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촉발된 중동발 전면전 위기가 현실화되면서 한국 경제가 고유가·고환율·고물가라는 '삼중고(三重高)'의 시험대에 올랐다. 이번 군사적 긴장은 물가와 무역수지에 직접적 타격을 가하는 위협이다.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20% 이상이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 가능성은 단지 유가 인상이 아니라 세계 에너지 공급망에 막대한 '지정학적 통행료'를 부과하게 된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0%를 웃도는 우리 경제로서는 유가가 배럴당 10~20달러만 출렁여도 기업 생산원가 상승과 가계 구매력 위축 압박에 직면하게 된다. 생산원가 상승은 기업의 손익계산서를 압박하고, 가계의 체감물가 상승으로 번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시장의 경고등은 선명하다. 원·달러 환율이 1,470원을 위협하며, 코스피는 6,000선이 무너지고 '공포지수'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최대치로 치솟았다. 금융당국은 24시간 점검 체계를 가동하며 '100조원+α' 규모의 시장 안정 프로그램을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충분한 유동성(流動性) 메시지를 보냈지만 시간 벌기용 임시방편일 뿐이다. 유동성 공급은 시장의 공포를 잠재울 수는 있어도 '불안 비용'을 지불하지는 못한다. 충격의 본질은 자금 경색이 아니라 에너지 가격과 지정학적 위험의 상승이기 때문이다.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전문가들은 유가가 100달러를 돌파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단기적 위험은 세 갈래 연쇄 반응(連鎖反應)으로 요약된다. 첫째, 환율 변동성 확대와 통화정책 딜레마다. 글로벌 위험 회피 국면에서 달러 선호 현상이 강화되면 원화 가치는 하락 압박을 피하기 어렵다. 환율 급등은 수입 물가를 직접 자극하며, 이는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운신의 폭을 극도로 좁힌다. 내수 진작을 위해 금리를 내리자니 물가 상승이 두렵고, 동결하자니 경기 둔화 골이 깊어지는 '진퇴양난'이다. 둘째, 자본 유출 가속화에 따른 시장 충격이다. 외국인 자금은 국내 시장의 '유동성 스위치' 역할을 한다. 글로벌 펀드가 위험 노출을 줄이고자 자산 재배분에 나서면 코스피 등 자본시장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셋째, 기업의 마진 압박과 비용 전가의 한계다. 에너지와 물류 비용에 민감한 정유, 석유화학, 항공, 해운 업종은 직격탄을 맞는다. 이번 위기가 단순한 변동성이라면 유동성 공급으로 충분하겠지만 과거 경험이 알려주듯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위험이다. 따라서 '에너지 안보의 구조적 재편'이 핵심이다.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조화, 차세대 에너지저장기술(ESS)에 대한 파격적 투자는 단순한 환경 논리를 넘어 국가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다. 에너지 자립을 위해 실행 가능한 목표들을 하나씩 설정해야 한다. 우선 에너지 공급망의 디지털 전환이 필요하다. 석유 비축량 싸움에서 에너지 흐름과 관리의 최적화로 위기관리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태양광, 풍력, ESS를 네트워크로 묶어 하나의 발전소처럼 관리하는 가상발전소 개념도 포함된다. 에너지 디지털화는 단일 서버(중동)에 의존하던 경제를 클라우드 기반의 분산 경제로 바꾸는 작업이다. 에너지 도입선의 탈(脫)중동화도 가속해야 한다. 지구 반대편 화약고가 터질 때마다 외생변수(外生變數) 운운하며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정부가 언급한 유동성은 임시 방화벽인 동시에 외상 거래일 뿐이다. 내일 지불해야 할 비용을 당겨 쓰는 방법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2026-03-04 05:00:00
최근 미국 구글 트렌드에서 '비트코인 0원'(Bitcoin to zero)과 '비트코인 사망'(Bitcoin is dead) 검색어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해 말 12만6천달러를 돌파하며 기세를 올렸던 비트코인은 올 들어 6만달러대 후반에서 등락하며 투자 심리가 급격히 흔들리는 모습이다. 이런 공포가 처음은 아니다. 2011년 첫 폭락, 2018년 암호화폐 겨울, 2022년 세계 3위 규모 암호화폐 거래소 FTX의 파산 등 수차례 위기마다 언론은 비트코인 부고(訃告) 기사를 썼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반 토막 수준의 조정과 사망 선언을 수백여 차례 이상 극복하며 생존을 증명했다. 다만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촉발된 중동발 전면전 위기에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 지정학적 위기나 금융 불안 시 '디지털 금' 역할을 기대했지만 비트코인은 위험자산처럼 행동했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이 사라질 수도 있을까. 오래 버틴 시스템일수록 앞으로 더 오래 지속할 확률이 높다는 '린디 효과'(Lindy Effect)에 비춰 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지난 17년간 수많은 규제, 해킹, 지정학적 리스크에도 시가총액 수조달러 규모를 유지해 온 이력(履歷)은 부정할 수 없는 신뢰의 증거다. 비트코인 첫 등장 때 '화폐가 될 수 없는 이유'들이 발목을 잡았고, 200달러대 돌파 때엔 '바보들의 금, 결국 터질 거품' 비판이 나왔으며, 1만9천달러를 넘어서자 '사상 최대 사기극' 소리를 들었고, 7만달러를 웃돌자 '에너지 낭비이자 무가치한 자산'이란 맹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비트코인은 중앙은행 보증도, 기업 실적도 없지만 '네트워크 신뢰'와 '채굴 한계' 기반 위에 지금껏 독보적 영역을 구축했다. 따라서 '비트코인 0원' 가능성이 아니라 왜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도 반복해 비트코인에 매달리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시장을 움직이는 숫자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위기 속에서도 무언가를 믿고 매달리려 하는 인간의 심리일지 모른다. 인공지능들에게 "지금 비트코인에 투자하겠는가?"라고 물었더니 "자산의 5% 이내에서 장기적 관점으로 분할 매수"라는 교과서적인 답을 내놨다. 그러면서 "비트코인은 신앙(信仰)의 대상이 아니라 확률 게임의 일부"라는 이유를 들었다.
