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 오디세이] ‘혹부리 영감’ 부자 되게 한 개암나무

개암나무
개암나무
이종민 선임기자
이종민 선임기자

나무하러 산에 갔던 혹부리 영감이 깊은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허름한 오두막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쉬려다 본의 아니게 한밤중에 도깨비들의 광란의 놀음을 엿보게 됐다. 배가 너무 고팠던 혹부리 영감이 낮에 따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깨금'을 꺼내 깨물었더니 "뿌지직" 소리가 너무 커서 도깨비에게 들키고 말았다.

도깨비들이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불러주자 도깨비들이 어디서 나는 소리냐고 물었다. 영감이 혹에서 나는 소리라고 둘러대자 도깨비들은 금은보화를 주고 혹을 사갔다. 영감은 혹도 떼고 금은보화도 챙겨 큰 부자가 됐다.

어릴 적 여름밤에 동네 어른이 들려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열매는 '깨금'이었고 우리도 고소한 열매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동화 '혹부리 영감'에 나오는 열매는 개암이다. '깨금'은 개암의 경상도 사투리다. 개암이 열리는 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키 작은 토종나무

개암나무는 전국에서 자라는 우리 조상들과 친숙한 토종나무다. 소나무, 참나무, 팽나무와 같은 큰 교목이 아니라 키가 상대적으로 작은 관목이며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활엽수다. 자작나뭇과 집안의 나무로 다 자라도 줄기 굵기는 사람 팔목만 하며 높이는 사람 키보다 조금 더 크다.

개암나무 수꽃
개암나무 수꽃

봄에 수꽃과 암꽃이 따로 핀다. 3월에 꼬리 모양의 긴 수꽃이 잎보다 먼저 가지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바람에 흔들린다. 반면에 암꽃은 꽃잎이 없이 암술대만 바깥으로 튀어나온 모양이기 때문에 눈에 확 띄지 않는다. 이유는 꽃가루를 전달하는 곤충의 도움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소나무의 송홧가루처럼 바람을 이용하는 풍매화(風媒花)다.

바람을 타고 날아간 꽃가루가 암꽃에 닿아 수분이 되면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도토리보다 조금 작다. 추석이 되기 전에 열매의 맛을 볼 수 있는데 밤 맛이 나기는 하지만 밤보다는 못하다. 이런 의미에서 접두사 '개'를 밤에 붙여 '개밤'이 됐다가 '개암'으로 이름이 굳어졌다.

한자 이름은 산반율(山反栗), 진율(榛栗)이라고 하며 밤 栗(율) 자가 공통으로 들어간다. 옛날에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는 먹거리는 많지 않았다. 개암은 상대적으로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과일이었다. 또 호두, 밤, 은행, 땅콩과 함께 정월 대보름의 액운을 물리치기 위해 사람들이 깨무는 부럼으로도 인기가 높았다.

◆헤이즐넛 커피 향신료

개암은 영어로는 개암나무류(Hazel)의 열매(Nut)라는 뜻으로 '헤이즐넛(hazelnut)'이다. 커피에 개암 추출물이나 개암 향을 넣어 고소하게 만든 헤이즐넛 커피를 국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즐긴다. 또 헤이즐넛을 더한 초콜릿은 한층 더 풍미가 있어 아이들도 좋아한다.

개암은 고려 때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임금의 제사상에 올라갈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여러 가지 풍속과 특산물이 나오는데 음력 6월에 많이 나오는 과일 중에 개암을 꼽았다. 개암은 다른 나라에 특산물로 소개될 만큼 유명했다.

개암나무 열매
개암나무 열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주세붕이 풍기군수 시절 백운동서원을 건립하고 관련 기록을 수집해 엮은 역사서 『죽계지』에 「진설도에 따라 여러 가지 제물 쓰는 법식」(依圖祭用雜物式) 중에 "잣·개암·밤·대추 가운데 알맞은 것으로 갖춘다(栢榛栗棗中隨備)"는 내용이 나오는데 개암은 당시 서원의 향사에 제물로 쓰였을 정도다. 그러다 더 좋고 맛있는 과일이 많이 나오자 슬며시 제사상에서 밀려났다.

