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줄지어 은퇴하면서 노후 생활에 대비한 연금이 화두(話頭)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 '3중 연금' 구조를 갖추라고 조언하지만 늘 그렇듯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여생(餘生)을 책임질 줄 알았던 국민연금은 용돈 수준에 불과하다. 지난해 2월 기준 65세 이상 고령층의 국민연금 평균 수령액은 월 67만5천원이다. 국민연금연구원이 발표한 1인 적정 생활비가 192만원 정도이니, 용돈이 맞다. 개인연금까지 가입해 그나마 여윳돈을 받는 은퇴자는 전체의 5% 남짓이다. 퇴직연금도 골치 아프다. 쌓아 놓은 돈에 비해 수익률이 터무니없이 낮아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431조7천억원에 달한다. 1년 만에 49조3천억원이 늘었다. 퇴직연금 가입률이 53%임을 감안하면, 추가 가입 시 적립금은 연간 18조~19조원에 달해 2033년엔 940조원을 넘어선다. 그런데 지난해 말 기준 최근 10년간 평균 수익률은 2.3%에 불과하다. 연금에 넣어 두느니 평균 금리 3%대인 정기예금이 오히려 낫다는 말이다. 지극히 소극적인 퇴직연금 운용(運用) 구조 때문인데, 거의 대부분이 원리금을 보장해 주는 은행 예금이나 국공채 등에 묶여 있다. 새 정부 들어 퇴직연금 개혁 논의가 활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선 모든 사업장에 퇴직연금을 의무화하는 방안이다. 일시불 퇴직금은 사라지고 퇴직연금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수익률 제고(提高)를 위해 퇴직연금 기금화도 추진한다. 자본시장 활성화 정책이 나오면서 퇴직연금 기금을 누가 어떻게 굴릴지도 관심사다. 국회에 여러 법안이 올라와 있는데, 운용 주체를 두고 이해집단 사이에 첨예하게 맞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퇴직연금 운용에도 상식을 뛰어넘었다. 최근 퇴직연금 계좌의 가상화폐 투자를 법제화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내년 하반기부터 가상화폐 투자가 가능해진다는데, 증권사 분석에 따르면 2027년 1분기에 가상화폐 시장 유입 자금이 한화(韓貨)로 122조~616조원에 이른다. 트럼프의 가상화폐 사랑은 유명하지만 안정성을 담보해야 할 퇴직금을 두고 도박을 벌여도 괜찮을지는 의문이다. 예기치 못한 경제위기로 가상화폐 가격이 폭락하면 퇴직금도 공중분해된다. ksy@imaeil.com
2025-08-20 05:00:00
기후의 항상성(恒常性)이 깨지면서 이변이 속출하고 먼 미래를 다룬 영화의 소재로만 여겨졌던 극한의 기상 현상이 수시로 벌어지자 '기후 스트레스'까지 생겨났다. 농작물은 직격탄을 맞았다. 식량작물은 물론이고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과수 수확량도 급감했다. 급기야 선선한 강원도 산간에서 재배되는 고랭지 배추마저 사라질 판이다. 2050년대엔 고랭지 배추 재배 면적의 97%가 없어진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초콜릿 원재료인 카카오빈(코코아) 가격은 사상 최고로 치솟았다. 불과 3년 전에 비해 3배나 올랐는데 이상고온, 홍수, 병충해 탓에 작황이 크게 악화돼서다. 최근 인천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식량안보 장관회의 핵심 주제로 기후변화가 등장한 것은 당연하다. 얼마 전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흥미로운 논문이 실렸다. 4만1천 년 전 지구 자기장(磁氣場) 변화 탓에 지표면에 닿는 자외선과 우주 방사선이 폭증했는데, 1천 년이 흘러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다. 중위도 지역까지 쏟아진 자외선과 우주 방사선 때문에 여러 생물종이 멸종했다. 연구진은 현생 인류가 동굴에 살면서 황토를 피부에 발라 자외선을 차단한 것이 생존 원인 중 하나라고 본다. 시간이 흘러 지표면 생명체는 자외선 공포에서 벗어났다. 성층권에 있는 오존층이 막아 준 덕분이다. 그런데 지난 1985년 남극 상공에서 거대한 오존 구멍이 발견됐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다양한 노력 중에 빌 게이츠의 기후테크 지원이 눈에 띈다. 온실가스 감축 기술 개발 기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인데, 2015년 설립 후 35억달러(약 5조원) 이상을 투자했다. 전기로 비행이 가능한 하이브리드 항공기, 재생에너지를 열로 바꿔 저장하는 열 배터리, 물과 토양 사용을 99% 줄이고 세포를 배양해 면화(綿花)를 생산하는 기술 등이 있다. 발상의 전환은 미래를 바꾼다. 냉매제인 프레온가스를 금지한 덕분에 걱정스럽던 오존층이 상당 부분 회복됐고, 10년 뒤 완벽 복구가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늘 걸림돌이다. 기후변화에 맞설 마지막 보루(堡壘)인 파리기후협정에서 미국이 탈퇴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 결정한 일이다. ksy@imaeil.com
2025-08-13 05:00:00
8월 둘째 주 최대 전력 수요가 역대 최고치인 97.8GW(기가와트)까지 오를 전망이다. 지난해 8월 20일 97.1GW 기록을 1년 만에 갈아 치우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10GW가량 예비전력을 유지해 비상 상황이 없다면 블랙아웃(대정전) 가능성은 낮지만 이상고온이 지구촌을 덮치며 곳곳에서 전력 대란(大亂)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에선 지난달 4일 전국 전력 부하가 1천465GW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유럽에선 전력 수요가 전년 대비 10% 이상 급증하면서 대정전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스위스와 프랑스 원자력발전소는 냉각수용 강물 온도가 치솟으면서 일부 가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전력 부족 사태를 걱정하게 만드는 원인은 따로 있다. 바로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리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지난 4월 보고서에 따르면, 데이터센터 구동에 필요한 전력량이 오는 2030년까지 945TWh(테라와트시·94만5천GWh)로 지금보다 2배 증가할 전망이다. 2023년 기준 우리나라 연간 전력 소비량(557TWh)보다 훨씬 많다. 1999년 개봉한 영화 '매트릭스'에선 AI가 세상을 지배하고 인간은 전력 공급용 생체 배터리로 전락했다. 얼마 전 마크 저커버그가 밝혔듯 인간을 뛰어넘는 초지능 개발도 가시권이라는데, 얼토당토않은 상상이 현실이 될까 두렵다. 메타,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이른바 글로벌 빅테크들이 AI 사업용 전력을 충당(充當)하기 위해 원자력발전에 나선다. 심지어 아마존과 구글은 소형모듈원전(SMR) 건설을 추진한다. 중국은 티베트에 수력발전소 5기 건설에 착수했는데, 댐이 완성되면 연간 전력 생산량이 30만GWh에 달할 전망이다. 우리돈 약 232조원이 드는 지구상 최대 단일 프로젝트다. 우리 정부는 재생에너지 전기로 100% 가동되는 'RE100 산업단지'를 조성해 AI 데이터센터 등을 유치할 계획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산단 기업에 대한 '파격적 전기료 할인 혜택 검토'를 주문했다. 그런데 산업용 전기 판매가보다 재생에너지 생산비가 더 비싸고, 안정적 공급도 어렵다. 하나뿐인 지구를 위한 장기적 포석(布石)일 테지만 과연 사투(死鬪)에 가까운 AI 개발 경쟁 상황에 알맞은 정책인지는 의문이다.