2026-03-03 05:00:00
광케이블로 이어진 인터넷은 국가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국제 인터넷 접속 지점이나 서비스 제공업체의 몇 개 스위치만 내리면 나라 전체를 정보 암흑에 빠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일론 머스크의 스타링크(Starlink)는 이런 공식을 흐트러뜨렸다. 스타링크는 저궤도(低軌道) 위성 수천 기로 이뤄진 통신망을 통해 케이블이나 기지국을 거치지 않고 위성에서 직접 인터넷 신호를 쏘아준다. 접시 모양 소형 안테나만 있으면 국경 밖 하늘을 통해 곧바로 연결된다. 그런데 최근 이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은 국경선 위로 떠오른 정보의 길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도 보여준다. 이란 정부가 반정부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인터넷을 전면 차단한 뒤 간헐적(間歇的)으로 접속이 허용된 짧은 시간에 유혈 진압 당시 영상과 메시지가 퍼져 나왔다. 그러자 당국은 불법 유통된 스타링크 단말기 수만 대를 비활성화했다고 발표했다. 전파를 흩뜨리는 재밍(jamming)이나 가짜 위치·시간 신호를 보내는 스푸핑(spoofing)과 함께 드론을 이용해 가정과 건물 옥상을 직접 수색한 뒤 장비를 압수했다는 증언도 잇따랐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스타링크가 전장(戰場)의 '신경망'으로 작동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지상 통신망이 파괴된 뒤에도 드론 영상, 포격 좌표, 지휘 명령이 위성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오갔고, 러시아군은 신호 교란과 단말기 확보까지 시도했다. 중국은 사후 대응이 아닌 사전 봉쇄를 택했다. 외부 위성 인터넷을 차단하는 동시에 국가 통제가 가능한 저궤도 위성망을 구축해 '우주 만리방화벽'을 세우고 있다. 위성 통신은 허용하되 데이터 관문(關門)은 국가가 쥐는 방식이다. 위성 인터넷은 자유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군사·안보 변수로 바뀌고 있다. 기술이 국경선을 지웠다고 해서 절대 권력은 바뀌지 않는다. 통제의 위치가 서버실에서 하늘과 옥상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인터넷이 진정한 자유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위성의 개수가 아니라 그런 신호를 받아도 안전한 현실이다. 그런데 무고한 시민을 사살해 놓고 총기를 소지한 용의자로 둔갑시키는 미국은 아무리 위성에서 무검열 정보가 쏟아져도 안전해 보이지 않는다.
2026-01-28 05:00:00
베네수엘라는 실패한 산유국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한때 미국 에너지 시스템의 핵심 내부자였다. 기술 혁명 덕분에 저렴한 비용으로 황 함량이나 점도가 낮은 경질유(輕質油) '셰일 오일'을 뽑아내면서 미국은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이 됐다. 하지만 미국 걸프만 일대 정유 시설 상당수는 중질유(重質油) 처리에 특화돼 있다. 확인된 원유 매장량 1위 국가 베네수엘라가 바로 중질유를 생산한다. 넘쳐나는 경질유는 수출하고, 처리가 까다로운 중질유를 수입해야 미국의 정유산업 경쟁력, 석유제품 수출국 지위, 에너지 패권을 유지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트럼프가 '사야 할 자산(資産)'으로 표현한 그린란드는 전기차·풍력·국방 산업 등 미래 기술의 핵심 전략 광물인 희토류를 둘러싼 경쟁의 최전선에 있다. '얼음 덩어리' 그린란드는 기후 변화로 빙하가 녹아 북극항로가 열리면서 희토류·우라늄·리튬 등이 집중된 땅으로 주목받고 있다. 남부 크바네필드 광산은 방대한 희토류와 우라늄 매장량으로 유명하다. 그린란드 의회가 2021년 고농도 우라늄 채굴 금지법을 통과시키면서 현재 채굴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트럼프의 거래에 따라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에너지의 정치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장면은 1977년 워싱턴에서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취임 첫해 연설에서 에너지 위기를 "전쟁에 상응(相應)하는 도덕적 시험(Moral Equivalent of War)"으로 규정했다. 베트남전 직후 오일 쇼크 충격 속에 카터는 석유 부족을 시장 문제가 아니라 국가 생존과 공동체 결속을 시험하는 정치적 위기로 바꿨다. 연료를 전략 자산으로, 에너지 정책을 안보 문제로 선언한 것이다. 덴마크가 추진하는 북해의 대규모 인공 에너지 섬은 재생에너지 인프라 허브를 목표로 한다. 초기 3GW 용량을 1천만 가구 규모의 전력 공급이 가능한 10GW로 키워 유럽 전체 재생에너지 주권을 쥐겠다는 의도다. 에너지의 생산·집중·분배가 이뤄지는 곳에서 정치적 갈등은 불가피해 보인다. 현대 에너지 경쟁은 형태만 바뀐 전쟁에 가깝다. 제국은 사라졌지만 연료를 둘러싼 정치적 계산은 유효하다. 에너지는 경제의 얼굴로 등장하지만 결정적 순간, 정치의 손에 쥐어진다.
2026-01-21 05:00:00
인공지능(AI)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인간 창작의 시대를 끝장낼 것처럼 떠들지만 현실에는 어두운 단면도 있다. '딥러닝' '자율주행' 같은 용어로 포장된 기술의 기저(基底)에는 인간의 단순 반복 노동이 촘촘히 깔려 있다. AI가 스스로 학습한다고 믿고 싶겠지만, 챗봇이 예의를 갖춰 답하고 혐오 발언을 피해 가는 것은 기계의 자율성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 화면 앞에서 '부적절한 문장' '폭력적인 이미지'라는 판단을 수천 번 반복한 덕분이다. 여러 자료로 추정한 전 세계 온라인 플랫폼 노동 계정 수는 1억~1억6천만 개. 이들 중 고액 연봉을 받는 개발자나 디자이너를 뺀 밑바닥 노동자들이 수천만 명을 헤아린다. 이들이 AI 학습을 위해 자신의 눈과 손을 기계에 빌려준다. 화려한 무대 뒤에서 검은 옷을 입고 소품을 옮기지만, 결코 관객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연극판의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다. 유튜브 혐오 영상을 거르는 이들은 하루 수천 번 '삭제' 버튼을 누르며 마음의 상처를 입지만, 인형 눈알 붙이는 수준의 수수료를 받는다. 