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트럭이 갓길에 널브러져 있다. 바퀴는 좌우로 틀어지고, 번호판은 제멋대로 찌그러져 숫자를 알아볼 수 없다. 차체는 한쪽이 일그러져 영락없이 쓰러진 부상병 신세다. 그나마 제 형체를 지키고 있는 건 운전사의 엉덩이를 얹었던 의자다. 잿빛 하늘에서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널브러진 차체엔 빗물이 흥건하다.
자동차 사고 수습 중이라며 빨리 오라는 남편의 기별을 받았다. 시골길이라 큰 사고는 아니기를 위안하며 쿵쾅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현장으로 내달렸다. 트럭이 앞만 보고 달리는데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카니발이 옆구리를 들이받았다고 한다. 사람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지만 목숨이란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이웃집 개가 죽음을 맞이해도 가슴에 파문이 일거늘, 오랜 시간 가족을 위해 짐을 싣고 달리고 태워준 트럭이 숨을 거두는데 어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견인되어 떠나는 1톤 포터의 뒷모습을 넋 잃은 사람처럼 바라본다. 풋내기 농군에게 반평생을 헌신한 흰빛 트럭이 어릴 적 아버지가 몰던 소달구지의 운명과 흡사하다.
소달구지는 아버지의 등짐을 대신하는 유일한 운반 도구였다. 얼었던 개울물이 녹아내리면 밑거름을 가득 싣고 들판으로 나갔고, 서리가 하얗게 내릴 즈음이면 누렇게 익은 볏단을 넘치도록 싣고 강을 건너 집으로 왔다. 아버지의 소달구지는 장터로, 밭으로, 들길을 종횡무진 누볐다. 다섯 남매가 무사히 자랄 수 있었던 것도 두 대주가 집안을 든든하게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댐 건설로 고향 마을과 농토가 수몰되던 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고난을 함께한 달구지와 이별을 했다. 이삿날을 앞두고 우시장에 소를 팔고 달구지도 넘겨주고 돌아온 아버지는 한동안 끼니를 거르고,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아픔을 트럭이 떠나는 지금에야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
중고 1톤 트럭을 우리 집으로 데려올 때, 남편을 제쳐두고 내가 마중 나갔다. 실전 운전은 면허 시험장에서 해본 후 처음이었지만 무사히 집으로 몰고 온 건 소처럼 주인을 알아본 트럭의 인연 때문이라 믿었다.
그 후 주중에는 나를 출퇴근 시켜주었고, 주말이면 서로 데면데면한 부부를 태워 농장으로 갔다. 세월이 갈수록 포터는 가족처럼 한 몸이 되었다. 의자에 앉아 운전대를 잡으면 쇠로된 차체는 가족의 생계를 지켜주는 평온한 안식처가 되어 마음속에서 안정감이 솟아올랐다. 차가 열심히 달리는 한 나도 주어진 현실에 또박또박 최선을 다했다.
시골로 이사하면서 트럭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농산물을 싣고 공판장에 가거나 판매하는 일에 남편이 아니라 트럭이 동행했다. 한번은 애써 지은 복숭아가 제값을 못 받아 새벽시장으로 달렸다. 헐값에 넘기느니, 직거래를 하겠다는 생각과 활어처럼 움직이는 시장 사람들의 삶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새벽 판매장은 자리다툼의 선착순이어서 알람을 맞춰 둔 시계보다 먼저 일어나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새벽바람이 가슴 속까지 파고들었다. 새벽 4시쯤이었다.
좌판에 복숭아 상자를 가지런히 진열하고 맛 좋은 산골 복숭아 싸게 드린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삶이 급박해 목성이 틔었는가, 득음이 어찌 소리꾼에게만 있을까. 시골 엿장수에게도, 어물전 아줌마에게도, 무명 가수에게도 삶을 부르는 득음이 그들을 일어서게 한다. 시장 사람들이 장삿길에서는 늦지 않은 나이라며 격려하는 말에 힘을 북돋웠다. 트럭은 변함없이 호위병처럼 곁에 있었다. 그때면 소달구지와 아버지가 서 있던 모습과 더불어 한마디 말이 떠오르곤 했다.
"열심히 살거레이."
트럭은 쇠의 집합소다. 엔진은 말 그대로 쇳덩어리다. 몸체도 범프도 모두 쇠판이다. 번호판, 기름통, 브레이크, 엑세레이더도 쇠로 만들어졌다. 부속들을 연결하는 스프링, 밸브 나사못 하나하나도 강철이다. 아버지의 운반 도구가 소달구지라면 나의 달구지는 철판, 철 핀 철끈으로 연결된 쇠 달구지다. 쇠는 차갑고 딱딱한 게 아니라 가족의 생존을 이끈 야무지면서도 푸근한 보호자였다.
나의 푸른 인생과 쇠 달구지의 푸른 시절이 함께했다. 무거운 농산물을 가득 싣고 내리막과 오르막을 힘차게 달릴 때면 아버지의 인생이 뚜벅뚜벅 걸어간 높낮이를 떠올렸다.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핸들을 잡은 두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십여 년이 지나면서 가파른 길에서 내는 트럭의 숨소리가 예전과 달라지기 시작했다. 몸피는 이미 검붉은 저승꽃이 군데군데 흠집으로 남고 이리저리 쥐어박힌 자국들이 움푹움푹 패이며 세월 따라 노쇠해진 건 자동차의 심장인 엔진이 시원찮아진 게다.
낡은 쇠 달구지를 새것으로 바꾸어야 되지 않겠냐고 남편에게 마음에 없는 말을 넌지시 건네 보았다. 남편도 보내기가 아쉬웠는지 타이어만 교체한 뒤, 내리막길도 안전하게 나간다며 좋아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1톤 트럭 쇠 달구지가 돌변사를 당했다. 힘찬 청년의 몸으로 우리 집에 와 열서너 해를 넘긴 셈이다.
쇠 달구지가 비명횡사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다. 주인의 지나친 애정이 걱정스러워 스스로 목숨을 줄였지 싶다. 아니면 힘에 부치고 낡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쇠 달구지의 순사가 살갗이 떨어져 나간 듯 아리다. 작별을 고하는 남편도 착잡한 심정인 듯 일찍 밭으로 가더니 황혼을 넘겨서야 돌아왔다.
오늘을 마주하는 이는 죽은 자를 배웅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가야 할 굽고 울퉁불퉁한 길을 혼자 힘으로 끄는 일이다. 생이란 언젠가 제 길을 자신이 마무리하는 것. 소임을 다한 쇠 달구지는 희뿌연 운무 속으로 사라져 갔지만, 그의 녹진한 노동의 시간과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껏 내 곁을 감싸고 있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백종원 저격수'가 추천한 축제…황교익 축제였다
윤희숙 여의도연구원장, 국민의힘 새 혁신위원장
트럼프 '25% 관세' 압박에…한국, 통상+안보 빅딜 카드 꺼냈다
李대통령, 이진숙 국무회의 제외 결정…"공무원 중립의무 위반"
감사원 "이진숙 방통위원장 정치중립 의무 위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