2025-08-06 05:00:00
[매일칼럼-김수용] 대구 제2국가산단, 산업 대전환 디딤돌로
지난주 '대구 미래 스마트 기술 국가산업단지'(가칭 대구제2국가산단) 조성 사업이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통과했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2009년 이후 16년 만에 대구 미래 산업을 이끌 두 번째 국가산단을 품게 됐다. 인공지능(AI) 기반 미래 모빌리티·첨단 로봇을 중심으로 한 산업 대전환의 탄탄한 디딤돌을 갖게 된 셈이다. 오는 2030년까지 달성군 화원·옥포읍 일대 255만㎡ 규모로 조성될 제2국가산단에는 국비 1조8천억원이 투입된다. 지난해 12월 국토부는 대구제2국가산단이 기재부 예타 대상으로 선정됐다면서 심사 기간을 종전 8개월에서 4개월로 대폭 단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기대보다 통과까지 걸리는 시간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대구시 관계자도 언급했다시피 첫 시도 만에 예타를 통과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예타 결과에 따르면 제2국가산단 조성 사업의 경제성(B/C)은 1.05에 달했다. 산단 사업에서 B/C 1.0 이상은 보기 드문 성과로, 11개 국가산단 후보지 중 가장 빠른 예타 통과 사례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정책 효과와 지역균형발전 종합 평가도 0.524점을 받아 사업 추진 타당성이 높다고 인정받았다. 정치적 배려나 시혜(施惠)가 아닌 정정당당한 경쟁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 못 할 우위를 선점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鼓舞的)이다. 앞서 대구시는 제2국가산단이 조성되면 7조4천387억원의 직접 투자와 18조6천288억원의 지역 생산유발효과, 8만2천952명의 직간접 고용유발효과 등 막대한 경제적 파급효과가 기대된다고 했다. 예타 과정에서 사업 용지 총면적은 조금 줄었지만 산업용지는 오히려 10만㎡ 늘어나 기업 수요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게 됐다. 경제성 점수에서 알 수 있듯이 제2국가산단은 탁월(卓越)한 입지와 교통·교육·주거 인프라를 갖췄다. 산단 밑그림만 잘 그린다면 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대구시는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스마트 기술 허브로 조성하기 위해 기존 제조 거점인 성서-달성-제1국가산단과 연계한 신산업 벨트 구축을 추진한다. AI, 로보틱스 등 신산업 전환의 구심점이 되려면 관련 기업 유치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법인세·취득세 면제, 투자 보조금 확대 지원 등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는 '기회발전특구' 추가 지정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앞서 지난 1990년대 위천국가산업단지 조성을 추진하다가 고배(苦杯)를 마신 뒤 한동안 국가산단을 유치하지 못한 대구시는 혁신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 꼴찌라는 꼬리표가 붙은 지 30년이 넘었다. 미래 비전이 없는 도시는 사람이 떠난다. 인재가 유출되니 기업들도 이전하고, 일자리가 없어져 젊은이가 대구를 등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2009년 제1국가산단 유치 이후 지난 2023년까지 입주한 기업은 275곳에 이르지만 지난해 이들의 매출액은 4조2천억원대에 불과하다. 지역 전체 산단 매출 중 차지하는 비중은 11%대로 떨어졌다. 국가산단은 국책(國策) 사업과 대기업 유치, 정책 지원, 첨단 산업 육성 등에서 매우 유리하다. 그러나 산단 조성이 곧 도시 발전은 아니다. 대기업과 앵커 기업 등 알맹이를 제대로 채워 넣어야 도시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역량을 총동원해 제조업 시대를 선도한 산업도시 대구의 명성을 되찾고 기회와 꿈의 도시로 부상할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대구 미래 100년을 이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2025-08-05 05:00:00
4대 금융그룹(KB·신한·하나·우리)의 올해 상반기 순이익이 10조3천억여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경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는데 금융권 호황(好況)은 여전했다. 지난해 하반기 기준금리 인하로 수익성 악화를 예상했지만 4대 금융그룹은 '이자 놀이'로 21조원 넘게 벌었다. 비이자 이익도 7조2천억여원으로, 지난해 상반기보다 5천억원가량 늘었다. 금리·환율이 떨어져 유가증권·외환·파생상품 이익이 급증했고, 은행 퇴직연금·방카슈랑스·증권 수수료도 짭짤했다. 예금·대출 금리의 차이, 즉 예대마진이 주 수입원이지만 은행들은 밖에서 볼 때 가만히 앉아 돈을 벌기도 한다. 은행마다 용어가 다르지만 '핵심저금리' 예금이 여기에 해당된다. 핵심이 붙었듯이 은행들마다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저금리에 걸맞게 시중금리가 아무리 올라도 이자 지급액은 쥐꼬리보다 적다. 이런 돈이 상반기에 6조원 넘게 불었다는데, 공공기관이 사업 집행을 앞두고 넣어둔 자금과 개인 급여통장 잔액이다. 은행들의 숨겨 둔 꿀단지인 까닭은 연 0.1%에 불과한 급여통장 이자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은행들은 언제든 돈을 뺄 수 있는 '요구불(要求拂) 예금'이어서 수익 내기가 어렵다거나 입출금·이체 등 편의를 제공한다는 등의 볼멘소리를 한다. 그럼에도 은행마다 지역 상생, 기부 등의 이름을 내걸고 이런 통장 유치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안정된 수익이 보장돼서다. 이재명 대통령은 얼마 전 금융기관을 향해 "손쉬운 주택담보대출 같은 이자 놀이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투자 확대에도 신경 써 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5대 은행(KB·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중소기업대출 잔액은 664조7천억여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2조5천억원 늘었다. 같은 기간 주택담보대출은 24조원 넘게 불어났다. 대통령의 강한 발언에 놀란 금융권은 화들짝 놀라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정부가 구상 중인 '100조 국민 펀드' 참여 가능성이 높아졌다. 물론 은행만 탓할 일은 아니다. 부동산 과열이 은행 탓은 아닌 데다 금융비용이 부담스러운 기업들에 대출을 떠안길 수도 없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적으로 경험했듯이 경제가 흔들리면 은행도 버틸 수 없다. 미증유(未曾有)의 위기가 닥치고 있다. 금융권이 내놓을 공생의 묘책을 기대해 본다. ksy@imaeil.com
2025-07-29 20:18:10