빅테크 기업들이 천문학적 가치를 창출할 때 이들은 '노동자'라는 이름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플랫폼 접속자(接續者)'로 분류된다. 4대 보험, 산업재해는 오프라인 시대의 유물이다. 인도, 남미, 아프리카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24시간 멈추지 않는 세계적인 '디지털 조립 라인'을 형성한다. 글로벌 플랫폼의 한국어 콘텐츠를 걸러내는 작업 역시 국내 하청업체를 거쳐 개인 계약자에게 넘어가는 구조다. AI는 문제를 찾고, 인간은 정답을 가르친다. AI는 속도를 맡고, 인간은 마지막 판단을 지킨다. 이런 보이지 않는 노동자가 '고스트 워커 (Ghost Worker)'다. 폭력, 혐오, 성 착취 콘텐츠를 걸러내면서 정신적 외상(外傷) 위험은 개인이 떠안고, 기업의 책임은 계약서 뒤로 숨는다. 기술이 노동을 해방한 것이 아니라, 노동을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밀어낸 뒤 책임만 없애버렸다. 스마트한 일상은 고스트 워커의 반복적 클릭 위에 세워진 결과물이다. 일부 국가가 최소한의 노동권 부여를 위한 법 개정을 언급하지만 결과물이 없다. AI가 발전해도 고스트 워커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들이 일컫는 '접속자'를 대체하려면 기업이 훨씬 비싼 비용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2026-01-14 05:00:00
학령인구 감소에도 사교육비는 폭증(暴增)했다. 10년 사이 학생 수는 18% 넘게 줄었지만 사교육비 총액은 60% 이상 늘어 2024년 29조원을 넘어섰다. 초등 사교육비는 74% 급증하며 증가세를 주도했다. 무한 경쟁의 출발선이 유치원 이전까지 내려오면서 교육비는 외식비·식비에 이어 가계의 3대 지출로 굳어졌다. 사교육비는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출산 기피를 부추기는 사회적 비용으로 변질됐다. 잦은 입시 제도 변경과 예측 불가능성은 학부모 불안만 키웠다. 정책이 흔들릴 때마다 사교육은 '안심용 보험'을 팔았고, 선행학습은 생존 전략이 됐다. '4세·7세 고시'는 일탈(逸脫)이 아니라 부작용이다. 인공지능(AI) 시대에 단순 암기와 계산, 정형적인 문제 풀이는 기계의 영역이 됐다. 그럼에도 AI를 활용한 과제 작성이나 시험 풀이를 금기시(禁忌視)한다. 마치 무능하고 게으른 학생들이 AI를 악용하는 듯 비춰진다. 그런데 본질적 질문을 던져보자. AI로 언제든 해결 가능한 과제나 문제를 반복 측정하는 시험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학교에서 AI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해프닝들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낡은 교육 시스템의 극악스러운 비명처럼 들린다. 인공지능의 아버지로 불리는 토론토대 제프리 힌튼 교수가 지적했듯 AI는 개인 이해도를 실시간으로 파악해 맞춤형 학습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AI 사용을 금지한 채 시험을 치르는 풍경은 계산기가 있는데 암산 역량만 재는 꼴이다. 그러나 시험이 사라질 이유는 없다. 바뀌어야 할 것은 평가 내용이다. 문제 풀이가 아니라 문제 설정, 해법 검증, 오류 판단, 맥락 이해, 책임성 등을 평가해야 한다. 학교는 지식전달 기관에서 학습설계 기관으로 바뀌고, 교사는 같은 교과서를 같은 속도로 가르치는 역할에서 학생의 사고 습관을 진단하는 역할을 해내야 한다. 이런 시대에 고가(高價)의 선행학습은 설 자리를 잃는다. 물론 입시제도부터 새판을 짜야 한다. 사교육비 폭증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의 실패다. 인공지능 시대, 계산은 기계에 맡기고 판단은 인간에게 남기는 용기, 그 경계선을 짓는 것이 교육 정책의 역할이다. 변별력을 내세우며 원어민조차 한숨 내쉬는 영어 문제로 학생을 고문(拷問)할 때가 아니다.
2026-01-07 05:00:00
"제발 쓸데없는 것 드시지 말고 이것부터 챙겨 드세요!" 자칭(自稱) 전문의가 전하는 간절한 조언은 인공지능(AI)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발표한 'AI 생성 전문가 활용 부당(不當)광고' 적발 사례를 보면, 단 16개 업체가 AI 전문가를 내세워 무려 84억원어치의 제품을 팔아치웠다.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가짜 권위'를 내세워 여러 질병의 완치와 회복을 약속했다. 옛날 허위 광고가 과장된 문구와 화려한 포장지로 소비자를 유혹했다면, 지금은 '디지털 복제 인격'이 신뢰의 근간을 뒤흔든다. 흰 가운을 입은 AI 의사의 신뢰감 있는 목소리는 합리적 판단을 무디게 만든다. 보고 듣는 것은 사실이라 믿었던 인지적 본능이 '가공된 진실'에 의해 농락당하는 셈이다. 가짜 전문가와 허위 치료법은 AI 이전부터 존재했다.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방울뱀 왕'을 자처한 인물이 관절염 특효약이라며 '뱀 기름'을 팔았다. 조사 결과, 병 안에는 뱀 기름이 한 방울도 없었다. '사이비 약장수, 돌팔이 의사, 사기꾼'을 뜻하는 '뱀 기름 판매원(snake oil salesman)'의 유래(由來)가 된 사건이다. 1920년대 당시 첨단 과학의 상징이던 방사능은 심장병, 백혈병까지 고치는 만병통치약으로 둔갑했다. 라듐을 섞은 음료 '라디토르'를 3년간 1천400병 넘게 마신 한 자산가는 방사선 괴사로 턱뼈가 무너진 채 숨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턱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효과가 있었다"는 냉소적 표현을 썼다. 치명적 결과를 낳은 과학에 대한 맹신은 AI 딥페이크로 대체되고 있다. 뱀 기름과 라듐의 역할을 알고리즘과 생성형 AI가 대신한다. 기술은 진화했지만 가짜 권위의 작동 방식은 한 세기 넘게 변하지 않았다. AI를 활용한 사기성 광고는 대중을 현혹하고, 진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유럽 의약품청(EMA)은 딥페이크 의료 광고를 '잠재적 건강 위해(危害) 요인'으로 분류했다. 미국 오리건주 등은 AI 가상 인물이 의료 면허를 연상시키는 직함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제한한다. 정부 단속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화면 속 인물이 건네는 정보의 출처를 의심하고, 교차 검증을 일상화해야 한다. 가공된 진실의 유혹으로부터 안간힘을 쓰고 깨어나야 할 때다.
