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다부동' 다시 찾은 老兵의 회고

전장 찾은 김형용·정이근씨…단 열흘 훈련 死地로

6·25전쟁이 발발한 지 벌써 55년이 흘렀다. 당시 참전한 청년들은 모두 70, 80대 노인이 됐다. 이들 기억 속의 전쟁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다부동 전투, 가장 치열한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용사를 만났다.

△그때의 일기장

'목수가 끌로 나무를 파듯 총검으로 땅을 팠다. 공사가 완전히 완료되었을 땐 총검이 닳아빠져 못 쓸 정도였다. 흙이 얼어붙으니 돌과 같이 야물었는데 땅 파기는 여간 어렵지 않았다…(중략)… 밤은 고요히 잠들었다. 이따금 인민군들이 떠드는 방송 소리가 들릴 뿐. 나는 OP(관측초소)에서 이 밤도 무사히 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비는 마음 금치 못하면서 깜박거리는 등불만 바라보고 있었다(중략)… 122mm 포탄이 내가 들어 있는 관측호 위에 1발 명중됐다. 사방이 먼지가 자욱한데 계속 떨어졌다. 너무나 맹렬한 적의 포 사격에 엄체호는 다 부서지고 몸을 피할 곳 없어지고, 갖다두었던 수류탄은 엄체호와 같이 다 적군으로 인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한두 발의 수류탄밖에 없는 고로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하였기 때문에 함부로 적 1, 2명을 보고 던질 수도 없었다.(김형용 할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다부동 그 혈전의 현장

군번 2704544. 1사단 15연대 2대대 7중대 소속. 6·25 전쟁 발발 당시 김천 봉계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김형용(76) 할아버지는 기억에 잠겼다.

"선생질하면 군대 안 가도 됐어. 근데 나 혼자 편하자고 도망칠 순 없는 거잖아. 그 어린 학생들도 다 조국을 위해 소년병으로 자원하는데… 안 갔으면 평생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했을 거야."

1950년 7월 20일 남산초등학교에서 10일간의 짧은 훈련을 끝으로 구미 임동 서부초등학교 뒷산에 투입됐다. "이곳이 터지면 대구가 무너진다"는 소대장의 말에 정신을 다잡았다. 그 해 8월 초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북서쪽 유학산과 동쪽의 가산 산등성이에는 북한군으로 꽉 차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복병전은 필설도 표현 못 할 정도로 잔인했다.

"낮에는 우리가 고지를 점령하고 밤이 되면 빼앗겼지. 미군 항공기가 낮에는 우릴 도와줘도 밤만 되면 힘을 못 쓰잖아. 깜깜한데 다 죽일 수는 없고. 칼 하나 차고 쳐들어갔지. 머리카락이 짧으면 찔러야 했어. 우리가 사는 방법은 그것뿐이었지."

김 할아버지는 피로써 막아낸 다부동 그 혈전을 잊을 수 없다. 북한군이 제3, 13, 15사단 등 5개 사단을 왜관 다부동에 집중 투입해 방어선 붕괴에 나섰지만 결국 실패했다. 아침나절 같은 주먹밥을 먹던 전우가 숨지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아야했던 그때. M-1총은 연발이 안 돼 발로 밟아 한 발 한 발 쏘았던 그때가 지금도 괴롭다. 기억이 따끔거린다.

△이제 더 이상의 전쟁은 안돼

"한번 전투가 벌어지면 산이 2, 3m 낮아질 정도로 포탄을 쏴 댔어. 포구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쏘고 또 쏘고 하다 보면 정신을 잃는 거야. 전우가 쓰러지면 미쳐서 날뛰고… 그때 정포대에 있던 군인 중에 귀먹지 않은 사람 없어. 나도 왼쪽 귀는 안 들리니까."

다부동전투에서 105mm 곡사포를 다뤘던 정이근(75) 할아버지는 당시를 띄엄띄엄 회상하며 말문을 열었다. "보통 배낭에 총까지 짊어진 전우들은 비스듬히 누워 휴식을 취했어. 어느 날 저 멀리 몇백 명의 군인들이 그 자세로 땡볕에서 쉬고 있는 거야. 반가운 마음에 고래 고함 질렀는데 알고 보니 모두 시체였어.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있는…."

열살을 갓 넘은 북한군 아이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피난길에 인질이 된 여자, 아이들이 셀 수도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제 다시 전쟁은 안돼. 같은 민족끼리 그 무슨 짓이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우리 전우들, 지금 세대가 따뜻하게 안아 줘야해.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데…. "

서상현기자 ssang@imaeil.com

사진: 다부동 전투에 참가했던 김형용 할아버지가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적기념비 앞에서 전우들의 이름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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