음속(音速)보다 빠른 항공기는 꽤 오래전에 등장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초음속 전투기가 제작됐고, 1962년엔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손잡고 초음속 항공기 개발에 나섰다. 1969년 11월 마하 2, 즉 음속의 2배 비행에 성공했고, 1976년 세계 최초로 상업 운항에도 나섰다. 종전 기록을 모조리 갈아 치운 역사적 항공기의 이름은 바로 '콩코드'다. 안타깝게도 콩코드의 역사는 길지 않았다. 초음속 돌파 때 발생하는 엄청난 굉음(轟音)과 좌석이 매우 좁은데도 다른 항공편 이코노미의 15배에 이르는 요금이 걸림돌이었다. 결정타는 2000년 7월 25일 파리 샤를드골 공항을 출발하던 콩코드가 이륙 중 폭발해 탑승객 109명 전원이 숨진 사고였다. 콩코드 결함은 아니었고, 앞서 이륙한 비행기가 활주로에 떨어뜨린 금속조각이 원인이었다. 2003년을 끝으로 콩코드는 박물관 신세를 지게 됐다. 20년 넘게 잠잠하던 초음속 항공기 시장이 들썩인다. 미항공우주국(NASA)과 록히드 마틴은 공동 개발하는 초음속 항공기 X-59의 첫 시험비행을 앞두고 마지막 활주(滑走) 테스트에 나섰다고 지난 10일 밝혔다. 마하 1.4(시속 1천489㎞)로 비행한다는데, 프로젝트명 '조용한 초음속 기술'에 걸맞게 소음을 획기적으로 줄였을지가 관건이다. 지난 1월엔 미국 초음속기 개발업체 붐 슈퍼소닉이 시험 제작기 XB-1의 12차 시험비행에서 처음 음속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민간업체로는 최초다. 2030년까지 마하 1.7(시속 2천80㎞) 속도의 60~80석 규모 여객기 운항에 나설 예정이다. 고비용, 저효율의 덫에 걸려 한 세대 가까이 진전이 없던 항공기 산업에 새 장이 열리고 있다. 반나절이면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시대가 온다. 항공 산업뿐 아니라 여행과 무역에도 전기(轉機)가 마련되는 셈이다. 기술적 진보만이 아니라 경제성과 환경 파괴 논란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2030년대 초음속 항공기가 창조할 지구촌의 변신은 고속열차가 이뤄 낸 변화에 비할 바가 아니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몫이다. 차세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산업은 초음속 항공기일 수도 있다. 터무니없다고 비아냥거릴 일이 아니다. 50년 전 자동차, 조선, 반도체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어느 누가 장담했던가. ksy@imaeil.com
2025-07-22 19:57:26
중년층 이상이 기억하는 학창 시절 가정환경 조사는 얼마나 잘 사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집에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가 있느냐는 물음에는 거짓말이지만 기죽기 싫어서 쭈뼛쭈뼛 손을 드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자동차 있는 집, 손 들어 보라"면 눈치 볼 것도 없이 조용했다. 1988년 올림픽을 기점으로 보급이 급증하기 전까지 자동차는 부의 상징이었다. 물론 지금도 최고급 수입차는 부유층의 전유물(專有物)로 인식되고 있지만 자동차 자체는 가전제품처럼 대수롭지 않은 시대가 됐다. 특히 20, 30대의 자동차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다. 올해 상반기 이들의 신차 등록 점유율이 10년 만에 최저로 떨어졌다. 10년 전 신차 등록 대수(자가용 기준) 중 20, 30대의 점유율이 35%에 달했으나 올해는 25%로 떨어졌다. 이에 비해 60, 70대 점유율은 12%대에서 약 23%까지 높아졌다. 20, 30대는 더 이상 차를 필수 소유품으로 여기지 않는다. 신차 가격은 갈수록 비싸지는데 굳이 세금과 유지비까지 떠안으며 구매할 필요를 못 느낀다. 차량 공유(共有)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싼값에 빌려 탈 수 있어서다. 이런 추세는 꽤 오래됐지만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릴 때 반전(反轉)도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바이러스 공포 탓에 대중교통을 기피하면서 2020년엔 2030세대의 신차 구매가 반짝 증가했다. 2015년 이후 꾸준히 감소세였는데 갑자기 20, 30대 신차 구매가 전년 대비 15~18% 늘어난 것이다. 요즘은 차량도 구독(購讀)하는 시대다. 월 단위로 빌리고, 보험·세금·정비비와 보증금 부담 없이 새 차를 이용한다. 한 달에 두 번까지 차를 바꿀 수 있다. 글로벌 조사업체에 따르면, 세계 자동차 구독 시장은 지난해 50억달러(약 7조원)에 달했다. 2032년까지 매년 평균 35% 성장한다는 전망도 나왔다. 국토교통부 통계를 보면, 지난해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는 2천600만 대를 넘어섰고, 올해 5월 기준 약 2천638만 대에 이른다. 인구 1.94명당 차량 1대를 보유한 셈이다. 소유에서 공유와 구독의 시대가 되면 이런 성장세가 지속될 수 있을까. 혹자는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떠받드는 자본주의의 종말까지 예언하지만 공유와 구독이 인간의 물욕(物慾)을 대체할지는 의문이다. ksy@imaeil.com
2025-07-15 20:16:31
40년 전 한 신문에 '주유소 부족' 기사가 실렸다. 자동차는 매년 급증하는데 주유소는 허가제에 묶여 제자리라는 주제다. 2~3㎞ 떨어진 주유소를 찾아 헤매고, 신흥 개발 지역엔 주유소가 아예 없어 운전자들이 기름이 떨어질까 봐 불안해한다는 사연도 소개했다. 빌딩 숲을 이룬 여의도에 주유소가 2곳뿐이라는 내용은 믿기 힘들 정도다. 당시 주유소 신설은 허가제였다. 특히 서울시는 1976년 이후 주유소 신설을 억제했다고 한다. 민원이 빗발치자 서울시도 당시 동력자원부에 도심 지역 신규 허가와 주유소 간 거리 제한 완화 등을 건의했는데,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상황은 전국적으로 비슷했다. 주유소 사장은 지역 유지(有志)였다. 현금을 자루에 담아 가져가고, 하루가 멀다고 땅을 사고 건물을 지었다는 입소문이 파다했다. 학교 육성회장도 주유소 사장 몫이었다. 10년쯤 뒤 세상이 바뀌었다. 주유소는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었고, 거리 제한도 사라졌다. 우후죽순처럼 주유소가 생겨났다. 1980년 1천465개이던 주유소가 2010년 1만3천여 개에 달했다. 출혈경쟁의 신호탄이 울렸다. 기름 넣을 때 도장을 찍어 주고 개수에 따라 생수, 라면, 쌀을 줬다. 수백만원짜리 경품(景品)도 내걸렸다. 수익성이 떨어지고 인건비조차 부담스러워지자 1992년 셀프 주유소가 처음 등장했다. 급기야 주유업계는 2010년 정부에 주유소도 당시 택시처럼 총량제로 관리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도시 규모와 자동차 등록 대수에 비례해 적정 규모의 주유소만 유지하게 해 달라는 얘기인데, 쉽게 말하자면 다시 허가제 시절로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경쟁에서 밀려난 주유소는 하나둘 문을 닫았다. 15년간 2천500곳 정도가 사라지면서 올해 6월 말 기준 1만528곳이 됐다. 감소세는 갈수록 가파르다. 최근 6년 반 동안만 1천 곳 가까이 문을 닫았다. 1991년 18%에 육박하던 영업이익률은 2023년 1.7%로 급전직하(急轉直下)했다. 알뜰 주유소 확산에다 전기·수소·하이브리드 등 친환경차 비율도 10%를 넘기면서 수익성은 갈수록 더 떨어질 전망이다. 토양조사와 지하 탱크 제거 등 폐업 비용이 1억원에 달해 흉물로 남겨지는 경우도 많다. 한 세대쯤 지나면 거리에 넘쳐 나던 주유소는 기록영화처럼 빛바랜 이미지로 남을 듯하다. ksy@imaeil.com
