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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 이병철의 두 유산 '반도체'와 '미디어'…AI 시대에 갈라진 명암 [금주의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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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1910-1987). 호암재단 홈페이지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1910-1987). 호암재단 홈페이지

올해 6월,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1910-1987)이 남긴 유산의 희비가 강렬히 엇갈렸다.

하나는 반도체 기업 삼성전자다. 데이터센터 구축 붐을 필두로 하는 AI(인공지능) 혁명의 수혜 기업이 돼 세계 산업의 자본을 빨아들이는 중심에 섰다. 삼성전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한 AI반도체 수요를 기반으로 최근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넘어섰고, 반도체 부문은 역대급 실적을 경신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미디어 기업 중앙그룹이다. 중앙일보는 220억원 규모 기업어음 최종 부도 처리 후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동양방송의 후예를 자처한 JTBC도 360억원 규모 기업어음 1차 부도 사태를 맞았다. JTBC, 중앙홀딩스, 콘텐트리중앙, 메가박스중앙 등 중앙그룹 계열사들은 무더기로 회생절차를 밟는다. 한국 언론 역사에서 대형 언론 그룹이 이처럼 본체와 핵심 계열사가 함께 흔들리는 유동성 위기에 빠진 건 초유의 사례다.

같은 창업자에 의해 출발한 반도체 기업과 미디어 기업은 AI 시대에 정반대의 이름을 얻었다. 반도체는 미래의 인프라가 됐지만, 미디어는 '레거시 미디어'라는 쇠락의 꼬리표를 달았다. 한쪽은 AI를 등에 업고 질주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플랫폼·OTT의 압박과 광고시장 붕괴, 그리고 무리한 사업 확장의 역풍으로 멈춰 섰다.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1910-1987)과 반도체, 미디어 상징 이미지. AI로 생성한 이미지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1910-1987)과 반도체, 미디어 상징 이미지. AI로 생성한 이미지

◆이병철의 '종합' 매스컴

이병철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중앙일보 설립(1965년)과 동양방송 개국(1964년) 배경을 두고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한 끝에 종합 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눈에 띄는 말은 '종합 매스컴'이다. 1960년대의 종합 매스컴은 지금의 문어발식 확장과 성격이 달랐다. 당시 신문 지면과 라디오 주파수, TV 전파는 모두 희소 자원이었다. 매체를 가진다는 건 곧 정보 유통망을 가진다는 뜻이었고, 이는 일종의 여론 권력을 갖는다는 뜻으로도 충분히 해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병철에게 반도체와 미디어 둘 다 근대화 산업이었다. 반도체가 물질 문명의 인프라라면, 미디어는 여론과 정보의 인프라.

이후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은 신문과 방송을 묶은 국내 대표 종합 미디어로 자리 잡았다. 이병철이 기본 방침을 세우고, 홍진기(홍석현 중앙그룹 회장의 부친, 홍정도 부회장의 조부)가 운영을 맡는 구조였다.

중앙일보, JTBC 사옥. 연합뉴스
중앙일보, JTBC 사옥. 연합뉴스

◆두 산업의 엇갈린 시간표

반세기가 흐르며 두 산업의 시계 속도는 큰 격차를 보이게 됐다.

1969년 설립된 삼성전자는 1970년대 한국반도체 인수와 1980년대 D램 개발을 거쳐 1983년 반도체 산업 진출을 공식 선언, 세계 시장으로 나갔다. 반도체는 막대한 설비 투자와 기술 축적, 공정 관리, 글로벌 고객망이 필요한 산업이다. 실패하면 손실이 크지만, 성공하면 진입장벽 우위와 가격 결정력을 갖는다. 삼성전자는 이처럼 길고 긴 투자의 결과로 AI 시대 핵심 수혜 기업이 됐다.

1999년 중앙일보와 보광그룹 계열사가 삼성그룹에서 분리됐다. 이후 중앙그룹은 홍씨 가문의 미디어 그룹으로 독자 노선을 걸었다.

중앙그룹이 몸집을 키우는 발판이 된 사건은 2011년 종합편성채널(종편) JTBC 개국이다. 드라마, 예능, 뉴스에서 존재감을 키우며 각종 평가와 조사에서 4개 종편 중 1위를 곧잘 차지했다. 이후 중앙그룹은 신문과 방송 말고도 드라마·영화 등 영상 제작과 영화관 운영, 스포츠 중계권 관리 등 스포츠 비즈니스, 각종 출판, 리조트 사업 같은 레저 영역을 아우르는 종합 미디어 그룹으로 확장했다.

중앙그룹의 미디어 사업은 언론 특성상 국내 영향력 시장에 오래 머물렀다. 신문은 의제를 만들고, 방송은 대중문화를 움직였다. 그 수익 기반은 광고와 구독, 시청률, 콘텐츠 흥행, 중계권 확보 등에 묶였는데, 사회적 영향력은 컸으나 반도체처럼 글로벌 수요와 기술 장벽이 고부가 수익으로 연결되는 구조는 아니었다.

지난해 10월 방한 당시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방한 당시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연합뉴스

◆AI가 가른 운명

그러다 두 산업의 명암을 가른 요소가 바로 AI다. 삼성전자는 세계 AI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기업이다. 과거 있었던 반도체 사이클(수요 증가)과 비교해 더욱 길고 강력한 '슈퍼 사이클'이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의 유례 없는 호황이 전망된다.

