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2>세계전쟁사에 빛나는 안시성 전투, 그 전장은 어디인가

안시성의 위치에 대한 심백강의 관점

하북성 당산시 개평구 입구에 설치된 안내 간판, 안시성은 개평구 부근에 있었다.
하북성 당산시 개평구 입구에 설치된 안내 간판, 안시성은 개평구 부근에 있었다.
요녕성지도. 기존 한, 중 역사학계는 요하 동남쪽의 무순, 안산, 해성, 개현, 영구 등지에 고구려의 방어성들이 건립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요녕성지도. 기존 한, 중 역사학계는 요하 동남쪽의 무순, 안산, 해성, 개현, 영구 등지에 고구려의 방어성들이 건립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북성 당산시 지도. 중심부에 옛고구려 안시성이 있던 곳으로 여겨지는 개평구가 보인다.
하북성 당산시 지도. 중심부에 옛고구려 안시성이 있던 곳으로 여겨지는 개평구가 보인다.

◆'한서'(漢書) 지리지에서 말하는 안시성의 위치

'한서' 지리지에 "요동군은 진시황 때 설치했고 유주에 소속되어 있다(遼東郡 秦置 屬幽州)"라고 하였는데 요동군의 18개 현 가운데 안시현(安市縣)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으로 요동군이라 하면 요녕성 동쪽의 요동군을 연상한다. 그러나 한나라 때의 요동군은 현재의 요녕성 동쪽이 아닌 유주(幽州)에 소속되어 있다고 '한서' 지리지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나라 때 요동군 안시현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주가 어디에 있었는지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유주는 고대 중국의 행정구역 명칭이다. 역사상에서 관할범위에 다소의 변동은 있었지만 유주의 중심구역은 연산(燕山) 남쪽 발해 북쪽 지역, 오늘날의 북경시 북쪽 일대를 벗어난 적은 없다. 바로 북송 때까지도 조선하(朝鮮河)라는 이름의 강이 있었던 곳이다.

'주례'에는 "동북방을 유주라 한다(東北曰幽州)"라고 말하였다. 지금은 중국이 동북방 북경을 수도로 하고 있지만 고대의 중원은 중국 대륙의 서쪽인 섬서성 서안시 일대에 있었으므로 북경 즉 유주는 중원이 아닌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동이족이 사는 동북방 변경지역이었다.

발해 북쪽에 위치한 유주는 춘추시대 이전엔 고조선 영토였고 전국시대 연나라 소왕때 고조선의 서쪽 변경 일부가 요동군으로 편입되었으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그대로 계승되었다.

한무제(서기전 156~서기전 87)가 당시 요동군 동쪽 고조선 서쪽을 침략하여 지금 북경시 동남쪽 일대에 현도군,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을 설치했고 이때 유주가 비로소 정식으로 중국의 행정구역에 포함되어 서한 13주 자사부(刺史部)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니까 '주례'에 "동북을 유주라 한다"라고 말했지만 주(周)나라 때는 지금 북경시 일대의 유주는 중국의 강역이 아니라 고조선 영토였고 유주가 정식으로 중국의 행정구역으로 포함된 것은 한무제가 고조선의 서쪽 변경을 침략하여 요동군 동쪽에 현도, 낙랑군을 설치하고 이를 묶어 유주라 호칭하면서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한무제 유철은 서한의 제7대 황제로서 54년 동안 재위했는데 중국 한족역사상 걸출한 황제였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한족의 강역은 사방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북쪽으로는 흉노를 공격하여 멀리 사막 북쪽으로 내쫓았고 서쪽으로는 장건(張騫)을 서역에 사신으로 보내 서역의 여러 민족들과 외교를 강화하였다.

남쪽으로는 민월(閩越), 남월(南越) 등을 정복했고, 동북쪽으로는 유주에 있던 고조선을 공격하여 그곳 서쪽에 한사군을 설치했다.

동서남북으로 강역을 크게 확대한 한무제는 전국을 13개 주로 분할하고 중앙에서 자사(刺史) 한 사람을 파견하여 감독하도록 했는데 그 관리하는 부서를 자사부라 칭하였다.

그러나 유주가 서한 이후 계속 중국 한족의 영토로 존속 되었던 것은 아니다. 한족이 몰락하여 장강 이남으로 쫓겨 간 동진시대에는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한사군을 비롯한 한족에게 빼앗겼던 고조선의 서쪽 고토를 회복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시대에는 하북도 평주,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 옛 고조선의 수도 평양성 지역으로 천도하여 북경시 서남쪽 일대가 다시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와 수, 당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서쪽에서 대치했고 이 시기에는 당연히 압록강 서쪽이 아닌 유주 서쪽이 북방 최전선의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고구려가 망한 이후에는 북경은 다시 중국 당나라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936년 후당(後唐)의 석경당(石敬瑭)이 유주를 포함한 16주를 거란에게 할양함으로서 다시 거란족의 영토가 되었다. 요나라시기에는 유주를 배도(陪都) 즉 부수도로 삼았고 남경, 혹은 연경이라 호칭하였다.