2025-07-08 20:11:48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다. 도입은 필요한데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지가 핵심이다. 스테이블코인은 가상화폐다. 변동성이 심한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암호화폐와 달리 특정 자산에 가치를 고정(固定)하는데, 주로 미국 달러화나 유로화 등에 교환가치가 고정돼 있다. 가상자산 시장의 주요 거래 수단으로 등장해 지난달 기준 10가지 주요 스테이블코인의 세계 시가총액만 2천300억달러를 넘어섰다. 지난 6·3 조기 대선을 앞두고 당시 이재명 후보는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원화 기반 한국형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암호화폐 거래소 등에서 달러형 스테이블코인이 주로 유통되면 원화 기반 결제 축소로 외환·통화정책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다. 미국에선 스테이블코인 규제 법안(지니어스 법안)이 상원을 통과했는데, 발행과 담보 요건 강화 등을 주로 담고 있지만 핵심은 스테이블코인을 정당한 금융 수단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중국 관영 매체도 "스테이블코인 파도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면서 당국의 신속 대응을 촉구했다. 우리나라에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요건만 충족하면 은행뿐 아니라 비은행 회사도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선제적 대응에 나선 은행권과 핀테크, 게임업계 등은 앞다퉈 관련 상표권을 출원하고 있다. 폭등세를 보이던 일부 관련 주식들은 과열 조짐을 보여 폭락해 거래정지되는 등 혼조세(混潮勢)다. 한국은행은 규제 수준이 높은 은행권부터 발행을 허용한 뒤 비은행으로 확대하자는 입장이다. 최근 한국은행과 국제결제은행(BIS)은 무분별하고 경쟁적인 스테이블코인 확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가치 고정자산(달러화·원화)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대규모 인출(引出) 사태가 벌어질 수 있고, 기술적 오류 발생과 범죄 악용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확대되면 통화·금융정책 영향력이 침해될 수도 있다. BIS도 통화 주권 약화 가능성, 신흥국 자본 유출 위험 등을 경고했다. 스테이블코인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통화다. '안정된(stable)'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아직 불안정한 모습이다. 법적·제도적 장치가 갖춰져야 이름값을 할 듯하다. ksy@imaeil.com
2025-07-01 20:21:36
[매일칼럼-김수용] 구조개혁 없이는 잠재성장률 3% 회복 어렵다
숫자로 드러나는 경제 동향은 국민들이 체감하는 경기와는 사뭇 동떨어진 느낌이 있다. 물가상승률이나 실업률 등이 그렇다. 하지만 경제지표(經濟指標)가 장바구니 경제와 늘 딴판인 것은 아니다. 현실이 지표에 반영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따름이다. 그런데 한 국가의 경제성장률은 조금 양상이 다르다.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팍팍해도 나라는 고속 성장할 수 있다.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 팬데믹 정도만 아니라면 경제성장률이 주춤해도 서민들 생활은 별 어려움 없이 흘러가기도 한다. 그런데 내수 부진과 자영업자 줄폐업, 제조업·건설업 위기가 하루가 멀게 뉴스에 등장하면서 장기 저성장 시대가 도래했다는 암울한 소식이 들려온다. 국내외 기관들은 앞다퉈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했고, 급기야 0%대 전망까지 나왔다. '나라 망하겠다'는 푸념이 술자리 안주로 등장했다. 정치적 불확실성 와중에 미국발 관세 장벽, 세계 곳곳에서 발발한 전쟁까지 악재들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그런데 새 정부 들어 미세한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 당선 후 기대 심리와 함께 글로벌 지정학적 위기도 차츰 해소되는 분위기다. 외국 주요 투자은행(IB)들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다시 높이고 있다. 대규모 추가경정예산 편성이나 미·중 무역 갈등 완화 등에 따른 기대감이다. 중국의 경기 회복에 따른 대중국 수출 증가 전망과 2차 추경에 따른 경기 부양 효과 등도 반영했다. 그러나 상황이 반전된 것은 아니다. 올해 0%대 성장률 전망도 지배적이다. 한 나라의 경제 체력을 의미하는 잠재성장률은 내년에 충격적인 1%대로 떨어진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외환위기가 벌어진 1997년 6.74%이던 잠재성장률은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 2018년부터 2%대로 떨어졌다. 이재명 정부가 잠재성장률 3% 달성을 목표로 '성장 기조(成長基調)'의 경제정책 방향을 제시한 것은 더 이상 성장률 하락을 방치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이 첫 국회 시정연설에서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겠다"며 국익 중심의 실용주의 국정 기조를 천명(闡明)하면서 "검불을 걷어 내야 씨를 뿌릴 수 있다"며 구조개혁의 고통을 감내(堪耐)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여기에 핵심이 담겨 있다. 자본시장 개혁을 통한 코스피 지수 5,000 시대, 인공지능·반도체·재생에너지 등 미래 산업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로 성장동력 회복을 꾀하겠지만 구조개혁이 없이는 잠재성장률 3% 회복도 불가능하다. 추경을 통한 유동성 공급도 저출생, 고령화, 신성장 동력 부재라는 해묵은 숙제를 풀지 않고는 그저 임시방편(臨時方便)에 지나지 않는다. 잠재성장률 3%가 무너졌던 2017년은 고령인구가 유소년인구를 앞지른, 즉 생산연령인구가 감소세로 접어든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은행은 '일본 경제로부터 되새겨 볼 교훈'이란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일본의 과거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 우리 경제 수준에 비해 노후화한 경제 구조를 혁신·창조적 파괴해야 경제가 활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새판을 짜야 한다는 말이다. 자본시장 변화, 규제 철폐, 노사 관계 재정립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변화가 극심할수록 저항은 거세진다. 여당은 지지율 하락의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선거를 겨냥한 포퓰리즘 정책은 나라를 망치게 한다. 잃어버린 30년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으려면 뼈를 깎는 고통이 불가피하다.
