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들의 고향 의성 ] <7> '의로운 고장' 의성(義城)

항쟁의 불꽃, 나라의 환란 앞에 참지 않고 일어서다
929년 고려·후백제 전투 성주 홍술 장군 전사하자
왕건 "나의 좌우수 잃었다" 통일 직후 義城 지명 하사

사촌마을은 안동 김씨 중시조인 김방경의 5세 손 김목관 김자첨이 조선이 개국한 1392년 안동에서 이곳으로 이주, 마을을 개척했다.서애(西厓) 류성룡이 태어난 서애생가
사촌마을은 안동 김씨 중시조인 김방경의 5세 손 김목관 김자첨이 조선이 개국한 1392년 안동에서 이곳으로 이주, 마을을 개척했다.서애(西厓) 류성룡이 태어난 서애생가 '사촌고택'도 이 마을에 있다.

'고려사' 지리지의 의성부조에 전하기를 '의성현은 본래 조문국[召文國]으로 신라가 이를 취하였다. 경덕왕 때 문소군(聞韶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의성부로 승격하였다'며 의성(義城)이라는 지명이 고려 초에 정착됐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를 병합하고 후백제를 무너뜨리는 등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 의성을 고려 개국에 공(功)이 큰 '의로운 고장' 이라는 의미에서 의성이라는 지명을 하사하고 군(郡)에서 부(府)로 승격했다.

전국에서 의로울 '의'(義)를 지명으로 삼고 있는 시·군은 북한의 신의주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의는 맹자가 말하는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4단(四端), 즉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하나로 신(信)을 더하면 오상(五常)이 된다. 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올바름에서 벗어난 것을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발로이다. 맹자(孟子)는 4단을 갖고 있는 인간은 원래부터 착하다고 성선설을 주장했다.

고대국가 조문국의 도읍지인 금성면에는 산운마을이 있다.산운마을 운곡당 너머로 금성산이 보인다.
고대국가 조문국의 도읍지인 금성면에는 산운마을이 있다.산운마을 운곡당 너머로 금성산이 보인다.

◆의성 지명의 유래, 의로운 고장

의성이 '의로울 의'를 지명으로 갖게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시대 패권을 두고 겨뤘던 견훤과의 대결에서 의성지역을 확보하기위한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아깝게 전사한 홍술장군을 기리기 위한 배려에서 비롯됐다.

의성은 지리적으로 경상북도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신라 말 고려건국 초기 고려와 후백제가 정면으로 충돌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신라 수도 경주에서 북쪽으로 진출하거나 고려 수도 개성에서 경상도 쪽으로 남진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그런데 후삼국시기에 군위-의성 지역은 전반기에는 후백제 세력권에 속했다가 후반기에는 고려의 영향권에 들어간 모양이다.

'고려사(高麗史)' 태조 12년(929년) 7월 고려와 후백제간의 의성 전투는 후백제가 의성을 장악한 고려를 공격한 전투였다. 924년에서 929년에 이르는 시기 의성이 후백제에서 고려의 세력권으로 넘어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삼국시대 최후의 승자를 결정하는 운명적인 대결과정에서 의성은 두 세력이 충돌하는 핵심전략지였다는 것이다.

후삼국 초반 '견훤'의 후백제는 고려를 압도했다. 후백제는 924년 대야성(합천)과 문소성(의성)을 동시에 공략했고 신라 수도 경주를 기습공격, 경애왕을 사로잡아 자결시키는 등 천년왕국 신라를 거의 함락시킬 지경이었다.

929년 의성전투는 고려와 후백제간의 세력대결의 분기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는 의성을 빼앗겼고 문소성 성주 홍술(洪術)장군은 전사했다. 견훤은 5천 여명의 병력을 동원, 총공세를 펼쳤고 의성은 안타깝게 함락됐다. 의성함락과 홍술 장군 전사 소식을 들은 왕건은 "나의 좌우수(左右手)를 모두 잃었다"고 애통해하면서 홍술장군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 곧바로 '의로운 고장'이라는 의미를 담은 지명을 하사했다.그 후 홍술은 의성지역을 수호하는 성황신으로 신격화되면서 성황사(城隍祠)에 모셔지는 등 의성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돼 있었으나 지금은 성황사가 폐사돼 그 흔적 조차 찾기 어렵다.

태생부터 예사롭지 않은 의성은 그래선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충효사상과 성리학의 오상이 어우러진 충절의 고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사촌마을 의성의병기념관
사촌마을 의성의병기념관

◆가로숲 사촌마을

가로숲으로 유명한 점곡면 '사촌마을'에는 의성의병기념관이 면단위에서는 보기 드물게 세워져 있다. 이곳 의성의병기념관은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공포하는 등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이에 이곳 사촌마을 김상종을 의병장으로 한 의병봉기를 일으킨 의성창의(義城倡義)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다. 나라가 환란에 처한 것에 대해 참지 않고 분연히 일어서는 선비정신의 진정한 발로였다.

