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소비자가 뿔났다

서종철 논설위원
서종철 논설위원

하루가 멀다며 꼬리를 무는 BMW 차량 화재 사태는 올여름 폭염만큼이나 고약하다. 이미 화차(火車) 신세가 된 차주는 말할 것도 없고, 언제 화마의 세례를 받을지 노심초사하는 수십만 BMW 운전자의 불쾌지수는 폭염보다 한참 윗길이다. 메이커나 우리 정부가 보여준, 한심하다 못해 불량한 대응 태도로 말하자면 '열상가상'(熱上加傷), 더워 죽겠는데 속까지 끓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업은 '소비자는 왕'이라며 사탕발림을 해왔다. 늘 '고객 감동'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런 인식이 눈곱만치라도 될까. 그저 소비자는 불만 없이 제품을 팔아주는 존재로만 인식해왔다. 문제점을 제기하고 따지는 '진상'은 요주의 인물이고, 나머지는 모두 '호구'로 취급되어온 셈이다.

소비자가 과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하찮은 존재일까. 고객 감동은 차치하고라도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아"라는 반응을 얻기가 그리도 어려운가. 까다로운 소비자가 원인이 아니라면 이 문제는 기업의 고질적인 생리가 만들어낸 불행한 현실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얼마 전 경기도 시흥의 한 아파트단지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주인공은 대구 토박이 건설기업인 화성산업이다. 입주를 앞두고 주민이 시설을 점검해봤더니 정말 기가 막혔다. 이런 기업도 있다니 깜짝 놀란 것이다. 1천594가구의 대단지 공사에서 하자나 흠잡을 곳이 거의 없어서다. 내 집처럼 성심성의를 다해 지은 시공사의 진심과 땀을 주민들이 가슴으로 느낀 것이다.

'왜 이렇게 잘 지어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현수막에다 감사패까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새 아파트가 물바다가 되고 벽이 갈라지는 것도 모자라 날벌레 소굴이 되는, 그런 뉴스가 아니라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는 감사패라니, 금시초문의 일이다. 물론 화성산업이 모두 천의무봉(天衣無縫)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윤보다 가치와 신뢰를 먼저 생각한 기업의 자세는 사소하지만 크고 울림도 깊다.

하지만 BMW는 거꾸로 갔다. 수천만원을 주고 산 차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는데도 소비자 탓을 했다. 불타는 차가 점점 더 늘어도 발뺌하기에 바빴고, 소비자 민원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뒷짐만 진 국토교통부도, 물러 터진 법 체계도 소비자 분노는 안중에도 없었다. 뒤늦게 운행정지 명령 검토니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도입이니 목소리만 크다. 내년에나 겨우 시행될 '레몬법'도 한참 늦었다.

그러다 사태가 조금 숙지면 또 어떤 변명과 소비자 취급 요령이 나올지 모른다. 신 레몬은 쓰일 곳이라도 있지만 기업이 쏟아내는 '불량 오렌지'는 쓸모는커녕 소비자를 괴롭히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소비자를 보호하는 '절대 반지'가 없다면 돈 버리고 속 끓이는 일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돈벌이에 눈이 먼 기업을 강하게 처벌하는 견제 장치 등 사회적 합의가 급하다.

BMW 화재 사태와 폭스바겐의 배기가스 데이터 조작, 옥시 가습기 살균제 파동이 과연 일부 소비자만의 문제일까. 언제 우리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는 돌부리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소비자를 함부로 '취급'하는 기업을 이제 더는 두고볼 수 없다. 불량기업을 일소하지 못한다면 적폐가 그 사회 전체를 뒤덮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소비자를 자극하지 않는 한 소비자는 그냥 필요에 따라 선택하고 사용하는 '쿨'한 존재다. 그런 소비자를 누가 뿔나게 만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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