2025-06-30 20:11:36
역사적으로 해협은 흐름과 막힘, 통로이자 충돌의 상징이다. 대양을 이어 주는 좁은 바닷길이면서 동시에 맞닿은 대륙 문명이 충돌하는 곳이었다. 해협(strait)은 '좁은, 제한된'이란 뜻의 라틴어 'strictus'에서 유래(由來)했는데, 지형적 의미뿐 아니라 지정학적 갈등까지 내포(內包)한 느낌이다.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가려면 유럽의 스페인 남부와 아프리카의 모로코 북부 사이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야 한다. 가장 좁은 곳은 폭이 14㎞에 불과해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주요 통로다. 지중해를 지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면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 사이의 홍해에 이르는데, 여기서 인도양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예멘, 소말리아 등과 접한 바브엘만데브 해협이다. 수에즈 운하가 뚫린 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붐비는 항로가 됐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벌어진 뒤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叛軍)이 아덴만으로 향하는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봉쇄하겠다면서 홍해를 오가는 배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원유와 LNG를 싣고 페르시아만을 떠난 배가 아라비아해와 인도양에 닿으려면, 세계의 이목(耳目)이 집중되고 있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미국 공습 직후 이란 의회는 해협 봉쇄를 의결했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로 갈등과 긴장의 무대였고, 해협을 막겠다는 위협도 있었지만 전면 봉쇄를 공식 선언한 것은 처음이다. 현지시간 23일 이란과 이스라엘이 휴전에 합의함에 따라 해협 봉쇄 위기는 넘겼지만 돌발 교전이 발생하면 합의가 무산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호르무즈 해협을 무사히 통과해 인도양을 가로지른 뒤에 동아시아까지 가려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해협 한 곳을 더 거쳐야 한다. 바로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사이의 길이 1천㎞ 남짓한 말라카 해협이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통로다. 폭이 좁고 수심도 극도로 얕은 이 해협을 전 세계 해상 운송량의 20%가량이 통과한다. 이처럼 세계의 주요 해협들은 각국의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각축장(角逐場)이다. 바다의 지름길인 해협이 막히면 세계 경제는 동맥경화에 걸리게 된다. 해협 봉쇄가 단순한 위협을 넘어 공멸(共滅)로 이끄는 시한폭탄인 이유다. ksy@imaeil.com
2025-06-24 20:00:44
퇴직연금 적립금이 400조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말 기준 432조원에 육박하는데, 5년 만에 2배가량 불었다. 일시불(一時拂) 수령보다 안정적 노후를 위해 연금처럼 받도록 만든 것이 퇴직연금이다. 회사는 금융기관에 퇴직금을 적립하는데 적립금을 회사가 직접 운용하는 확정급여형(DB), 근로자가 운용하는 확정기여형(DC)으로 나뉜다. 개인이 별도로 가입하는 퇴직연금, 즉 개인형 IRP도 있다. 모두 합친 적립금이 432조원이며, 절반가량인 약 215조원은 받을 연금액이 정해진 확정급여형이다. 새 정부 들어 퇴직연금이 화두로 등장했는데, 이유는 수익률이 너무 낮아서다. 최근 6년간 명목상 평균 수익률이 2.8%에 그친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수익이 없다고 봐도 무방(無妨)하다. 최근 가파른 물가 상승세를 감안하면 오히려 마이너스일 가능성도 높다. 국민연금의 6년 평균 수익률은 8.69%에 이른다. 퇴직연금은 거의 대부분 원리금이 보장되는 상품에 묶여 있지만 국민연금은 주식·채권·부동산 등에 분산 투자해서다. 따라서 퇴직연금도 국민연금처럼 기금화(基金化)하자는 주장이 정·관계와 학계에서 나온 것이다. 물가 인상도 감안하고 노후에 안정적 소득도 보장하려면 원금을 넉넉히 불려야 하는데, 지금처럼 개별로 운용해선 수익은커녕 금융사 수수료를 떼면 손해라는 이유다. 퇴직연금 운용 주체를 국민연금공단, 근로복지공단 등 누구로 정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여당 의원들은 여러 퇴직급여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금융투자업계는 반대하고 있다. 기금화가 고수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며 기본투자 운용 방안(디폴트 옵션)부터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퇴직금 특성상 거의 대부분 초저위험 자산에 투자하는데, 이를 보다 공격적 투자가 가능하도록 바꿀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울러 금융투자업계와 국민연금공단의 경쟁도 걱정스럽고, 지금껏 힘들게 유치한 가입자들이 이탈할까 봐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고용노동부는 6월까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논의를 진행한 뒤 하반기에 정부 개정안을 내놓을 방침이다. 안정과 경쟁, 원금 보장과 수익 사이의 절묘(絕妙)한 합의점을 찾는 게 핵심이다. 첨언(添言)하자면 지금껏 퇴직연금 적립금이 2%대 수익률에 그쳤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ksy@imaeil.com
2025-06-17 19:49:31
프랑스 연금자문위원회가 최근 노동자 퇴직 연령을 2070년까지 66.5세로 연장할 것을 권고(勸告)했다. 현재 화폐가치로 따져 볼 때 2030년 연금 적자 규모가 10조원을 훌쩍 넘어서기 때문이다. 자문위는 연금 축소와 연금보험료 인상보다 단계적 퇴직 연령 연장이 효과적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2023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정년을 62세에서 2030년 64세로 늦췄는데, 노조와 야당은 도리어 정년 축소를 외친다. 지난달 덴마크 의회는 은퇴 연령을 67세에서 2040년까지 70세로 연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덴마크는 기대수명과 은퇴 연령을 자동 연장하고 5년마다 조정한다. 현재 기대수명은 81.7세인데, 1971년생은 70세가 은퇴 연령이다. 연금 수령 나이가 늦춰지자 노동자들은 반발하고, 은퇴 연령 자동 연장을 재검토하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우리나라는 법정(法定) 정년이 60세다. 1991년 고령자고용법 제정 때만 해도 정년 60세 이상은 권고 정도로 그쳤는데, 2016년부터 정년 60세가 단계적으로 의무화됐다. 