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용모의 영혼의 울림을 준 땅을 가다] 구름 속에 피어난 차밭, 누와라 엘리야

바다처럼 광활한 초록 물결…홍차의 향기, 자연에 취하다
영국식 건물 교회·박물관·펍…붉은 벽돌 우체국 '랜드마크'
스리랑카의 '작은 영국' 불려

스리랑카 캔디에서 누와라 엘리야를 가기위한 기차여행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운 풍광중 하나로 여행자들에 인기 만점이다.
스리랑카 캔디에서 누와라 엘리야를 가기위한 기차여행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운 풍광중 하나로 여행자들에 인기 만점이다.
해발2,000m의 누와라 엘리야의 차 밭 사이로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하는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해발2,000m의 누와라 엘리야의 차 밭 사이로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하는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 스리랑카의 작은 영국, 누와라 엘리야

스리랑카의 뜨거운 태양 아래 며칠을 보낸 후, 캔디에서 누와라 엘리야(Nuwara Eliya)로 향하는 길. 나누오야(Nanu Oya)역까지 이어지는 기차 여행은 그야말로 눈을 뗄 수 없는 매혹적인 풍경의 연속이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끝없는 초록의 물결을 바라보며, 대자연의 향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기차와 툭툭을 번갈아 타고 3시간 넘게 달린 끝에 도착한 누와라 엘리야에 발을 들이는 순간, 마치 전혀 다른 나라로 순간이동을 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누와라 엘리야는 19세기 중반, 영국인들에 의해 차밭이 조성되면서 시작됐다. 시원한 기후 덕분에 많은 영국인이 이곳에 거주했고, 지금도 영국식 교회, 학교, 박물관이 남아 있으며, 고원 지대 곳곳에는 전통적인 펍과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누와라 엘리야는 종종 '작은 영국(Little England)'이라 불린다.

누와라 엘리야의 상징적인 건물인 붉은 벽돌의 우체국에서 엽서 한 장 부치는 건 여행길에 누리는 작은 낭만이다.
누와라 엘리야의 상징적인 건물인 붉은 벽돌의 우체국에서 엽서 한 장 부치는 건 여행길에 누리는 작은 낭만이다.

이곳의 상징적인 랜드마크로 붉은 벽돌 건물의 오래된 우체국은 13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운 이에게 엽서 한 장을 보내는 일은 여행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낭만적인 경험이다. 마을 중심의 중앙시장은 신선한 채소와 과일은 물론, 수산물과 정육 코너까지 갖추고 있다. 인근의 그레고리(Gregory) 호수에서는 산책을 하거나 보트를 탈 수 있으며, 마을 뒷산에 올라 내려다보는 시내전경은 안개에 휩싸여 또 다른 세계에 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빅토리아 공원에서 현지인들과 여행자가 함께 어울려 춤을 추며 번잡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아본다.
빅토리아 공원에서 현지인들과 여행자가 함께 어울려 춤을 추며 번잡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아본다.

빅토리아 공원(Victoria Park)은 100년 된 평화의 나무와 흥미로운 분수, 아름다운 꽃밭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현지인들과 여행자가 함께 여유를 즐기는 이곳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던 순간은, 바쁜 일상과는 전혀 다른 평화로운 세계로의 초대처럼 느껴졌다. 공원 서쪽 길가에 위치한 공공도서관은 낡은 2층 건물로, 빛바랜 책들이 옛 시절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었다.

굽이굽이 물결치는 언덕마다 초록색으로 밭고랑이 질서정연하게 정리된 차 밭은 한 폭의 그림같다.
굽이굽이 물결치는 언덕마다 초록색으로 밭고랑이 질서정연하게 정리된 차 밭은 한 폭의 그림같다.

◆ 초록으로 물든 세상, 홍차밭

'실론의 나라'라 불릴 만큼 세계적인 차 수출국인 스리랑카. 특히 누와라 엘리야는 '빛의 도시'라는 이름처럼, 강한 햇살과 해발 2,000m 고원의 청정한 바람이 조화를 이루는, 홍차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지역이다. 이곳은 19세기 중반 스리랑카에 차 산업이 도입된 이후, 홍차의 수도로 자리 잡았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차밭 언덕을 오르면, 눈부신 하늘과 초록빛의 차밭이 조화를 이뤄 눈앞에 펼쳐지며 이색적인 낭만을 선사한다. 계단식으로 정갈하게 관리된 광활한 차밭은 마치 녹색 카펫이 대지를 덮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은 감동을 넘어 경외감을 자아낸다.

초록의 차밭에서 차 잎을 따는 여인들의 손놀림은 마치 오래된 리듬처럼 고요했고, 그들의 미소는 풍경만큼이나 따스했다.
초록의 차밭에서 차 잎을 따는 여인들의 손놀림은 마치 오래된 리듬처럼 고요했고, 그들의 미소는 풍경만큼이나 따스했다.

