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용 논설실장 ks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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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고부-김수용] 매개변수(媒介變數)

    [야고부-김수용] 매개변수(媒介變數)

    인공지능(AI)이 고양이 사진을 보고 '고양이'라고 답하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다. 세상엔 온갖 종류의 고양이가 있고, 사진 속 고양이는 일부 모습만 흐릿하게 드러낼 수도 있다. AI는 셀 수 없이 많은 고양이 이미지를 보고 특징과 차이, 구별법을 수없이 반복하며 학습한다. AI의 학습은 특징에 따른 중요도, 특징끼리의 연결 등을 숫자로 남겨 두는 과정이다. 학습이 끝난 뒤 AI 내부에 저장된 방대(厖大)한 숫자 체계가 '매개변수(parameter)'다. 고양이를 구분하듯이 AI는 수많은 문장을 읽으며 단어 사이의 관계를 배운다. '오늘 아침에 커피를…' 뒤에 '마셨다' '마시고 싶다'를 이어가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AI가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문장을 그대로 외워서가 아니라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수많은 문장을 학습해 매개변수로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초기 인공 신경망(神經網)의 매개변수는 수십~수백 개 수준이고, 2012년 이미지 인식 AI '알렉스넷'은 약 6천만 개였다. 2019년 GPT-2는 15억 개, 2020년 GPT-3는 1천750억 개로 늘었다. 중국 AI 스타트업 문샷AI가 최근 공개한 '키미 K3'는 2조8천억 개에 이른다. 숫자가 클수록 AI가 표현할 수 있는 관계와 패턴이 많아진다. 고양이와 개를 구분하는 것보다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수학 문제를 풀고,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전문 지식을 분석하려면 훨씬 복잡한 관계와 패턴이 필요하다. 더 많은 매개변수는 결국 더 복잡한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물론 매개변수에 비례(比例)해서 AI가 똑똑해지는 것은 아니다. 학습 데이터의 질과 학습 방법 등도 중요하다. 게다가 모든 AI에 천문학적 숫자의 매개변수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스마트폰이나 AI 안경 등 구글과 애플이 내놓은 온디바이스 AI의 매개변수는 30억~50억 개 정도다. 거대한 AI가 데이터센터에 있다면 작은 AI는 스마트폰, 자동차, 로봇, 안경 등에 탑재된다. 미래는 하나의 거대한 두뇌(데이터센터)가 모든 것을 처리하는 세계가 아니라 거대한 두뇌에서 배운 능력이 일상생활 속 모든 기기들로 흘러드는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AI가 발달해도 신뢰도, 친밀도, 기억, 경험, 감정, 기대, 이해 등 인간관계의 매개변수를 대체할 수는 없다.

    2026-07-28 05:00:00

  • [세풍-김수용] 반도체 클러스터, 입지보다 기반 조성이 먼저다

    [세풍-김수용] 반도체 클러스터, 입지보다 기반 조성이 먼저다

    얼마 전 로이터 통신은 미국 버지니아주 애슈번(Ashburn)의 낯선 풍경을 전했다. '데이터센터 앨리(Data Center Alley)'로 불리는 이곳은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의 데이터센터가 밀집한 인공지능(AI) 산업의 심장이다. 공사는 순조로워 보였다. 철골은 올라갔고 냉각설비도 설치됐으며, 서버도 곧 들어온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에서 공사가 멈췄다. GPU 부족이나 자금난(資金難) 때문이 아니었다. 초고압 변압기가 없어서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 전력회사들은 변압기 확보를 위해 몇 년 전부터 생산 물량을 예약하고 있고, 일부 제품은 납기만 160주에 이른다. AI 혁명의 병목은 최첨단 반도체가 아니라 100년 넘게 전력망을 지탱해 온 거대한 철제 변압기였다. 다른 기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을 세상 앞으로 불러냈다. 1979년 3월 2호기 원전 사고 이후 홀로 가동되던 1호기마저 경제성 부족 탓에 2019년부터 멈춘 상태였다. 폐쇄된 원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으로 여겼지만 AI 등장 이후 계산법이 바뀌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24년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막대한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원전 운용사와 재가동될 원전의 전력을 장기간 구매하기로 계약했다. 한때 경제성을 이유로 문을 닫았던 원전이 불과 5년 만에 재가동 절차를 밟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최근 보고서도 비슷한 역설을 보여준다. 새 AI 모델은 수시로 등장하고 반도체는 매년 성능을 높여 가지만, 송전망(送電網)은 그렇지 않다. 송전선 하나를 새로 깔려면 주민 협의, 환경영향평가, 인허가를 거쳐 길게는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지금 미국과 유럽에선 데이터센터보다 전력망 해결이 급선무다. 21세기 기술은 빛의 속도로 달리는데, 전기는 여전히 20세기의 시간으로 움직인다. 홋카이도 치토세에서는 일본 정부가 2나노 첨단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설립한 국가 프로젝트 '라피더스(Rapidus)' 공사가 한창이다. 한때 세계 반도체 강국이던 일본은 최첨단 시스템 반도체 생산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시장 논리는 냉정했고 수익성이 떨어지는 공장은 문을 닫았다. 최첨단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투자와 긴 회수(回收) 기간, 높은 실패 위험 때문에 민간 기업이 단독으로 뛰어들기 어렵다. 일본 정부가 2조엔이 넘는 보조금을 투입한 이유다. 일본 언론과 정부 자료에 반복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경제안전보장'이다. 첨단 반도체를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국가 경쟁력으로 보기 시작했다. 단기 수익성보다 국가 전략을 우선한 판단이다. AI와 반도체, 원전, 송전망, 변압기는 첨단기술을 떠받치는 기반(基盤)이다. 세계 각국이 전력망을 늘리고, 원전을 다시 세우고, 반도체 생산 기반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는 이유다. 첨단기술도 중요하지만 이를 안정적으로 구현할 기반을 먼저 확보한 나라가 경쟁력을 갖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한국도 AI 육성을 말하기에 앞서 전력과 송전망, 용수, 반도체 공급망 같은 기반을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최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를 둘러싼 논란도 마찬가지다. 지역 균형발전이든 산업 육성이든 출발점은 입지의 정치적 상징성이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과 용수, 공급망, 인재를 얼마나 빠르고 안정적으로 갖출 수 있느냐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공장을 어디에 짓느냐보다 그 공장이 제대로 돌아갈 기반을 갖추고 있느냐에서 결정된다.