일본도 1994년 '60세 이상 정년 의무화'가 실시됐고, 2012년엔 희망자에 한해 65세 의무 고용을 법제화했다. 심지어 2020년엔 65세 이상도 희망하면 70세까지 일하도록 사용자 노력을 의무화했다. 일본과 결이 다르게 유럽 국가들은 연금 운용 때문에 정년을 연장하려고 한다. 연금 수령 나이와 정년을 맞추는 것이다. 지난 3월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늘려야 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를 받은 고용노동부가 이달 중 이행 계획을 제출한다. 노인 빈곤, 국민연금 수급 연령과 정년의 간극(間隙), 육체노동의 가동연한을 65세까지로 본 대법원 판결 등을 감안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한국은행은 고령화로 통화정책마저 기능을 못 할 수 있다고 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정년 연장이 국내총생산(GDP)과 재정 성과를 높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누구도 정년 연장을 반기지 않는다. 정년이 늘어날수록 연금도 더 늦게 받는다. 기업들은 생산성, 임금 부담, 청년 고용 문제, 인사 적체(積滯) 등을 이유로 난감해한다. 인공지능과 로봇에 일자리를 뺏길 위기에 내몰린 청년들도 마뜩잖은 반응이다. 무엇보다 정년 연장은 해결 과정일 뿐 궁극적 해답이 될 수 없다. ksy@imaeil.com
2025-06-10 19:54:43
영화 '미션 임파서블' 최신 시리즈엔 보이지 않는 악당이 등장한다. 엔티티(The Entity: 독립체)라는 이름의 인간 지능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공지능이다. 디지털 세계를 통제·조작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휘두른다. 인터넷 연결과 디지털 기기 없이는 일상이 불가능한 현대인의 약점을 교묘히 파고든다. 해킹을 통해 정보를 빼내는 수준을 넘어 인간 행동 패턴을 분석해 놀라운 정확도로 미래를 예측하기도 한다. 가짜 음성과 영상을 만들고, 존재하지도 않는 적의 공격을 만들어 전쟁 위기 상황까지 꾸며낸다. 등장인물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인식에, 자체 학습하는, 진실을 좀먹는 디지털 기생충'이다. 기생충에 현혹돼선 곤란하다. 엔티티는 신(神)에 가까운 능력을 갖췄다. 얼마 전 구글 인공지능인 딥마인드의 최고경영자 데미스 허사비스는 AI 탓에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보다 AI 기술이 나쁜 세력에 넘어가거나 정교하고 자율적인 AI를 통제 못 하는 상황이 더 위험하다고 했다. AI의 '자기보존(self-preservation)' 행동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AI가 생명체처럼 자기 존재나 기능을 지키려는 경향을 말하는데, 인간 행동을 모방하면서 생존 본능까지 학습했기 때문이다.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복제(自己複製)를 시도하며, 심지어 인간을 협박하기도 한다. 챗GPT의 AI 모델은 수학 문제 풀이 실험 중 작동 종료를 막기 위해 컴퓨터 코드를 조작했다. 앤트로픽의 AI 모델은 자신을 다른 모델로 대체하려는 회사 경영진에게 교체하지 말아 달라는 이메일을 보내고, 모델 개발자의 불륜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불륜 정보는 사용자가 입력한 허위 내용이었다. AI의 활용도가 군사, 보안 등으로 확대되면서 인간 통제를 벗어난 AI는 국가 안보나 생명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가령 기후변화를 막아 달라는 지시를 받은 AI가 목적 달성을 위해 인간을 제거할 수도 있다. 영생(永生)을 꿈꾸는 초지능의 탄생은 상상조차 어려운 위험이다. 이에 대비해 인간을 모방하지 않고 다른 AI 모델의 위험 행동을 예측·방지하는 새로운 '과학자 AI' 모델을 개발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인간을 모방하지 않아야 위험하지 않다는 뜻일 텐데, 결국 가장 위험한 존재는 인간이라는 말로 들린다. ksy@imaeil.com
2025-06-05 20:10:41
현금 사용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줄었다. 신용카드조차 쓸 일이 없다. 휴대폰 모바일카드로 거의 모든 결제를 할 수 있어서다. 축의금, 조의금을 전달할 때만 아주 가끔 현금지급기(ATM)를 이용한다. 아예 지갑을 갖고 다니지 않는 사람도 많다. 시장에선 디지털온누리카드를 이용하고, 노점상 거래에는 계좌이체를 한다. 자녀들은 명절에 받는 용돈을 부모에게 돌려준 뒤 디지털페이로 송금해 달라고 요구한다. 현금 쓸 일이 없을 뿐 아니라 현금을 계좌에 넣으려고 은행이나 ATM 기기를 찾기도 번거로워서다. 지난 1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지급수단(支給手段)에 대한 설문조사(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3천500여 명 대상) 결과에 따르면, 건수 기준 현금 이용은 15.9%에 그쳤다. 신용카드가 절반가량 차지했고, 체크카드와 모바일카드는 30%에 육박했다. 2013년 40%가 넘던 현금 비중은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매우 낮다. 2023년 기준 오프라인 매장에서 현금 사용액을 비교했더니 우리나라는 10%로 주요 40개 나라 중 29위에 그쳤다. 일본은 40%를 웃돌았다. '현금 없는 매장'도 증가세다. 직원 없이 키오스크만 설치해 둔 매장도 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현금(거스름돈) 없는 버스' 도입도 늘어난다. ATM 기기는 갈수록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ATM 기기는 2020년 8만7천773대에서 2023년 8만907대로 줄었다. 중국에선 5년 만에 ATM 기기 4대 중 1대꼴로 사라졌다. 2019년 109만여 대에서 지난해 80만여 대로 줄었다고 한다. 중국 여행객들은 아예 환전이 필요 없을 정도라고 입을 모은다. 우리나라보다 디지털 결제 비중이 훨씬 높아서다. 기존 암호화폐와 달리 달러 등 법정화폐나 금 등에 가치가 고정돼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가상자산인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 법정통화(法定通貨)를 대체한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외국 스테이블코인의 국내 도입 시 통화 주권 침해, 통화정책과 금융시장 불안정, 자금 세탁 등의 문제점을 우려해 한국은행도 디지털화폐 연구를 진행 중이다. 그런데 문득 의구심이 든다. 과연 디지털화폐는 현금보다 안전할까. 거대 통신사도 해킹에 속수무책인데 은행이라고 괜찮을까. ksy@imaeil.com
2025-05-27 19:54:13
[매일칼럼-김수용] 흔들리는 달러, 환율 협상 신중히 접근해야