2026-01-02 05:00:00
[매일칼럼-김수용] 4천470조 유동성의 역설, 돈은 왜 흐르지 않나
한국 경제가 기이(奇異)한 정체(停滯) 상태에 빠졌다. 시중에 풀린 돈은 사상 최대인데, 경제 맥박은 느려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0월 기준 광의통화량(M2)은 4천470조원을 넘어 최고치를 경신했다. 그러나 돈이 얼마나 활발히 도는지를 보여주는 통화유통속도는 2014년 0.78에서 지난해 0.61까지 떨어졌다. 돈은 많지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돈맥경화'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M2 증가분을 들여다보면 실체가 드러난다. 10월 한 달 가계 및 비영리단체의 M2 잔액은 24조원 넘게 늘었다. 기업 부문 역시 예금과 단기금융상품 중심으로 자금이 쌓이고 있다. 이미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비금융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1천100조원을 넘어섰다. 투자와 고용으로 흘러가야 할 자금이 금고와 대기성 계좌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경제 주체들의 선택은 분명하다. 소비도, 설비 투자도 미룬 채 '현금 보유'를 최우선 전략으로 택했다. 한국 시장이 더 이상 수익을 창출하는 공간이 아니라 리스크를 피해 숨을 고르는 대피소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상 최대의 유동성은 풍요의 증거가 아니라 갈 곳 잃은 자본의 집단적 침묵이다. 문제의 근원은 무너진 심리이고, 그 기저(基底)에는 정책 불확실성이 있다. 정부는 경기 부양을 명목으로 천문학적 재정을 투입하며 유동성을 공급해 왔다. 그러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단기적 현금 살포식 처방은 소비 심리를 살리기는커녕, 가계로 하여금 미래의 세금 부담에 대비한 '방어적 저축'만 강화하는 역설을 낳았다. 28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5년 경제주체별 화폐 사용 현황 종합 조사'에 따르면 개인과 기업의 현금 보유액이 늘었다. 기업의 현금 보유가 늘어난 배경으로는 '경영 환경 불확실성 확대에 따라 비상시 대비 유동자산을 늘리기 위해'(36.3%)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정부가 시장에 신뢰를 주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뼈아픈 수치다. 글로벌 통상 질서가 재편되는 전환기에 우리 경제는 구조적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 대응은 규제 개혁이나 산업 경쟁력 강화보다 단기 재정 투입에 머물러 있다. 돈이 돌지 않는 이유는 유동성 부족 때문이 아니라 돈을 썼을 때 돌아올 보상과 안정적 규칙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서다. 시중 자금이 고인 물로 변하면서, 코로나 팬데믹 직후 주식시장에서 나타났던 폭발적인 거래량은 보이지 않는다. 사상 최고 수준의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자금은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보다 안전자산과 대기성 계좌에 머물고 있다. 문제는 이런 유동성이 언제든 생산적 투자 대신 부동산 등 비생산적 자산으로 쏠릴 수 있다는 점이다. 환율과 금리, 재정 정책의 부담 요인으로 지적돼 온 부동산 시장이 다시 들썩일 경우, 정책의 선택지는 더욱 좁아진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돈이 아니다. 돈이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이다.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회복하고, 기업이 미래의 수익을 계산할 수 있도록 제도적 신뢰를 복원해야 한다. 정부는 '돈을 푸는 주체'가 아니라 '돈이 흐르도록 만드는 조력자(助力者)'로 역할을 전환해야 한다. 정치 일정에 흔들리는 단기 처방을 멈추고, 인공지능(AI)·반도체 등 미래 산업으로 자금이 흘러가도록 규제 혁신과 세제 개편에 나설 때다.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 정책은 어떤 유동성으로도 경제를 움직일 수 없다. 금고 속에 머물러 있는 수천조원의 자금은 시장의 침묵이자 경고다. 침묵은 결국 정책 성적표로 돌아온다.
2025-12-30 05:00:00
2025년 말, 미국 워싱턴은 거대한 진실의 폭풍에 직면해 있다. 오랜 세월 베일에 싸여 있던 '제프리 엡스타인 파일'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해서다. 미 의회는 지난 11월 법무부의 기밀(機密) 자료 전면 공개를 강제하는 '엡스타인 파일 투명성법'을 사실상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공개 시한인 지난 19일 법무부가 내놓은 결과물은 실망을 넘어 분노를 자아냈다. 의회가 명한 '전면 공개' 원칙에도 불구, 법무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관련된 사진 16건을 포함해 핵심 문서들을 대거 삭제하거나 검게 가린 채로 공개했다. '의회 모욕죄'와 '탄핵'까지 언급하며 의회가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 공방이 아닌 법치주의의 존립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프리 엡스타인은 자산가를 넘어 전 세계 엘리트들의 치부와 욕망을 관리하던 '정보 포식자(捕食者)'였다. 추악한 성범죄 네트워크는 정·재계를 망라한 유력 인사들의 인맥으로 지탱됐고, 수감 중 사망한 이후 그 명단은 워싱턴의 가장 위험한 '판도라의 상자'로 남아 있었다. 세간의 시선은 악마의 섬 '리틀 세인트 제임스'에 누가 발을 들였느냐는 자극적 명단에 쏠려 있지만 정작 폭발력을 지닌 진실은 명단 뒤에 숨은 '통제 기제(機制)'다. 엡스타인 파일은 여러 기관에 흩어진 기록의 집합이다. 연방검찰의 내부 메모, FBI 수사 보고서, 대배심 기록, 교정 당국 문서, 민사소송 증언들은 의회를 포함한 누구도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없게 설계돼 있다. 특히 민감한 대목은 2019년 엡스타인 의문사 전후에 오간 기밀 메모들이다. 특정 인물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사법 당국에 어떤 '비공식 지침'을 내렸는지, 은폐의 대가로 무엇이 오갔는지가 파일의 진정한 폭발력이다. 트럼프 대통령 측은 '정치적 마녀 사냥'이라 규정하며 방어막을 치고 있다. 그러나 행정부가 불리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은폐하려고 공권력을 동원했다면, 리처드 닉슨의 하야(下野)를 불렀던 권력에 의한 '사법 방해'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엡스타인 파일은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 사건의 핵심은 파일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가 아니라 민감한 특정 내용이 어떻게 지워졌느냐다. 바로 그 지점에서 탄핵의 문이 열릴 수도 있다.
2025-12-24 05:00:00
3천370만 건에 이르는 쿠팡 이용자의 이름·이메일·배송지(配送地)·전화번호 등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터진 지 한 달 넘게 흘렀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여론이 들끓었다. 쿠팡의 실체, 허술한 보안, 안일한 대응 등은 회사 존립마저 뒤흔들 듯 보였다. 우선 개인정보 침해 분야의 집단소송제 도입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피해자 일부가 소송에서 이기면 판결 효력이 모든 피해자에게 적용되는 제도다. 중대한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낸 기업에 전체 매출액의 최대 10%까지 과징금을 부과하는 법안도 통과될 전망이다. 매출액의 10% 과징금은 회사 문을 닫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제재다. 그런데 분노와 대응은 사뭇 다른 양상이다. 쿠팡 사태의 불안감과 불신에 대해 80% 이상이 '그렇다'고 답했는데, 계속 이용하겠다는 응답자도 55%가 넘었다. 연령대가 낮을수록 계속 이용 응답률이 높았다. 심지어 쿠팡 관련 앱 이용자는 개인정보 유출 사태 전보다 소폭 증가했다. 12월 첫 주 쿠팡 앱 주간(週間) 활성 이용자는 3천만 명에 육박한다. 업계는 쇼핑·배송·콘텐츠·배달 서비스를 하나로 묶어 이용자 탈퇴를 어렵게 만든 '락인(lock-in) 효과' 때문으로 분석한다. 익숙하고 편해서 계속 쓴다는 말이다. 쿠팡 창업주인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은 국회 청문회에 불출석을 알렸다.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여서 바쁘다는 이유다. 박대준·강한승 전 대표도 현재 대표직을 떠났다며 불출석 사유서를 냈다. 국회의원들은 "단순한 개인적 불출석이 아니다. 기업 차원의 조직적 책임 회피, 국민을 무시하는 오만(傲慢)함이자 국회를 기만하는 태도"라고 비판하며 3명을 국회증언감정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기로 했다. 쿠팡은 한국인을 정말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쿠팡 족쇄(足鎖)에 묶인 한국인들이 고함만 냅다 지를 뿐 떠나지 못할 것을 이들은 안다. 충성스러운 고객이 버티고 있으니 국회 따위가 두려울 리 없다. 쿠팡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전현직 고위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는데, 사외이사인 케빈 워시 전 연방준비제도 이사는 현재 연준 의장 최종 후보에 포함될 정도다. 앞서 김범석 의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에 공식 초청받았고 무도회, 만찬에도 참석했었다.
