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선전하는 존재가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다. 통신사가 조선의 선진문명과 문화를 일본에 전수해 주었다는 것이다.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행차할 때 머무는 곳마다 이들과 교류하려는 일본 유학자·지식인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면서 K-컬처의 원조라고 자랑이 대단하다. 과연 이런 주장은 어느 정도나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과 부합할까?
통신사란 조선시대에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이다. 1403년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3대 쇼군(征夷大將軍)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가 사신(일본국왕사)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일본 간에 정식 국교가 시작됐다. 조선은 태종 시절부터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는데,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조선에선 18회 파견했고, 일본국왕사의 조선 파견은 71회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양국 국교가 단절되었고, 1603년 3월 24일 도쿠가와(德川)막부는 쓰시마 번을 통해 국교 재개를 요청해 왔다. 1609년(광해군 1)에 양국은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양국 간 국교가 재개되었다. 이후 조선은 도쿠가와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에도(도쿄)에 12차례 통신사를 파견했다. 일본 측은 60여 차례 일본국왕사를 조선에 파견했다.
도쿠가와막부는 지리상 가까운 쓰시마 도주(島主)에게 조선과의 외교를 일임했는데, 조선 정부는 쓰시마 도주를 '준신하(準臣下)'로 하대했다. 쓰시마에서 조선에 보내는 외교 공문서에는 조선의 종주국인 중국 황제 연호와 조선 정부가 구리로 새겨 보낸 관인(감합지인·勘合之印)을 찍어 보내도록 했다. 조선 정부가 관인을 일본에 보낸 것은 일본을 한 수 아래로 낮춰 보았음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조선과의 외교관계가 필요했던 도쿠가와막부의 쇼군은 굴욕을 참고 자신을 '대군(大君)'으로 낮춰가며 교류를 재개했다.
◆일본 측이 통신사 행차 비용 700억 엔 부담
통신사의 이동 거리는 왕복 4천150km, 이동 시간은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년 걸리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통신사 행차 비용은 조선 구간은 조선 측이, 일본 관내에서 드는 비용은 막부가 부담했다. 막부는 통신사 행차 비용으로 총 100만 냥(현재 화폐가치로 700억 엔)을 지출했다. 제임스 루이스 옥스퍼드대 교수는 막부가 일본 쌀 연간 수확량의 12%를 통신사 접대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도쿠가와막부는 통신사 행차를 위해 선박 1천400여 척, 짐 운반을 위한 일꾼 33만 명, 8만 마리의 말을 제공했다.
통신사 행렬의 선두에는 의장대가 장엄한 곡을 연주했고, 화려한 복색을 차려입은 통신사 일행이 행진했다. 뒤에서는 조선의 명물인 마상재(馬上才,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 가지 기예를 부리는 마상무예) 공연을 펼쳤다. 통신사 행렬이 시가지를 통과하는데 무려 5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통신사가 머무는 지역마다 일본의 세력가들은 통신사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글씨나 그림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왕복 1만 리가 넘는 거친 여정과,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가며 통신사를 파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국가적 위기를 경험했다. 때문에 주기적으로 일본 현지 정황을 정탐하고, 우호 관계를 통해 재침을 예방해야 했다. 특히 명·청 교체기를 맞아 북방에서 여진족이 준동하자 남쪽 지역의 안정을 위해 통신사를 파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이 통신사를 초청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도쿠가와막부는 자신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력이란 사실을 국내에 전파하기 위해 통신사를 적극 활용했다. 그들은 실리 외교를 위해 겉으로는 조선에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신(神)의 나라' 일본은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게 우월하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도쿠가와막부는 일본 백성들에겐 통신사를 서쪽 오랑캐 나라에서 온 조공 사절로 선전했다. 또 나가사키에 상관을 설치한 네덜란드에는 조선이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인식시켜 네덜란드가 조선과 직접 교역하지 못하도록 했다.
막부가 통신사를 초청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도쿠가와막부는 거액의 통신사 행차 비용을 통신사가 통과하는 지역의 번을 다스리는 다이묘(영주)들에게 부담시켰다. 이런 방식으로 각 번의 경제력을 소진시켜 막부에 대항하는 군사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싹을 잘라버렸다. 말하자면 통신사를 이용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이었다.
도쿠가와막부는 17세기 초 나가사키에 오늘날 경제특구에 해당하는 데지마를 설치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한 나라에만 교역을 허가했다. 그 대가로 네덜란드는 자국 동인도회사 정보망을 통해 수집한 세계 동향 정보를 제공토록 했다. 이것이 풍설서다. 네덜란드 상관장은 막부에 풍설서를 제출하기 위해 총 164회 막부의 수도 에도(도쿄)를 방문했다. 통신사의 에도 방문 횟수 12회보다 14배나 많은 행차였다.
막부는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자국의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상세한 국제 정치·경제 동향 정보를 입수했다. 통신사를 통해 수집하는 정보의 질이 계속 낮아지자, 막부는 1811년 제12차 통신사를 쓰시마에서 적당히 대접한 후 돌려보냈다. 학자들은 이것을 역지빙행(易地聘行)이라고 말한다. 이것으로 통신사 교류는 막을 내렸다.
