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대구음악遺事<유사>♪] 인생은 낙화유수

60년대 나훈아와 남진이 서로 ‘나 잘났소’하고 라이벌 대결을 보여 가요 팬들에게 재미를 주었다. 몇 년 뒤 그 것을 흉내 내어 송대관과 태진아가 무대에서 맞대결하는 모습을 연출하여 관심을 모았다.

가요계 양자대결의 원조는 남인수와 현인이다. 이들은 59년 봄 부산에서 세기의 대결을 선보였지만 사실 둘의 대결은 그 몇 년 전 대구에서 처음 시작하였다. 남인수의 대구 인연은 만경관에서 시작이 된다. 1945년 8월 15일 만경관에서 악극단 공연 중 해방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노래고 뭐고 다 때려 치고 가수나 배우나 시민들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53년에는 대구에 살며 오리엔트 레코드사에서 ‘향수’, ‘청춘 무정’을 녹음한다. 현인은 대구에 살던 중 51년 여름 양키시장의 강산면옥서 냉면을 먹다가 갑자기 악상이 떠오른 작곡가 박시춘이 강사랑에게 즉석 작사를 부탁하고 현인을 오리엔트 다방으로 데리고 올라가 녹음실에서 부르게 한 노래가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남인수는 1918년 진주에서 출생했는데 가난해서 소학교(제2공립 심상소학교, 진주봉래초등) 밖에 다니지 못했다. 어릴 적 이름이 최창수였고 나중에는 강문수가 된다. 일찍 남편을 여읜 어머니가 가난을 이기지 못해 재취 댁으로 개가한 탓에 이름이 둘이 된 것이다. 현인은 남인수보다 한 살 아래였는데 부산 영도구 영선동 부잣집 아들이었다. 서울 가서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등)를 다녔고 졸업 후 일본 우에노 음악학원(도쿄 예술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다. 남인수는 일제의 강요로 살아남기 위해 친일적 노래 두 곡을 불렀다고 두고두고 친일파라는 욕을 얻어먹는 불운아였지만, 현인은 만주나 홍콩을 돌며 해외 공연만 하고 산 덕에 잘 먹고 살았고 매국노 소리도 듣지 않는 행운아였다.

 

남인수와 현인은 전국적인 스타였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자 대구로 피난을 와서 살게 된다. 둘은 같은 경남사람인데다 나이도 한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친하게 지냈다. 둘 사람 다 당구에 취미가 있어 향촌동 ‘초원의 집 자리’에 있던 당구장에서 자주 대결을 하였다. 남인수는 나중에 고향에서 당구장을 할 정도로 당구 광이어서 잘 칠 때 천점 정도까지 쳤다. 그러나 현인은 당구 200정도 밖에 못쳐 항상 남인수의 호구노릇을 하였다. 당구 대결에는 항상 남인수가 승리자였다.

 

둘의 노래 진검 승부는 전쟁 후 부산에서 벌어진다. 이미자가 데뷔하던 59년 부산극장에서 서바이벌 공연이 벌어진다. 남인수 측은 구봉서가, 현인 측은 곽규석이 응원 단장이었다. ‘가거라 삼팔선’에 ‘신라의 달밤’ ‘청춘고백’에 ‘비 내리는 고모령’ 등으로 둘은 한 참 치고받는다. 결국 관중들은 남인수를 가요 황제로 등극시키며 대결은 끝난다.

남인수는 1962년 6월 26일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 세상을 떴으나 현인은 2002년까지 천수를 누렸다. 생명 대결에는 현인이 승리했다. 남인수의 장례식장에는 대중가수들이 총집합했다. 소복한 여가수들과 기생이 상여 뒤를 따르며 부른 노래는 ‘낙화유수’,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삼팔선’, ‘무너진 사랑탑’ 이었고 그의 부인 이난영이 ‘황성옛터’로 조객들에 화답을 하면서 장례식이 끝났다. 이 자리에는 50년대 후반부터 가요계의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현인도 이 모습을 지켜보며 “형님 가시오. 인생은 낙화유수요.”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전 대구적십자 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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