    2026-07-22 05:00:00

  • [야고부-김수용] 호네부토 쇼크

    [야고부-김수용] 호네부토 쇼크

    최근 일본 언론에 등장하는 '호네부토 쇼크'는 사람 이름이나 경제학 용어가 아니다. 일본 정부가 매년 발표하는 경제 운영 청사진인 '호네부토 방침'에서 나온 말이다. 호네부토(骨太)는 일본어로 '뼈가 굵다'는 뜻이며, '경제의 큰 뼈대를 세우는 기본 방침' 정도로 이해하면 쉽다. 정식 명칭은 '경제재정운영과 개혁의 기본 방침'. 일본 정부의 경제 방향을 제시하는 최상위 정책 문서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처음 도입됐다.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 잠시 이름이 사라졌다가 2013년 아베 신조 내각에서 부활했다. 아베노믹스도,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의 '새로운 자본주의'도 모두 호네부토 방침을 통해 공식화됐다. 올해엔 2040년까지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우주 등 전략산업에 공공과 민간을 합쳐 370조엔 이상을 투자하겠다는 구상도 담겼다. 올해 호네부토 방침 초안(草案)에는 지난해까지 있던 '재정건전화' 표현이 빠졌다. 쉽게 말해 빚을 줄이는 데 우선순위를 두기보다 빚이 늘더라도 AI와 반도체 등 미래 산업에 과감하게 투자하겠다는 신호로 시장은 받아들였다. 최종 확정이 안 된 초안인데도 일본 국채금리는 크게 뛰었다. 일본 정부가 국채를 더 많이 발행할 것이라는 예상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해외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나라다. 만약 일본 국채금리가 계속 오르면 미국이나 한국 등에 투자했던 돈의 일부가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면 국채시장의 투자금이 줄면서 국채금리와 기준금리가 오르고, 결국 기업과 가계가 돈을 빌리는 비용도 함께 높아질 가능성이 커진다. 일본의 재정정책 변화는 국제 금융시장을 뒤흔들 수 있는 엄청난 변수다. 이번 호네부토 쇼크는 심지어 초안에서 비롯된 논란이다. 그럼에도 시장은 정책의 방향을 먼저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최종안이 확정되고 재정 확대가 실제 정책으로 이어진다면 시험대에 오르는 것은 일본 경제만이 아니다. 지난 30여 년간 세계 금융시장을 떠받쳐 온 '일본의 초저금리와 해외 투자'라는 자금 순환 구조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호네부토 쇼크의 진의는 정부 문서에 담긴 표현의 변화가 아니라 일본의 재정 철학 변화가 국제 금융 질서의 새 변곡점(變曲點)이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2026-07-21 05:00:00

  • [야고부-김수용] 슈퍼 엘니뇨

    [야고부-김수용] 슈퍼 엘니뇨

    19세기 페루 북부 어부들은 수년에 한 번씩 성탄절 무렵 찾아오는 따뜻한 해류를 엘니뇨(El Niño: 스페인어로 아기 예수)​라고 불렀다. 원래 적도 태평양에 부는 무역풍은 따뜻한 표층수(表層水)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보낸다. 동쪽 페루 연안의 표층수가 밀려간 자리에는 차갑고 영양분이 풍부한 심층수(深層水)가 솟아오른다. 이런 거대한 순환으로 태평양은 열 균형을 유지하고, 페루 앞바다는 세계적 어장이 됐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이유로 무역풍이 약해질 때가 있다. 그러면 서쪽으로 밀려가던 따뜻한 바닷물이 중앙·동태평양으로 퍼져 태평양 전체 해수면이 평소보다 훨씬 뜨거워진다. 그 결과 엉뚱한 곳에 비구름이 생기면서 가뭄과 폭우 지역이 뒤바뀐다. 태평양 해류 변화, 즉 엘니뇨 때문에 폭염, 가뭄, 홍수, 태풍 등 기상이변이 생긴다. 물론 엘니뇨는 인류가 기록을 시작하기 전부터 있던 기상현상이다. 19세기에 이름이 붙여졌을 뿐이다. 문제는 엘니뇨가 발생하는 지구 환경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산업혁명 이전 약 280ppm이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430ppm 안팎으로 높아졌다. 온실가스가 가둔 열의 대부분을 바다가 흡수해 왔지만, 최근 세계 평균 해수면 온도가 사상 최고치를 잇달아 경신하며 완충(緩衝)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바다가 뜨거울수록 대기로 전달되는 열과 수증기가 많아지고, 같은 엘니뇨라도 기상이변 강도는 과거보다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슈퍼 엘니뇨'가 등장했다. 강한 엘니뇨는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데워 놓은 지구에서 발생한 슈퍼 엘니뇨는 훨씬 파괴력이 큰 기상이변을 낳는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강한 엘니뇨가 세계 식량 가격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고 경고했고, 유럽 경제분석기관들은 '기후 인플레이션(Climateflation)'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위험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온난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지구가 끓는 시대"라고 했다. 위성(衛星)으로 태평양을 실시간 관측하고, 슈퍼컴퓨터로 엘니뇨를 예측하지만 결코 기상이변을 막지 못한다. '하나뿐인 지구'를 외치지만 인간의 탐욕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혹독한 대가는 미래 세대의 몫이 됐다.

    2026-07-17 05:00:00

  • [야고부-김수용] 밈코인(Meme Coin)

    [야고부-김수용] 밈코인(Meme Coin)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영상 하나가 천문학적 돈을 움직이는 시대다. 사람들은 그림과 농담을 사고 심지어 대통령 이름까지 산다. 바로 '밈코인'이다. 원래 모방(模倣)되고 퍼지는 문화적 아이디어를 뜻하는 '밈'은 인터넷의 웃긴 사진, 패러디, 유행어를 가리킨다. 밈코인은 이런 화젯거리, 유행, 유명인 이름을 암호화폐로 만든 것이다. 주식, 채권, 제품과 달리 대부분 밈코인에는 공장도, 기술도, 실적도 없다. 투자 열풍이 전부다. 시장은 자산이 아니라 관심을 거래한다. 유명인 자체가 금융상품이 되는 시대다. 대표적 사례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밈코인($TRUMP)이다. 지난해 1월 트럼프는 대통령 취임을 사흘 앞두고 밈코인을 공개했다. 최강국 대통령의 이름이 붙은 암호화폐에 시장은 폭발적 반응을 보였다. 가격은 순식간에 70달러를 넘어섰다. 그러나 열광(熱狂)은 오래가지 않았다. 현재 고점보다 97%가량 폭락했다. 약 99만 명이 38억달러(약 5조8천억원) 이상 손실을 입었다. 트럼프 측이 코인 발행 물량의 80%를 보유했고 시장엔 20%만 유통됐다는데, 정작 트럼프는 손실은커녕 막대한 수익을 거뒀다. 트럼프는 투자자가 아니라 밈코인 발행자이기 때문이다. 투자자는 가격이 올라야 돈을 벌지만 발행자는 시장이 커지면 돈을 번다. 미국 정부 재산 공개에는 트럼프가 밈코인 사업으로만 6억3천600만달러(약 9천700억원)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기재돼 있다. 시세 차익뿐 아니라 코인 발행 수수료, 트럼프 브랜드 사용료, 다양한 프로젝트 운영 등을 통해 돈을 벌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왜 이처럼 불합리한 게임에 뛰어들까. 경제학은 '더 큰 바보 이론(Greater Fool Theory)'으로 이를 설명한다. 밈코인의 작동 원리는 미래 자산 가치가 아니라 '누군가(나보다 더 바보가) 비싸게 사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다. 국정 책임자인 대통령이 자기 이름을 내건 암호화폐 사업으로 거액을 벌어들이는 장면은 미국인들조차 처음 봤다. 논란에 대해 백악관은 모든 것이 적법하다고 설명했지만 대통령 이름까지 투기 대상이 돼 버린 21세기 금융시장을 역사는 과연 어떻게 기록할까. 자본주의 끝판왕 국가에서 벌어졌음에도 좀처럼 납득(納得)하기 어려운 행태임에는 틀림없다.