◆17~18세기 일본의 놀라운 번영
조선은 1644년 중화의 원조 명나라가 여진족에게 멸망하자 소중화를 자처하며 자신이 이 세상 유일의 중화 문명 수호국이라는 멍청한 우월 의식에 빠졌다. 그 시기에 일본은 이와미(石見) 은광에서 생산되는 은을 가지고 국제 무역을 하여 국부를 창출했고, 서양 학문과 기술, 문물을 받아들여 번영을 구가했다. 일본 상인 집단은 중국 남부와 베트남의 호이안, 캄보디아, 태국, 믈라카해협, 자카르타, 마닐라, 대만에 상관을 설치하여 동남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대 무역망을 연결했다.
막부의 쇼군이 거주하는 에도에는 1653년 상수도가 완공돼 시민들이 위생적인 수돗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오이시 마나부, '일본 근세도시 에도의 기능과 성격', 도시인문학연구 1호, 2009). 18세기 초 에도 인구는 100만 명, 오사카와 교토는 40만 명이 넘었고, 각종 근대적 인프라를 갖춘 세계적 대도시로 발전했다. 조선의 수도 서울은 20세기 초 인구가 25만 명에 불과했다.
특히 일본은 오래전에 주자학을 폐기하고 고증학·양명학·난가쿠(蘭學)를 학문의 주류로 삼았다. 17~18세기 일본은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학문이나 과학기술 수준이 조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서 있었다.
통신사 수행원들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의 발전상에 대한 찬사가 상당수 발견된다.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는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을 예로 들어 해외무역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특히 통신사를 통해 일본 고학(古學·양명학)의 연구 성과가 조선에 수입돼 정약용 등 실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후마 스스무(夫馬進) 일본 교토대 교수를 비롯한 여러 학자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1711년(숙종 37), 제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徳川家宣)의 취임 축하를 위해 제8차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됐다. 정사 조태억, 부사 임수간을 비롯한 대표들은 11월 5일 에도에서 일본의 근대 지식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와 대화했다. 임수간이 남긴 '동사일기'(東槎日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발견된다.
'조태억 : 천하가 오랑캐를 따르지만, 우리나라만은 대명(大明)의 제도를 고치지 않았다. 오로지 우리가 동주(東周, 동쪽의 주나라라는 뜻)다.'
'아라이 하쿠세키 : 그런데 왜 명나라 옷을 입고 있는가. 그나마 청나라가 봐줘서 그 정도 아니겠는가? 대서양과 구라파의 이탈리아, 네덜란드 사람들을 직접 보았고, 지금 공들과 한집에 있으니 기이하다.'
'임수간 : 대서양은 서역 나라 이름이다. 구라파와 이탈리아는 어느 곳에 있는가?'
'아라이: 귀국에는 만국전도가 없는가?'
◆일본 서점에 큰 충격 받은 통신사
1719년 제9차 통신사 홍치중을 따라 제술관으로 일본을 다녀온 신유한은 "오사카에는 수많은 책이 있어 실로 천하 장관이었다. 오사카의 서점에 가 보니 중국 남경에서 수입한 책이 1천여 종, 민간에서 간행한 각종 문집과 특이한 책이 조선의 100배가 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시기 조선에는 서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몰래 책을 팔러 다니는 책쾌(冊儈)라 불리는 비밀 서적상이 있었는데, 이들이 책을 판매하다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유한은 김성일의 일본 견문록인 '해사록', 유성룡의 임진왜란 기록인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 같은 기밀에 속하는 책이 오사카에서 버젓이 출판 유통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내가 통신사 사행 중에 쓴 시문이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보니 벌써 책으로 묶여 출판되고 있으니, 이 엄청난 속도에 어안이 벙벙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11차 통신사의 서기 김인겸의 1764년 오사카 방문 기록을 소개한다.
"100만 채 가까운 집 모두는 기와집이다. 오사카 부호 집은 '조선 최대의 대저택'의 10배 이상 넓이로, 구리 기둥에 내부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도시 크기는 40km 정도로 모두가 번영하고 있다.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낙원이란 오사카의 일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도시가 있을 수 있을까? 한양 번화가 1만 배의 발전이다. 북경을 접해본 통역 통신사가 있지만 그도 "북경의 번영도 오사카에는 진다"라고 말했다. 짐승 같은 인간들이 2천년 동안 이렇게 평화롭게 번영하고 있었다니 원망스럽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아간 조선 도공이 제작한 채색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여 만국박람회의 최우수상을 싹쓸이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무역선이 1650년부터 1세기 동안 유럽으로 수출한 일본 도자기가 무려 520만 점이었다. 일본 도자기 포장지에 그려진 전통 그림 우키요에(浮世絵)가 유럽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19세기 중반 모네, 마네, 반 고흐 등 이 일본 문화에 심취, 인상파 성립에 결정적 영향 끼친 사실을 우리만 모르고 있다. 아니,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고 애오라지 통신사가 일본에 선진문화·문명을 전해주었다고 국뽕에 심취해 자랑만 일삼는다.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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