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과묵한 아버지의 삶…내가 힘들 땐 달맞이꽃처럼 피어나 용기"

최유정 씨의 아버지 고(故) 최화륜 씨

최유정 씨가 아버지 최화륜 씨 생전 때 병실에서 함께 찍은 모습. 최유정 씨 제공.
최유정 씨가 아버지 최화륜 씨 생전 때 병실에서 함께 찍은 모습. 최유정 씨 제공.
20년전 아버지 최화륜(오른쪽) 씨 생신 때 손녀들이랑 축하 파티 모습. 최유정 씨 제공
20년전 아버지 최화륜(오른쪽) 씨 생신 때 손녀들이랑 축하 파티 모습. 최유정 씨 제공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 언제나 즐거운 노래를 부릅시다/ 진달래가 생끗 웃는 봄봄/ 청춘은 싱글벙글 윙크하는 봄봄봄봄/ 가슴은 두근두근 청춘의 꿈/ 산들산들 봄바람이 춤을 추는 봄봄/ 시냇가의 버들피리는 삐삐리 리 라라라라 릴리리 봄봄/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

아버지의 노래는 어둠 속에서 달맞이꽃처럼 피어났다. 목소리는 힘찼고 불끈 쥔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사이키 조명 아래서 화려하게 춤을 췄다.

2013년 어느 날, 아버지는 뜻하지 않은 인생극본을 받았다. "췌장암은 아닙니다." 그것은 잠시 희극이 되어 주었고, 일주일 후 다른 부위에 5㎝의 암이 있다는 비극의 대본을 다시 받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희극 주인공 역할을 자처하셨다. 병원 복도를 걸을 때는 20대 청년처럼 성큼성큼 앞서 걸으셨고, 두 번의 항암치료를 받고는 더 이상의 치료를 거부하셨다. 대신 젊은이들이 입을 법한 날렵한 뒤태의 양복 한 벌과 듬성한 머리를 덮어 줄 따개비 모양의 모자를 샀다. 한 동안 아버지는 희극에 어울리는 의상을 입고 종친회, 노인회 회장으로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바쁘고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전화벨소리가 온 집안을 흔들었다. 무섭고 두려운 마음은 비켜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경북 청송에서 앰뷸런스를 타고 응급실에 도착했다. 급히 달려간 병원에는 가픈 숨을 호흡기에 의지한 아버지가 계셨다. 그렇게 2014년 8월, 아버지는 호스피스병동으로 무대를 옮겼고 희극배우의 역할을 마쳐야했다.

아버지는 과묵한 분이셨다.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살벌한 '키다리아저씨'처럼 큰 키에 수염 덮인 얼굴과 무뚝뚝한 음성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근처에 가는 것을 꺼렸다. 과묵한 아버지의 속내는 행동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소풍이며 운동회 때마다 천막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계셨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던 사춘기 딸을 위해 세계문학전집을 책장 가득 월부로 들여 놓았다. 고등학교 시절 야간자율학습을 할 때면 자전거 앞에 카스텔라 한 봉지를 걸고 동네 어귀에서 무작정 기다리셨다. 객지에서 대학 생활하던 자식이 집에 오면 수돗가에서 쪼그리고 앉아 손수 다듬고 씻은 상추를 삼겹살과 같이 내어주셨다.

뭉툭하게 닳았던 아버지의 수첩처럼 볼품없던 사랑은 자식들에게 깨알 같은 추억이 되었다.

호스피스병동에서 섬망증상(인지기능 저하가 동반되는 의식장애)으로 아버지의 의식은 대부분 흐렸다. 그 날도 말없이 휠체어를 가리키며 무작정 밖으로 나가자고 하셨다.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병원 모퉁이쯤 왔을 때 그때서야 이리저리 살핀 후 한마디 하셨다.

"니 돈 많나?"

"저요, 돈 억수로 많은데요" 하며 팔을 양껏 벌려 동그라미를 그렸다. "약 사먹게 돈 많이 줄래?"하고 그때서야 움푹 파인 눈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환자복 주머니에 잃어버려도 될 정도의 지폐 몇 장을 말아 넣어 드렸다. 아버지는 개선장군처럼 손바닥으로 주머니를 툭툭 치시더니 평소처럼 말 대신 병실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것이 마지막 용돈이 될지 생각하지 못했다. 돌돌 말았던 몇 장의 지폐가 아직도 부끄럽고 죄송하다.

올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0주기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면 아버지의 삶은 내 삶에서 끊어지지 않는 달맞이꽃으로 피어난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매일신문이 함께 나눕니다. '그립습니다'에 유명을 달리하신 가족, 친구, 직장 동료, 그 밖의 친한 사람들과 있었던 추억들과 그리움, 슬픔을 함께 나누실 분들은 아래를 참고해 전하시면 됩니다.

▷분량 : 200자 원고지 8매, 고인과의 추억이 담긴 사진 1~2장

▷문의 전화: 053-251-1580

▷사연 신청 방법
1. http://a.imaeil.com/ev3/Thememory/longletter.html 혹은 매일신문 홈페이지 '매일신문 추모관' 배너 클릭 후 '추모관 신청서' 링크 클릭

2. 이메일 missyou@imaeil.com

3. 카카오톡 플러스채널 '매일신문 그립습니다' 검색 후 사연 올림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