요나라 이후에는 행정구역으로서의 유주라는 이름은 역사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주로 국가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바로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가 모두 옛 유주 지금의 북경을 수도로 하였다.

유주는 옛 고조선과 고죽국의 강역인데 연나라 소왕 때 서쪽 일부가 연나라에 편입되었고 한무제 때 고조선 서쪽을 침략하여 중국의 13개 행정구역의 하나로 편입되게 되었으며 고구려 때 되찾았다가 다시 거란족이 차지하였고 요나라 이후로는 주로 동이족의 수도로서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유주의 지난 4천년간의 역사이다.

진시황시대에 설치한 요동군이 진, 한시대에 압록강 서쪽이 아닌 지금의 하북성 북경시 유주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안시성을 위시한 요동군에 소속된 18개 현들이 지금의 요녕성 요하 동쪽 해주시, 개주시 일대에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한무제 때 일시적으로 북경 서쪽 고조선 영토에 한사군을 설치했지만 광개토태왕시기에 다시 유주 일대 고조선의 고토를 완전히 회복하여 장수왕시기에 하북성 동쪽 평주를 수도로 하였고 하북성 서남쪽 역수(易水)가 서쪽 국경이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때 최전방 방어성인 안시성의 위치를 하북성 서남쪽이 아닌 현재의 요녕성 해성시에 있었던 것으로 간주한 기존 한, 중 학계의 관점은 커다란 오류를 범한 것이 확실하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보이는 안시성의 위치

북송 때 편찬된 '태평환우기'를 살펴보면 하북도19 조항에 탁주(涿州), 계주(薊州), 평주(平州)가 기재되어 있다.

하북도20 조항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신성주도독부(新城州都督府), 요성주도독부(遼城州都督府), 가물주도독부(哥勿州都督府), 건안주도독부(建安州都督府), 남소주(南蘇州), 목저주(木底州), 개모주(蓋牟州), 대나주(代那州), 창암주(倉巖州), 마미주(磨米州), 적리주(積利州), 여산주(黎山州), 연진주(延津州), 안시주(安市州)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한서'에는 안시현이 유주 즉 지금의 북경지역에 있던 요동군에 소속되어 있는데 '태평환우기'에서는 안시주가 신성주, 건안주, 개모주 등과 함께 하북도에 있던 안동도호부에 소속되어 있다.

'태평환우기'에 보이는 신성주, 건안주, 개모주, 마미주, 적리주 등의 지명은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등장하는 성의 이름들이다. 기존의 한, 중학계는 이를 모두 오늘의 요녕성 요하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태평환우기'의 기록을 검토해본다면 당나라 때 당태종이 공격했던 안시성을 비롯한 고구려 성들은 요녕성 동쪽 해성시, 요양시 개주시 일대가 아닌 오늘날의 하북성 북경시, 진황도시, 당산시 일대에 분포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하북성 고구려성들이 요녕성 동쪽으로 이동 배경

한, 당, 송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어디에서도 고구려의 안시성이 요녕성 해성시에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면 언제부터 안시성을 위시한 고구려 성들이 요녕성의 요하 동쪽으로 옮겨오게 되었는가.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중국의 근,현대 역사학자들이 고대문헌상에 나타난 지명을 현대의 지명으로 바꾸어 설명하는 과정에서 안시성(해성 영성자) 현도성(요녕성 무순) 개모성(요녕성 개현) 등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자치통감' 당기(唐紀)에서는 정관 19년 "고구려를 정벌하여 현도, 횡산, 개모, 마미, 요동, 백암, 비사, 맥곡, 은산, 후황 10성을 함락시켰다(凡征高麗 拔玄菟 横山 盖牟 磨米 遼東 白岩 卑沙 麥谷 銀山 后黄十城)"라고 말했을 뿐 이곳 성들의 위치가 오늘날의 어디에 해당하는지 밝힌 적은 없다.

그런데 현대 중국 학자들은 당나라 영토를 확대하고 고구려 영토를 축소하려는 심리가 은연중에 작용하여 이들 성의 위치를 설명할 때 모두 지금의 요하 동쪽으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중국의 역사지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반도사학, 민족사학 할 것 없이 중국학자들의 우리 역사영토를 잠식하려는 음흉한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 되었고 따라서 그러한 잘못된 논리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아주 굳어지게 된 것이다.

◆고구려 안시성은 요녕성 해성시가 아닌 하북성 당산시에 있었다.

