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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철학이야기] ‘희망’의 가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어렵고 힘들 땐 누구나 '희망'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그래서 희망이란 두 글자가 자주 등장한다면 그만큼 살기 힘든 상황이라는 뜻이다.

기대가 구체적이라면, 희망은 추상적이다. "다음에는 일등을 해야지"처럼 기대는 현재 상태의 연속선상에서 좀 더 나은 성과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반면에 희망은 "복을 지어 극락에 가야지"처럼 극락이 아닌 지금 장밋빛 미래를 설정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기대는 현재 있는 것에 대한 바람이지만, 희망은 현재 없는 것에 대한 기다림이거나 그리움이다.

희망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나라 잃었던 시기에 불렀던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라는 '희망가'이다. 이 노래는 영국의 춤곡이 미국에서 찬송가로, 다시 이것이 일본에서 진혼곡으로 편곡・번안됐다가, 1921년 국내에 대중가요로 수입, 번안된 것이다. 나라 없는 설움 속에서 갈망했던 것은 역시 해방의 희망이 아니었을까.

절망의 시간 속에서 희망이란 말은 더욱 빛난다. 희망은 지금 여기에 없는, 부재의, 불가능한 '무엇'을 찾는 막연한 신념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하의 1926년,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를 보자. 희망은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라는 노랫말 속의 '무엇'과도 같다.

'사의 찬미'는 이오시프 이바노비치 작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을 편곡・번안한 것인데, 원래는 경쾌한 발라드곡이었다. 이것이 식민지 조선이라는 공간에 들어오면 우울하고 처량한 곡조로 바뀐다. 한편 1931년 현제명이 작사・작곡한 근대 가곡 '희망의 나라로'는 좀 다르다. 이것은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 찬 곳 희망의 나라로"를 외치며, 경쾌하다. 그래서 여기서 노래한 '희망의 나라'가 일제를 상징한다느니 등의 논란도 있다.

어쨌든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은 그렇게 애타게 찾는 것이 지금 여기 없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언제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라고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 질러 봤자 이 '언젠가는'이 진짜 성사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복권이 당첨되는 날∼"처럼, 임의적 가정일 뿐이다. 이럴 경우, 대개 "돼 봐야 알지!"라고 대꾸하는데, 정곡을 찌른 말이다.

위의 '사의 찬미'에서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의 '무엇'은 궁극적 의미를 뜻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뜻으로 '이 뭣고?'라고도 한다. 이 '무엇'은 큰 물음이다. 함부로 답해선 안 될 '마지막 어휘'를 요구한다. 이런 물음 앞에 서면 아찔해지고, 정신적 경련을 일으킬 수 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처럼, '무엇'을 묻지만 그 대답은 대체로 시원찮고 허접할 수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고대 동서양의 철학자들은 "이 세상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 대답은 '물, 불, 공기, 흙…'처럼 좀 시시하고 썰렁했다. 거창하게 물었으나 대답은 쪼잔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무엇'을 찾다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이곳을 넘어 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른바 초월적 존재로 향해갔다.

하나님이나 여래 같은 것이다. 그게 아니면, 지금 여기에서 본질적인 것, 심층의 존재를 찾기도 한다. 이치(理)나 도(道) 같은 것이다. 저쪽의 '먼 곳'이나 지금 여기의 '깊은 곳'으로 향해봤자 그 답은 대개 추상적이거나 믿음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심리적인 것들이다.

이처럼 '무엇'이라는 물음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해명되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면 유야무야 해소될 관념들이다. 지금 이곳에 부재하는 것을 '있어야 할 것'으로 상정한 신념 혹은 심리적 착각이라 해도 좋겠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좀 더 예민하게 고민해볼 점이 있다. '물음' 그 자체의 가치이다.

물음은 희망의 다른 말이다. 물음을 갖는다는 것은 희망을 품는다는 뜻이다. 예컨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치자. 사실 이런 식의 질문은 '있다, 없다'의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공중에 내던져진 물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주술을 걸어 창발적 사유를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이 '무엇'이라는 물음에 곤혹스러워하다 보면, 으레 '어떻게'라는 또 다른 물음이 생겨난다. 이 두 물음에는 정답이 있을 리 없다. 희망도 그렇다. 희망은 해명될 것이 아니다. 그것을 품고 있는 마음속에 답은 숨어 있다.

사실 희망이라는 단어를 갖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희망이 없으면, 실망도 절망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왕 가졌다면 왜 가졌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에게 되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56억 7천만 년 뒤에 온다는 미륵을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100세 인생으론 어림없다.

그러나 그것을 기다리는 진실한 마음속에 미륵은 이미 거기 와 있다. 미륵은 바깥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속에 도래, 현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이라는 물음은, 불가능성을 새로운 지평으로 인도하고 우보천리처럼 실현 가능으로 전환하는 큰 힘이라 하겠다. 밑져봤자 본전 이상의 그리움 같은 것이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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