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15일 오전 7시. "외에엥~~~" 투표 시작 사이렌이 고요한 대구 아침을 흔들었습니다. "자유당 완장 없인 투표장 입장 불가"(동인 3가) "조장 인솔 없는 유권자는 입장 불가"(신천 1구). 투표소마다 동장, 방(반)장이 핏대를 올렸습니다.
신천 4구 투표소(현 중앙고)에선 정체 불명 청년들이 투표 행렬을 찍던 매일신문 기자 카메라를 후려갈겼습니다. 투표 번호를 받지 못해 방장을 찾는 유권자들. 방장 뒤를 따라 대열 지어 입장하는 유권자들…. "하나마나한 선거 왜 하는지…." 곳곳에서 하소연이 터졌습니다.
"더 이상 선거 못한다." 오후 4시 30분, 대구 제1구·현풍·칠곡·영양·문경·영덕·청송·예천·안동·월성 등 18곳 민주당부에서 당원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 시각 민주당 중앙당에선 '선거 무효'를 선언했습니다. 오후 5시 20분, 신문 호외가 대구 거리에 깔렸습니다.(매일신문 1960년 3월 16일 자 )
투표는 참으로 기묘했습니다. 4할 사전 투표, 3인조·9인조 공개 투표. 개표장 야당 참관인을 내쫓고 여당표가 80~90% 든 투표함으로 바꿔친 사실도 검찰 수사로 들통났습니다. 3월 초 폭로된 비밀선거지령문 그대로였습니다.
또 투표함을 실은 차가 출발하면 대기 중인 경찰이 가짜 투표함을 똑같은 차에 싣고 슬그머니 개표장으로, 진짜 투표함은 팔공산, 가창 등지서 불태웠습니다. 개표 중 여당표가 너무 많자 여당표 뭉치에 야당표, 무효표를 덧댄 샌드위치식 감표까지 탄로났습니다. (동 신문 6월 1일 자)
이승만 86%, 이기붕 77%, 장면 16%. 3·15 정·부통령 선거 전국 득표율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완벽한 관권·부정선거였습니다. 저 멀리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의 이 대통령 당선을 "썩은 승리"라 썼습니다.
투표 날 제일 먼저 무효를 외친 곳은 마산. 성난 시민들이 밤 늦도록 시가지를 휘젓자 경찰이 발포로 맞섰습니다. 총탄에 학생들이 쓰러져간 아비규환의 밤…. 마산은 봄도 비켜갔습니다. 4월 11일, 그토록 찾던 김주열 군이 끝내 마산 부두에서 주검으로 떠오르자 전국이 들끓었습니다.
대구도 들썩였습니다. 데모를 우려한 경찰이 대안동 민주당 경북도당부를 틀어막았습니다. 새끼줄을 쳐 도로를 막고 첩첩이 인간 바리케이트를 쳤습니다. 발 묶인 당원들은 밤새 풍선 삐라를 만들었습니다.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 소리 없는 함성이 빨간 풍선을 타고 아침 하늘을 날았습니다.(동 신문 4월 13일 자)
4월 18일, 고려대생 4천여 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민주 역적 몰아내자'는 하얀 머리띠가 거리를 달렸습니다. 살얼음판 데모가 끝나 해산하던 오후 7시 25분쯤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몽둥이 든 깡패떼 데모 학생에 테러'. 19일 자 신문마다 대문짝만하게 실렸습니다. 혁명의 수레바퀴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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