수, 당시대 고구려의 서쪽경계는 요녕성 요하가 아닌 하북성 역수(易水)였다는 것을 필자는 앞서 여러 중국 문헌을 통해서 뒷받침한 바 있다. 역수가 당과 고구려의 국경이었다면 당군을 방어하기 위한 고구려 성들은 역수 동쪽 어딘가에 있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만일 하북성 역수가 고, 당의 국경선인데 요녕성 요하 동쪽에 당군을 방어하기 위한 고구려 성들을 배치했다고 한다면 이는 마치 3.8선이 남북한의 국경선인데 북한의 방어를 위한 군사기지를 천안이나 대전에 건설했다는 논리와 흡사한 것으로서 상식에 맞지 않는 억지 주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안시성을 위시해서 당군의 방어를 위한 고구려 성들은 과연 역수 동쪽 어디쯤에 건설되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의 다음 문장이 주목된다.

"이세민이 안시성에 이르렀는데 먼저 당산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했다.(世民至安市城 先自唐山 進兵攻之)"

이는 그동안 한, 중 역사학계가 주장한 것처럼 요녕성 해성시에 고구려의 안시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당산唐山 부근에 안시성이 있었으며 당산이 고구려와 당나라의 격전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당산은 어디인가. 지금의 북경시 동남쪽에 있는 하북성 관할의 당산시를 가리킨다. 당산은 하북성 동부, 화북평원의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화북과 동북의 통로에 해당하는 요충지이다.

당산은 남쪽으로는 발해를 면하고 북쪽에는 연산이 있다. '산해경'에서 고조선이 "해북 산남(海北山南), 즉 발해 북쪽 연산 남쪽에 있다"고 말한 것에 따르면 오늘날의 당산은 상고시대에는 고조선 땅이었다.

상나라 때는 여기가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이었고 한무제 때는 유주에 포함되었다. 동진시대에는 고구려가 평주의 창려현에 도읍을 정함으로써 당산은 수, 당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고구려의 영토였다.

본래 고조선, 고죽국, 고구려 영토였던 이 지역이 당산으로 지명이 바뀐것은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이 지역에 있던 고구려 성들, 즉 '자치통감' 당기(唐紀)에서 말한 고구려의 10성을 함락시킨 뒤 만천하에 이제부터는 여기가 당나라의 산천임을 표명하기 위해 당산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하북성 당산시 개평구(開平區) 동북쪽이 고구려 안시성의 옛 유적지다

하북성 당산시를 중심으로 그 일대에 당군을 방어하기 위한 고구려의 여러 성들이 분포되어 있었다면 안시성이 있었던 구체적인 장소는 과연 지금의 어디일까.

'태백일사' 고구려본기는 고구려 태조대왕이 한(漢)군을 방어하기 위해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는데 첫째가 안시성이라고 말하면서 "안시성은 개평부 동북쪽 70리에 있었다(一曰安市 在開平府東北七十里)"라고 그 구체적인 지점을 언급하고 있다.

개평은 어디에 있는가. 놀랍게도 지금 중국 지도상에서 하북성 당산시 동쪽에 개평이란 지명이 보인다. 이것을 과연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는 "요서 10성의 두 번째 성이 석성인데 건안성 서쪽 50리에 있다(二曰石城 在建安西 五十里)"라고 말하고 있다. '태평환우기' 하북도19 평주 조항에는 "평주가 노룡현(盧龍縣), 석성현(石城縣), 마성현(馬城縣) 3개 현을 관할한다"라고 하였다.

고구려 요서 10성의 첫째가 안시성이고 둘째가 석성인데 그 석성현이 노룡현과 함께 하북도 평주 관할이라면 안시성은 요녕성 해성시가 아닌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부근에 있었던 성임이 명백하다.

그런데 중국 최대 검색 사이트인 바이두에서는 하북성 당산시 개평구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당나라 때 석성현이 있던 지역이라고 밝히고 있다.

'태평환우기'에서는 하북도 평주 관할현이 노룡현, 석성현, 마성현이라 말하고 '태백일사'에서는 요서 10성의 첫째가 안시성, 둘째가 석성인데 안시성은 개평부 동북쪽에 있다고 말했으며 중국 바이두에서는 당산시 개평이 당나라 때 석성현이 있던 지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세 기록을 종합 검토해본다면 지금 당산시 개평구 일대가 당나라 때 안시성, 석성이 있던 지역이 확실하다고 본다.

다만 바이두에서 당산시 개평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당나라 석성현 만을 언급하고 안시성은 말하지 않은 것은 기존에 요녕성 해성시에 있는 것으로 잘못 알려진 안시성의 존재를 숨기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그리고 당산시 개평구 부근에 안시성이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당산시 개평구 일대에는 양가구참(楊家口站), 양가향(楊家鄕) 등 양씨들이 집단적으로 촌락을 이루고 사는 지역이 많다는 사실이다.

안시 성주는 양만춘 장군으로서 당나라 이후 그에 대한 자료가 철저히 파손되어 지금 그 정확한 가계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양씨 자손들이 개평 부근지역에서 여기저기 분포되어 살고 있다는 것은 당산시 개평구 일대가 옛 안시성 유적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간접적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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