2025-12-17 05:00:00
어떤 사람을 특정인으로 규정짓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어 얼굴이 바뀌었고 지문도 사라졌으며, 심한 충격으로 기억마저 잃었다면 과거의 자신으로 살 수 있을까? 물론 법적, 의학적 수단을 동원해 정체성(正體性)을 찾을 수 있다. 유전자 정보나 뼈와 치아의 모양, 의학적 치료 흔적, 홍채와 망막혈관 패턴 등은 특정인을 구분하는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나와 주변인의 기억을 통해 이뤄지는 상호 교감이 불가능하다면 과연 원래의 자아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현실 공간이 아닌 디지털 세상이라면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해진다. 유전자나 의학 정보를 통한 존재 입증이 무의미해질 수 있다. 내 머리에 저장된 기억도 전혀 역할을 못 한다. 디지털 공간에서 자신을 규정짓는 것은 아이디와 비밀번호, 그리고 휴대폰 번호, 계좌번호, 이메일 주소 등이다. 이런 정보를 누군가 갖고 있다면 제2, 3의 디지털 자아를 만들 수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거의 모든 거래가 비대면(非對面)으로 이뤄진다. 포털사이트, 신용카드사, 쇼핑몰 등에서 빠져나간 정보의 퍼즐을 조합하면 새로운 '나'가 생겨난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 따르면, 연간 개인정보 유출 신고는 2022년 64만여 건에서 2023년 1천만 건 이상으로 15배 이상 급증했다. 특수한 경로로만 접속 가능한 인터넷 세계인 다크웹에선 개인정보가 상품처럼 거래된다. 단순히 주민등록번호와 이름 정도가 아니라 전자상거래 기록, 배달 이용 내역 등 특정인의 삶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는 민감한 정보들까지 줄줄 새어 나가고 있다. 이런 사생활 정보까지 손에 쥐었다는 것은 훨씬 교묘하고 지능적인 범죄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인공지능(AI)으로 만든 가짜 음성과 영상까지 가세하면 개인이 이를 가려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디지털 자아를 지키기 위해 유전자나 의학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은 지극히 위험한 발상(發想)이다. 글로벌 빅테크와 다국적 제약 회사, 거대 보험사 등이 가장 군침을 흘리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특정 기관이 보관 중인 건강 관련 빅데이터가 유출된다면 상상을 능가하는 피해가 생길 수 있다. 디지털 정보로는 구분이 불가능한 도플갱어가 탄생한다. 바로 지금 그런 세상이 펼쳐지려 한다.
2025-12-10 05:00:00
한때 정보검색대회가 꽤 인기였다. 온갖 분야의 정보를 인터넷 검색으로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찾는지 경쟁했는데, 지금은 일부 대회만 남아 있다. 독도의 명칭 변화, 인류 최초의 문명, 도라지의 효능, 국내 최초 쇄빙선(碎氷船) 이름 등이 최근 출제된 문제라고 한다. 뉴스, 블로그, 게시글 등을 최단시간에 검색해서 정답을 찾아야 하는데 무슨 키워드를 어떤 순서로 입력하느냐가 승패를 가늠했다. 몇 해 전 정보검색대회에서 특정 검색엔진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단서가 붙었다. 기존 검색엔진이 키워드를 입력해 주제 범위를 좁혀 가는 방식으로 정보를 찾는 데 비해 사용 금지된 검색엔진은 문장으로 입력하면 단번에 답을 알려줘서다. '정보의 바다' 인터넷의 정보는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런 바다를 누비는 항해사(航海士)로 '인터넷정보관리사' 자격증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진학이나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응시생이 몰렸다는데, 지난 2022년 2월 17일부로 국가공인자격이 만료돼 민간자격증으로 바뀌었다. 검색엔진의 기능이 워낙 뛰어난 탓에 자격증의 전문성과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 취업 포털사이트의 구직자 대상 조사에서 취득을 후회한 자격증 1위에 오르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는데, 실제 그런 조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생성형 인공지능(AI)에 익숙해진 젊은이들은 검색 따위에 시간을 쏟지 않는다. 문서 정리부터 보고서 작성까지 AI가 알아서 해 주니까. 이솝 우화(寓話) '황새와 개구리'는 지나친 욕망과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경고한다. 제우스에게 왕을 보내 달라고 간청했던 개구리들은 처음 연못에 던져진 통나무에 만족하지 못하고 강력한 왕을 원한다고 소리쳤고, 결국 황새가 내려와 개구리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다는 내용이다. 통나무는 검색엔진 시절의 인터넷, 황새는 생성형 AI가 아닐까 싶다. AI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10년 뒤 과연 어떤 직군(職群)이 살아남을지 궁금할 정도다. AI에 우화의 교훈을 물었더니 '완벽한 해결책만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 답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나쁜 결과가 빚어질지 두렵다.
2025-12-03 05:00:00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매우 좋은 전화 통화를 했다"며 대화 내용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공개했다. 내년에 미중 정상의 상대국 방문을 알리는 빅 뉴스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3주 전 한국에서 있었던 매우 성공적인 회담의 후속"이라면서 "자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했고, 그렇게 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중국과 미국이 협력하면 모두에 이롭고(合則兩利) 싸우면 모두가 다친다(鬪則俱傷)는 것은 실천을 통해 반복 증명된 상식"이라며 양국 관계의 변화를 강조했다. 국제 관계를 둘러싼 다양한 대화 중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대만(臺灣)이다. 신화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미국은 중국에 있어 대만 문제의 중요성을 이해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 발언 이후 중일 갈등이 고조되고, 중국의 대일본 압박 조치가 강도를 더해 가는 와중에 나온 트럼프의 발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물론 트럼프는 SNS에서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카이치 총리가 25일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했다면서 "미중 정상 간 통화 포함, 최근 미중 관계 상황에 관한 설명이 있었다"고 전했다. 역시 대만 문제를 둘러싼 중일 갈등에 대한 트럼프의 언급이 있었는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극도로 민감한 상황에서 이뤄진 트럼프의 전화가 정확히 어떤 의도였는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트럼프에게 전화는 통신 수단이 아니라 폭넓은 통치 수단에 가깝다. 전화로 상대를 설득·압박하고 의지를 강력히 전한다. 외신에 따르면, 과거 트럼프가 사전 조율 없이 외국 정상에게 전화를 걸고, 친구와 대화하듯 국익을 논하는 모습에 측근들조차 당황했다고 한다. 트럼프의 전화 집착(執着)은 회고록 '거래의 기술'에도 상세히 나온다. 사업가 시절 트럼프는 9시 사무실 도착 후 하루 평균 50~100건씩 통화하고, 퇴근 후 자정까지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전화로 동맹국 지도자를 압박하고, 결정적 순간에 비공식 메시지도 보낸다. 트럼프에게 전화는 고도로 연출된 정치이며 전략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깜짝 통화도 충분히 가능하다.