부드러운 햇살이 산등성이를 쓰다듬고, 비단결 같은 초록 차밭에서 찻잎을 따는 여인들의 손놀림은 고요하고 숙련된 리듬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따스한 미소는 이곳 풍경만큼이나 온화하다. 차밭 사이를 걷는 동안, 코끝을 간질이는 향긋한 찻잎 냄새와 함께 바람은 홍차 향기를 실어 나르고, 마음은 어느새 차분해진다. 찻잎 하나하나에 담긴 정성과 시간은 찻잔 하나에도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일깨워준다.

누와라 엘리야산 홍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그것은 대지의 온기와 사람의 손길이 스며든 예술이며, 초록빛은 단순한 색을 넘어 평온함과 정갈함, 그리고 내면의 풍요를 상징하는 언어다. 이곳의 차밭은 그러한 초록빛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였고, 그 속에서 여행자는 한 편의 주인공이 된다.

하루종일 땀흘리며 채취한 차 잎의 중량을 달아 납품한 농민들과 추억을 남기고 있다.
하루종일 땀흘리며 채취한 차 잎의 중량을 달아 납품한 농민들과 추억을 남기고 있다.

홍차밭에서 시작한 아침은 마치 녹색의 바다에 몸을 던진 듯한 기분이었다. 부드러운 흙길 아래 발을 딛고, 이슬 맺힌 찻잎 사이를 걷는 체험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차밭 사람들의 삶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는 시간이 되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자연의 온기, 그리고 숙련된 여인들의 섬세한 손놀림 속에는 시간이 빚어낸 지혜가 깃들어 있었다.

이후 방문한 티 팩토리에서는 찻잎이 한 잔의 차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공장 안은 홍차 특유의 깊은 향기로 가득하고, 수확된 찻잎이 선별되고, 시들고, 말려 산화되는 모든 과정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정제와 포장을 거쳐 우리의 찻잔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순간은 정성과 시간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호튼 플레인스 국립공원의 하이킹은 입구의 능선에서 멋진 일출을 보면서 새벽에 시작하는 것이 좋다.
호튼 플레인스 국립공원의 하이킹은 입구의 능선에서 멋진 일출을 보면서 새벽에 시작하는 것이 좋다.

◆ 세상의 끝, 호튼 플레인스 국립공원

누와라 엘리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호튼 플레인스(Horton Plains) 국립공원으로 가는 거점 도시이기도 하다. 시내에서 약 40km 떨어진 이곳은 대부분 투어 프로그램을 통해 방문하며, 짙은 운무를 보기 위해 새벽 4시경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고원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세상의 끝(World's End)'이라 불리는 절벽 전망대는 누와라 엘리야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명소다.

트레킹 코스는 왕복 약 9km, 소요 시간은 5시간 내외다. 일출을 바라보며 능선을 따라 걷기 시작해, 오전 중 안개가 끼기 전 세상의 끝에 도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섬나라 스리랑카의 내륙 깊은 곳에 이런 초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놀라움이다. 정글과 사원, 바다를 떠올리던 여행자에게 이 고산 평원은 뜻밖의 선물이다.

푸르고 건조한 초원이 펼쳐지고, 이슬 맺힌 풀잎들이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착각을 준다. 야생동물의 흔적을 따라 걷는 동안, 마음속 소음도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눈앞에
눈앞에 'World's end'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누와라 엘리야의 산맥이 켜켜히 보이는 모습이 이곳이 세상의 끝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다.

여행자를 둘러싼 풍경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완만한 능선이 끝없이 펼쳐졌다. 나무가 무성한 곳도 있었지만, 어떤 곳은 언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새소리도 들린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탁 트인 파란 하늘이 세상을 감싸고 숨을 깊게 쉬어 여행자를 정화시킨다.

고요한 능선을 지나 어느 순간, 풍경은 장엄한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산맥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짙은 정글의 존재감이 그 풍경을 완성한다. 드디어 'World's End'라는 표지판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 아래 펼쳐진 낭떠러지는 무려 1,050m에 이르며, 절벽 아래로 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낸다. 그곳에 서서 두 팔을 벌리면, 마치 세상의 끝자락에 홀로 선 듯한 기분이 든다.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시원하게 쏟아지는 베이커스폭포의 물줄기가 열대의 더위를 식혀준다.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시원하게 쏟아지는 베이커스폭포의 물줄기가 열대의 더위를 식혀준다.

돌아오는 길엔 베이커스 폭포(Baker's Falls)에 들른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와 흩날리는 물보라, 무지갯빛 햇살이 어우러져 감동을 더한다. 호튼 플레인스는 어떠한 수식어보다도 순수한 자연, 그 자체로 깊은 울림을 안겨주는 곳이었다.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ymahn11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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