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재경 교수의 수도원 탐방기]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

900년 세월 유지된 수도원 규칙 '사랑' 발견하는 발걸음이길…
박물관·도서관·교회 중세 양식 고스란히…황제의 거처였던 곳에 보석·미술품 가득
장서 27만권 오스트리아 최대 사립도서관…수녀·평신도 여성들 정교한 필사본 존재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은 1114년에 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인 바벤베르크의 성 레오폴트 3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아그네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은 1114년에 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인 바벤베르크의 성 레오폴트 3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아그네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무채색의 도시, 그러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있어 다소 활기찬 비엔나, 그곳을 떠나 우리는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을 향했다. 비엔나에서 자동차로 한 30분 정도 달리자, 언덕 위에 웅장한 수도원이 서 있었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이었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이 주는 경외감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수도원 아래쪽에 차를 세워두고, 순례자들처럼 수도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는 도나우 강 서쪽 기슭과 비엔나 숲 북쪽에 위치한 오스트리아 북동부의 작은 도시다. 이곳은 원래 로마의 요새였지만 나중에 레오폴츠베르크 성과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이 들어섰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

◆오스트리아 문화, 정치, 종교의 중심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은 1114년에 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인 바벤베르크의 성 레오폴트 3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아그네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산과 강이 둘러싸여 자연 경관이 빼어난 레오폴트의 성 근처이다.

마리아 탄생(Maria Gegurt)을 기념하는 교회는 1136년에 축성되었는데, 17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웅장한 수도원 건물 대부분은 1730년에서 1834년에 사이에 건설되었다. 1879년 프리드리히 폰 슈미트의 계획에 따라 수도원 교회와 수도원이 복원되었고, 신고딕 양식의 쌍둥이 첨탑도 이때 세워졌다. 하지만 아직도 수도원에는 12세기 건축물인 성탑과 고딕 예배당이 존재한다.

1318년에 지은 예배당과 레오폴트 무덤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수도원은 수세기 동안 오스트리아 문화, 정치, 종교의 중심이었다. 세계 유명 문화재인 '베르둔 제단' '오스트리아 대공의 관'은 물론 바로크 시대의 유물부터 현대 회화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유물이 소장돼 있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도 질곡의 세월이 있었지만, 1941년에서 1945년을 2차 대전 시기를 제외하고는 수도사들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에 따라 이곳에서 수행해 왔다. 지금도 40여 명의 수도사들이 수행과 교회를 돌보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가장 먼저 현관 홀에서 수도원을 경험한다. 현관 홀은 '살라 테레나'란 이름으로 2006년에 문을 열었다.

오스트리아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에 있는 오스트리아 최고의 금세공 제단인 '베르둔 제단'
오스트리아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에 있는 오스트리아 최고의 금세공 제단인 '베르둔 제단'

◆ 베르둔 제단, 중세 미술사에 중요한 자료

현관 홀을 지나 수도원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원래 황제의 거처였는데 지금은 수도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2개가 넘는 방에는 수도원이 수집한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인상적인 종교적 물건과 보석, 그리고 미술품과 공예품이 가득했다. 이 가운데 수도원을 설립한 바벤베르크 가문의 가계도가 인상적이다.

1492년에 완성된, 폭이 8m인 거대한 작품이다. 빼어난 예술성을 자랑하는 이 작품이 원래는 순례자들을 위해 성 레오폴드의 무덤에 세워졌었다. 이 작품은 바벤베르크 가문을 위상을 높일 목적으로 제작되었지만, 지금은 중세의 삶과 역사에 중요한 사료 역할을 하고 있다.

수도원 박물관에는 수도원이 수집한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인상적인 종교적 물건과 보석, 그리고 미술품과 공예품이 가득했다.
수도원 박물관에는 수도원이 수집한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인상적인 종교적 물건과 보석, 그리고 미술품과 공예품이 가득했다.

수도원 박물관에는 수도원이 수집한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인상적인 종교적 물건과 보석, 그리고 미술품과 공예품이 가득했다.
수도원 박물관에는 수도원이 수집한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인상적인 종교적 물건과 보석, 그리고 미술품과 공예품이 가득했다.

그 외에도 르네상스 청동 컬렉션부터 20세기와 21세기의 다양한 종교 예술작품까지 다양하다. 17세기 초 막시밀리안 3세가 하사한 왕관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금, 에나멜, 보석, 진주 등 최고의 품질로 제작된 왕관, 누구든 그 왕관을 쓰면 왕이 될 것 같았다.