    2026-07-07 05:00:00

  • [야고부-김수용] 초순수(超純水)

    [야고부-김수용] 초순수(超純水)

    반도체 공장을 들여다보면 실리콘보다 물과 전기가 먼저 보인다. 반도체 공장은 칩 생산시설이자 물 생산 공장이며,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하나의 도시다. 반도체 용수는 증류수보다 훨씬 깨끗한 초순수(Ultra Pure Water)다. 순수한 증류수조차 반도체 산업에선 불순물 덩어리다. 반도체 공장 내부에서 생산하는 초순수는 역삼투압, 막여과, 이온교환, 자외선 살균 등 수십 단계의 정제를 거쳐 극미량 이온과 유기물, 용존 가스까지 완벽히 제거한 물이다. 사실 반도체 제조는 '씻어 내는 공정'에 가깝다. 웨이퍼 위에 회로를 새기고 화학물질을 입힌 뒤 씻는 과정, 즉 '증착(蒸着)-식각(蝕刻)-세정(洗淨)'을 수백 차례 반복한다. 머리카락 굵기의 수만분의 1에 불과한 회로를 새기는 공정에서 불순물은 수율(收率)을 좌우한다. 반도체 공장은 한순간의 전압 강하(降下)도 허용하지 않는다. 순간정전이나 전압변동은 웨이퍼 대량 폐기를 뜻한다. 클린룸, 진공장비, 냉각설비, 초순수 생산시설은 멈출 수 없다. 반도체 기업들이 전기 요금보다 송전망과 안정성을 따지는 이유다. 정부는 호남 반도체 거점의 필요 전력을 6.3GW, 용수를 하루 65만t으로 제시했다. 6.3GW는 울진 한울원전 8기 전체 설비용량 약 7.27GW에 육박하는 규모다. 원전 단지 하나가 쉼 없이 생산하는 전기를 반도체 클러스터가 소비하는 셈이다. 하루 65만t의 용수는 현재 삼성전자 국내 반도체 사업장 전체가 사용하는 물의 2배를 넘는다. 세계 반도체 강국들이 공장보다 인프라를 먼저 준비하는 이유다. 대만은 극심한 가뭄에 농업용수를 줄이고 물탱크 차량을 동원해 반도체 공장에 물을 댔다. 미국은 사막에 공장을 짓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용수 재이용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 건설 자체는 통상 2~4년이면 가능하지만, 안정적 전력망과 광역 용수망 구축에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첨단기술의 상징 반도체는 의외로 매우 기본적인 요소들 위에서 작동한다. 깨끗한 물, 끊기지 않는 전기, 안정적 송전망이다. 이재명 대통령 앞에서 "서남권의 용수 공급에는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 확실히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豪言壯談)한 한국수자원공사 윤석대 사장의 자신감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2026-07-01 05:00:00

  • [세풍-김수용] 경제 성장의 전달 경로가 끊어지고 있다

    [세풍-김수용] 경제 성장의 전달 경로가 끊어지고 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9일 "앞으로는 실질 GDP(국내총생산)뿐 아니라 명목 GDP도 계속 봐야 한다"고 말했고,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20일 "올해 명목 GDP 성장률이 두 자릿수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숫자만 놓고 보면 환호(歡呼)할 일"이라고 했다. 경제정책과 통화정책의 두 사령탑이 한국 경제의 '외형 성장'을 보여 주는 명목 GDP를 강조하고 나섰다. 1분기 명목 GDP는 전년 동기 대비 17.1% 증가했다. 명목 GDP는 그해 가격으로 계산한 경제 규모다. 인공지능(AI) 투자 확산으로 반도체 가격이 급등하고 수출 단가가 높아지면서 한국 경제가 벌어들인 돈 자체가 크게 늘었다는 의미다. 올해 1분기 실질 GDP 성장률도 3.8%를 기록했다. 물가 영향을 제외한 실제 생산량 증가 폭이다. 그런데 가계 실질 소득 증가율은 0.4%에 그쳤고, 자영업자의 실질 사업소득 증가율도 0.5%에 머물렀다. 국가의 생산과 소득은 급증하는데 정작 가계로 흘러가는 돈은 거의 늘지 않았다. 성장의 상당 부분이 반도체와 AI 관련 수출 호황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성장의 과실(果實)이 수출 대기업과 자본에 집중되고 가계로 전달되는 경로는 약해졌다. 국가 경제는 성장하는데 국민 체감 소득은 제자리인 이유다. 과거엔 자동차, 조선, 철강이 성장하면 대기업 생산이 늘고 협력 업체도 바빠졌다. 수출은 고용 확대와 임금 상승을 이끌었고, 소비와 내수 진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AI와 반도체가 주도하는 경제에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첨단산업은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지만 고용 유발 효과는 크지 않다. 반도체 수출이 늘어도 협력 업체와 지역 경제 전체로 파급되는 효과는 제한적이다. 경제의 성장 엔진이 바뀌면서 성장의 전달 경로가 달라지고 있다. 최근 5대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은 2020년 이후 최고 수준으로 상승했다. 반도체 기업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는데 상당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는 은행 이자조차 감당하기 어렵다. 지난해 월평균 임금 500만원 이상 근로자는 371만 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정보통신업과 금융업, 반도체 중심 제조업에선 고임금 일자리가 빠르게 늘지만 최근 취업자 증가를 떠받치는 보건·복지 서비스업에서는 500만원 이상 근로자 비중이 5%대에 불과하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불평등 양상(樣相)에서 나타난다. 최근 국회 입법조사처 연구에 따르면 지난해 자산의 불평등 기여도(40%)는 소득의 불평등 기여도(33%)를 크게 앞질렀다. 특히 MZ세대에서는 자산 격차가 전체 불평등의 절반 가까이를 설명하는 핵심 요인으로 나타났다. 성장의 과실이 임금과 고용으로 확산되지 못하면 결국 기업 이익과 주식, 부동산 등 자산시장으로 흘러들 가능성이 커진다. 노동보다 자산이 삶의 격차를 결정하는 사회가 된다. 이재명 정부는 AI 투자 확대와 첨단산업 육성, 국민성장펀드 조성 등을 핵심 경제 전략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당면(當面) 과제는 국가 전체 소득을 어떤 경로로 국민에게 전달할지 고민하는 일이다. 성장률은 높은데 소득은 늘지 않고, 수출은 호황인데 내수가 살아나지 않으며, 국가 소득이 급증하는데 중소기업 연체율은 오르는 경제는 지속되기 어렵다. 한은 총재와 청와대 정책실장이 경제 덩치가 커졌으니 기뻐할 일이라고 한목소리를 낼 때가 아니다. 경제 성장이 임금과 고용, 지역 경제와 중산층의 삶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성장은 숫자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2026-06-24 05:00:00

  • [야고부-김수용] 브렉시트 역설(逆說)

    [야고부-김수용] 브렉시트 역설(逆說)

