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의 예술기행] 쫓기는 자들의 피난처 '튀르키예 카파도키아'

튀르키예의 카파토키아에는 동서 400km, 남북 250km, 괴레메, 우치히사르, 위르굽, 네브쉐히르, 아바노스, 카이세리로 이어지는 계곡마다 기암괴석, 동굴교회 그리고 지하도시로 가득하다.
튀르키예의 카파토키아에는 동서 400km, 남북 250km, 괴레메, 우치히사르, 위르굽, 네브쉐히르, 아바노스, 카이세리로 이어지는 계곡마다 기암괴석, 동굴교회 그리고 지하도시로 가득하다.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은 카파도키아를 보고 "진작에 여기에 와 보았더라면 굳이 달에 가지 않았을 텐데" 라는 말을 남걌다.

삼백만년 전 아나톨리아고원에 거대한 화산 폭발이 있었다. 먼저 쌓인 화산재는 푸석한 응회암으로 굳어갔고 그 위를 현무암이 뒤덮었다. 오랜 시간 풍화되고 침식된 고원의 계곡들은 깎이고 쏠려 그야말로 기암절벽 가파른 지구 속 외계행성 풍경이 되었다. 그곳이 현재 튀르키예 카파도키아다.

동서 400km, 남북 250km, 괴레메, 우치히사르, 위르굽, 네브쉐히르, 아바노스, 카이세리로 이어지는 계곡마다 기암괴석, 동굴교회 그리고 지하도시로 가득하다. 앗시리아, 히타이트, 로마, 비잔틴, 이슬람제국 등 지난한 역사를 거치며 쫓기는 자들의 피난처가 된 까닭이다.

카파토키아
카파토키아

응회암은 비교적 물러 작은 도구로도 표면을 깎아 동굴을 파고 몸을 숨기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자연이 빚어낸 이 웅장한 풍경은 전쟁터에서 또는 자신들의 신을 섬기다가 박해를 피해 달아나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없는 은신처가 되었을 것이다.

앗시리아나 히타이트인들에게 쫓기던 포로들이나 로마인과 무슬림들에게 쫓기는 기독교인들에게 경외감이 저절로 드는 이곳은 그들의 신이 내린 은신처였을 테니 삶의 터전을 닦아 교회를 짓고 공동생활을 하며 무른 땅을 파고 또 파서 지하로 지하로 숨어들었을 것이다.

세계 최대 암석교회단지로 알려진 이곳에서 현재 발견된 동굴교회만 250여 개라고 한다. 그 중 '보이지 않는 곳'이란 뜻을 가진 괴뢰메의 야외박물관은 초기부터 고대 비잔틴 시대 프레스코화를 고스란히 보존하고있어 압권이다. 특히 신약성서에 기반한 예수의 생애를 그린 프레스코화가 장엄하게 묘사된 동굴 속 암흑 교회(Karanlık Kilise, Dark Church)는 백미다. 안타깝게 훼손을 막는다는 이유로 촬영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데린쿠유는 약 2만 명이 살 수 있는 11개 층으로 지하 85미터 깊이까지 이어진다. 곡물창고, 포도주와 기름 착유기, 식당, 학교와 예배당, 심지어 가축우리와 농장, 감옥도 있다.
'뾰족한 바위'라는 뜻의 우치히사르.

◆'뾰족한 바위'라는 뜻의 우치히사르

우치히사르는 마을 입구에 성격이 고약하다는 낙타가 나무에 묶여 혼자 씩씩대는 것 외엔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아마도 인근 도로변 낙타바위를 상징하려 마을에 한 마리를 데려온 모양인데 툭하면 방문객들을 뒷발로 차거나 물어뜯어 아주 곤혹스럽다며 원주민들이 손사래를 치며 설명한다.

그 말에 모두 와아 웃으니 낙타가 제 욕을 알아들은 듯 이빨을 드러내며 벌떡 일어나 푸르르거린다. 다시 한 번 파안대소하다가 중앙의 우치히사르 성을 바라보니 뚫린 구멍마다 마을 아이들이 머리를 내밀고 손을 흔들고 있다.

'뾰족한 바위'라는 뜻의 우치히사르는 사람보다 비둘기들이 먼저 둥지를 틀었더라 한다. 나중엔 인위적으로 작은 구멍을 내고 비둘기를 살게 해 그 배설물을 비료삼아 포도나무를 길렀다는 것이다. 성으로 불리는 가장 큰 바위는 교회와 납골당, 수도사들의 방으로 이루어져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계곡 전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약간의 폐쇄공포증이 있는 나는 좁은 통로를 몇 번 오르내리다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차 포기하고 만다.