반대로 미디어 기업 내지는 언론사 입장에서 AI는 기회보단 위기를 더 많이 던져주는 모습이다. AI가 기사와 콘텐츠 생산 효율을 높여줄 순 있지만, 동시에 검색 유입과 광고 수익을 잠식한다. 독자들이 언론사 홈페이지나 방송 채널에 접속하지 않고도 포털, 유튜브, SNS, 그리고 AI 검색을 통해 뉴스를 소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언론사가 제작한 콘텐츠에 대한 유통과 광고의 주도권을 AI 기반 플랫폼이 가져가는 형국이다.

1960년대의 종합 매스컴은 매체가 희소하던 시대의 통합 전략이었다. 신문과 방송을 함께 갖는 게 곧 유통망과 광고망도 장악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60년이 흐른 지금 매체는 많고 콘텐츠는 넘치며, 그걸 소비하는 독자의 시간은 점점 쪼개진다. 이런 환경에서 종합이 반드시 시너지를 뜻하는 건 아니다. 자칫하면 큰 몸집이 비용과 부채를 한 몸에 엮는 약점이 될 수 있다.

홍정도 중앙그룹 부회장이 지난 6월 15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빌딩에서 열린 JTBC 등 중앙그룹 일부 계열사의 유동성 위기로 인한 회생 절차 개시 관련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고개 숙이며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홍정도 중앙그룹 부회장이 지난 6월 15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빌딩에서 열린 JTBC 등 중앙그룹 일부 계열사의 유동성 위기로 인한 회생 절차 개시 관련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고개 숙이며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종합? 문어발?

중앙그룹의 위기가 이 지점에서 설명된다.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진용은 겉으로는 수직계열화된 콘텐츠 생태계처럼 보였다. 전통적인 신문·방송이 영향력을 유지하며 신뢰를 구축하는 가운데, 제작사들이 생산하는 드라마·영화·예능 IP(지적재산)에 스포츠 중계까지 더해 다채로운 엔터테인먼트가 흐르고, 이걸 극장 유통망과 레저 사업으로도 소화하는 구조.

이 시너지 구조는 시장 상황이 나빠지면 되려 독이 퍼지는 경로가 될 수 있다. 종이신문 구독 부수가 급감하고 TV 광고 시장도 쪼그라들며 신문·방송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다. OTT 경쟁은 제작사 콘텐츠 제작 비용을 높였다. 코로나19 때 OTT의 효능을 맛 본 사람들은 극장행 발길을 줄였다. 스포츠 중계권 사업은 대형 이벤트의 흥행 가능성과 무관하게 막대한 선투자를 요구한다. 이 위험은 중앙그룹이 단독 확보한 2026 북중미 월드컵 중계권 재판매 협상에서 난항을 겪으며 결국 이번 유동성 위기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콘텐츠, 영화관, 방송 광고 등이 함께 현금 흐름을 만들지 못하는 자금 경색을 보일 경우, 그룹 전체는 차입과 보증, 계열사 간 자금 지원에 기대게 된다. 바로 중앙그룹이 지난 수년간 겪은 일이다.

이병철이 얘기한 '종합'이란 희소 매체를 묶어 영향력을 키우는 데 방점이 찍혔다. 그러나 후대 중앙그룹의 '종합'은 과잉 경쟁(레드오션) 속 콘텐츠 사업들을 하나의 재무구조 안에 묶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영향력의 통합, 후자는 위험의 통합.

선대가 남긴 경영철학을 후대가 잘못 이해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대목에서 중앙그룹의 확장은 과거 한국 재벌 비판 담론에서 흔히 썼던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표현과도 맞닿는다.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1910-1987). 연합뉴스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1910-1987). 연합뉴스

◆호암 어록이 던지는 질문

"장기적인 사업에 있어서는 신용이 제일이다."(서울경제신문 '재계회고', 1976년 6월)

중앙그룹의 위기는 그간 쌓아온 대형 언론사의 존재감과 상관없이, 시장 내 금융 신용이 무너진 사건이다. 기업어음 부도와 회생 절차는 언론의 영향력도 상환 능력을 대신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경영의 과학화, 경영의 합리화야말로 중대한 문제다."(서울경제신문 인터뷰, 1970년 1월)

중앙그룹이 신문·방송·제작·극장·레저를 묶은 종합 전략은 시너지처럼 보였다. 하지만 합리적 현금 흐름과 부채 관리가 따르지 않으면 확장은 곧 위험의 통합이 된다.

"기술혁신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한국인' 지 기고문, 1982년 10월)

삼성전자는 반도체 기술을 축적해 AI 시대의 인프라 그 자체가 됐다. 반면 중앙그룹은 콘텐츠 영향력은 키웠으나 플랫폼과 유통 기술의 주도권은 갖지 못하며 경영 위기도 자초했다.

"10년 이상, 50년 정도의 장기 안목 위에서 세워야 한다."(삼성조선(현 삼성중공업) 건설현장, 1977년 6월)

장기 비전과 장기 부채는 다르다. 스포츠 중계권, 영화관, 콘텐츠 투자가 미래 수익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장기 안목은 외형 확장의 명분에 그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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