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성미의 마음과 마음] 의사와 환자는 서로 닮아 가고 싶다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어머니가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고 가셨어.> 대학 동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나의 어머니는 평소 운동도 열심히 하고 붓글씨 교실과 교회도 빠지지 않으시고, 아주 건강했다.

친구 말에 의하면 어머니가 척추전방전위증이 심해서 오랜 동안 힘 드셨을텐데 모르고 있었냐. 수술하기는 번거로움이 많으니 주사요법 하면서 지켜보자고 한다. 그러면서 너 어머니께 좀 잘해 드려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어릴 때는 어머니의 어깨를 자주 주물어드렸고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드리고 칭찬받는 것이 좋았다. 지금은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속 고질병 하나 앓느라고 가까이 계신 부모님의 고통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환자는 의사의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가 있음을 실감했다. 모든 직업이 훌륭하지만, 의사라는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친구가 고마웠다.

50대 중반의 부인이 온몸이 아프고 만사 귀찮다고 정신과 치료를 권유받고 내원하였다. 그녀의 유일한 낙은 헬스장 가서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 운동하는 것인데, 이제 그조차도 못할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운동하면서 땀을 흘리면 몸에 두드러기가 솟아서, 어느 병원을 가 봐도 운동을 자제하라고 했다.

처음 경험해보는 폐경 증상, 젊음의 상실, 자녀의 결혼 등으로 집은 적막강산이고 밤마다 윙윙거리는 이명 때문에 잠 못 드는 날은 많아지고, 좋아하는 것을 못한다고 생각하니 살얼음처럼 견디어오던 일상이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 앞으로 운동하실 수 있도록 해 드릴께요. 염려마세요> 나의 말을 들은 부인은 눈물을 툭 쏟는다. <선생님 말씀이 너무 위로가 됩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희망이 생겼어요.> 나의 공감 한마디에 이토록 큰 위로를 받는 것은 의사도 환자의 처지와 무관하지 않고, 극복해야 할 중년의 과제이고 서로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모든 치료의 시작은 의사-환자 사이의 좋은 신뢰 관계 형성에 있다.

우리는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경험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부정성 편향(negativity bias)이라고 한다. 인류 생존 본능에서 비롯되었다. 원시 사회에서 맹수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동물은 살아남지 못했다. 생존하려면 주변 환경에서 도사리고 있는 어떤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빠르게 대응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고, 이것이 생존 매카니즘으로 진화해온 것이다. 방심하고 뒤통수 맞는 것보다는 미리 경계하고 조심하다가 아니면 말고, 그런 심리가 안전하다는 것을 체득한 것이다.

특히 공황 장애로 고생하는 분들은 부정 편향이 심한 인지적 왜곡을 가지고 있다. 언제 또 불안발작이 와서 죽지나 않을까 하는 경계심을 늘 가지고 있다. 꽉 막힌 도로나 톨게이트를 지나야만 빠져나올 수 있는 고속도로는 숨 막히게 한다. 언제라도 찾아갈 병원이 가까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요즘 넘쳐나는 배드 뉴스(bad news)는 모두에게 위협적이다.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심근경색 환자가 골든타임을 놓쳐서 사망, 응급실 뺑뺑이 등 부정적인 소식은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상상 이상의 큰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나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객사하겠구나. 자다가 밤중에 가슴 통증이 오면 어쩌지. 아침에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온갖 불길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머리안의 걱정 공장은 쉬지 않고 돌아가고, 밤새 하얀 불면이다.

부정성 편향은 우리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때가 많다. 특히 미디어의 대중에 대한 영향이 그렇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뉴스에 더 많이 민감하기 때문에 나쁜 뉴스를 더 많이 보도하는 것이 시청률을 높인다. 특히 누군가를 미워하고 적대시 하는 건 강력한 감정적인 에너지를 불러일으킨다. 어떤 집단을 결속하기 위한 가장 쉬운 게 방법은 증오심을 자극하는 거다.

누군가를 함께 미워하면 쉽게 단결이 된다. 전공의 면허 정지, 기소, 처벌, 조사 등 험한 단어들이 의사와 결합되었을 때 환자들이 아픈 상처를 마음 놓고 의사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환자에겐 차가운 쇠창살보다는 보드라운 솜털이 필요하다. 의사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직업에 자부심과 긍지를 잃는 것은 스스로를 모멸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미움의 대척점은 이해에 있다.

어떤 결말이 나든 이미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미움으로 생긴 상처가 아물자면 네 배 이상의 긍정적인 경험과 사랑이란 해독제가 필요하다. 인생의 출발점에 들어선 초롱같은 눈동자의 의대 학생들과 전공의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나뭇가지에 꽃이 피고 아름다운 꽃비가 내리고, 사람 사는 맛이 나는 그런 풍경이 그립다. 바보 같은 우리에게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길 바란다.

김성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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