생육신인 매월당 김시습의 『매월당시집』 제1권에 수록된 시 「고탄」(古呑)은 기행이 가난한 집 살림살이보다 못하다는 것을 읊으면서 오솔길에 개암나무가 걸리적거리는 것조차 설움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득히 청산은 멀고

渺渺靑山遠(묘묘청산원)

가고 또 가도 푸른 물가

行行綠水濱(행행록수빈)

높은 봉우리에 저녁 해 머물고

高峯留晚照(고봉류만조)

오솔길 거친 개암나무에 걸리네

小路礙荒榛(소로애황진)

만 리나 되는 천지는 광활한데

萬里乾坤闊(만리건곤활)

평생을 불우하게 산 사람이로다

平生落魄人(평생낙백인)

이제야 알았네, 나그네 즐거움

始知爲客樂(시지위객락)

가난한 집 살림살이보다 못한 것을

不及在居貧(부급재거빈)

개암나무 열매
개암나무 열매

◆유럽 신화에 자주 등장

개암나무는 유럽에서도 생활에 널리 쓰였다. 열매는 식용유 원료로, 줄기는 마법 지팡이나 수맥 탐지봉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유용한 나무였다.

또 사랑을 점칠 때 개암 열매를 사용했다. 개암에 자신과 애인의 이름을 각각 써서 불에 넣은 뒤에 같이 튀거나 불에 타면 사랑이 이뤄지는 걸로 해석했다. 양다리를 걸친 경우 두 연인의 이름을 각각 개암에 새겨 불에 넣은 뒤 오래 타는 개암 쪽의 연인을 선택했다고 한다.

게르만 신화에서 개암나무는 번개의 신 '토르(Thor)'에게 봉헌된 나무이기 때문에 번개를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전령 헤르메스의 지팡이는 개암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비를 내리게 하거나 수맥을 찾는 마법의 지팡이로 여겼다. 요즘도 개암나무의 Y자로 갈라진 가지를 수맥을 찾는 탐지봉으로 쓴다고 한다.

개암나무 가지가 회창회창해서 잘 휘감기다 보니 줄기는 회초리로도 쓰였다. "개암나무 즙으로 정신을 차리게 한다"는 말은 호된 매질을 예고하는 다른 표현이었다.

문학 작품에도 개암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는 거인의 나라에서 공연을 하는데 짓궂은 학동이 던진 호박만 한 개암에 맞아 죽을 뻔했다고 나온다. 『채털리부인의 사랑』에서는 주인공 코니가 자주 놀러가는 오두막 주위에도 개암나무가 있었다.

독일에서 '개암나무 덤불로 가다'라는 표현은 정인(情人)과의 밀회를 뜻한다. 성적 상징이 강한 나무인 만큼 상대가 꿈쩍하지 않을 때에는 개암나무 껍질을 태운 가루를 상대방이 먹을 음식에 타는 주술적 행위를 서슴없이 했다. 이쯤 되니 개암에서 짠 기름을 성욕 증강제로 여기는 풍습이 자연스럽게 정착됐다.

중국 훈춘 새벽시장 개암 열매
중국 훈춘 새벽시장 개암 열매

◆신데렐라 소원 들어줘

동화 『신데렐라』에서 주인공은 장에 가는 아버지께 옷이나 보석 대신 나뭇가지를 꺾어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가 꺾어준 개암나무 가지를 어머니 산소 곁에 심어놓고 기도를 드렸다. 뿌리를 내린 나무에 흰 새가 날아와서 소원을 들어줬다.

노천명의 시집 『창변』에 나오는 「망향」이라는 시에는 고소한 어린 시절이 담겨 있어 나이든 사람들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

둥굴레山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뻑꾹새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곰방대 곰취 참두릅 개두릅을 뜯던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맹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길 즐겼다

……

개암쌀은 개암 속 알맹이를 말한다. 여름방학 막바지인 8월 하순에 잘 익은 개암의 딱딱한 껍질을 이로 깨물면 안에서 고소한 알맹이가 나온다. 그 맛에 빠져 소 먹이러 산에 갔다가 해 지는 줄도 모르고 깊은 산속을 헤맨 어린 날의 추억도 이맘때쯤 산행하면 생각난다.

요즘은 개암 열매를 보기 어렵다. 몇 년 전 중국 동북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 한 마을의 새벽시장 난전에서 개암을 수북이 모아놓고 팔고 있었다. 사먹어 봐도 풍토가 달라서 그런지 옛날 먹던 고소한 맛이 아니었다.

근래 산에는 개암나무가 그리 흔하지 않다. 어쩌다 본 개암나무 열매가 제대로 익지 않아 부실하다. 예전에 그 많고 많던 개암은 다 어디로 갔나? 아쉽다. 전설과 함께 사라진 도깨비들이 가져가지는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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