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팔공총림 동화사 방장 의현 대종사 "호국불교 다시 꽃 피우는 것이 제 마지막 소임"

지난 3월, 팔공총림 동화사 방장에 의현 큰스님 만장일치 추대
밀가루 포대 엮어 태극기 만들어 한국전쟁 때 팔만대장경 지켜
"불교재산관리법 폐지는 불교 자주화의 첫 걸음"
"방장이 된 것은 대구경북 시도민이 수호해줬기 때문"

팔공총림 동화사 제2대 방장 의현 큰스님은
팔공총림 동화사 제2대 방장 의현 큰스님은 "팔공총림의 수행가풍을 진작하고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소명이다"고 말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팔공총림 동화사 제2대 방장 의현 큰스님은
팔공총림 동화사 제2대 방장 의현 큰스님은 "성철·향곡·자운 큰스님들의 봉암사결사를 어찌 잊겠습니까"라며 "제가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을 때는 열세 살 정도로 향곡 스님을 따라 봉암사에 가서 성철 스님을 시봉하며 행자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지난 3월 29일, 조계종 중앙종회는 팔공총림 동화사 방장에 의현 대종사를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종정을 지낸 초대 방장 진제 대종사에 이은 제 2대 방장이다.

속명이 서황룡인 의현 대종사는 16세에 출가해 성철, 청담, 향곡 스님 등이 중심이 돼 시작된 봉암사 결사의 현장을 지켰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10·27 불교 법난의 주요 피해자이면서 명예회복의 주역이기도 했다.

또 1986년 9월 제 25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서 한국불교 자주화를 선언한 해인사 승려대회를 개최했으며 불교 관련 악법 철폐를 주도했고 불교방송 개국을 통해 포교의 현대화를 이룩하는 등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사실 의현 대종사가 총무원장을 맡은 기간 만큼 우리 불교계가 교세를 늘리고 영향력을 키웠던 적도 없다. 이런 업적을 들어 의현 대종사를 20세기 한국불교 중흥의 초석을 놓았다고 칭송하는 이들도 많다.

반면 한때 반대파로 부터 권력에 기생하는 정치 승려, 부패 승려라는 오명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평가절하에 대해 할 말이 너무 많은 듯했다. 결코 사리사욕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정치 권력에 빌붙어 어용한 게 아니라 불교 중흥과 자주화를 이루기 위해 권력과 타협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매일신문은 11일 동화사에서 1973년 동화사 주지를 처음(의현 대종사는 이후 동화사 주지를 두 차례 더 역임했다.) 맡은 지 50년 만에, 1994년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지 30년만에 팔공총림 동화사의 방장으로 추대된 의현 대종사를 만났다.

-먼저 10대 초였을 건데요. 성철 스님을 시봉 하시던 때의 일화부터 소개해 주십시오.
▶저는 어려서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불심이 깊으셨던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절을 자주 찾았고, 결국 출가로 이어졌습니다. 13세 때 외할머니를 따라 부산 기장의 묘관음사를 찾았고, 그곳에서 향곡 조사의 손을 잡고 문경 봉암사로 갔습니다. 그리고 향곡 조사는 이 무렵 청담, 자운, 성철 조사 등과 봉암사에서 결사중이셨습니다. 이때 성철 조사를 시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성철 조사 공양도 도와드리고 빨래, 청소는 물론 잡다한 일은 모두 행자인 저의 몫이었습니다. 특히 성철 조사는 생식을 하셨기 때문에 저는 들에서 나물을 뜯고, 약초를 구하고 다녔습니다. 또 성철 조사는 몸에 쉽게 열이 오르는 병이 있으셨고, 이에 저는 '청심연자탕'이라는 탕약을 직접 만들어 드렸습니다. 이 탕약은 특히 깨끗한 물과 여러 약초의 비율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산으로 들로 물과 약초를 구하러 다니다가 늑대와 같은 짐승을 만날까 무서웠던 기억도 납니다.

