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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김노주] 북성로의 사랑: 정주와 아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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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북성로의 밤'(2012)은 조두진 작가가 일제강점기 말의 역사적 사실에 상상의 옷을 입힌 장편소설이다.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다섯 등장인물의 삶을 반추해 본다.

대구 북성로 96에 뉴시민유료주차장이 있다. 그곳은 1933년에 설립된 미나카이 본점 백화점(이하 미나카이)이 있던 자리다. 미나카이는 지하 1층, 지상 4층이었고 대구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이었다.

나카에는 대구에서 1905년에 포목점을 시작했고 1933년엔 북성로에 미나카이를 설립하며 사업을 발전시켰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까지 조선, 일본, 만주, 중국에 20여 개의 백화점을 운영하며 승승장구했지만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정주는 대구부 경찰서 순사부장인 사촌 형 태영 덕분에 미나카이 배달부에 취직해서 고객이 주문한 물건을 동인동, 삼덕동 등지로 배달했다. 그런데 무영당 백화점이 새로 생겨 조선인 고객들이 몰려가니 나카에 사장은 위기를 느껴 정주를 판매부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정주는 미나카이에 근무하는 4년 동안 나카에 사장의 무남독녀인 아나코를 지켜보았다. 아나코는 대구공립고등여학교(대구여고)를 졸업하고 대구의학전문대학교(경북대 의과대학)를 다녔다. 천진난만하고 예쁜 아나코는 집안 명성을 후광으로 더욱 빛났다.

아나코는 정주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을까? 정주에게 자전거 타기를 가르쳐 준 것부터 정주의 자전거 짐칸에 앉아 정주의 허리를 잡은 것까지 먼저 손을 내민 쪽은 아나코였다. 정주는 아나코와 만난 후 그녀가 생각나는 것이 두려웠다. 두려워할수록 생각은 깊어졌다. 신분 차이와 시대가 둘을 갈라놓을까 무서웠다.

태영과 치영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형제였지만 가는 길은 너무나 달랐다. 태영은 조선인이라서, 가난 때문에 설움받는 것이 싫어 순사가 됐다. 동생 치영은 일본인 앞잡이가 된 형이 싫어 의열단 단원이 됐다. 형은 동생 같은 불순분자를 잡아야 했고, 동생은 형 같은 친일 앞잡이를 처단해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천황은 미·영·중·소 4개국 앞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했다. 오후부터 세상이 뒤집혔다. 조선인은 기가 살아 거리로 뛰쳐나왔고 일본인은 겁을 먹고 대문을 잠갔다.

해방조국청년회라는 단체가 태영을 끌고 가 동생 치영의 눈앞에서 처형했다. 치영이 형의 처형만은 막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치영은 해방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았지만 훗날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좌익 활동을 하다 처형당했다.

미 군정이 일본인 재산을 몰수하고 일본인을 추방한다고 했다. 나카에는 평생 동안 일군 재산을 몰수당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몇 달 전에 아나코가 정주와 혼인하겠다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했던 일이 떠올랐다. 급하게 혼례를 치르게 하고 정주에게 미나카이를 위탁했다.

일주일 뒤, 정주만 남긴 채 아나코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들은 대구역에서 부산행 열차를 탔다. 정주는 신방도 차려 보지 못하고 아나코를 보내야만 했다. 창밖으로 "이사 가지 마세요. 사랑해요"를 외치며 아나코는 멀어져 갔다. 미 군정은 두 사람의 혼인을 인정하지 않고 전 재산을 몰수했다.

20년 후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졌다. 1967년 봄, 정주는 큰아이에게 자전거 타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들이 "아빠, 놓지마!"라고 외칠 때면 자신에게 자전거를 가르쳐 주던 아나코가 생각났다. 아들은 비틀비틀 자전거를 타고 나아가고 정주도 한국전쟁에서 다친 불편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따라갔다.

앞쪽에서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운 얼굴, 아나코였다. 국교 정상화 덕분에 북성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나코는 독신이었지만 정주는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두 사람은 그 옆 경상감영공원 벤치에 앉아 "미안해요" "괜찮아요"를 반복하며 두 손을 잡고 흐느꼈다.

다음 달이면 광복 80주년이다. 그 시대를 처절하게 살았던 인물들에 대한 평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아픈 과거사를 지녔지만 이웃한 일본을 등지고 살 수는 없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은 각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경제·국방·교육·문화 분야에서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극일(克日)을 넘어 우리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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