2025-11-26 05:00:00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인공지능(AI) 산업의 핵심인 고성능 그래픽카드(GPU) 26만 장을 한국에 우선 공급하겠다고 밝히면서 이재명 정부가 천명한 'AI 3강' 꿈에 한 걸음 다가선 느낌이다. 그러나 전력 수급, 인재(人材) 확보 등 선결 과제를 풀어야 가능한 얘기다. 특히 인재는 단기간 해결도 불가능한 데다 핵심 인력 배출은커녕 외국에 줄줄이 빼앗기는 판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0여 년 경력 외국의 이공계 전문가 연봉은 평균 5억3천만원인데, 국내는 9천300만원으로 비교 불가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AI 인재 순유입 35위다. 떠나는 인재가 더 많다는 말이다. 미국은 AI 분야 학부 졸업생 93.7%가 자국 대학원에 진학하지만, 한국은 38.6%가 외국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보고서도 나왔다. 특히 중국의 '천인계획(千人計劃)'은 우리 과학기술계의 취약점을 철저히 공략하고 있다.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많은 연봉을 제시하며 주택과 자녀 학비까지 지원한다. 지난 5월 한림원 정회원과 차세대 회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최근 5년 새 영입 제안을 받은 경우가 61.5%에 달했고, 이들 중 82.9%가 중국에서 온 제안이었다. 정부가 지난 10일 내놓은 AI 인재 양성 방안에 대한 과학기술계 반응은 싸늘하다. 인재 조기 육성을 위해 학·석·박사 과정을 5년 반 만에 완료토록 했는데, 학계는 깊이 없는 붕어빵 인재 양산을 걱정한다. 5년간 매년 20여 명의 국가과학자를 선정해 연간 1억원 정도 연구활동지원금을 제공한다는데, 외국에서 8억~10억원 지원 제안이 쏟아지는 판국에 과학자 예우도 아니고 명예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이재명 정부 제1호 인재 정책인 '해외 인재 2천 명 유치 프로젝트'도 목표만 거창할 뿐 구체적인 실행 방법이 부족하다. 정부의 인재 육성·유치 방안을 두고 과학계에선 '수술할 환자에게 연고를 발라주는 보여주기식 처방에 그친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이런 와중에 청년층 일자리는 급격히 줄고 있다. 취업에 성공해도 기간제(期間制) 근로자 등 비정규직이 대부분이다. 안정적 일자리를 제공해 왔던 제조업과 건설업이 부진의 늪에 빠졌고, 청년 일자리를 둘러싼 대내외 불안 요소들도 가세하고 있다. 기성세대들은 젊은이들이 눈만 높아 취업을 못 한다고 비난하지만 실제 청년 일자리의 질(質)은 매우 나쁘다. 올해 8월 기준 20·30대 임금근로자 811만 명 중 비정규직만 257만 명(31.7%)에 이른다. 비정규직 비중이 2004년 이후로 21년 만에 최고치다. 지난 10년간 20·30대 정규직은 60만 명가량 줄었고, 비정규직은 45만 명 정도 늘었다. 2년짜리 계약직인 기간제가 그나마 청년 일자리의 버팀목인 셈이다. 양극단(兩極端)으로 치닫는 청년 일자리 문제의 원인은 지극히 복합적이고 심층적이지만 정부 대응은 단편적 수준에 머문다. AI 확산에 따른 일자리 증발, 중장년 고용 유지를 위한 정년 연장 추진, 고부가 산업의 소수 고숙련 인력 수요 등이 연쇄 작용해 청년 고용 부진이 장기적이고 구조적 문제로 뿌리내리는 상황에서 정부는 여전히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이다. 정부의 '일자리 전담반'이 AI 교육·직업훈련 대폭 확대, AI 분야 벤처 창업 적극 지원을 대책으로 내놨지만 정권 지향점에 맞춰 급조한 임시방편 인상을 지울 수 없다. AI 미몽(迷夢)에서 깨어나야 청년 일자리 문제를 바로 볼 수 있다.
2025-11-25 05:00:00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등장은 과연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던지는 계기가 됐다. 학교 시험이나 과제 작성에서 AI 활용 사례가 급증하면서 공정성(公正性) 논란도 도마에 올랐다. 워낙 정교하게 글을 써 내다 보니 인간의 능력으로는 구분하기 힘들어 AI가 쓴 글을 검증하는 데 AI에 의존하는 시대가 됐다. 내용의 옳고 그름은 여러 생성형 AI를 교차(交叉) 활용해 쉽게 판별할 수 있지만 작성자가 인간인지 여부를 밝히기는 매우 까다롭다. 최근 대학가에서 발생한 AI 부정행위에 대해 학교 측이 자수를 권고하자 "부정행위를 적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까지 나왔다. AI 생성 글을 탐지해 내는 도구를 활용해도 정확도는 60%에 못 미친다. 그런데 탐지기 맹점을 역이용하면 이조차 급격히 떨어진다. 일부러 철자를 틀리게 적거나 문장 길이를 들쭉날쭉하게 쓰면 정확도가 20%대로 낮아진다고 한다. 특히 영어 기반 AI 탐지기에 한글 작문을 넣었더니 거의 무의미한 신뢰도를 보여 줬다. 한마디로 탐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특정 글이나 제품 반응을 '좋아요' 또는 '댓글' 숫자로 가늠하는데, 이것도 AI로 얼마든 조작 가능하다. 구독자나 사용자의 진정성 있는 댓글이 아니라 AI가 만든 댓글이 무한정 달릴 수 있다. 한 달에 10만원만 내면 수만 건의 댓글과 좋아요를 자동으로 만들어 준다고 한다. 최신 AI를 이용하면 댓글 한 개당 1원 안팎의 비용이 든다는데, 이쯤 되면 과연 세상에 믿을 것은 없다는 회의감(懷疑感)이 든다. AI 대량 댓글은 여론 조작에도 충분히 악용될 수 있다. 특정 뉴스에 달린 수천 건의 댓글이 인간이 쓴 것인지, 누군가 돈을 주고 교묘하게 만든 댓글인지 지금으로선 구분해 낼 방법이 없다. 유튜브 광고에 등장하는 가상(假想) 의료인이나 전문가들은 '자기 말이 틀리면 전 재산을 주겠다'는 식으로 떠드는데, 가상 인물이 재산을 갖고 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광고 기법은 장차 사회에 가져올 파장을 상상하면 애교 수준이 불과하다. 첨단 해킹과 AI, 딥페이크가 결합하면 자칫 괴멸 수준의 정보사회 붕괴가 찾아올 수도 있다. 이처럼 두려운 예측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누구도 AI에 재갈을 물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두렵다. 벌써 AI가 지배하는 세상이 온 것일까.
