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화(造花)를 좋아한다.
아내가 살아있었을 때는 함께 외출하면 그때마다 조화가게를 기웃거리곤 했다.
뭔가 좀 색다른 것이 나와 있는가 해서다.
간혹 기대를 채워주기도 했기에 그 재미로 늘 조화가게를 찾았다.
내가 조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물론 있다.
조화는 시간이 정지된 상태를 보여준다.
생화는 시시각각으로 시간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루가 다르게 모양과 색이 변한다.
보기 싫게 변한다.
시간은 모든 생물을 그렇게 만든다.
나의 형상을 보는 것 같아서 나는 생화를 곁에 두지 않는다.
혹 누가 선물로 가지고 오지만 채 시들기도 전에(아직 색이 바래기도 전에) 나는 얼른 치워버린다.
조화는 제가 제일 아름다울 때의 모습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있다.
현실의 꽃(생화)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만든 사람의 솜씨에 따라서는 말이다.
그것은 영원의 모습이요,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모습이다.
그것을 보면서 늘 그런 생각을 한다.
시간이 정지된 모습은 저런 것이어야 한다고, 아니 저런 것이라고- 만약 이 세상에 조화가 없었다고 하면 나는 그 만큼 허전한 시간을 더 보낼 수밖에는 없었으리라. 다행한 일이다.
말을 좀 바꿔보자. 나는 샤갈의 그림을 또한 좋아한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의 그림을 소재로 해서 시를 쓴 일도 있다.
샤갈의 그림에 신부를 그린 것이 있다.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어 다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알다시피 이 그림은 신부복장을 한 신부가 가슴에 새빨간 카네이션을 한아름 안고 비스듬히 하늘을 날고있는 그런 구도다.
아주 상징이 강하다.
새빨간 카네이션은 사랑의 뜨거움을 새하얀 신부복은 순결을 그리고 비스듬히 하늘을 나는 자세는 꿈과 희망을 상징한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그런 것들을 아주 절실히 느끼곤 한다.
나는 훌륭한 예술은 단순하고 강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그림이 바로 그런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샤갈 그림의 특색이 또한 거기에 있다.
그러니까 그의 그림의 모티브도 언제나 유아(幼兒)적이다.
그리고 환상적이고 동화적이다.
소의 눈 안에 그가 어릴 때 보고 들은 고향의 풍물이 고스란히 그대로 들어앉아 있다.
단순한 한 둘의 장면인데 그 울림의 범위가 굉장히 넓다.
연상대(聯想帶) 말이다.
샤갈의 그림이 이처럼 적나라하게 자기의 비전을 그대로 다 드러내고 있는데 비하여 릴케의 시는 모든 것을 감추고 있다.
릴케의 유명한 (인구에 회자된) 시의 한 구절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나도 나의 시 '꽃을 위한 서시(序詩)'에서 이 구절을 빌린 일이 있다.
패러디로 빌린 것이지 물론 표절은 아니다.
릴케의 신부는 시구에 나타나있는 그대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돼있다
어떤 모양과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도 물론 모른다
그것은 신비의 베일에 싸여있다.
그 베일은 아무도 벗기지 못 하도록 돼있다.
그러니까 릴케의 시에서는 신부의 실체는 아무 데도 없고 신부라는 언어만이 메아리치고 있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러나 이 안타까움이야말로 영원을 가리킨다.
시간이 정지된 신부의 영원한 모습을 찾고 있다.
목말라 부르고 있다.
그것은 거듭 말하지만 현실에는 없는 그 어떤 대상이다.
샤갈의 그림과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예술이 되고 있는가? 예술의 진가(眞價)는 어느 쪽에 있는가?
릴케와 샤갈을 비교해보면 시와 그림의 성격차이가 잘 드러난다.
시는 훨씬 심리적이다.
릴케의 신부는 프로이트 심리학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거기 비하면 샤갈의 신부는 월등으로 리얼리스틱하다.
실지로 어떤 형상을 볼 수 있도록 돼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시간이 정지된 어떤 상태(영원)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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