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의 예술기행] 섬 전체가 미술관인 일본 나오시마

잿빛 걷히고 파란 하늘 '세계 7대 예술 성지'
자연·건축 경계 없는 '소통의 공간'…산업폐기물로 피폐해진 섬 재탄생
베네세 뮤지엄 세계적 작품 100점…모네 그림 잘 어울리는 지추 미술관
발길 옮기면 근처에 이우환 미술관…쿠사마 야요이 노란 호박도 유명세

베네스하우스.베네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홈페이지
베네스하우스.베네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홈페이지

내 유년엔 유난히 녹슨 것들에 대한 기억이 많다. 녹슨 기계, 녹슨 철문, 녹슨 못, 심지어는 녹물이 검붉게 배인 흙과 자갈 틈에 핀 민들레까지. 지금도 어디선가 아련하게 풍기는 녹 냄새를 맡으면 악취라며 코를 쥐기보다는 왠지 묘하게 정겨운 향수를 느끼곤 한다. 이것은 1960년대 농경에서 막 산업화로 내딛기 시작하는 우리나라 경제구조 변모의 표본처럼 보일 법한 대구 북구 침산동 3공단 초입에서 내가 태어난 것에 기인한 것일 터.

몇 년 전 들른 그 옛 동네는 그야말로 쓸쓸하거나 또는 비정한 느와르를 찍기에 더할 나위 없을 곳처럼 쇠락해 있었다. 방직공장과 염색공장, 철공소, 국수집 옆 선술집 그리고 빵집, 양품점이 즐비한 빛나던 거리는 오우삼이나 왕가위의 구시대물 영화 세트장처럼 추레했다. 서글펐다. 그날 나는 옛 동네가 부디 빌바오나 나오시마처럼 재생의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오르기를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원했다.

지추미술관
지추미술관

◆버려진 섬, 현대예술 이상향이 되다

오카야마에서 세토 내해(瀬戸内海)를 건너 나오시마로 가는 페리호를 탔다. 비가 내렸다. 1917년 들어선 미쓰비시 구리 제련소로 중금속에 오염되어 피폐해진 섬, 배 난간에서 점점 어두워지는 빗속 검은 바다를 보며 후쿠타케 테츠히코를 생각했다. 아동 학습서와 잡지로 큰돈을 번 도쿄 후쿠타케 서점의 창업주인 그는 늘 나오시마의 노을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아이들을 위한 자연캠프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86년 타계한다.

가업을 물려받은 아들 후쿠타케 소이치로는 태생 자체가 도시인이었지만 혼슈(本州), 규슈(九州), 시코쿠(四國)에 둘러싸인 세토 내해의 한없이 고요한 바다에 둘러싸인 나오시마를 보곤 곧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만다. 부드러운 섬의 곡선 지형으로 떨어지는 노을을 보며 생전 아버지가 그토록 이곳을 그리워하던 이유를 깨달았던 것이다.

후쿠타케 소이치로는 본사를 도쿄에서 오카야마로 옮기고 회사명도 베네세(Benese, 라틴어 '잘 살다'의 합성어)로 바꿔 피폐해진 나오시마를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명이 공존하는 섬으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10억엔을 들여 나오시마의 절반을 사들이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건축가 안도 타다오를 만나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함께 이 섬을 이상향으로 만들어 봅시다. 나오시마 선술집에서 통음하며 둘은 의기투합한다. 산업폐기물로 잿빛이 된 나오시마가 한 해 50만 명이 찾는 '세계 7대 예술 성지' 중 한 곳이 되는 시작점이었다. 베네세 레스토랑 테라스는 내부 불빛이 얼비친 창으로 화사했다. 우리는 좀 비싸지만 예약해둔 프렌치 코스 요리와 씁쓸한 와인에 취해갔다. 밤이 깊었다.

베네스하우스.베네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 홈페이지
베네스하우스.베네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 홈페이지

◆베네세 하우스(Benese House), 베네세 뮤지엄(Benese Museum)

'자연과 건축이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소통하는 공간'이란 호텔의 캐치 프레이즈답게 아침 창밖엔 푸른 잔디 너머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멀리 시코쿠 산등성이 위로 스프 속 게살처럼 퍼진 하얀 구름이 그림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통영의 유명한 편백나무 리조트와 흡사하다. 한려수도가 눈앞에 쫘악 펼쳐져 탄성을 질렀던.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은 후쿠타케 소이치로와 안도 타다오가 1992년 완공한 나오시마 첫 건축물이다.