    2016년 6월 23일 영국은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EU) 탈퇴를 선택했다. 여론은 팽팽했지만 투표 결과는 탈퇴 51.9%, 잔류 48.1%. 당시 영국을 움직인 구호는 '통제권을 되찾자(Take Back Control)'였다. 국경 통제, 브뤼셀 규제 탈피, 국가 주권 회복이 영국을 되살릴 것으로 믿었다. 10년이 흐른 지금, 탈유럽 실험 성적표는 기대와 사뭇 다르다.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영국 경제의 역동적인 성장을 주장했다. 그러나 전미경제연구소(NBER)는 브렉시트로 영국 GDP 수준이 6~8% 낮아지고 기업 투자는 12~18% 줄었다고 분석했다. 수출은 통관(通關) 절차와 비관세 장벽에 부딪혔고, 유럽 시장을 잃은 중소기업들은 신음했다. 영국 경제는 저성장과 투자 부진의 늪에 빠졌다. 영국은 EU의 자유로운 이민 정책을 문제 삼아 탈퇴를 선택했지만, 순이민자는 오히려 크게 늘었다. 2016년 32만 명 수준이던 순이민자는 한때 90만 명을 넘어섰다. 유럽 출신 대신 인도·나이지리아·중국 이민자가 자리를 채웠다. 브렉시트 당시 유럽 곳곳에서는 프렉시트(프랑스), 이탈렉시트(이탈리아), 그렉시트(그리스) 등 탈퇴론이 거셌다. EU 해체가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흘렀다. 영국이 탈퇴 이후 겪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비용은 다른 국가들에 강력한 경고가 됐다. 최근 퓨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주요 유럽 국가들의 EU 호감도는 브렉시트 당시보다 크게 높아졌다. EU는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등 가입 희망국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도 EU 체제를 공고하게 만든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동 분쟁, 미·중 경쟁, 미국의 동맹 정책 변화 등 유럽은 새로운 현실과 직면하고 있다. 과거 EU가 시장을 위한 공동체였다면 지금은 안보와 경제를 함께 지키기 위한 전략 공동체로 변모하고 있다. 브렉시트는 주권과 통합 가운데 주권을 선택한 역사적 실험이었다. 영국은 규제 자율성을 얻었지만 시장 접근성을 잃었고, 국경 통제를 원했지만 이민은 늘어나는 역설을 경험했다. 약화가 예상됐던 EU는 결속(結束)했고 확대를 준비하고 있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국가들은 고립보다 연대를 택한다. 이것이 브렉시트가 남긴 값비싼 교훈이다.

    2026-06-23 05:00:00

  • [야고부-김수용] 미토스(Mythos)

    [야고부-김수용] 미토스(Mythos)

    지난해 개봉한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악당은 '엔티티(Entity)'라는 인공지능(AI)이다. 온갖 정보망을 뒤져 시스템의 약점을 찾아내고, 정보를 조작해 디지털 세계를 장악하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능력을 가졌다. 각국 정부들은 이를 차지하려고 치열한 암투를 벌인다. 영화 속 이야기로만 들리겠지만 최근 미국 정부가 AI 기업 앤트로픽의 최첨단 모델 '미토스'에 대해 외국인 접근을 전면 차단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해외 접속자는 물론 미국 내 외국 국적자와 외국인 직원까지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첨단 반도체나 군사기술에서나 볼 법한 수출 통제가 AI 모델에 적용된 것이다. 흔히 AI를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 주는 편리한 도구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미토스는 시스템의 보안 취약점을 공략하는 최첨단 무기나 다름없다. 현대 사회는 보이지 않는 프로그램 위에 세워져 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뱅킹, 철도와 항공 관제(管制), 전력망과 수도 시설 등도 모두 소프트웨어로 움직인다. 이런 프로그램에는 오류와 허점이 있는데, 해커들은 이런 틈새를 찾기 위해 수개월 또는 수년을 보낸다. 그런데 앤트로픽에 따르면, 초기 참여 기관들이 미토스를 써 본 결과 불과 몇 주 만에 1만 건이 넘는 고위험·치명적 보안 취약점을 찾아냈다. 일부 사이버보안 능력 평가에선 기존 최고 수준 모델보다도 압도적인 성능을 드러냈다. 누군가 한 국가의 모든 은행, 병원, 발전소, 통신망의 취약점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미국 정부가 미토스를 전면 통제하고 나선 이유는 바로 국가안보 자산이기 때문이다. 앤트로픽이 일반 공개 모델을 '페이블(Fable·우화)', 제한 공개 모델을 '미토스(신화)'라고 이름 붙인 것도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AI는 누구나 사용하는 기술로 여겨졌지만 미토스는 다르다. 기업은 이용자를 선별(選別)하고, 정부는 국적에 따라 접근을 제한한다. 경쟁의 초점도 '누가 더 좋은 AI를 만들었는가'에서 '누가 최강의 AI에 접근할 수 있는가'로 바뀌고 있다. AI가 편리한 도구에서 전략자산으로, 개방의 대상에서 통제의 대상으로 바뀌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인류는 가장 강력한 디지털 도구를 손에 넣었다. 남은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그것을 통제할 능력을 충분히 갖고 있는가.

    2026-06-16 05:00:00

  • [야고부-김수용] 텍사스

    [야고부-김수용] 텍사스

    몇 년 전부터 미국 언론에 '텍사스의 기적(Texas Miracle)'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이 발표한 올해 500대 기업 명단에선 텍사스에 본사를 둔 기업이 57개로 집계됐다. 석유, 목장, 카우보이를 떠올리게 했던 텍사스가 캘리포니아(56개)를 제치고 미국 1위에 올라선 것이다. 텍사스 기업들의 매출은 2조8천억달러에 달한다. 20~30년 전만 해도 미국의 미래는 캘리포니아였다. 애플, 구글, 엔비디아, 메타가 자리 잡은 실리콘밸리는 혁신의 성지(聖地)였다. 텍사스는 석유, 천연가스 등 전통적인 산업에 강한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1980년대 유가 폭락 당시 지역 경제가 큰 충격을 받으며 '석유 경제'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데 혁신도시 캘리포니아에 있던 테슬라가 텍사스 오스틴으로 떠났고, 오라클과 셰브런이 뒤따랐다. 창업은 실리콘밸리에서, 경영은 텍사스에서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텍사스에는 주(州)소득세가 없고,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 세금이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세금의 승리'라는 표현도 쓰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텍사스는 원래부터 규제가 비교적 단순했고 기업 활동에 우호적이었다. 오히려 달라진 것은 캘리포니아였다.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규제는 늘어났다. 최근 초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한 '억만장자세' 논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텍사스 주지사 그렉 애벗은 '예측 가능한 규제 환경'을 강조했다. 기업이 두려워하는 것은 높은 세금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미래다. 물론 캘리포니아 경제 규모는 여전히 일본을 넘어 세계 4위 수준으로 평가될 만큼 크다. 인공지능(AI) 혁명 중심지도 실리콘밸리다. 엔비디아, 애플, 구글의 영향력은 건재(健在)하다. 그럼에도 기업들이 본사를 옮기는 것은 비용과 규제, 예측 가능성의 균형이 달라져서다. 삼성전자도 뉴저지에 있는 미국 법인 본사를 올해 텍사스 플레이노로 옮긴다. 지역의 흥망도, 국가의 미래도 결국 기업의 투자에 달려 있다. 기업은 세금이 낮은 곳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미래를 찾아간다. 국가 경쟁력은 기업이 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안정적인 정치·경제 환경과 인적·물적 지원에서 결정된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2026-06-09 05:00:00

