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훈 기자 cdro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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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야 내전(內戰)]한국계파사

    [여야 내전(內戰)]한국계파사 "정권은 바뀌어도, 계파는 계속된다"

    ◆권력은 바뀌어도 계파는 살아남았다한국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정권의 흥망과 함께 계파의 부침도 반복돼 왔다. 권력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정치권의 주도 세력이 바뀌었고, 계파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형성됐다가 권력 재편기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거쳤다. 계파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은 곧 한국 정치의 권력 지형을 읽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자유당 내 다수파가 정국을 주도했다. 이후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부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시기에는 5·16 군사정변과 12·12 군사반란을 함께한 군 출신 인맥이 국정 운영의 핵심을 차지했다. 특히 전두환 정부에서는 군 내부 사조직인 하나회가 사실상 '개국공신'으로 대접받으며 군과 정권의 핵심 요직을 장악했다. 1990년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 '3당 합당' 이후에는 민주화 세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계파 정치가 본격화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가 정치권 양대 축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에는 두 전직 대통령의 자택에서 정치 현안을 논의하는 일이 잦았고, 누가 상도동과 동교동을 자주 드나드느냐가 권력의 중심과 거리를 가늠하는 척도로 여겨질 정도였다.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계파 정치의 명칭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대통령을 뜻하는 '친(親)'자가 붙기 시작한 것이다. 386세대를 중심으로 한 친노(親盧) 세력이 국정 운영의 중심축으로 떠올랐고, 노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된 이후에는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하며 집권 세력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는 친문(親文)계가 여권의 주류로 부상했다. 청와대와 정부, 당의 주요 요직에 친문 인사들이 대거 포진하면서 국정 운영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했다. 보수 진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부터 친이(親李)계를 구축했고,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승리 이후 당내 최대 계파로 성장했다.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친박(親朴)계가 세를 확장하며 보수 진영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박 전 대통령의 집권 과정에서도 핵심 동력으로 작용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 전 대통령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친윤(親尹)계가 당내 최대 세력으로 부상했다.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집권한 이재명 대통령 역시 비주류에서 당의 주류로 올라서며 당권과 대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친명(親明)계는 더불어민주당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집권 이후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집권 2년 차에 접어들면서 여권 내부에서는 다시 계파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차기 당 대표 선출과 2년 뒤 총선 공천권을 둘러싸고 친명계 내부의 신주류와 기존 친노·친문계 인사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양상이다. 특히 당권 경쟁 과정에서는 친명계와 정청래 전 대표를 지지하는 세력이 맞붙는 이른바 '명청대전(明淸大戰)'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며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2026-07-24 16:30:00

  • [여야 내전(內戰)]바람직한 계파정치

    [여야 내전(內戰)]바람직한 계파정치 "정책, 신념, 이슈따라"

    계파 정치의 폐해는 정치권 안팎에서 오래전부터 지적돼 왔다. 정치인과 학계, 시민사회 모두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뚜렷한 대안은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원론적 수준의 처방이나 선언적 구호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고, 총선과 대선 등 권력 재편의 분기점에서는 계파 정치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정태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지방의회정책연구원장)는 현재 한국 정치의 계파 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바람직한 계파의 방향을 제시했다. 이 교수는 "한국식 계파 정치의 폐해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며 "권력을 중심으로 무리를 짓고 줄을 서는 행태가 가장 큰 문제이며, 이것이 오늘날 한국 정치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계파 자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며 "정치적 이념과 정책 노선, 특정 현안에 대한 신념을 중심으로 계파가 형성된다면 정책 경쟁이 가능해지고 정치 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도 계파 정치 청산을 꾸준히 주장해 온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나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특정 계파에 줄을 서거나 편승하는 정치를 했다면 5선 수도권 정치인으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내 정치에는 친도, 반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오직 '친국민'만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역시 계파 정치의 부작용을 여러 차례 지적해 왔다. 그는 2017년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당시 여권의 '친문 패권'을 언급하며 "정치를 하면서 계파 정치의 폐해를 절감했다"고 밝혔다. 이어 "계파 정치란 결국 끼리끼리 나눠 먹는 정치"라며 "계파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 무능과 부패가 뒤따르기 쉽고, 요직을 독점하면서 능력 있는 인재들이 정치에 진입할 기회를 잃게 된다"고 비판했다. 계파 정치 청산을 위한 시도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4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은 당의 고질적 병폐로 꼽혀 온 계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계파주의 극복과 당 혁신 방안'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계파 정치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데는 의견이 모였지만, 실효성 있는 제도적 대안은 제시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천정배 전 의원은 "계파 정치와 무기력, 침체가 가장 심각한 곳이 호남 정치"라며 "호남 정치의 개혁과 복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2026-07-24 16:30:00