이런 대표적인 선비마을이 의성에 사촌마을과 산운마을 등 두 곳이 있다. 사촌마을은 안동 김씨 중시조인 김방경의 5세 손 김목관 김자첨이 조선이 개국한 1392년 안동에서 이곳으로 이주, 마을을 개척했다. 사촌마을은 김자첨이 중국의 사진촌(沙眞村)을 본떠 '사촌(沙村)'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는 이야기와 모래땅이던 지역적 특징을 감안해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중국에 沙眞村이라는 실제지명이 없어 본래 이 곳이 하천가의 모래땅에 나무를 심어 '가로숲'을 조성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촌마을 사촌가로수
사촌마을 사촌가로수

사촌마을 가로숲은 마을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숲이 조성돼 있는 데 마을 서쪽에 있어 '서림'(西林)이라고도 불린다. 아마도 조선시대 풍수사상의 영향을 받아 원래 지형이 물길이 짧고 모래가 많아 비가 오면 물이 한꺼번에 흐르고 홍수피해가 우려돼 느티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한 것이다. 지금도 한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진 가로숲에는 동네 어르신들의 휴식처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 3월 '의성산불'이 고운사를 불태울 정도로 의성 전역을 덮치면서 사촌마을쪽으로 덮쳤으나 가로숲과 사촌마을을 양쪽으로 비껴갔다.

서애(西厓) 류성룡이 태어난 서애생가 '사촌고택'도 이 마을에 있다.

산운마을 학록정사
산운마을 학록정사

◆산운마을

고대국가 조문국의 도읍지인 금성면에는 산운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늘 구름이 휘감아 도는 듯한 '산운'(山雲)의 지명처럼 금성산 자락에 자리한 산운마을은 영천(永川) 이씨 집성촌이다. 조선조 관찰사를 지낸 이광준을 입향시조로 영천 이씨 김사공파가 400여년 이어온 세거지로 사촌과 더불어 의성 선비마을의 쌍두마차인 셈이다.

마을 정중앙에는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점우당과 운곡당, 소우당 등이 정방형으로 자리잡고 있다면 마을 입구에는 학록정사가 산운마을의 고고함을 드러낸다. 학록정사의 입구 소시문(蘇始門)은 원래 이 마을이 소시랑골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의미로 지어진 것이다. '소시랑골'은 한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소(蘇)씨가 시랑 벼슬을 한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학록정사 소시문
학록정사 소시문

산운마을과 이웃한 산운생태공원에는 주말이면 인근주민들의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산운초등학교가 폐교되자 학교가 있던 자리를 자연학습장 및 연못과 공원 등 친환경공간으로 조성하여 생태관 등으로 탈바꿈시켰다.

생태관 전시실에는 인근 금성산의 공룡화석 등을 활용, 공룡의 연대기와 화석을 볼 수 잇는 전시실 등이 꾸며져 있고 생태공원에는 수십여 기의 공룡모형 등이 포진하고 있어 아이들의 생태학습공간으로도 잘 활용되고 있다. 볕좋고 바람부는 봄 가을에는 돗자리를 깔고 멍때리는 휴식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힐링공간이다.

의성 김씨 오토재 전경.오토재에는 지역민들이 김용비를 기리는 뜻을 담아 모신 사당이다.
의성 김씨 오토재 전경.오토재에는 지역민들이 김용비를 기리는 뜻을 담아 모신 사당이다.

◆의성 김씨 본관 오토재

선비라면 의성을 본관으로 한 의성 김씨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의성(義城) 김씨(金氏) 시조는 김석(金錫)으로 신라 경순왕과 고려 태조 왕건 장녀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고려 초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면서 그 때부터 의성을 본관으로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 퇴계 이황의 직계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이 퇴계의 맥을 이은 성리학자로 널리 알려지면서 의성 김씨의 본향이 안동처럼 알려지기도 했다.

일제하 항일독립운동의 주축이 된 선비들 중 상당수가 의성을 본관으로 둔 의성 김씨들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안동 내앞 출신인 일송(一松) 김동삼은 만주로 망명, 이시영 등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에 참여하면서 일생을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학봉의 13대종손 김용환은 노름꾼 '파락호'로 지탄을 받았지만 사실은 일본의 눈을 피해 700마지기 논밭을 팔아 독립군 자금을 공급한 진짜 독립투사였다.

의성 사곡면 토현리 오토산(五土山) 자락에는 고려 초 태자첨사를 지낸 김용비(金龍庇)를 모신 오토재(五土齋)가 있다. 김용비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족을 피해 복주(안동)로 몽진하자 의성에서 홍건족들을 토벌하였다고 한다. 오토재에는 지역민들이 김용비를 기리는 뜻을 담아 세운 사당 진민사(鎭民祠), 사경당(思敬堂), 전사청(典祀廳), 숭덕문(崇德門), 진선문(進善門), 신도비각(神道婢閣), 사원지(思源池) 등이 있다.

오토재 입구의 사원지(思源池) 빗돌에는 '음수사원(飮水思源)'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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