  • [야고부-김수용] 스페이스X

    [야고부-김수용] 스페이스X

    월가가 다시 일론 머스크를 바라보고 있다. 이번 달로 예정된 기업공개(IPO)에서 스페이스X는 최소 1조8천억달러(약 2천500조원)의 기업가치를 목표로 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성공한다면 역사상 최대 규모 상장(上場)으로 기록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이들이 로켓 회사의 주식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일론 머스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투자하려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주식시장은 냉정한 곳이다. 적자와 부채, 현금 흐름과 수익률을 따진다. 하지만 가끔 예외가 등장한다. 숫자가 아니라 꿈이 거래되는 순간이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비싼 꿈의 이름이 바로 스페이스X다. 출발점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머스크는 화성에 작은 온실을 보내 식물을 키우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로켓 값이 너무 비쌌다. 러시아에 가서 발사체를 사려 했지만 원하는 가격에 계약하지 못했다. 그러자 머스크는 '로켓을 직접 만들겠다'는, 당시로선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발상(發想)을 내놨고, 2002년 스페이스X가 탄생했다. 초기 상황은 처참했다. 세 번 연속 발사 실패. 네 번째마저 실패했다면 회사는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었다. 다행히 네 번째는 성공했다. 결국 스페이스X는 경쟁사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던 재사용 로켓을 현실로 만들었다. 스페이스X는 로켓을 만들고 위성을 쏘아 올리는 동시에 스타링크라는 위성 인터넷 서비스도 운영한다. 지상 기지국이 부족한 오지(奧地)나 전쟁 지역에서 인터넷을 연결하는 '우주 통신망'이다. 머스크는 로켓으로 위성을 올리고, 위성으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시 로켓을 만든다. 호사가들은 선구자이자 몽상가인 머스크를 두고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한다. 전기차 시대, 재사용 로켓, 스타링크를 예언할 때 허황하다는 평가도 적잖았지만 현실화했다. 머스크가 말하는 화성(火星) 시대가 실현 가능하게 들리는 이유다. 물론 진공관 캡슐을 초고속으로 이동시키는 미래형 교통수단 '하이퍼루프'와 완전 자율주행은 약속했던 시간표보다 훨씬 늦어지고 있지만. 투자자들은 화성 개발을 말하는 스페이스X의 미래 수익에 대해 의심을 품는 동시에 '혹시라도 머스크가 옳다면?'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바로 그 질문이 천문학적인 돈을 움직인다.

    2026-06-03 05:00:00

  • [세풍-김수용] 첫 직장을 잃어버린 세대

    [세풍-김수용] 첫 직장을 잃어버린 세대

    "취업만 하면 된다"는 말이 통하던 시대가 있었다. 월급은 적어도, 중소기업이어도, 비정규직이어도 일단 노동시장에 들어가면 경력을 쌓고 더 나은 자리로 이동할 기회가 충분했다.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高度成長)은 그렇게 수많은 청년을 사회 안으로 끌어들이며 이뤄졌다. 그런데 이런 취업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다. 지난달 청년층(15~29세) 고용률은 43.7%에 그쳤다. 반면 30대 고용률은 81.0%였다. 두 세대 간 격차는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대 수준까지 벌어졌다. 전체 고용률은 역대 최고라는데 청년만 뒤처진다. 정부는 일자리 증가를 자랑하지만, 체감 현실은 정반대다. 좁아진 노동시장 입구 앞에서 수많은 청년이 마냥 기다리고 있다. 고용 통계가 현실을 가리는 숫자처럼 보일 정도다. 구직 활동을 멈춘 '쉬었음' 청년들도 급증하고 있다. 그런데도 사회는 청년들에게 자격증을 따고, 인턴을 하고, 영어 점수를 올리라고 재촉한다. 이재명 정부는 청년 고용 문제를 국가적 과제로 언급하며 성장의 성과가 청년 일자리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정책은 지원금, 금융상품, 단기 일 경험 사업 중심이다. 청년 자산(資産) 형성 지원 정책도 잇따르지만 정작 청년들이 원하는 것은 적금 통장이 아니라 첫 직장이다. 노동시장에 편입도 못 한 청년에게 자산 형성부터 요구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접근이다. 정부는 재계에 청년 채용 확대를 요청했고 기업들도 신규 채용 계획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청년들이 체감하는 채용 시장은 갈수록 냉혹해지고 있다. 공개 채용이 줄고 수시 채용과 경력직 선호가 대세가 됐다. 신입을 키우는 비용은 줄이고, 필요한 경험은 다른 곳에서 쌓아오라고 요구한다. 그러면서 책임은 다시 청년 개인에게 돌아간다. '눈높이가 높다, 중소기업을 기피(忌避)한다, 노력이 부족하다'고 욕한다. 기업은 신입 채용을 줄이고, 대학은 끝없는 스펙 경쟁으로 내몰고, 정부는 단기 지원 사업을 반복한다. 이런 흐름에 AI 확산까지 가세했다. 생성형 AI는 보고서 초안 작성, 자료 조사, 번역, 코딩 보조, 데이터 정리 등 초급 화이트칼라 업무를 빠르게 대체하거나 축소시키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AI 시대에 입문형(entry level) 일자리가 가장 먼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이유다. AI는 인간 노동 전체를 단번에 대체하기보다 인간이 숙련을 쌓는 입문 단계부터 지우고 있다. 입문 단계가 사라지면 미래의 숙련 노동자도 사라진다. 한국 사회는 '경력직만 원한다'면서 미래의 경력직이 어디에서 올지에 대해 답을 내놓지 못한다. 경제는 적은 인력으로 더 높은 실적을 내는 구조로 이동한다. 첨단산업은 성장하는데, 청년 첫 직장은 줄어드는 역설(逆說)이다. 첫 직장을 얻지 못한 세대는 결혼과 출산을 미루고 소비와 창업에서도 멀어진다. 사회 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져 버리면 잠재성장률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고용률 숫자를 내세우고, 기업은 경력직만 찾으며, 대학은 학생들을 끝없는 취업 준비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과거 한국 경제는 청년에게 자리 하나쯤은 내어줄 수 있는 사회였다. 그 기회가 더 나은 삶으로 올라가는 디딤돌이 됐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는 첨단산업의 성과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다음 세대를 노동시장 밖에 세워두고 있다. 신입이 사라진 노동시장은 결국 미래의 전문가도, 미래의 소비자도, 미래의 부모 세대도 길러내지 못한다.