수도원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예술품은 '베르둔' 제단이다. 이 제단은 중세 미술사에 중요한 자료다. 니콜라스 베르둔이 10년이란 세월을 들여 1181년에 완성한 에나멜 패널 작품인데, 동판에 금장을 한 설교단 장식용이었다. 이 제단은 수평 3개 면에, 51개의 에나멜 패널로 구성되었다. 패널에는 신구약 성경 내용을 담았고, 뒷면에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4장의 템페라화가 그려져 있다. '베르둔' 제단은 8세기가 넘는 세월을 보냈는데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베르둔' 제단은 전통적인 비잔틴 에나멜 작품을 탈피해, 푸른색 에나멜 평면에 디자인하는 파격적인 기술을 사용했다. 베르둔은 네오 아티가(neo-Attic) 양식에 영향을 받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초기 기독교 양식에서 길을 찾았다. 그는 전통적인 판넬화와는 달리 각 판넬에 참신함과 특이점을 부여하여 생동감과 즉각성을 주었다.

박물관에 보관된 성경 필사본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필사의 정교함에 놀라고, 책 두께에 다시 놀란다.
박물관에 보관된 성경 필사본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필사의 정교함에 놀라고, 책 두께에 다시 놀란다.

◆중세의 필사본,수녀와 여성들의 손끝에서

박물관에 보관된 성경 필사본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필사의 정교함에 놀라고, 책 두께에 다시 놀란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 도서관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사립도서관이다. 장서를 무려 27만 권 이상 보유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 제작한 필사본만 해도 1200권 이상이다. 필사본 가운데는 '성 레오폴트 기도서', '11세기에 쓰여진 시편', 그리고 '레오폴트 성경' 등이 있다. 대부분의 필사본은 이 수도원 필사실에서 제작한 것이다.

중세의 많은 필사본은 여성들의 손끝에서 나왔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도 한 때는 수도사와 수녀들이 함께 수행하는 이중 수도원이었다. 13세기 중반까지는 많은 수녀들과 평신도 여성들이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필사에 참여했다.

그런데 1330년에 파사우의 알버트 주교는 수도원에 거주할 수 있는 여성의 수를 32명으로 제한했다. 수도원 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필사본들은 그 당시 수도원에 거주했던 수녀들과 여성들의 땀방울에서 나왔다. 도서관 곳곳에 놓인 아름다운 필사본, 정교하게 필사된 성경을 보며 다시 한번 중세 여성들의 헌신을 기억했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 교회,수도원 교회,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느낄 수 없는 '무게'와 '신비'가 있었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 교회,수도원 교회,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느낄 수 없는 '무게'와 '신비'가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도원 교회에 들어섰다. 잠시 의자에 앉아 제단을 향했다. 수도원 교회,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느낄 수 없는 '무게'와 '신비'가 있었다. 잠시였지만 제단에 흘러나오는 신비한 빛에 자신을 맡겼다. 그 '신비'와 '무게' 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서 흘러나온 깊은 사색의 힘 같았다. 이곳에서 수행했던 그들이 경험한 그 하나님은 만나고 싶었다. 수도원 교회당은 현관 홀이나 화려한 박물관과는 완전히 달랐다. 교회당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공간 그 자체였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 교회에서 이 수도원이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이라는 걸 확인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학자였지만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회심하자마자 카시키아쿰에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잠시 살았다.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가서도, 히포에서도, 그는 수도 공동체를 만들었고, 수행자로 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로서 활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일생 묵상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의 목회와 연구였지만 묵상하는 삶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 공동체는 아침 일찍 정한 시간에 아침 기도를 했고, 개인 기도와 공동 기도를 했다. 수도원 형제들은 교회에서 기도와 시편을 찬송을 드렸다. 그들은 매일 평신도들과 함께 성찬을 집례했다. 이들은 하루 두 번의 공동식사, 사유재산 포기, 독신의 삶으로 거룩한 삶을 추구했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찾고 싶었다. 이곳 수도사들은 900년의 세월 동안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원 규칙에 따랐다고 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 제 1항에 나오는 '사랑'를 발견하기를 소망해 봤다.

"가장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이웃들도 그러해야 합니다. 이것들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계명들로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수도원 규칙1)

" 사랑이 없다면 당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사랑은 그 자체로 충만합니다." (요한 서신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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