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②대구교육감 강은희 후보를 추천합니다-모친 김선자 여사

강은희 대구시교육감 후보의 모친 김선자(76) 여사가 대구 시민들에게 강 후보의 선거용 명함을 돌리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강은희 후보 캠프 제공
강은희 대구시교육감 후보의 모친 김선자(76) 여사가 대구 시민들에게 강 후보의 선거용 명함을 돌리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강은희 후보 캠프 제공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에 자식 키운 부모 마음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제 딸 은희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쉽고 눈물로 얼룩져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시조부님은 국채보상운동 발기인의 한 분이었어요. 독립유공자이신 시아버님과 시숙부님은 상주 3.1만세 운동을 주도하시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그 많던 재산과 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집도 방도 없어 강씨 문중 제실에서 비바람을 가리며 힘겹게 살았지요.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난 은희는 공부도 잘하고 늘 반장을 했습니다. 똑똑하고 기특한 것이 오히려 이 엄마에게는 더 가슴 아프고 가난으로 인한 죄책감이 컸습니다. 착한 심성의 딸을 대할 때마다 제대로 입히고 먹이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었지요.

고등학교 입학 시기가 되자 가정 형편을 생각해 돈도 벌며 공부도 할 수 있는 한일합섭 산업체학교에 가겠다고 했어요. 그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꿈이라 했으니 어떻게든 대학에 보내줄 테니 인문고로 가라고 달랬지요.

아버지 병간호를 하면서도 교사가 되고자 경북대 사범대에 들어갔어요. 은희가 대학 3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저를 도와 은희가 가장 노릇을 했답니다. 대학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로 세 동생의 학비를 마련하며 돌보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 봉화 소천중고에 발령을 받았어요. 첩첩산골 시골학교였지만 은희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즐거워했고, 가난때문에 학교 대신 공장에 취업하는 여학생들이 너무 불쌍하다며 내 앞에서 울기도 했지요. 아마 중3 때 자기 생각이 나서 그랬겠지요.

결혼한 후에 사위의 사업이 어려워져 단칸방을 전전하고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은희는 교직을 떠나 사위 사업을 돕기 시작했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요. 딸이 회사 일을 하면서 사업이 잘되어 대구의 대표 기업이 되고 IT여성기업인협회장도 지냈습니다. 교사를 그만 둘 때 학생들 곁을 떠나는 것을 그렇게 가슴 아파했던 은희는 국회의원으로 교육분야 일을 하고 장관으로 청소년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그렇게 일이 많으면서도 너무 행복해 했지요.

딸 우리 은희가 고맙고 눈물겹습니다. 항상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일벌레처럼 살아왔던 은희가 대구시교육감이 되어 늘 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꿈, 아이들 교육과 함께 하고자 했던 바람을 이룬다면 언제나 그랬듯이 잘 해낼 거라고 엄마인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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