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재경 교수의 수도원 탐방기] 괴트바이크 수도원(Göttweig Abbey)

'하나님의 길' 앞에서 각자 '인생 길' 걷는 이를 만났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바우어’ 오스트리아 최고의 와인 산지
존 번연 하늘 가는 길 닮은 괴트바이크 수도원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평원같은 바하우 계곡에 섬처럼 우뚝 솟은 산꼭대기에 요새처럼 서 있다.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평원같은 바하우 계곡에 섬처럼 우뚝 솟은 산꼭대기에 요새처럼 서 있다.

오스트리아 수도원 순례는 남서쪽에서 시작해 비엔나를 거쳐 다시 북서쪽 다뉴브강의 바하우(Wachau) 계곡을 향하는 여정이었다. 바하우 계곡은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 다뉴브강이 만들어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하나님은 자연을 창조하고, 자연은 하나님의 형상따라 또 다른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신의 원리를 왜곡하고 비틀고 어두운 욕망의 힘으로 세계를 주조해가는 인간과 자연은 다른 것이다. 인간은 그저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에 수줍은 마음으로 바하우를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이름을 올려놓은 것 뿐이다.

◆하나님의 길(way of God)이란 뜻

바하우 계곡은 온통 포도밭이었다. 바하우, 캄프탈, 크렘스탈, 트라이센탈은 자연경관도 빼어나지만 오스트리아 최고의 화이트와인 산지다. 햇볕 내리쬐는 비탈에서 자란 리슬링(Riesling)의 품질은 최상급이다. 와인 맛과 향이 탁월해 와인 소믈리에, 비평가, 그리고 관광객들이 전세계에서 몰려오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의 유명한 포도밭은 대부분 수도원 소유였고,수도승들이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제조했다. 심지어 뒤른슈타인 (Dürnstein) 수도원에서 관리해온 도멘 바하우는 오늘날 바하우 지역 전체 와인 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다.이곳에 고풍스러운 도시 크렘스(Krems)와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괴트바이크 수도원이 있다. 수도원은 평원같은 바하우 계곡에 섬처럼 우뚝 솟은 산꼭대기에 요새처럼 서 있었다.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1072년 교회당의 높은 제단이 봉헌되고,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후 1083년 파사우의 주교였던 알트만은 이곳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1072년 교회당의 높은 제단이 봉헌되고,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후 1083년 파사우의 주교였던 알트만은 이곳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우리는 북쪽 산비탈, 이리저리 굽은 길을 돌아 수도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돌아보니 산 비탈 전체가 포도밭이었다. 수도원 문턱을 넘자, 넓은 수도원 정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정원에 들어서자 거대한 수도원이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수도원은 거대하고 웅장했지만 평온했다. 넓은 땅, 외진 곳에 고독하게 서 있었지만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따뜻했다.

1072년 이곳 교회당의 높은 제단이 봉헌되고,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후 10년의 세월이 흐른 1083년 파사우의 주교였던 알트만(Altmann)은 이곳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수도원 이름인 괴트바이크(Göttweig)는 하나님의 길(way of God)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수도원을 올라가는 길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순례자가 장망성을 떠나 하늘나라를 향하는 길과 닮았다. 하나님을 찾아 나선 자들의 길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에 꼭 들러야 하는 중요한 순례지중 하나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은 중세 유럽인의 영적인 동맥이었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침묵과 기도, 성찰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역사, 문화, 그리고 영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다.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역사, 문화, 그리고 영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다.

◆베네딕트 수도회 규칙 받아들여

오스트리아인들의 영적인 동맥은 비엔나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시작해, 괴트바이크 수도원을 통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흐른다. 수많은 중세의 순례자들은 괴트바이크 수도원에 도착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길을 만나게 된다. 괴트바이크 즉 '하나님의 길'. 나는 남부 독일을 돌아, 서쪽에서 동쪽 알프스를 넘어 이제야 '하나님의 길'을 만났다.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역사, 문화, 그리고 영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다. 12세기에 이르러 유명한 수도원으로 발돋음하는 데는 파사우의 울리히(Ulrich) 주교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처음 수도원이 설립되었을 때는 수도승들의 수행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었다. 수도승들의 영적인 삶도 느슨해져 수도 공동체의 의미를 잃어갔다.