어느날 성철 조사와 향곡 조사가 부르셔서 갔더니 성철 조사께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달마가 혜가선사에게 가벼이 불법을 구한다고 질책하며 구법을 위해 무엇을 내어주겠는가라고 묻자 왼팔을 잘라 구도심을 보여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너는 무엇을 내어주겠느냐고 물으시길래 저는 다리 한쪽을 내어주겠다고 했습니다. 하니 성철 조사께서 도끼를 가져오라 하셔서 가져다 드렸습니다. 두 분은 그 도끼로 구들장을 내리쳤습니다. 그때 구들장에 불꽃이 튀었습니다. 저는 그 때 생인지 사인지 모를 무아지경을 경험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성철 조사께서 찾는다며 향곡 조사께서 저를 깨우셨습니다. 갔더니 성철 조사께서 다리 잘린 놈이 어찌 왔느냐 하시기에, 오도송을 읊으니 성철 조사께서 법거랑(깨친 선사들의 대화)을 하였다며 저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성철 조사 지시로 해인사로 가 유엔군의 폭격으로부터 팔만대장경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전말은 어떻게 된 겁니까?
▶6.25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후 성철 조사는 제게 해인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성철 조사를 계속 시봉하고 싶다고 했지만, 성철 조사는 '해인사에 곧 불이 날 것이다. 불을 끌 사람은 너 밖에 없다. 불을 끄고 다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손과 발을 끊는 심정으로 너를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바로 해인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당시 해인사를 본거지로 삼고 있던 인민군 사령부를 소탕하기 위해 유엔군 폭격기가 해인사 상공을 수시로 비행하고 있었습니다. 유엔군이 폭격을 한다면,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장경각은 물론 해인사 전부가 소실될 수 있는 큰 위기였습니다. 저는 해인사 원주 법홍 스님과 상의하여 밀가루 포대를 엮어 대형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장경각 지붕에 올라가 그 태극기를 펼치고, 저녁 무렵 다시 거둬들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제가 스님들보다 몸도 가볍고 날래고 해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해인사에 여전히 대한민국을 지지하고 팔만대장경을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주던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 이 소식을 듣고, 해인사 폭격을 유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문에 다행히 유엔군은 해인사를 폭격하지 않았고, 호국 호법의 상징이자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문화재이자 세계 인류의 정신문화 유산인 팔만대장경도 자손만대로 전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의현 큰스님.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의현 큰스님.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1980년 신군부가 집권을 하면서 벌어진 10·27 법난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요. 끝내 사과까지 받아내셨다면서요.
▶10·27 법난은 1980년, 신군부가 전국 사찰을 급습해 교권을 유린한 사건입니다. 저는 당시 은해사 주지로 있었고, 사건을 들은 후 바로 상경해 긴급 중진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신군부가 국회를 해산시키고 헌정 질서를 무너뜨렸다. 불자들은 우리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사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에 의해 보안사의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고,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저는 큰 방에 나체로 눈은 가려진 채 있었고 그들은 딱 죽기 직전까지 저를 공 차듯 발로 찼습니다. 피를 토하고, 기절을 수차례 반복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의사가 오더니 죽진 않겠다고 말했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에 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저에게 ▷조계종은 부도덕한 집단이다 ▷나는 파렴치범이다 ▷12.12와 신군부를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은 문서에 지장을 찍으라는 협박을 했습니다. 저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는 또 다른 고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제 머리 속에는 내가 결국 총과 칼에 굴복하지 않고 총칼을 꺾었다라는 환희심이 충만했습니다.

의현 대종사는 결국 정부의 사과까지 이끌어냈다. 불교계에서 맨 처음 진상규명과 사과를 요구했고 1988년 국회 '5공 비리특위'에서도 요구를 굽히지 않은 결과 같은 해 12월 강영훈 당시 국무총리로부터 유감 표명과 함께 불교계 권익 회복과 보상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당시 골반을 크게 다친 의현 스님의 고문 후유증은 4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60대 사건으로도 선정된 1986년 해인사 승려대회를 통해 불교 자주권 회복을 선언하고 불교 관련 악법 철폐를 내걸어 성사시킨 일도 있습니다.
▶해인사 승려대회는 불교 자주화, 국가 민주화, 사회 선진화, 민족 통일의 염원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총독부는 사찰령을 반포해 독립운동의 온상이 될 지도 모를 전국의 사찰들을 통제했습니다. 해방 이후 1963년에는 정부가 이를 승계산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해 다시 불교계를 억눌렀습니다. 불교재산관리법은 사찰의 예결산을 지방관청에 보고해야 하거나, 대외적인 주지 활동도 제약이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불교의 자율권을 박탈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재산관리법 폐기'를 촉구한 것입니다.

이는 종단 내부의 결속을 가져왔습니다. 전국 2천여명의 스님이 승려대회에 참석했고, 대한불교청년회, 전국신도회를 비롯해 해외에 거주하는 스님들도 성명을 잇따라 발표하며 이를 지지했습니다.