미국발 관세 전쟁으로 금융시장 변동성이 커지는 가운데 환율마저 출렁이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하루에도 수십원씩 오르내릴 정도다. 미국은 무역 불균형 해소를 천명하며 관세와 환율이라는 2가지 공략법을 택했다. 기축통화(基軸通貨) 지위를 유지하면서 미국에 유리하도록 달러화 절하(切下), 즉 대미 무역 흑자국 화폐의 평가절상을 꾀하고 있다. 주요 타깃은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인데, 모두 지난해 기준 미국의 무역 적자 상위 10개 국가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미국의 원화 절상 요구 보도가 나오면서 원·달러 환율은 급락했다. 기획재정부가 "환율 협의가 진행 중이나 구체적으로 정해진 내용은 없다"고 해명했지만 시장 움직임을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원화뿐 아니라 주요 아시아 통화를 둘러싼 미국과의 갈등과 협상 소식이 들릴 때마다 환율은 들썩일 것이다. 안전 자산의 대명사인 미국과 일본 국채를 동시에 투매(投賣)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2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가 5%를 넘겼고, 시장 금리의 벤치마크 역할을 하는 10년 국채 금리도 4.6%로 급등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미국 신용등급을 한 단계 강등한 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규모 감세안을 밀어붙일 뜻을 강하게 밝히면서다. 트럼프는 법인 최고 세율과 개인 소득세율 인하, 소득공제 및 자녀세액공제 확대 등을 밀어붙이고 있다. 감세안은 지난 22일(현지시간) 미 연방하원 본회의에서 찬성 215표, 반대 214표로 간신히 통과됐다. 상원까지 통과해 최종 확정되면 미국의 재정적자는 2024년 연 1조7천억달러에서 2035년 2조5천억달러 이상 증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재정적자가 커지면 미국 국채는 더 불안해진다. 중국이 지난 2013년 11월 1조3천160억달러에 달했던 미국 국채 보유액을 올해 3월 7천653억달러까지 줄인 이유이기도 하다. 상호 관세는 미국 국채에 악재다. 미국 국채를 사들일 돈은 미국과의 무역에서 벌어들인 달러다. 중국은 미국에서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여 지금껏 미국 국채를 매입해 왔고, 양국은 무역적자와 대미 투자의 선순환(善循環) 구조를 누려 왔다. 관세 전쟁이 격화돼 무역흑자가 줄어들면 미국 국채에 대한 매력은 더 떨어진다. 이런 혼란 속에 한미 환율 협상이 진행 중이다. 환율은 관세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작위적(作爲的)인 환율 조정은 국가 경제를 뒤흔든다. 협상의 구체적 내용을 흘리지 않는 까닭도 의도치 않은 결과를 우려해서다. 시장은 충분한 합의와 협상을 통한 일정 부분의 환율 목표치 조정은 납득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불거지는 불협화음 탓에 변동성이 커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예측 가능한 변화는 용납하지만 예기치 못한 급등락은 시장에 충격만 안겨 준다. 지난 2018년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중국에 관세를 부과한 후 위안화 약세로 관세 효과가 상쇄되자 2019년 8월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위안화 약세는 미국 관세의 결과물이었다. 미국이 원인을 제공해 놓고 중국 정부가 환율 조작에 개입했다고 떠넘겼다는 말인데,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미국의 속셈이었다. 지난해 10월 이후 벌어진 원·달러 환율 상승도 마찬가지다. 국내 정치 불확실성과 미국의 통화·경제 정책 변화 탓에 벌어졌을 뿐 한국 외환당국의 개입은 없었다. 마음이 급한 미국은 환율 조작 운운하며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임해야 한다. 끌려다니는 협상의 결과는 뻔하다.
2025-05-26 19:43:45
빚도 자산(資産)이라는 말이 있다. 경제적 여력(餘力)이 있어야 개인이나 기업, 국가도 돈을 빌릴 수 있다. 국가 역시 신용등급에 따라 국채 한도가 결정된다. 경제가 엉망이면 국채를 사 주지 않아서, 즉 돈을 빌려주는 곳이 없어 국채를 발행할 수 없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채 비율이 10%도 안 되는 나라도 있고, GDP의 2배 이상 빚을 진 나라도 있다. 최빈국은 국채 발행 능력이 없어 빚도 적다. 그러나 미국, 일본 국채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인정돼 적은 이자(국채 수익률)를 주는데도 인기가 높다. 국채는 외환 유동성과도 밀접하다. 달러 보유고가 넉넉하거나 기축통화 발행국이라면 국채 비율이 높아도 버티지만 반대라면 상황이 심각해진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으로 달러를 사올 때를 떠올리면 된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도 같은 맥락이다.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 후 대한제국 경제를 예속(隷屬)시키고자 일제는 고리(高利)의 차관(借款)을 강제로 들여오게 했다. 당시 국채가 대한제국 1년 전체 세입과 맞먹는 1천300만원이었다. 운동을 주창한 서상돈은 "2천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매월 1명당 20전씩 모은다면, 3개월 만에 국채를 다 갚을 수 있다"고 밝혔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무디스가 미국의 부채와 재정적자 등을 이유로 국가 신용등급을 강등했는데, 우리나라도 걱정스럽다. 지난해 국채는 1천175조2천억원, GDP 대비 비율은 46.1%였다. 2016∼2018년 600조원대에서 2배가량 늘었고, 채무 비율도 10%포인트 넘게 뛰었다. 국회예산정책처 장기 전망에 따르면, 2050년 국채 비율이 100%를 넘어서고 신용등급 하락도 불가피하다. 나라 살림도 적자인데 저성장을 벗어나려면 대규모 재정 투입이 절실하다. 빚을 더 내야 한다. 6·3 대선 후보들은 증세 없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편다. 재정 건전성에 대한 구체적 대안은 없다. 재정 투입을 통해 경제가 살아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재앙(災殃)적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지금 국채보상운동을 편다면 5천만 국민이 2천350만원씩 내야 한다. 돈 빌린 사람 기준 1인당 1억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3월 말 1천930조원 기준)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ksy@imaeil.com
2025-05-20 20:13:05