이때 울리히 주교가 교황의 도움으로 베네딕트 규칙을 도입했다. 그는 검은 숲에 있는 성 블라이세 수도원(St. Blaise's Abbey)의 하르트만(Hartmann, 1094-1114)을 수도원장으로 세웠다. 하르트만은 블라이세 수도원에서 덕망이 높은 두 수도승을 데리고 왔고, 이들과 더불어 쾨트바이크 수도원은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규칙을 받아들이므로 수도 공동체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 곳곳에서 그리스도인을 군인과 운동선수에 비유했듯 수도 공동체는 영적인 삶을 위해 군인같이 규칙적인 삶을 살고 훈련한다. 쾨트바이크 수도원은 베네딕트 규칙을 따라 기도와 노동과 말씀 묵상을 통해 날마다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하나님께 나아갔다.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수도 공동체의 영성이 살아나자, 학문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웠다.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수도 공동체의 영성이 살아나자, 학문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웠다.

◆문화,예술,학문의 전당으로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수도 공동체의 영성이 살아나자, 학문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웠다. 하르트만은 베네딕트 수도원 규칙의 도입뿐 아니라 학문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괴트바이크 수도원에 수도원 학교와 도서관을 건립해, 수도원을 학문의 전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괴트바이크 수도원 근처 언덕에 수녀원을 세웠고, 수녀원은 1557년까지 존재했다.

그 수녀원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최초의 여성 시인이 탄생했다. 괴트바이크의 아바(Frau Ava or Ava of Göttweig)는 독일어의 모든 장르에서 최초의 여성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구원과 재림에 관련된 다섯 편의 시를 썼다. 특히 세례 요한의 삶을 다룬 그녀의 작품은 '독일 최초의 서사시'로 칭송받았다. 그녀는 모국어로 단순하게 글을 썼지만 독자들은 크게 공명했다. 그녀는 복음서에 나타난 수많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로 해석했다.

괴트바이크 수도원 교회에 들어서자, 화려한 교회당 장식이 눈부셨다. 교회당은 온통 금박과 풍부한 예술품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넓고 긴 예배당 회랑, 그 제단 맨 앞쪽 전체를 차지하는 것이 파이프 오르간이었다. 자세히 보니 오르간 앞쪽에는 천사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교회당 앞자리에 앉아 중세 신앙인들의 찬양 소리와 천사들의 찬양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흔적은 지금 그곳에 남아 있었다.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바로크 시대 오스트리아 예술의 전당이었다. 목관 악기의 제작자이고 클라리넷을 발명한 요한 크리스토프 테너와 그의 두 아들이 이 수도원과 깊은 인연이 있다.

테너의 아들 야곱 테너는 그 당시 괴트바이크 수도원의 성가대를 조직하고 성가대가 사용하는 악기의 종류를 기록한 증거가 남아 있다. 수도원은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지역의 예술 발전에 가장 오랫동안, 가장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바로크 시대의 걸작 중 하나인 황제의 계단(Kaiserstiege)이 있다.
바로크 시대의 걸작 중 하나인 황제의 계단(Kaiserstiege)이 있다.

◆오스트리아 바로크 건축의 걸작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빛의 세월도 있지만 어둠의 세월도 있다. 1556년, 이곳에는 수도원장이 없었고, 1564년에는 이곳에서 수행하던 마지막 수도승까지 떠났다. 그 후 150년의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이 수도원 재건에 힘썼지만 두 번의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지금의 웅장하고 화려한 수도원은 이후 수도원장 코트프리트 베셀이 마드리드에 있는 스페인의 궁전 에스코리알(Escorial)에 영감을 받아 지었다.

그래서 괴트바이크 수도원은 마치 궁전 같은 모양과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수도원에는 왕족에게 어울릴만한 호화로운 거실이 있으며, 바로크 시대의 걸작 중 하나인 황제의 계단(Kaiserstiege)이 있다. 이 황실 계단이 오스트리아의 가장 큰 바로크 건축물이고, 이 계단을 장식한 프레스코화는 오스트리아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괴트바이크 수도원 도서관에는 13만 권이 넘는 도서, 수많은 조각품, 유물, 악보, 자연사 컬렉션 등이 소장돼 있다. 도서관은 마치 역사의 대변자 같았다. 도서관을 나서, 남쪽 뜰로 들어서자 수도원 아래 저 멀리 다뉴브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동쪽을 향해 걸으니 붉은 타원형 지붕의 아담한 에렌트루디스 예배당(Erentrudis Chapel)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작은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그 결혼식을 유심히 지켜봤다. 신랑과 신부 하객들, 조금은 엄숙함과 진지함이 묻어 나왔다. 짧은 탐방 기간, 수도원에서 열리는 두 번의 결혼식을 봤다. 지금 이곳에는 30여명의 수도승들이 세속을 삶을 등지고 살아간다. 세속의 삶을 시작하는 결혼과 세속을 떠난 수도승의 삶이 묘하게 오버랩되었다. 그러나 인생은 각자의 길이 있는 법, 나는 생각에 젖은 채 내가 가야할 길을 가고 있다.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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