  • [여야 내전(內戰)]

    [여야 내전(內戰)]"밀리면 수렁" 진보는 계파 VS 보수는 인물

    ◆바야흐로 '정치 내전(內戰)' 정치권 내전(內戰)이 시작됐다. 6·3 전국 지방선거가 끝나고, 여야 모두 권력 재편을 둘러싼 치열한 주도권 경쟁에 돌입했다. 문제는 여야 모두 민생(民生)보다 계파 투쟁 양상이 뚜렷하다. 경기 침체와 고물가, 청년 취업난, 저출산과 지방 소멸 등 국가적 난제가 산적해 있지만 여야의 관심은 당권과 차기 권력 구도에 집착하고 있다. 국민들이 바라보는 현실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국민의 피로감도 극에 달하고 있다. 온·오프 라인에서 진영간 극한 대립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곳곳에서 상대를 비방하는 원색적인 비난과 혐오가 난무하고, 정치적 갈등이 국민들 사이까지 깊숙이 파고 들었다. 정치가 국민을 통합하기는커녕 오히려 분열을 확대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국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정책과 입법을 둘러싼 생산적인 토론보다 정치적 공방이 더 큰 관심을 받고 있다.6·3 지방선거후 여야의 당권 싸움이 격해지고 있다. 특히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친노(親盧)·친문(親文) 정통 민주 계열과 친명(親明)으로 대표되는 뉴 이재명 계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대결 양상이다. 야당인 국민의힘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강성파와 중도파의 대결로 장동혁 대표의 사퇴 문제로 연일 시끄럽다. 현 지도부로 대표되는 강성 보수(당권파)와 중도 보수(오세훈, 한동훈 등)의 주도권 경쟁이 본격화되는 모습이다. 보수는 현 시점에서 단일대오로 똘똘 뭉친다면 확실한 반등의 기회가 찾아올 수 있겠지만, 바람잘 날이 없다. 차기 주자를 중심으로 한 계파 갈등도 멈출 기미가 없다. 국민들이 정치권에 바라는 것은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민생 안정과 국가 경쟁력 향상을 위해 일하는 모습이다. 당내 권력 투쟁에만 골몰하는 모습이 때론 한심하게 느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 내전'이 아닌 '민생 내전'이다. ◆계파 정치의 폐해, 분열로 망한다 정치의 수레바퀴는 쉼 없이 돌아간다. 한 때는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정치권의 통설처럼 회자된 문장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는 양상이 달라졌다. 오히려 보수는 분열과 내부 갈등을 반복하며 세 차례나 정권을 진보 진영에 내줬다. 현재도 진행중이다. 이회창·이인제의 대선 경쟁을 시작으로 친이(이명박)계와 친박(박근혜)계의 극한 계파 대립, 박근혜 전 대통령과 유승민 전 의원의 '배신' 논란, 윤석열 정부 시절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대표 간 당정 갈등까지 보수 내부의 권력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보수의 분열은 진보 진영에는 새로운 기회가 됐으며, 실제로 정치적 반사이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분열'이라는 정치의 고질병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거대 집권 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도 권력 재편을 둘러싼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민주당은 과거 '친노·친문' 세력과 새로운 주류로 부상한 '친명' 세력 간 미묘한 힘겨루기가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2003년 노무현계 개혁세력이 창당했던 열린우리당이 계파 갈등 끝에 3년 9개월 만에 정치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기억이 소환된다. ◆더불어민주당, 계파 갈등 가속화 이른바 명청대전(明淸大戰), 집권 여당에 계파 갈등이 본격 시작됐다. 양쪽 계파의 선을 넘는 발언들이 오가고 있다. 지난 20 여년 동안 좀체 볼 수 없었던 양상이다. 6·3 지방선거 결과가 양측의 갈등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소위 이재명 대통령의 이른바 '명픽(明 Pick)' 으로 분류됐던 인사(정원오·김용남·하정우 등)들이 잇따라 낙선했고, 당내에선 친명계와 친청계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다. 집권 1년 동안 60~70%대를 유지하며 견고했던 대통령 국정 지지율도 최근 들어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6월 3주차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부정 평가(49.7%)가 긍정 평가(46.7%)를 앞서는 '데드크로스'가 일어났다. 이후 지지율은 2~3% 정도 반등해 현재는 긍정 평가가 다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집권 2년 차에 접어든 시점에서 양측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이유는 2년 뒤 치러질 총선 때문이다.당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공천권의 향배가 결정되고, 이는 곧 정치적 생존과 직결된다. 이 대통령과 정 전 대표에겐 공천 주도권이 걸린 한판 승부다. 청와대는 집권 중반 이후 찾아올 수 있는 레임덕을 최소화하려 하고, 친청계 역시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 위해 총력전을 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겉으로는 서로를 예우하는 모습도 보인다.이 대통령의 유럽순방 귀국행사에서 정 전 대표가 악수하며 협력하는 모습을 연출하지만, 내부에서는 치열한 주도권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 전 대표는 지난달 초 "정권은 짧고, 국민은 영원하다"고 선전포고에 가까운 말을 내뱉았고, 이 대통령은 도발에 가까운 그 발언에 격노했다고 한다. 당권주자인 송영길 의원은 정 전 대표를 향해 "옛날로 치면 역적"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국민의힘, 누가 보수의 간판인가? 보수 세력인 국민의힘은 오랫동안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는 구조를 보여 왔다. 정책이나 노선보다 인물을 중심으로 계파가 결집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 과정에서 극심한 내부 갈등과 '배신' 논란이 반복됐다. 현재도 4년 후 차기 대권주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가 최대의 관심사다. 친이계와 친박계의 대립은 결국 보수 진영의 분열을 심화시켰고, 의회 권력을 진보 세력에 넘겨주는 결과를 낳았다. '박근혜를 배신한 유승민', ' 윤석열을 버린 한동훈' 등 배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배신 프레임은 진보 세력에겐 상대를 흔들 수 있는 정치적 공격의 결정적 빌미가 했다.손자병법에 나오는 '이이제의'(以夷制夷, 오랑캐를 이용해 다른 오랑캐를 제압)에 해당한다. 6·3 지방선거 이후 보수진영의 차기 대권 구도는 사실상 3파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시장을 지켜낸 오세훈 서울시장과 보수 재건을 주창하며 부산 북갑에서 승리하며 존재감을 키운 한동훈 의원, 그리고 현 당권파로 당을 이끌고 있는 장동혁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장동혁 대표는 당권파를 대표해 보수의 정체성을 강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당 대표직을 쉽게 내려놓을 뜻이 없다는 입장이다. 최근에는 다시 징계 카드를 꺼내며 당 기강 확립을 명분으로 강경한 당 운영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반면, 비당권파 세력들은 현 지도부가 당의 외연확장에 한계를 노출했다며, 중도층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교체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6-07-24 16:30:00