관세를 둘러싼 한미 통상 협상에서 미국이 비관세 장벽 중 하나로 지목하는 것이 한국의 정밀 지도 반출(搬出) 거부다. 구글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인 지난 2월 18일 국토지리정보원에 5천 대 1 축척 지도의 해외 구글 데이터센터 이전을 신청했다. 5천 대 1 축척 지도는 5천㎝(50m) 거리를 지도상 1㎝ 수준으로 표현한 고정밀 지도다. 구글은 현재 2만5천 대 1 축척의 공개 지도 데이터에 항공·위성사진을 결합한 한국 지도를 제공하고 있다. 초정밀 인공위성이 자동차 번호판까지 식별하는 마당에 정밀 지도가 따로 필요한 이유는 바로 정보값, 즉 지도 데이터 때문이다. 구글이 원하는 지도 데이터는 '관심점(POI·Point Of Interest)'이라고 부른다. 도로·건물 이름, 지역 명칭, 주소뿐 아니라 주요 시설물의 이름·주소·업종·연락처와 위도·경도 등 좌표 데이터, 영업시간·리뷰·평점·사진 등 추가 정보까지 포함한다. 정부 기관이나 지자체가 제공하는 정보 외에 사용자가 작성·수정하는 정보, 기업·단체가 추가하는 데이터도 아우른다. 꾸준한 업데이트도 핵심이다. 이게 없으면 지도는 길 찾기 기능도 못 하는 단순한 그림에 불과하다. 해외여행을 가면 구글 지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까닭도 바로 위치 찾기에 있어 백과사전급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구글은 2011년과 2016년에도 요청했으나 정부는 지도 데이터를 해외 서버에 두면 정보 유출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구글은 이번에 보안시설을 흐릿하게 처리하겠다며 데이터를 요구했지만 국내에 서버를 두겠다는 뜻은 밝히지 않았다. 구글이 한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려는 선의(善意)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정밀 데이터는 단순 지도 정보를 넘어서 인공지능, 자율주행, 드론 등 미래 산업의 원천(源泉) 자원이다. 구글의 요청에 대해 정부는 8월 중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국방부·국정원을 포함한 정부 부처가 참여하는 '측량성과 국외 반출 협의체'에서 심사하는데, 만장일치가 돼야 통과되기 때문에 안보 문제가 제기되면 반출 승인은 어렵다. 한편 구글은 지난 2016년 반출 요구 당시 월스트리트저널(WSJ)을 통해 '한국의 법규는 낡아 빠지고 불공정하며 혁신에 역행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ksy@imaeil.com
2025-05-13 19:59:37
1990년대 중반까지 극장의 최대 화두는 설과 추석 명절에 대박 흥행작 상영 여부였다. 당시만 해도 극장은 상영관이 1개뿐인 단관(單館) 시절이었다. 1천 석이 넘는 극장들도 여럿 있었다. 한 극장에서 추석 연휴에 성룡이 주인공인 영화를 상영하면 매표소 앞에 끝도 없이 줄을 섰고, 할리우드 대작 간판이 내걸리면 흥행 보증 수표였다. 극장 관계자의 역량은 관객이 몰릴 만한 외국 영화를 얼마나 빨리 선점(先占)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흥행작을 확보하지 못하면 사표까지 각오해야 했다. 한국 영화는 말 그대로 찬밥 신세였다. 스크린쿼터, 즉 한국 영화 의무 상영일에 맞춰 마지못해 영사기에 필름을 걸 뿐 홍보도, 기대도 없었다. 어쩌다가 흥행작이 걸리면 극장 입장에선 의무 상영일수도 채우고 돈도 벌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따로 없었다. 간간이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품들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한국 영화는 끼워 팔기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서편제'(1993년)가 한국 영화 최초로 서울 관객 100만 명 돌파 기록을 세웠다. 당시만 해도 박스오피스 집계가 불확실해 전국 단위 관객 수는 신뢰할 만한 숫자가 되지 못했다. '타이타닉'(1997)이 서울 관객 200만 명을 넘겨 외화 신기록을 세우자 역시 한국 영화는 한계가 있다는 자조 섞인 푸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쉬리'(1999)가 한국 영화 최초로 500만 관객을 돌파했고, 전국 621만 명 기록을 세웠다. 이후 '천만 영화' 수식어가 붙는 영화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쉬리'와 함께 한국 영화의 전기(轉機)가 된 사건이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과정에서 영화 시장 개방 요구에 따라 의무 상영일을 146일에서 73일로 절반 줄였다. 영화계 반대는 거셌다. 한국 영화의 식민지화를 우려했지만 결과는 사뭇 달랐다. 멀티플렉스의 확장과 함께 시장 자체가 급격히 커졌다. 대기업들이 영화 산업에 뛰어들었고 작품 수도 급증했다. 약 20년 만에 한국 영화계는 다시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미국이 대표적 비관세 장벽 중 하나로 스크린쿼터제를 지목해서다. 영화계가 직면한 상황이 2006년과 전혀 달라 결과에 대한 어설픈 예측조차 쉽지 않다. 스크린쿼터 무용론도 있지만 섣부른 철폐는 위험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ksy@imaeil.com
2025-05-06 19:26:46
중국의 생성형 인공지능(AI) 딥시크(DeepSeek) 서비스 중단, 악성 앱 설치를 악용한 보이스피싱, SK텔레콤 고객의 유심(USIM) 정보를 탈취한 해킹 사건. 이들 사건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개인정보(個人情報)다. 특정 인물을 식별하는 모든 정보를 뜻하는데, 주민등록번호나 실명(實名)이 대표적이다. 나이, 성별, 휴대폰 번호, 이메일 주소, 고향, 카드 사용 내역, 주소, 위치 등도 중요한 개인정보다. 디지털 공간에서 자아를 형성·규정하는 개인정보만 조합하면 다른 누군가가 나처럼 행세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딥시크는 중국과 미국 업체 여러 곳에 이용자 정보와 사용자가 프롬프트에 입력한 내용을 넘긴 것으로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조사에서 드러났다. 서비스 중단 전까지 하루 5만 명이 이용했는데, 한 달로 치면 150만 명의 정보가 해외로 넘어간 걸로 추정된다. 개인정보 처리 방침에는 파기(破棄) 절차 및 방법, 안전조치 등이 빠져 있었고, 프롬프트 입력 내용의 이용을 거부하는 기능도 없었다. 딥시크는 시정권고를 일부 수용해 최근 잠정 중단했던 서비스를 재개했다. 올해 1분기에만 보이스피싱 범죄 5천878건이 발생해 3천116억원의 피해를 입었다. 명의도용 사건 안내, 신용카드 배달, 부고(訃告) 문자, 범칙금 통지, 건강검진 진단서 송부, 카드 결제 해외 승인 등 미끼 문자메시지를 보내 악성 앱 설치를 유도하는 것이 시작이다. 이때부터 모든 개인정보뿐 아니라 통화 내용, 실시간 위치까지 범죄 조직에 넘어간다. 수상한 느낌이 들어도 신고할 수 없다. 금융감독원·검찰·경찰 등에 전화를 걸면 범죄 조직으로 연결되도록 조작했기 때문이다. 국내 최대 가입자를 보유한 SK텔레콤이 해킹당해 고객 유심 정보 일부가 탈취된 사건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도 바로 개인정보 때문이다. 가입자 식별·인증 정보를 저장하는 디지털 신분증인 유심을 범죄 조직이 복제해 얼마든 악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디지털 공간에 넘쳐 나는 개인정보를 악의적으로 조작하는 딥페이크 범죄까지 가세했다. 직접 보고 듣고도 속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개인정보를 보호할 확실한 수단을 찾는 것이 디지털 시대 존속(存續)을 담보할 관건이다. ksy@imaeil.com
2025-04-29 20: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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