2025-11-19 05:00:00
이재명 정부가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2035 NDC)를 2018년 대비 53~61% 감축 수준으로 정했다. 공청회 공개 안보다 상향됐는데, 산업계 반발이 상당할 전망이다. NDC는 파리협정에 따라 당사국들이 5년마다 스스로 정해 유엔에 제출하는 10년 단위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다. 국제사회에 공표(公表)하고 유엔에 제출하기 때문에 한 번 결정되면 수정할 수 없다. '새 NDC는 기존 NDC보다 높아야 한다'는 파리협정 원칙에 따라 장래에 감축 목표를 낮출 수도 없다.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전 지구적 노력에 당연히 동참해야 한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일본의 감축 목표도 60%로 높은 수준인데, 원전 재가동을 감축 수단으로 공식 인정했다. NDC 달성을 위해서는 산업구조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전기요금에 원가와 기후비용이 반영돼야 하고, 기업들은 천문학적 탄소 절감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충분한 정부 지원이 없다면 기업들이 대거 생산 설비를 해외로 옮겨갈 공산이 크다. 전기요금도 훨씬 비싸질 텐데 물가 인상과 선거 민심 탓에 실질 인상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정부는 구체적인 재생에너지 확대 방안을 내놨지만 입지가 부족한 태양광과 환경영향평가 문제에 봉착(逢着)한 풍력 모두 급속도로 늘리기 어렵다. 이런 전력 생산을 늘려도 포화 상태인 전력망이 더 문제다. 지금도 과잉생산 탓에 출력제한으로 버려지는 형국이다. 2040년까지 석탄화력발전 완전 퇴출(退出) 계획을 내놨지만 원전 확대에 대한 확답은 없다. 탈원전은 아니라지만 고리 2호기 계속운전 여부는 아직 확정 짓지 못했다. 새울 3·4호기(옛 신고리 5·6호기)는 부지 선정부터 건설까지 25년 걸렸다. 2038년을 목표로 정한 신규 대형 원전의 경우 부지 선정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대선 공약(公約)으로 에너지 비용 50% 인하를 내걸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인공지능(AI) 핵심 인프라인 데이터센터 건설 등에 대비하기 위해 100GW(기가와트)인 원전 설비용량을 2050년까지 400GW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며 한국과 일본의 대미 투자금 상당분을 쏟아부을 태세다. 한편 우리 정부가 2035 NDC에 맞춰 내놓은 추진 전략 중에는 전 국민 1인 1 나무 심기도 포함돼 있다.
2025-11-12 05:00:00
공상과학영화가 상상의 틀을 뛰쳐나온 지 3년이 흘렀다. 인간 말을 알아듣고 응답을 위해 검색·추론까지 가능한 챗GPT의 등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조금 어눌하고 얼토당토않은 거짓도 쏟아 내던 생성형 인공지능(AI)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을 거듭했고, 일상생활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민원인 상담이 많은 A씨는 AI 비서 덕을 톡톡히 본다. 서너 시간 분량의 상담 녹취(錄取)는 몇 초 만에 글로 바뀌고, 분량이 길면 핵심 내용만 추려서 뽑아 준다. 업무 효율이나 비용 절감에선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아쉬움도 크다. 민원인의 미묘한 감정이나 복잡한 이해관계는 AI가 읽어 낼 수 없다. 자료를 정리할 뿐 인간 개입(介入) 없이는 최선의 해결책을 도출할 수 없다. 신뢰성도 여전히 의문이다. 오류 보정을 위해 두세 가지 AI를 함께 쓰지만 늘 불안감이 남아 따로 검색 엔진을 돌린다. 당장 대안(代案)이 없어서 사용하고 있지만 특히 정보 유출은 걱정스럽다. 민원인의 민감한 정보가 AI 서버에서 어떻게 저장·가공될지 알 수 없어서다. 기대와 우려가 섞인 가운데 AI 시대는 선택의 여지 없이 열리고 말았다. 'AI 3대 강국' 도약을 목표로 내건 우리 정부는 AI 예산으로 올해보다 3배 이상 늘어난 10조1천억원을 편성했다. AI 경쟁에 나선 글로벌 대기업들은 빚까지 내 가며 공격적 투자를 이어 간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은 지난 4월 11조원에 이어 다시 36조원가량 채권을 발행한다. 메타, 오라클도 수십조원 규모 채권을 통해 자금 조달(調達)에 나섰다. 2028년까지 전 세계 AI 관련 인프라 투자액은 3조달러(약 4천300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AI는 인간도 바꾼다. 챗GPT로 예측한 2050년 인간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현재 생활 습관을 유지한다고 가정(假定)했을 때 인간은 복부 비만, 거북목, 뻣뻣한 관절, 퉁퉁 부은 발과 발목, 충혈된 눈, 탄력 잃은 피부로 묘사됐다. 100세 시대는커녕 평균수명도 못 채울 판이다. 챗GPT 등장 후 3년의 변화는 적응조차 힘들 만큼 빨랐고, 다가올 변화의 속도는 현기증이 날 정도다. 하지만 넋 놓고 AI 능력에 감탄할 때가 아니다. 거부할 수 없는 AI와의 공존 시대에서도 결국 최종 결정은 인간의 지혜가 내려야 한다.
2025-11-05 05:00:00
구독(購讀)은 책, 신문, 잡지 등 정기 간행물을 일정 기간 구입해 읽는다는 의미다. 현대사회에서 이런 구독은 극히 일부가 됐고 대부분 온라인 콘텐츠나 배송(配送)·관리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이용한다는 뜻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하나둘 신청한 구독 서비스가 가계에 큰 부담이 되는 지경이다. 1만원 안팎의 구독 서비스를 서너 개만 이용해도 매월 5만원 정도 지출한다. 굳이 필요할까 싶어 해지하려 해도 딱히 어떤 서비스를 끊을지 애매한 데다, 신청 때와 달리 스마트폰에서 해지(解止) 버튼을 찾기조차 힘들다. 올 초 성인 1천 명 대상의 한 조사에 따르면, 95%가량이 구독 서비스 이용 경험이 있고, 40%가량은 3~4개 서비스를 이용했다. 7개 이상 이용자도 10%에 육박했다. 월간 구독료로 10만원 이상 지출한다는 응답자는 4명 중 1명꼴이나 됐다. 방송통신위원회 자료 등에 따르면, 넷플릭스 사용자는 지난해 12월 기준 1천300만 명, 쿠팡 유료 회원은 1천500만 명, 배달의민족은 6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업체들이 가입자 통계를 공개하지 않아서 대부분 추정치다. 실제로는 더 많을 수 있다. 네이버 유료 회원도 1천만 명, 유튜브 유료 이용자도 7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구독료 부담이 크다 보니 요금이 싼 외국 계정(計定)으로 우회해 가입하거나 한 계정을 여러 명이 공동 구매하는 방식도 있지만 업체와의 숨바꼭질에서 늘 가입자는 지게 마련이다. 대안처럼 등장한 것이 광고형 요금제다. 애초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는 광고 없이 콘텐츠만 보는 대가로 돈을 받는데, 광고를 보는 대신 요금을 깎아 주는 방식이다. 가입자 폭증으로 OTT 광고 시장이 새로 뜬다. 돈 내고 광고 보는 세상이다. 인공지능(AI) 구독도 있다. 맛보기 무료 이용이 많지만 전문가용은 월 수십만원씩 부담해야 한다. 인건비보다 훨씬 싸다며 일반 사무직원을 뽑는 대신 4, 5가지 서비스를 이용하는 자영업자도 늘고 있다. 컴퓨터로 업무를 해결하려면 AI 구독은 필수로 자리 잡을 것이다. 수입의 상당 부분을 AI 업체에 상납(上納)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 신문, 우유 사절(謝絕)과 달리 미래 구독 서비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자기 의지로 끊어 낼 수 없는 상황을 흔히 종속 또는 속박이라고 말한다.
