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그 시절 기생들 (하)
일제시대 강명화(康明花)라는 기생이 있었다. 그녀의 짧은 삶이 소설과 영화로 널리 알려진 바 있다. 또한 월간지 '조광'의 1936년 6월호에 가장 먼저 단발을 실천한 여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단발을 하게 된 사연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가위로 머리채를 싹둑 잘랐는데, 기생이 머리채를 자른다는 것은 그 노릇을 그만두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1901년 평양에서 조금 떨어진 산골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살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 윤씨가 기적에 올렸고, 뒤에 서울로 올라와 대정권번에서 명화(明花)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와 가무 솜씨로 장안의 화제를 몰고 다닌 이름난 기생이었다. 열아홉 나이에 대구의 부호였던 장길상(張吉相, 동산에 있었던 아흔아홉 칸 저택의 소유자)의 아들 장병천(張炳天)과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장병천은 이미 혼인하여 부인이 있었으나, 두 사람은 탑골승방(보문사)을 찾아 부처님 앞에서 백년해로를 맹세하였다.
장병천이 기생첩을 두었다는 소문이 그의 아버지 귀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집 밖 출입을 못하도록 단속하는 한편 용돈마저 끊어버리자 두 사람은 곤궁한 처지가 되었다. 골똘히 생각한 끝에 일본으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강명화의 패물을 팔아서 여비를 마련해 몰래 도쿄로 떠났고, 셋집을 얻어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장병천은 게이오대학 예비과에 등록하였고, 강명화는 우에노 음악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영어를 배웠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장병천의 아버지가 사랑의 도피 행각을 알고 즉시 돌아오라는 엄명과 함께 생활비마저 보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강명화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생활비를 지원 받았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돌아왔다. 1년 6개월 남짓한 세월, 가난하지만 행복했다.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했으나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강명화는 처지를 비관해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르렀고, 장병천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장병천을 만난 지 5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부탁이었다.
"나리, 아무리 어려워도 옥양목 두 통하고, 흰 구두 한 켤레만 사다 주시겠소."
1923년 6월 7일, 강명화는 인력거에 올랐다. 두 사람은 용산역에서 만나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온양온천으로 향했다. 백짓장같이 창백한 얼굴이 눈처럼 새하얀 옥양목 치마저고리며 흰 구두와 어우러져 한 송이 우아한 백합 같았다. 두 사람은 온천을 하고 산보도 다니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했다. 며칠을 그렇게 보낸 뒤 강명화가 쥐약을 먹었다. 신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장병천이 그녀를 품에 안고 "내가 누구인지 알겠느냐"고 물었다.
"세상 사람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파건……."
장병천의 별호인 파건을 부르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녀의 나이 스물셋이었다. 시신은 서울로 옮겨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고, 장병천의 부친도 죽은 사람에게 미안했던지 제문과 제수를 마련하여 명복을 빌었다. 이 같은 사실이 '꽃 같은 몸이 생명을 끊기까지'라는 제목으로 1923년 6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되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장병천 또한 같은 길을 결심했다. 세상을 비관하던 장병천은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죽으면 이태원 공동묘지에 강명화와 합장해 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결국 같은 해 10월 29일 쥐약을 먹고 스물두 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정사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소문은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국내는 물론 일본까지도 널리 퍼졌다. 호사가들은 두 사람의 죽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1924년 일본에서 하야가와(早川) 감독에 의해 '비련의 곡'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졌고, 주연은 기생인 문명옥(文明玉)이 맡았다.
세월이 흘러 해방이 되었고, 그녀가 죽은 지 44년이 지났다. 1967년 강대진 감독이 조흔파 원작의 '강명화'를 윤정희·신성일 주연의 영화로 만들었다. 그 영화는 아세아극장에서 개봉되었고,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였던 10만여 관객을 모았다. 영화관 앞에는 대구관·계림관·죽림헌·청수원 같은 대구의 요정 기생들로 붐볐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세 폐지해라"…이재명 블로그에 항의 댓글 1만여개 달려
尹, 한동훈 패싱 與 지도·중진 ‘번개만찬’…“尹-韓 앙금 여전” 뒷말
탁현민 "나의 대통령 물어뜯으면…언제든 기꺼이 물겠다"
文 “민주당, 재집권 준비해야…준비 안 된 대통령 집권해 혼란”
“환자 볼모로 더 이상 집단 행동 안된다”…환자 보호자 “하루빨리 협상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