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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빈의 시와 함께] 못 다한 말-골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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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1958~ )

장하빈 시인
장하빈 시인

자장면 한 그릇 천 원 할 때
세 그릇 값으로 시집 한 권 샀던 그 시절
나는 쫄쫄 굶긴 배 띄워놓고 배부른 척하다
신세타령만 하는 비렁뱅이
시인이 되고 말았다
책장에 꽂힌 해묵은 시 몇 편 거들먹거리며
유명시인 헐값에 다 팔아먹고
이젠 골방으로 밀려난 시의 집들마저
경매로 넘겨야 할 판이니
내게로 와 굶어죽은 시혼들이여
지렁이처럼 구불텅구불텅 기어가다
걸려 넘어지고 잘리고 짓밟힌 숱한 문장들이여
그대 못 다한 말, 못 다한 저녁의 풍금소리
언제쯤 울려 퍼질 것인가
골방에 골백번 더 처넣었다 건져낸 말
아, 누가 숨은 상상과 행간의 말들을 읽고 갈까
자장면 한 그릇 값도 채 안 되는 나의 집 나의 시집
골방에서 말을 잃은 이 밤
―시집 『참, 조용한 혁명』(시문학사, 2016)


시의 집을 짓는 자여! 시집 한 권과 자장면 세 그릇을 맞바꾸던 시절에 시장기 속여 가며 어렵사리 시인이 되었으나, 시집 한 권이 자장면 한 그릇 값도 채 안 되는 오늘의 황폐한 현실 앞에 그만 허탈감에 빠지는가? 이 밤도 캄캄한 골방에서 "내게로 와 굶어죽은 시혼들"을 부둥켜안고 '참, 조용한 혁명'을 꿈꾸는 비렁뱅이 시인이여!

시인은 왜 '골방'과 같은 어둡고 구석진 공간 속으로 스스로를 은둔시키는 걸까? 그건 '타메이온'(골방)이라는 은밀한 대화와 진리의 방에 갇혀 "걸려 넘어지고 잘리고 짓밟히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숨은 상상과 행간의 말들"을 건져 올릴 수 있기 때문이리라. 시의 산실인 '골방'은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삼가서 웅녀로 환생한 '동굴'이나, 새가 알에서 깨어나고 날갯짓을 익히는 '둥지'와 다름없는 통과의례(通過儀禮) 공간이다. 따라서 '골방'은 "못 다한 말"과 "못 다한 저녁의 풍금소리"가 울려 퍼지는, 재생과 부활의 장소인 셈이다.

시인 · 문학의 집 '다락헌'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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