2025-10-29 05:00:00
은값 상승세가 무섭다.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금 가격이 연일 최고가를 깨자 은도 덩달아 뛴다. 상승률은 금을 압도(壓倒)한다. 금에 가려졌던 은의 전성시대가 열리는 듯하다. 물론 가격은 금이 훨씬 비싸다. 21일 한국금거래소 기준 순금 한 돈(3.75g) 시세는 92만원(살 때), 은 시세는 1만1천790원으로 금이 80배가량 비싸다. 지난 5월만 해도 국제 금과 은 가격 격차는 100배에 달했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128배까지 벌어졌다. 역사적 평균은 40~60배 정도였는데, 올 들어 은이 기록적 상승세를 보였음에도 아직 80배라는 말은 여전히 은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돼 있다는 의미다. 은의 독특한 물리적 성질 중 하나는 반사율(反射率)이다. 가시광선을 90% 이상 반사한다. 고가의 거울은 은으로 코팅돼 있다. '진실을 비추는 금속'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다. 다만 반사성은 오래가지 않는다. 공기 중 황화물에 닿으면 쉽사리 검게 변색된다. "거울이 흐려지면 거짓이 깃든다"는 서양 미신이 생겨난 배경이다. 은은 정화(淨化)의 금속이기도 하다. 은 이온은 세균 단백질을 분해해 번식을 억제한다. 중세 수도사들은 은잔에 물을 담아 '썩지 않는 물'이라 불렀고, 20세기 초까지 은은 항생제가 등장하기 전 가장 신뢰받는 살균제였다. NASA(미국 항공우주국)는 우주선 식수 정화장치에 은을 쓴다. 현대 산업에서 은은 더욱 필수적 존재가 됐다. 구리보다 전도율(傳導率)이 뛰어나지만 가격과 공급 문제로 제한된 곳에만 쓰인다. 태양광 패널, 반도체, 전기차, 스마트폰 카메라도 은이 있어야 완성된다. 국제은협회에 따르면 2024년 은의 산업용 수요 비중은 전체의 56%로, 10년 전보다 두 배가량 늘었다. 그런데 공급이 문제다. 은광 자체는 줄어들고, 대부분 은은 구리·납 광산의 부산물로 얻어진다. 2024년 세계 은 생산량은 2만5천500톤(t)인데 수요는 3만7천600t에 이른다. 은의 부활은 가격 상승이 아니라 기술적 전환의 신호다. 1GW 전력을 생산할 만한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려면 은 200t가량이 필요하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는 2030년까지 세계 태양광 설비가 3배 늘면, 은 수요는 지금의 2배가 된다고 내다봤다. 금은 쌓이지만, 은은 에너지와 함께 흐른다.
2025-10-22 05:00:00
[매일칼럼-김수용] 꿈을 박탈당한 20대, 나라의 미래도 사라진다
얼마 전 한국경제인협회는 '2014∼2024년 세대별 실질소득 추이 분석' 보고서를 내놨다. 최근 10년간 체감물가를 반영한 실질소득을 분석한 결과인데, 자못 충격적이면서 청년층의 고민과 세대 갈등, 불합리한 경제·사회적 구조 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듯해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20대 청년층의 실질소득 증가율이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낮았다는데, 일견(一見) 당연해 보인다. 고착화한 낮은 경제성장률과 일자리 부족, 치솟는 물가 등을 감안하면 실질소득 증가 자체가 놀라울 수도 있다. 그러나 연평균 1.9%에 불과한 20대 증가율에 비해 60대 이상은 3배 가까운 5.2%를 기록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은 나라이고,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구직시장에 뛰어든 60대 이상 노년층이 해마다 증가한다는데 이들의 소득 증가율은 단연 두드러진다. 경제개발 호황기를 거친 기성세대가 노년층에 편입되면서 이들의 자산이 증식(增殖)한 것도 원인 중 하나다. 부동산 폭등이 젊은이들에겐 좌절과 박탈감을 안겼고, 퇴직 세대들에겐 부의 상승을 가져왔다는 말이다. 경제적 여력이 바닥을 치는 상황인데 젊은이들의 사회적 부담은 갈수록 가중되고 있다. 인구 비율에서 20대는 70대 이상 노령층에도 추월당했다. 국가데이터처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20대 인구는 630만여 명으로 전년보다 약 20만 명 줄었다. 70대 이상 인구 654만여 명보다 적은데, 1925년 통계 집계 이후 처음이다. 50대 871만여 명, 40대 780만여 명, 60대 779만여 명 순으로 20대 인구가 성인 연령대 중 가장 적다. 제 목소리 내기도 힘든 처지다. 이들이 활발히 경제활동에 참여해 고소득을 올리고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료를 넉넉히 내야 선순환(善循環)이 이뤄질 텐데 현실은 반대다. 안정적 일자리는 갈수록 귀해진다. 젊음이 기회와 도전의 동의어이던 시대는 지났다. 인구가 줄어든 만큼 노동시장에서 20대 인력 구하기가 힘들어져야 하는데 청년들은 구직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지난 8월 20대 고용률은 60.5%로, 꾸준히 낮아지고, 20대 실업률은 5%로 3년 만에 최고치다. 대규모 공채는 사라졌고 경력직 수시 채용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일할 기회조차 없는데 경력을 쌓아야 한다. 금융위기나 코로나 팬데믹 당시만 해도 곤두박질쳤던 고용시장이 이내 회복돼 청년층 고용 한파(寒波)도 사라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졌다. 인공지능(AI)과 로봇이 일자리를 빼앗고, 일자리 창출은 거의 없다. 경제가 회복돼도 양질의 일자리가 대거 늘어날 것으로 보긴 어렵다. 통계 작성 이래 처음 50만 명을 넘긴 '쉬었음' 청년(15~29세)이 결국 장기 백수로 남아 경제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극히 일부지만 고수익 일자리를 찾아 캄보디아로 떠났다가 불법 감금과 고문을 경험한 청년들 사태가 구조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편하게 돈 벌려 했으니 인과응보(因果應報)라며 욕할 수 있지만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제2, 3의 캄보디아 사태가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 없다. 청년 문제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은 "장기간 누적된 경제·사회적 문제가 악화하면서 빚어진 구조적 위기"라고 했다. 한두 정책으로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일 텐데, 결국 한정된 파이를 어떻게 나누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불공정을 외치는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가 올바른 답을 내놔야 할 때다. 그래야 나라가 살 수 있다.
2025-10-21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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