데브란트와 파샤바계곡을 걷거나 차를 타고 지나는 동안 본 세 마녀 바위, 버섯바위(요정의 굴뚝), 여러 동물 형상을 한 수많은 바위들을 보며 중국 장예의 칠채산을 떠올리기도 하고 벨기에 작가 페요의 스머프들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언덕 위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촬영은 못했다지만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를 여기서 찍었으면 그 미장센이 어땠을까 상상했다. 내가 다녀온 뒤 크리스토퍼 놀란이 인터 스텔라를 카파도키아에서 촬영했다고. 강렬한 하루의 마지막 햇빛이 버섯머리 바위를 비추자 놀라워라, 바위의 일정 부분이 노란 황금빛으로 번쩍거린다.

넴루트산의 무너진 석상들
데린쿠유는 약 2만 명이 살 수 있는 11개 층으로 지하 85미터 깊이까지 이어진다. 곡물창고, 포도주와 기름 착유기, 식당, 학교와 예배당, 심지어 가축우리와 농장, 감옥도 있다.

◆지하마을 '데린쿠유'

데린쿠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의미다.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된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2023년 12월 14일 오늘, 이 깊다는 동굴도시에 대해 쓰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하마스를 비롯해 북베트남과 가깝게는 북한의 그것까지 한 쾌에 꿰이는 땅굴이 연상되는 까닭이다.

데린쿠유는 아직까지 전체의 길이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최소 10km의 복잡한 구조라 혼자 들어가면 길을 잃으니 절대 조심하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을 정도다. 기원전 프리기아인들이 처음 이곳에 굴을 팠고 이후 동로마인들이 들어와 크게 확장해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데린쿠유는 약 2만 명이 살 수 있는 11개 층으로 지하 85미터 깊이까지 이어진다. 곡물창고, 포도주와 기름 착유기, 식당, 학교와 예배당, 심지어 가축우리와 농장, 감옥도 있다. 이 지하도시의 입구에는 수백 명이 거주할 수 있는 규모의 작은 지상 마을이 있는데 아마도 눈속임용이었을 것이다. 빛과 공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동굴 중앙에 수직 환기구와 보조 환기구를 만들어 환기와 환풍을 시키고 거대한 바위문 입구와 방과 방 사이 작은 틈새에 미닫이로 둥글고 거대한 돌덩이 추를 숨겨 적들의 침입을 막았다.

넴루트산의 무너진 석상들
넴루트산의 무너진 석상들

◆넴루트산, 안티오코스 1세, 신과 함께!

나는 사실 유프라테스강가 넴루트산에 가고 싶었다. 카파도키아왕국의 이웃나라 콤마게네왕국 안티오코스 1세의 왕릉이자 미스터리한 석상들이 뒹구는 곳, 부계는 프톨레마이오스 후손이며 모계가 페르시아 황녀였던지라 그의 두상은 페르시아 관모를 쓴 그리스 조각 기법이다.

기원전 1세기, 자신을 신이라 여긴 왕은 왕국에서 가장 높은 산에 릉을 만들었다. 후대의 도굴을 막기 위해 작은 자갈들로 봉분을 높게 쌓고 아침 해가 뜨는 동쪽과 저녁 해가 지는 서쪽에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신들과 자신의 석상을 함께 세웠다.

제우스, 포르토나, 헤라클레스, 아폴론, 독수리 카라쿠스, 사자 아슬란 그리고 자신이 함께 올림포스에 오르기를 꿈꾸며 왕이 만들게 한 거대한 석상들은 머리 크기만 2미터에 달한다. 이 거대한 석상들은 그러나 지진과 일종의 반달리즘으로 파괴되어 몸통에서 떨어져 나와 왕좌 아래 발밑에 뒹굴고 있다.

넴루트산의 무너진 석상들

생전에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 등 로마의 명장들과 각축을 벌이기도 하고 협상도 해 왕국 역사에서 스스로를 가장 위대한 왕으로 증명하고 싶었을 터, 왕의 그 욕망에 대한 인간적인 뭉클함과 비감 그리고 애잔함이 더해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왕릉은 신기하게도 현재까지 흘러내리는 자갈로 인해 도굴되지 않았다고. 서기 17년 콤마게네왕국은 로마에 병합되었다.

튀르키예 즉 터키족은 우리 한민족과 같은 알타이 문화권에 속한다. 중앙아시아, 흉노, 돌궐, 말하자면 우리 민족과 고대사 일정 부분을 공유한 셈인다, 그 내용을 튀르키예는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1950년 우리나라에 전쟁이 났을 때 '형제의 나라'를 구하자는 시위를 하며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입대했다는 것도 유명한 사실이다.

코리아에서 왔다고하면 오른 손을 가슴에 대고 정겹게 바라보던 그들은 참으로 정 많은 민족이었다. 그러고 보니 튀르키예의 술 라크는 막걸리처럼 부옇고, 항아리 케밥은 마치 동인동 찜갈비 같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우리와 형제국임에는 분명한 모양이다. 조만간 이스탄불에서 달콤한 체리 한 바구니를 사 들고 넴루트산을 향해 떠날 나를 그려본다.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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