    2026-05-27 05:00:00

  • [야고부-김수용] 농축(濃縮) 우라늄

    [야고부-김수용] 농축(濃縮) 우라늄

    이란이 보유한 60% 농축 우라늄 440㎏이 중동전쟁의 최대 걸림돌이 됐다. 핵무기 10개를 만들 만한 분량을 두고 미국과 이란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자연 상태 우라늄(U-238)에 들어 있는 핵분열 가능 우라늄(U-235) 비율은 0.7% 정도인데, 이를 3~5%까지 농축하면 원전 연료로 쓸 수 있다. 농축도가 20%를 넘으면 고농축 우라늄으로 간주(看做)한다. 이란 보유 60% 농축 우라늄은 '무기급 직전 단계'로 평가된다. 전문가들은 "우라늄 농축의 가장 어려운 과정은 60% 이전 단계에서 대부분 끝난다"고 말한다. 핵무기 제조가 힘든 이유는 우라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U-235만 골라내는 농축 작업이 극도로 까다롭기 때문이다. U-235와 U-238의 미세한 질량 차이를 이용해 원심분리기를 초고속으로 수천~수만 번 돌려 분리하는데, 이런 우라늄 농축 기술이 바로 핵보유국 판단의 기준이기도 하다. 90% 농축이면 핵무기급으로 분류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 아래 이란 내부에서 저농축으로 희석(稀釋)하는 방안도 가능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가 확보하겠다"며 선을 긋고 있다. 우라늄을 담은 은회색 실린더가 미군 수송기에 실려 이란을 떠나는 장면은 곧바로 승리의 상징이 되고,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가 원하는 바다. 반대로 이란 입장에서는 가장 굴욕적 시나리오다. 지난 2003년 리비아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장비를 미국과 영국에 넘겼지만, 결국 카다피 정권은 붕괴했다. 여기에서 북한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중동에선 "핵무기가 있는 북한은 공격받지 않고, 핵무기가 없는 이란은 공격받는다"는 말까지 나온다. 핵보유국 지위 확보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반출' 카드를 꺼내든 것은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오바마 행정부의 이란 핵 합의 때도 이란 저농축 우라늄 상당량을 러시아로 옮겼다. 푸틴은 이를 협상 카드로 활용하고 싶지만, 트럼프에게 필요한 것은 국제사회의 복잡한 검증(檢證)보다 "미국이 직접 가져와 제거했다"는 가시적인 성과다. 미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완성된 핵폭탄만이 아니라 언제든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440㎏ 회백색 핵물질이 세계 정치의 향방을 뒤흔드는 이유다.

    2026-05-26 05:00:00

  • [야고부-김수용] 토큰(Token) 경제

    [야고부-김수용] 토큰(Token) 경제

    스마트폰으로 버스 요금을 결제하는 세대에겐 낯설겠지만 기성세대에게 '토큰'은 익숙하다. 1999년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20년가량 버스를 타려면 구멍 뚫린 동전 모양의 버스 토큰이 필요했다. 요즘엔 인공지능(AI) 사용 요금 단위인 토큰이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화제다. 생성형 AI는 인간의 말을 잘게 쪼개 토큰 단위로 처리한다. 토큰 1개는 대략 단어 0.75개 분량으로, 영어 기준 1천 단어짜리 문서라면 약 1천300개 토큰에 해당한다. 이미지나 음성은 수백에서 수천 개 토큰이 필요할 수 있다. AI에 입력하는 양과 AI가 돌려주는 답변 모두 과금(課金) 대상이며, 출력 토큰은 입력 토큰보다 3~10배 비싸다. 최신 AI 모델 기준으로 입력 토큰 100만 개당 약 2.5달러, 출력 토큰 100만 개당 약 20달러 수준이다. AI 신봉자(信奉者)인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최근 "연봉 50만달러 엔지니어가 연간 5천달러어치 토큰만 썼다면 기가 막힐 것"이라며 "AI를 안 쓰는 엔지니어는 종이와 연필로 반도체 설계를 하는 것과 같다"고 토큰 사용을 독려했다. 엔비디아는 직원 토큰 비용으로 연간 3조원가량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엔비디아처럼 AI 사용을 장려할 수는 없다. 생각보다 돈을 많이 먹기 때문이다. 일반 소비자는 월정액 구독제로 AI를 쓰지만 기업 내부에선 사용량에 따라 토큰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최근 '토큰 경제학'이 기업 경영의 핵심 패러다임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이유다. 사람은 오래 고민해도 전기요금이 더 나오지 않지만 AI는 오래 생각할수록 토큰을 더 먹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 테크 업계에서는 기이한 풍경도 벌어진다. 연봉 계약을 맺을 때 급여 액수 옆에 '연간 사용 가능한 AI 토큰 총량'을 복지 혜택으로 명시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반대로 직원별 AI 사용량을 관리하거나 "불필요하게 긴 질문은 자제하라"는 내부 지침을 내놓는 기업도 있다. 산업혁명 시대 기업들은 석탄 사용량을 계산했고, 디지털 시대 기업들은 클릭 수를 계산했는데, AI 시대 기업들은 토큰을 계산한다. 미국 AI 업계에선 월정액 시대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구독자 확보용 출혈 경쟁이 끝난 뒤엔 AI 종량제(從量制) 시대가 올 수 있다.

    2026-05-19 05:00:00

  • [야고부-김수용] 매점매석(買占賣惜)

    [야고부-김수용] 매점매석(買占賣惜)

    정부가 석유제품과 의료용품은 물론 석유화학 원료까지 매점매석 금지 대상으로 묶고, 몰수(沒收)·추징·과징금 검토에 나섰다. 대통령은 "매점매석은 망하는 길"이라고 경고했다. 중동전쟁 이후 정부가 통제하는 것은 가격이 아니라 '불안'이다. 사람들은 '부족해질 것 같다'는 심리가 지배하는 순간부터 움직인다. 미국에서도 그랬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당시 석유 공급이 거의 끊겼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시장 공급은 크게 줄지 않았다. 그러나 시민들은 주유소마다 줄을 섰고, 기름이 반만 남아도 주유소로 향했다. 사재기가 시작되자 진짜 부족이 시작됐다. 닉슨 행정부는 가격 통제로 대응했지만 소비는 줄지 않고 주유소 공급만 움츠러들었고, 결국 자동차 번호판 홀짝제로 주유 날짜를 제한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자기실현적 부족'이라고 불렀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정부는 생필품 가격을 강력하게 통제했다. 그러자 상인들은 물건을 창고에 숨겼고, 사람들은 돈보다 담배와 비누를 더 신뢰했다. 담배가 사실상 화폐 역할까지 했다. 도시민들은 양복과 시계를 들고 시골로 가서 감자와 바꿨다. 공식 경제는 멈췄고 암시장(暗市場)만 살아남았다. 그런데 1948년 경제장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가격 통제를 대폭 풀자 전날까지 비었던 상점 진열대가 갑자기 채워졌다. 독일인들은 '상점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코로나19 시절 화장지 사재기도 비슷했다. 일본에선 "중국산 원료가 끊긴다"는 가짜 뉴스 하나로 화장지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일본 화장지 원료 대부분은 국산이었다. 공급이 아니라 공포가 문제였다. 한국 정부는 보세 창고 물품 반출을 독려하며,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일부 지역에선 쓰레기 종량제 봉투 사재기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중동전쟁이 몰고온 불안은 한국인의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위기 때 일정 부분 정부 개입은 불가피하다. 실제로 최고가격제와 유류세 인하는 단기 물가 급등을 막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격 통제는 늘 부작용을 동반했다. 가격을 오래 누르면 시장은 왜곡된다. 시장은 조용히 움츠렸다가 어느 순간 품절(品切)과 공급 축소로 반격한다. 역사 속에서 늘 경제를 뒤흔든 것은 부족이 아니라 부족이 닥칠 것이라는 공포였다.