오벌, 파크, 비치의 이름을 가진 객실 3동과 정원은 섬에서 생래한 듯 자연스럽다. 룸의 가구와 조명, 베란다에서의 조망을 배려한 것과 곳곳의 조형물까지 '자연, 건축, 예술의 공생'이란 안도 타다오의 건축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뮤지엄은 데이비드 호크니, 니키 드 생팔, 브루스 나우만, 리처드 롱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 1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역시 바깥으로 열린 구조라 시시각각 변하는 시간과 그 빛을 오롯이 느끼며 감상할 수 있다. 그들이 며칠을 묵는 미술관 호텔을 지향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이제 거대한 돌담을 돌아 지중(地中), 이우환 미술관을 건설 순서대로 돌아볼 시간이다.

지추미술관
지추미술관

◆지추 미술관, 이우환 미술관

2004년 섬에서 가장 높은 남쪽, '자연과 인간이 함께 하는 공간'을 모토로 안도 타다오가 지은 지추 미술관은 땅 속 즉 지하에 있다. 설계 과정에서부터 클로트 모네와 월터 드 마리아, 제임스 터렐 세 작가의 작품만을 위한 미술관으로 건축되었다. 입구 쪽 작은 연못과 정원은 모네의 지베르니를 닮았다. 끝없을 것만 같은 회색 노출콘크리트 터널을 따라 가면 모퉁이에서 햇빛이 쏟아지고 하늘이 열린다.

모네의 수련과 연못이 그야말로 자연광 아래 찰랑대고 있다. 인공 불빛이 없는 전시관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 모네의 그림 아니겠는가. '오픈 스카이', 제임스 터렐 작품이다. 정사각형 천장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것, 작가의 의도가 바로 읽힌다. 단 한 번도 같은 화폭을 관람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월터 드 마리아의 '시간/영원/시간 없음'은 검은 구체(球體)에 비친 자신을 계단을 올라가며 바라본다. 타자와 나의 간격이 모호해진다. 내가 바로 타자라는 말일까.

이우환미술관
이우환미술관

2010년 개관한 이우환 미술관은 반지하로 지추미술관 지척에 있다. 벽을 따라 내려가니 탁 트인 넓은 잔디밭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무채색 돌, 녹슨 쇠막대, 더 붉게 녹슨 강철판으로 구성된 이우환의 작품이 불쑥 나타난다. 미술관을 벗어난 작품이 바로 자연이라는 외침 같다. 고승이 내리치는 죽비처럼. 사물의 존재, 사람과 사물 간의 관계를 생각하라는 모노하(物派)가 이것인가. 기둥, 조응, 만남, 작은 방, 침묵, 명상의 방을 지나니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보라고 단촐하게 작가가 자꾸 속삭인다.

나오시마의 상징이 된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
나오시마의 상징이 된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

◆버려진 섬에 꽃이 피었다

섬의 혼무라 지역 이에(家) 프로젝트는 빈 집과 신사 등 일곱 채를 떠난 그들이 살았던 시간과 기억을 담은 작품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집 한 채가 한 작가의 갤러리인 셈인데 카도야는 근처의 섬 125개를 LED로 형상화해 물 위에 섬 주민들이 직접 띄운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히로시 센주, 나이토 레이 등 일본 작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섬 주민들이 안내를 한다.

쓰쓰지소 선착장 잔교 쿠사마 야요이의 노랑 호박은 여러 번 태풍에 휩쓸렸다. 빠진 호박 꼭지가 섬 어부 그물에 걸려 제자리를 찾기도 하고, 어느 폭풍에 통째로 둥둥 세토 내해에 떠다니는 것을 선원들이 건져 올린 게 해외 토픽이 되기도 한다. 다른 선착장의 거대한 빨강 호박은 구멍이 뚫려 까르륵 소리를 내며 아이들이 드나들고 섬을 순환하는 버스도 호박이다.

쿠사마 야요이의 '나르시스 가든'
쿠사마 야요이의 '나르시스 가든'

섬이 있는 오카야마 일대는 일본 내 지진이 없기로 거의 유일한 곳이다. 이를 테면 일본 십승지(十勝地) 격인데, 관동대지진 이후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용인, 경성, 자국의 후쿠오카, 오카야마 중 한 곳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다는 설도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 한 구절을 인용한 기저를 따지고 보면 내겐 이 섬이 일본에서 가장 탐나는 곳이고, 무단하게 비교된 나의 옛 동네에 대한 열패감 그리고 질투일지도.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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