이후에도 밤낮으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인들을 만나 불교재산관리법의 부당성을 알렸습니다. 1987년 11월, 드디어 국회가 불교재산관리법을 폐지하고, 전통사찰보존법으로 대체 입법을 했습니다. 불교계가 정부의 통제와 억압의 방식에서 벗어난 것이 이때였습니다. 불교계로서는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뿌리 뽑고 민족정기를 회복함으로써 진정한 자주 불교를 이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총무원장 시절 각종 악의적인 루머에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권력이 보기에는 고분고분한 승려가 아니었습니다. 불의를 보고는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동화사 주지 시절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인권은 불성인데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가 화원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신군부가 벌인 10.27 법난 때도 그랬고요.

불교 자주화를 선언한 해인사 승려대회를 마치고는 장세동 부장이 있던 안기부로부터 사표를 제출하라는 압력도 받았습니다. 안기부는 저를 미행하고 도청하며 음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음해는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어요.
이 자리에서 반드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특히 불교계율에 반하는 몸가짐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용납하지도 않았습니다. 불교계의 발전과 중흥을 위해 이 한 몸 다 바쳤다는 자부심도 있습니다.

저를 정치승려라고들 하는데 당시 정치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다면 악법철폐와 불교방송 개국 등 수많은 불교계 현안들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동화사의 상징물이 된 약사여래 통일대불 건립 당시 정주영 회장과의 인연이야기는 불교계에서 알려져 있지만 국민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정주영 회장님이 어렸을 때 강원도 통천 고향에서 서울로 나올 때 갑자기 내린 눈에 금강산에 일주일간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장안사 스님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면하고 목숨도 구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이후 정 회장님은 평생 불교에 대한 인연과 스님들의 그 마음을 잊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와 정 회장님은 통일을 기원하는 대불을 조성하고자 뜻을 모으며 사이가 매우 가까웠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온 겨레의 마음을 모아 약사여래불을 조성하고, 그 공덕으로 우리 민족이 화합해서 통일 조국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고, 제가 삼국통일의 발상지이자 신성한 겨레의 얼이 담긴 동화사에 모시자고 하여 그러기로 했습니다. 정 회장님은 그때 큰 시주를 하셨습니다. 정 회장님의 부인 변중석(보현행) 보살님도 동화사 주차장 부지 1만5천평을 매입해 시주하셨습니다.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점이 있다면 정 회장님과 한 약속 가운데 가장 큰 걸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 총무원장 직을 1년만이라도 더 할 수 있었다면 정 회장님의 구상대로 국내 최대 불교 의료시설을 지어서 세계적인 자랑거리로 만들 수 있었는데 당시 모든 여건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그 문제로 인해 저는 총무원장직에서 물러나게 됐고요. 영겁의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불교계와 우리 사회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게 돼 참으로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비밀로 하기로 한 정 회장님과의 약속 때문에 공개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상무대 이전 자금이 통일대불 불사금으로 사용됐다는 등 의혹이 많이 제기됐습니다만 모두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군부대 이전 자금을 불사에 쓴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방장 취임식이라 할 수 있는 승좌법회를 열지 않았습니다. 대신 마침 튀르키예를 강타한 지진피해 돕기 법회를 열었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까?
▶6.25 전쟁 당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을 때 튀르키예 군인 수백 명이 팔공산 자락의 다부동 전투에서 전사를 하면서까지 대구를 지켜냈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는 달라졌을 겁니다. 그 국운이 다시 자손만대로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복락을 누리면서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터전을 만들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분들의 후손들이 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들을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병사들의 조상님과 후손들의 집과 학교를 지어주는 일이 승좌법회를 여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마음이 또 팔공산에 전달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의현 큰스님.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의현 큰스님.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1973년 처음 동화사 주지를 맡은지 50년(의현 대종사는 그후 두 차례 더 동화사 주지를 지냈다.) 1994년 총무원장에서 물러난지 30년 만에 팔공총림 동화사 방장으로 추대되셨습니다. 꼭 하시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호국 불교를 다시 한 번 꽃 피워야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키셨던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이 서려 있는 동화사에 사명대사 박물관과 교육관을 건립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를 통해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호국정신이 계승되어야 합니다.

또한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도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안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곳곳에 위험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 호국불교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잘 살려내 불자들이 위기 극복에 앞장선다면 미래 세대가 열어갈 대한민국을 더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팔공총림의 호국불교 전통과 수행가풍을 진작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의현 대종사는 마지막으로 파란만장한 격랑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부처님의 가피로 이뤄진 것 같다고 했다. 30년 가까운 야인 생활을 뒤로 하고 팔공총림의 방장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불자들과 대구경북의 시도민들이 걱정해주고 수호해주셔서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한다며 합장했다.

인터뷰=이동관 편집이사
정리=심헌재 기자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