    2026-05-12 05:00:00

  • [야고부-김수용]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야고부-김수용]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대개 경제가 성장하면 물가도 오른다. 수요와 공급의 선순환 덕분이다. 성장과 수요가 이끄는 인플레이션은 통화·재정으로 비교적 조절이 가능하다. 그런데 성장이 멈췄는데 물가만 오르는 상황도 생긴다. 바로 스태그플레이션이다. 1·2차 오일쇼크 이후 물가 급등에도 영국 정부는 실업을 우려해 완화적 재정과 임금 억제 정책을 병행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결국 1976년 영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1980년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외채(外債) 위기 속에 통화 팽창이 이어지며 인플레이션 가속과 성장률 둔화를 겪었다. 물가를 잡기보다 성장을 유지하려 했는데 결국 연간 물가상승률 1천%를 넘는 초인플레이션이 닥쳤고 장기간 침체를 겪었다. '조금만 버티면 회복된다'는 판단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스태그플레이션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치지 않는다. '아직'이라는 오판 아래에서 서서히 진행된다. 정책은 선택을 미루고, 신호는 엇갈린다. 그리고 선택의 여지가 사라진 순간 뒤늦은 대응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동결은 안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부 이견이 노출됐다는 것은 판단 기준이 흔들린다는 의미다. 물가 안정이 필요한데 방법이 뚜렷하지 않다. 공급 충격 앞에 금리는 무기력하다. 한국은 더 난감(難堪)하다. 에너지는 수입에 의존하고, 금리는 미국 변동에 민감하다. 환율, 한미 금리 격차, 수입물가 상승 구조가 외부 충격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다. 물가는 오르는데 체감 경기는 내려간다. 스태그플레이션 경고등이 켜졌다. 스태그플레이션이 무서운 이유는 나쁜 것들이 동시에 오기 때문이고, 더 무서운 것은 매번 정책 대응이 쉽게 틀려서다. 1970년대에도 물가를 잡으려다 경기를 망치고, 경기를 살리려다 물가를 폭발시켰다. 선택은 더 늦어지고, 대가는 더 커졌다. 현재 그런 단계는 아니지만 조건은 갖춰지고 있다. 유가는 빠르게 움직이고, 금리는 따라가지 못한다. 경제는 그 사이에서 희망과 불안을 저울질한다. 과거 경험은 이런 국면(局面)에서 방향보다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스태그플레이션은 늘 "아직은 아니다"는 진단과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도 그 말을 하지 않게 된다.

    2026-05-06 05:00:00

  • [세풍-김수용] 늦출수록 비싸지는 연금 개혁

    [세풍-김수용] 늦출수록 비싸지는 연금 개혁

    정책을 만들거나 고칠 때 첫 근거는 수치(數値)다. 뭔가 부족하거나 남아돈다는 것은 숫자로 드러나고, 이를 효율적으로 조절하는 시스템이 바로 정책이다. 물론 정책, 특히 정치적 판단의 결과물은 숫자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다분히 국민의 정서적인 영역을 감안할 수밖에 없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표심(票心)이다. 숫자와 표심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추를 맞춰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정책으로 교정할 수 있다면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묘수가 발휘되기는 쉽지 않다. 대선·총선·지선에다 보궐선거·재선거까지 줄줄이 이어지는 판에 단지 숫자가 표심을 이기기는 어렵다. 연금 문제가 그렇다. 1981년 노인복지법이 정한 '65세' 기준은 그대로인데, 기대수명은 2024년 기준 83.5세다. 단순 계산으로도 평균 18년가량 노후 급여에 의존하는 구조다. 제도는 바꾸지 못했고 수급(受給) 기간만 늘다 보니 재정이 버틸 수 없다. 2025년 24조원대이던 기초연금 지출은 2050년 58조원, 2065년 67조원 이상 늘어날 전망이다. 같은 기간 정부의 의무지출은 전체 예산의 54%를 넘어 2029년에는 55% 후반까지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법정 의무지출이 늘수록 다른 정책에 쓸 돈은 줄어든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5년부터 2030년까지 한국의 GDP 대비 연금 지출 증가 속도가 주요 20개국 중 가장 빠를 것으로 본다. 일본이나 독일의 2~3배에 이른다. 일본과 독일은 20년 전부터 숫자를 읽어 낸 뒤 정책적 대응을 준비했다. 법정 연금 수급 연령을 올리고, 기대수명과 재정을 반영한 연금 자동조정장치도 도입했다. 일본은 70세까지 고용 기회를 제공하도록 의무화하는 등 연금과 노동시장을 함께 움직였다. 한국도 정책의 선택지는 이미 나와 있다. 노인 기준을 65세에서 70세로 상향(上向)하면 2065년까지 재정을 최대 600조원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상향 속도에 따라 재정 절감 효과는 203조원에서 603조원까지 차이가 난다. 이는 노인 기준을 유지할 때 추가 부담해야 할 재정이기도 하다. 물론 숫자로만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연령 기준을 늦추는 순간 현재 수급자와 미래 수급자 사이에 불이익이 발생한다. 정책 변화가 곧바로 소득 감소로 연결된다. 정부가 기초연금 개편을 논의하면서도 '65세'는 건드리지 않는 이유다. 재정 필요와 유권자 정서가 충돌해서다. 그래서 지급 방식을 조정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꼭 필요한 계층에 보다 넉넉하게 지급하자는 것이다. 기초연금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공무원연금은 2025년 기준 10조원가량 적자를 세금으로 보전해야 한다. 건강보험과 노인 의료비 지출도 급증하고 있다. IMF는 2025년부터 2050년까지 한국의 연금 지출 증가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GDP의 41.4%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주요 선진국 평균(약 12%)의 3배 수준이다. 방향은 정해져 있다. 기초연금 지급 대상을 손봐야 한다. 속도 조절이 필요하겠지만 노인 기준도 바꿔야 한다. 변수는 시간이다. 지금 조정하면 완만하게 갈 수 있지만, 미루면 급격한 변화가 불가피하다. 연금은 한번 손대면 수십 년을 간다. 1년의 지연(遲延)이 수십조원 차이를 만든다. 65세는 더 이상 경제적 기준이 아니다. 기대수명과 노동 현실이 바뀐 만큼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 선택을 늦출수록 비용은 커지고, 부담은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눈앞의 표심에 기대어 개혁 속도를 늦추는 것이 바로 포퓰리즘이다.

