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에서 보낸 수많은 문서들이 조령을 넘어 영남으로 왔다. 관직에 임명한다는 문서, 사마방목을 간행하는 데 필요한 돈을 내라는 문서, 영남의 한 궁색한 계곡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 옛 신하를 잊지 않고 임금이 보낸 제문, 각지로부터 답지한 수많은 편지들까지 문서는 많고도 다양했다.
과거 합격자 명단이 발표된 뒤, 대개 그 명단은 책으로 간행됐다. 합격자 명단을 방목(榜目)이라고 했는데, 그 중에서 생원이나 진사의 방목을 사마방목이라고 했다. 사마방목을 간행하는 데 필요한 돈을 내라는 전갈을 받은 선비는 비록 한 끼를 굶더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그 돈을 냈을 것이다.
숙종은 영남 사람 이관징(1618-1695)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제문을 내렸다.
'그대가 한성부윤을 지낼 때 정치는 공평했고, 형조판서를 역임할 때는 송사가 종식되었네. 시종 어려운 일이 반복되었으나 절조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네. (중략) 어찌 하늘은 인재를 아끼지 않고, 우리 원로를 빼앗아 갔는가? 선인이 죽으니 조야가 모두 애석해 하네. (중략) 술 항아리를 들어 멀리서 잔을 치네. (하략)'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문서에 좋은 내용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점순이 어머니 마조이는 먹고 살 길이 없어 자신과 아직 어린 자식을 노비로 팔았다.
'광서 12년(1886년) 병술 1월 17일. 이 글로써 밝히는 일은 당차 궁춘한 생활을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고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8세인 딸 이름 점순과 더불어 이 집에서 얻어먹고 살아온 관계로 8냥의 가격에 이 집 주인에게 영원히 앙역할 마음으로 영영 방매하오니, 만약 후일 문제를 삼을 경우 이 문기를 올려 관에 고해 증빙할 것. 작성자 점순 어머니 마조이. 증인 이성단.'
마조이는 원래 노비가 아니라 양인이었다. 능숙한 솜씨로 수결한 것으로 보아 일자무식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몸과 딸을 노비로 팔았을 1월 17일은 아직도 설과 대보름의 잔치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였다. 세상은 잔치를 열고 있었지만 그녀는 먹고살기 위해 딸과 함께 스스로 노비가 됐다. 집을 지을 때 품을 산 기록, 외상으로 먹은 약값, 혼수를 얼마나 어떻게 할 것인가를 기록한 문서도 남아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누이동생을 위로하며 친정 오빠가 쓴 편지도 있다. 며느리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시댁에서는 첩을 들였던 모양이다. 친정 오빠는 시앗을 바라보아야 하는 누이를 위로하며 이렇게 썼다.
'여자의 직분은 출가하면 생남(生男)하는 것이 첫 일이니 누구도 원망할 일이 아니네. 깊이깊이 생각하여 조심하게. 또 다른 사람을 두고 보면(아마도 '다른 사람의 경우를 보니' 인 듯) 본처에게 생산 못 하다가 첩이 생산하면 처첩이 모두 생산하니 이 일로 보면 매제가 작첩(作妾)하면 혹 누이도 생남할 징조가 오니 그리 알고 근심치 말고 지내기를 바라고 바라네.'
자애로운 친정 오빠는 동생을 위로하는 동시에 잉태를 위한 처방도 알려주며 꼬박꼬박 챙겨 먹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오빠는 또 매제가 첩을 들이기 위해 간 일이 잘 안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적었다. (오빠가 편지를 보낼 당시까지 아직 첩을 들이지는 않았고, 첩을 들이기 위해 매제가 어딘가로 가 있는 상태였던 듯 하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영남이 어떤 곳이냐고 물으면 '선비의 고장'이라고 답했다.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준비했고, 또 많은 선비들은 책을 읽으며 초야에 살기를 바랐다.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 시험장으로 나갔던 많은 선비들이 시험에 떨어져 터벅터벅 걸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멀리 다른 지방에 사는 선비들이 영남의 선비들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학업을 물었다. 벼슬을 좇는 자신의 몰골을 슬프게 바라보는 편지가 있었고, 초야에 은거해 사는 선비의 절개를 찬하는 편지도 썼다. 임금은 영남의 시골 마을에 사는 선비에게 조정으로 나오라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저 놈은 뉘집 자식이냐?'는 말은 개인의 잘못을 개인의 잘못으로 보지 않고 집안의 잘못으로 보는 우리의 관행이었다. 조선시대에 집안의 명망과 위신은 중요했다. 그래서 집안의 어른들은 자식을 나무라고 꾸짖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계 선생은 병이 깊어 죽을 날이 멀지 않다고 판단, 자식과 손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일일이 적어 보냈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 돈을 어떻게 거두고 쓸 것인가를 적어 남긴 사람도 있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의 횡포를 관아에 고하는 진정서도 있다. 1847년 경상도 청도 일위면 지촌 마을 사람들 12명은 연서로 이웃 마을 사람들의 횡포를 고발했다. 지촌 사람의 진정서는 이웃 3개 마을 사람들이 무시로 무리를 지어 내려와 횡포를 부리고, 백주에 지촌 사람을 때려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고, 남이 베어서 쌓아둔 풀을 훔쳐가고, 다 자란 보리를 밟아 엉망으로 만들고 있으니 처분을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집안 간 싸움의 내용을 밝히고, 나라를 위해 세운 공을 공정하게 평가해달라는 내용, 낙동강의 고질적인 범람을 막기 위한 방도를 다루는 문서 등도 있다. 영남 선비의 눈에 보인 세상 이야기도 있다. 경상도 예안의 한 선비는 성균관에 입격해 서울에 머물면서 보고들은 이야기를 일기로 남기기도 했다.
이 책은 다양한 고문서의 원본 사진과 원문, 해설을 곁들이고 있다. 지금까지 고문서 관련 글들이 전문 분야 학자들을 위한 것이라면 이 책은 대중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적이면서도 전문성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오래 수장고에 있던 고문서가 당대를 모두 증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귀하고 흥미로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당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
360쪽, 2만1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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