳐 달아나던 도깨비가 급하게 서두르다가 흘린 것일까? 아직은 지난해 낙엽들이 두터운 숲바닥에 순도 99.9퍼센트의 금덩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따스하고 기세좋은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반짝거린다. 바로 가지복수초다. 꽃과 잎이 함께 올라오고, 꽃이 피면서 동시에 줄기가 자라고 잎이 전개된다. 처음 꽃이 필때는 꽃 아래 잎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점차 빠른 속도로 잎이 펼쳐지고 초록색 보자기에 황금이 가득 담긴다. 꽃이 반사시키는 빛에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를 찾고 싶을 정도다. 꽃은 오목한 모양을 하여 햇빛을 모아 꽃 속의 온도를 높이고 유지하는 역할도 한다. 꽃 속에는 꽃 못지않게 반짝이는 노란 수술이 여러 개다. 머지않아 금가루를 뒤집어쓰고 곤충을 불러 제 할 일을 한다. 아름다운 황금덩어리가 결국 곤충에게 제일 유용하게 쓰인다.

밤사이 도깨비가 흘리고 간, 초록 보자기에 쌓인 황금을 주우러 가산산성으로 가고 싶어진다.

쇠뿔현호색
쇠뿔현호색

◆꼭꼭 숨어라, 쇠뿔현호색

쇠뿔현호색은 발견하고 명명한 사람이 나라서 늘 애틋한 느낌이다. 다른 식물들은 애인같다면 쇠뿔현호색은 자식같은 느낌이다. 쇠뿔현호색이 팔공산국립공원의 어느 지역에서 새로운 자생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가운 마음과 걱정이 동시에 생겼다. 새로운 자생지가 더 있다는 사실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알려지면 훼손이 될 것을 먼저 염려하는 마음이 생긴다.

쇠뿔현호색의 꽃은 아주 연하게 자주색이 도는 흰색이다. 바싹 마른 낙엽 뒷면의 색과 닮았다. 잎은 솔잎처럼 가늘어서 파릇하게 밝은 느낌이 덜 느껴진다. 이런 특징은 주변환경과 유사하여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존재를 위한 이들의 생존전략이다.

그런 이유로 사람의 눈에도 쉽게 띄지 않는다. 다른 현호색들은 화사한 파란 꽃이나 진달래색 보다는 좀 연한 자주색 꽃을 피우지만 쇠뿔현호색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한국특산식물인 쇠뿔현호색, 이왕이면 잘 숨어서 영원히 숲속에 머물 수 있으면 좋겠다.

올괴불나무
올괴불나무

◆봄바람에 왈츠를 추는 올괴불나무

올괴불나무는 내륙의 산지에서 가장 일찍 꽃이 피는 나무이다. 흔히 일찍 핀다고 여기는 생강나무 보다 더 일찍 꽃이 핀다. 생강나무가 샛노랗게 필 때 이미 올괴불나무는 꽃이 지기 시작하니까. 그만큼 이른 봄에 피고, 꽃이 워낙에 작아서 알아보기 쉽지 않다. 올괴불나무 옆을 스쳐 지나면서도 몰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올괴불나무
올괴불나무

올괴불나무는 작디작은 꽃눈이 터져서 화사한 분홍색의 꽃이 아래를 향해 핀다. 꽃 속에는 꽃잎보다 더 화사하고 유혹적인 자주색 꽃밥이 여럿 달린다. 꽃이 활짝 피면 깊게 갈라진 꽃잎의 조각들은 위로 살짝 젖혀지고 꽃밥이 드러나는데, 그 모습이 꼭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왈츠를 추는 귀족 여인 같다.

특히나 봄바람이 살랑이며 지나가면 영락없이 왈츠를 춘다. 그렇게 화사한 시절을 아주 짧게 보내고 나서 잎이 나고 열매가 달리는데, 꽃이 일찍 피는 만큼 열매도 빨리 익는다. 5월에 주홍색의 열매가 익고 바람이 불면 또 춤을 춘다.

생강나무
생강나무

◆매혹적인 향기, 생강나무

꽃의 향기라고 하면 흔히 달콤하고 은은하고 사랑스러운 향기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식물들은 아주 다양한 향기를 갖고 있다. 비린내가 가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 좋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자극적인 향기를 가진 식물도 많다. 생강나무의 향기는 매혹적이다. 사랑스럽다기보다 앙큼하게 매력적인 향기는 다시 한번 코를 벌름거리게 만든다.

생강나무는 이른 봄 올괴불나무가 꽃 지기 시작할 무렵에 아주 샛노란 색으로 핀다. 동글동글하던 생강나무의 꽃눈이 터지면 한자리에 여럿 보인 꽃들이 서둘러 꽃핀다. 그리고는 그 꽃에 매혹된 꿀벌들이 날아든다. 그럴 때 꽃에다 코를 들이대면 향기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생강나무
생강나무

꽃뿐만이 아니다. 잎에서도 향기가 나며 나뭇가지를 꺾어도 향기가 난다. 생강나무는 자신의 모든 부위에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향기를 품고 꿀벌뿐만이 아니라 사람까지 매혹시킨다. 한번 빠지면 봄마다 생강나무에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리게 된다. 중독성 강한 향기를 품은 생강나무 노란 꽃이 팔공산에 가득 핀다.

김영희 작가
김영희 작가

글 산들꽃사우회 (대표집필 김영희작가),사진 산들꽃사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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