    2026-04-29 05:00:00

  • [야고부-김수용] 자위대(自衛隊)

    [야고부-김수용] 자위대(自衛隊)

    일본의 '자위대'는 모순(矛盾)적인 조직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7년 제정된 일본 헌법 9조는 '전쟁 포기'와 '군대 보유 금지'를 명시했지만 냉전이 시작되자 1954년 자위대를 창설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군사력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으며, 공격받을 때만 대응한다는 원칙을 내세워 위헌 논란을 피해 왔다. 1991년 걸프전에서 130억달러를 제공하고도, 돈으로 국제적 역할을 대신한다는 비판에 직면한 일본은 해외 파병의 길을 열었다. 2015년엔 자국에 대한 직접 공격 없이 동맹국이 공격받아도 무력을 사용해 함께 방어할 수 있는 '집단적 자위권'도 일부 허용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 출범 이후 자위대는 다시 변하고 있다. 무기 수출 금지 원칙을 사실상 폐기했고, 자위대 계급 체계를 국제 군사 기준에 맞추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전후(戰後) 오랜 기간 '평화국가'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무기 수출을 엄격히 제한해 왔으나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과의 방산 협력을 추진하며 동아시아 지역 안보 네트워크의 공급자로 나서고 있다. 군사적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는 뜻이다. 배경에는 중국과 미국이 있다. 동중국해와 대만해협의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일본은 전쟁 가능성을 전제로 전략을 재편한다. 미국은 주일미군 주둔비 분담 확대, 미군기지 방호 강화, 공동작전 체계 강화 등을 내세우며 '함께 싸우는 국가'로의 변신을 요구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독일이 '자이텐벤데(Zeitenwende, 시대 전환)'를 선언하며 재무장에 나선 것과 비슷한 맥락이지만 일본의 재무장 강화는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다르다. 동북아의 특수성 때문이다. 자위대는 어디까지 변화할까. 자위대의 헌법 명기, 즉 사실상 군대 인정이 현실화하면 일본은 전후 체제를 공식적으로 끝내게 된다. 단순히 일본 헌법 개정이 아니라 국제 질서의 재편을 알리는 신호다. 중국은 팽창하고, 미국은 재배치하며, 일본은 재무장한다. 여기에 북한의 핵 문제까지 더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요구는 복잡한 함수(函數)가 된다. 자위대가 자위를 위한 조직이 아니라 국제 질서 재편의 힘으로 바뀌면서 한·미·일 안보 구조는 현재와 사뭇 다른 형태가 될 수 있다.

    2026-04-28 05:00:00

  • [야고부-김수용] 그레셤의 법칙

    [야고부-김수용] 그레셤의 법칙

    16세기 영국 왕실의 재정 고문인 토마스 그레셤(1519~1579) 이 남긴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한다"는 말은 지금도 유용한 통찰이다. 1558년 그레셤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좋은 돈과 나쁜 돈은 함께 유통되기 어렵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당시 영국은 재정 압박을 덜기 위해 금과 은의 함량을 낮춘 화폐를 반복해 발행했다. 법정 액면가는 동일한데 금속 함량이 다른 화폐가 혼재하게 됐다. 왕실은 이들을 동일한 가치로 사용하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실질 가치가 높은 화폐는 보관하고 질 낮은 화폐부터 썼다. 결국 순도 높은 좋은 돈(양화)은 유통에서 차츰 사라지고 가치 낮은 돈(악화)만 남게 됐다. 왜곡된 제도가 합리적 선택을 거쳐 비효율의 증폭을 낳았다. '양화는 숨고, 악화가 유통되는' 장면은 현재도 여전하다. 한계기업은 영업이익이 이자비용을 충당하지 못한다. 문제는 자금과 노동이 한계기업의 비효율 부문에 묶이면서 오히려 생산적인 기업은 기회를 잃게 된다. 퇴출이 지연될수록 혁신 속도도 늦어져 경제 전체의 생산성이 낮아진다. 글로벌 기업들은 자사주(自社株) 매입을 확대해 주주환원을 강조하는데, 자본 효율성 측면에서 의미있지만 동시에 장기 투자 여력을 잠식한다. 과수원을 가꾸기보다 열린 과일을 서둘러 따서 시장에 내다 파는 행위에 가깝다. 정보 시장에선 질보다 '얼마나 빠르게, 많이 노출되는가'가 중요해졌다. 정확성보다 반응을 우선하는 알고리즘에 밀려 단순하고 자극적인 메시지가 시장을 장악한다. 이들 현상은 공통 메커니즘을 가진다. 왜곡된 인센티브가 합리적이면서 왜곡된 선택을 불러오고, 이는 비효율의 누적으로 돌아온다. 그레셤의 법칙은 인간의 도덕성을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시스템이 잘못 설계돼 있으면,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할수록 결과는 더 나빠진다.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도덕적 호소가 아니라 구조의 교정(矯正)이 필요하다. 좋은 선택이 손해가 되는 환경에선 어떤 정책도 제 효과를 내기 어렵다. 한국 경제의 문제는 단순히 저성장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경기장에서 공정성을 잃은 규칙이 난무(亂舞)한다면 선수의 실력과 무관하게 결과가 결정된다. 양화는 시장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돌아올 이유를 잃었을 뿐이다.

    2026-04-20 05:00:00

  • [야고부-김수용] 인공지능의 전쟁

    [야고부-김수용] 인공지능의 전쟁

    영화 '터미네이터 2'에서 핵전쟁을 일으킨 것은 인공지능(AI) '스카이넷'이었다. 자아(自我)가 생긴 스카이넷은 인간의 강제 종료를 막기 위해 인류 절멸(絕滅)을 결정했다. AI가 전쟁에 깊이 관여하면서 공상과학영화 속 위협들이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 국방부 '프로젝트 메이븐'은 가공할 위력을 자랑한다. 중동 등지에서 드론이 수집한 방대한 영상 데이터를 인간이 일일이 분석하는 데 한계에 다다르자 AI 분석 기술을 동원했는데 위성 이미지, 무인기 영상, 레이더 신호뿐만 아니라 온갖 인터넷 정보까지 실시간 융합해 포착된 물체를 판별한다. 적으로 확인되면 인근의 가용한 화력(포병, 미사일, 드론 등)을 검색해 불과 몇 초 만에 최적 공격 옵션을 제시한다. 전쟁의 승패가 초당 수십억 번 연산을 수행하는 알고리즘 처리 속도로 결정되는 시대다. 탐지·판단·타격으로 이어지는 '킬체인(kill chain)'을 AI가 떠맡으면서 인간의 개입(介入) 여지는 급격히 줄었다. 냉전시대엔 핵을 사용하면 인류 파멸을 가져온다는 공포가 전쟁을 억제했다. 그러나 AI는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확률과 효율만 계산한다. AI를 활용한 전쟁 시뮬레이션의 대부분 시나리오에서 핵 사용이나 대규모 공격을 선택한 이유는 인간의 망설임조차 개입되지 않아서다. 군사 전문가들은 여전히 인간의 통제권을 강조하지만 수천 개 표적을 초 단위로 분석하고 최적의 타격 시나리오를 쏟아 내는 AI 앞에서 인간은 이를 검증해 낼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조차 갖지 못한다. 지난 2월 28일 이란 남부 미나브시 한 여학교에 미사일 3발이 날아들었고 어린 학생들과 교사, 학부모 등 165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의 표적 설정 오류가 원인으로 지목됐는데, 미군 데이터베이스에는 학교 건물이 이란 혁명수비대(IRGC)의 기지로 기록돼 있었다. 벌써 수년 전에 바뀌었지만 미군은 최신 정보 확인 없이 타격 좌표로 결정했다. 표적 우선순위를 정하는 과정에서 낡은 데이터가 AI의 판단 근거로 사용된 것이다. 물론 전문가들은 AI 자체 오작동이 아니라 데이터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AI가 내놓는 선제공격(先制攻擊) 효율성에 도취돼 전쟁을 데이터 처리 과정으로 환원하는 순간 인류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보루인 인간성은 사라졌다.

    2026-04-14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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