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트렌드 경제] '을' 아닌 '슈퍼 을'…반도체 밸류체인 지배하는 소부장 기업들

ASML, EUV 노광 장비 공급망 '반도체 동맹'의 핵심…네덜란드 정부 정책도 좌우
설계 SW 제작 EDA '빅 3' 점유율 75% 육박…인수합병 통한 독점적 지위 유지

방진복을 입은 윤석열 대통령(왼쪽 부터)이 지난해 12월 12일(현지시간) 벨트호벤 소재 ASML 본사에서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과 함께 클린룸을 방문,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사업책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방진복을 입은 윤석열 대통령(왼쪽 부터)이 지난해 12월 12일(현지시간) 벨트호벤 소재 ASML 본사에서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과 함께 클린룸을 방문,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사업책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산업계에는 갑(甲)과 을(乙)이 명확하게 존재한다. 완성품을 제작하는 원청은 수많은 협력사들로부터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등을 공급받는다. 갑의 위치에 있는 선 기업이 주도권을 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틀을 깨는 '슈퍼 을' 기업이 있다. 압도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대체 불가능한 영역에 진입한 소부장 기업들이 그 주인공이다. 특히 반도체 업계는 슈퍼 을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야다. 첨단 산업의 핵심인 반도체를 양산하는 과정, 그 이면에는 공급망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숨어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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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체계 에르메스 'ASML'

지난해 12월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네덜란드 한 반도체 장비 기업의 생산시설을 찾았다. '반도체 동맹' 구축을 목적으로 순방에 나선 윤 대통령은 ASML 본사를 직접 둘러보며 반도체 산업 현안을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순방 일정 중 처음으로 찾은 기업에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ASML은 대표적인 슈퍼 을 기업으로 꼽힌다. 최첨단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AI(인공지능)을 포함한 세계 산업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노광장비는 반도체 회로 패턴을 그리는 장비다. EUV 노광장비의 경우 나노미터(약 10억분의 1M) 단위 수준의 폭을 구현할 수 있다. 더 얇고 정밀하게 회로를 새길수록 반도체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다.

고성능 반도체 개발에 속도를 높이고 있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ASML 장비를 들이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연간 생산 물량은 50대 안팎에 불과하고, 가격은 2천억원을 호가하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본사를 둔 ASML은 전자제품으로 널리 알려진 필립스에서 분사된 기업이다. 2006년부터 EUV 관련 기술 개발에 매진했고 산업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세계 정상의 위치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도 ASML의 역할이 주목을 받고 있다. 미 정부가 대(對) 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입을 통제하면서 중국 반도체 업계가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따라 대만의 TSMC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미국의 반도체 동맹국 주요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보기도 했다.

지난달 ASML이 공개한 차세대 노광 장비 '하이-NA EUV'는 기존 제품에 비해 1.7배 작은 트랜지스터를 인쇄할 수 있어 집적도를 2.9배 향상시켰다. 향후 차세대 AI칩 제작에 활용되는 장비로 인텔을 비롯한 반도체 선도 기업들이 해당 제품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한편, 최근 ASML은 네달란드 정부의 '반(反) 이민' 정책에 반발하며 해외 이전을 시사했다. 이에 네덜란드 정부는 25억 유로(약 3조 7천억원)을 투입해 ASML의 이탈을 막기 위한 정책을 시행할 예정이다.

EDA 산업 구조. KOTRA 제공
EDA 산업 구조. KOTRA 제공

◆ 팹리스 EDA '빅 3'

반도체 산업 밸류체인(가치사슬)의 시작점에는 설계 전문기업 '팹리스'가 있다. 팹리스는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쥔 분야다. 현재 AI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는 엔비디아가 대표적인 팹리스 기업이다.

팹리스는 반도체 회로를 설계 및 검증하는 과정에서 전용 소프트웨어 'EDA'(전자설계자동화)를 활용한다. 업계에서는 도구를 뜻하는 툴(Tool)을 더해 'EDA 툴'이라는 용어도 통용된다.

EDA 업계에도 슈퍼 을이 존재한다. 상위권 3개 기업이 70% 이상의 점유율 확보하며 관련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른바 EDA 빅3로 불리는 이들 기업은 30년 이상 축적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전문 지식은 물론 최고 수준의 소프트웨어 개발 역량을 갖추고 있어 진입장벽이 높다.

이들 기업의 소프트웨어는 반도체 산업의 표준 도구로 자리매김 했으며 후발 주자가 격차를 극복하기 어려운 탓에 사실상 독점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실제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EDA 소프트웨어 시장 점유율(2021년 기준)은 시놉시스(32%)가 가장 높고 케이던스(30%), 지멘스(13%)가 뒤를 이었다. 빅 3 기업의 점유율의 합계는 75%에 육박한다. EDA 시장 규모는 오는 2027년까지 연평균 9.6% 성장을 거듭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EDA 시장은 주요 3사 점유율이 뚜렷하고 이미 확보된 고객푹이 탄탄하다. 장기간 기술, 생태계, 고객 확보 등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다"면서 "EDA는 R&D 비용이 기업 영업수익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기술적 장벽이 높고 총이익률이 80% 안팎에 달하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대표 3사는 300회에 가까운 인수합병을 통해 현재 위치를 공고히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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