  • [여야 내전(內戰)]'계파'(系派)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여야 내전(內戰)]'계파'(系派)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계파 없는 정치는 가능한가." 전 세계를 막론하고 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가 중에 정당 내 계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찾기는 쉽지 않다.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면, 정치적 가치와 뜻을 같이 하는 결사체가 있어야 한다. 그 속에서 특정 지도자를 중심으로 조직화되는 것이 정치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당내 다수 계파가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하고, 국민은 그 후보 가운데 대통령을 선택한다. 독재국가도 경쟁없이 단일 계파의 지도자 한 명을 추대하는 형식을 취한다. 대한민국 정치 역시 예외일 순 없다. 여야 모두 당내 다수 계파가 당권과 공천권을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차기 대선과 총선을 준비하는 구조다. 박성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의원 한 명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느냐"고 반문하며, 정치권에서 계파가 생존과 권력의 기반이라는 점에 의미를 부여했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늘 "난 계파가 없다"고 강조해 왔지만, 4년 전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서 조직력을 갖춘 윤석열 전 대통령의 '친윤'(親尹)에 밀려 쓰라린 패배를 맛봤다. ◆반복되는 계파 정치, 공천이 곧 권력 정치권에서 계파 경쟁이 반복되는 가장 큰 이유는 공천권이다. 정치인에게 공천은 정치 생명과 직결된다. 현역 의원이라도 공천을 받지 못하면 재당선 가능성은 급격히 낮아진다. 이 때문에 총선을 앞둘수록 정치인들은 차기 주류 세력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모습을 반복해 왔다. 자칫 비주류에 줄을 서게 되면 정치 생명마저 끊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현재 여야의 내전은 2년 후 있을 총선의 전초전 성격으로 봐도 무방하다.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미 2년 전 총선에서 큰 내홍을 겪은 바 있다. 이른바 '비명횡사'(非命橫死). 친노·친문 세력 중 공천권을 거머쥔 친명계에 비협조적으로 나온 인물들은 여의도를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이를 혹독하게 겪은 비명계는 다가오는 총선에서 친청계가 공천권을 행사하기를 바라며, 친명계에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 여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당내 갈등 역시 단순한 노선 다툼이라기보다 2년 뒤 총선을 겨냥한 공천권 경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야당도 계속되는 계파 경쟁 국민의힘 역시 계파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 이후 각종 재판을 받고 있지만 친윤파는 여전히 당내 주류 세력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장동혁 당 대표 역시 강성 당원들과 친윤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사퇴 요구를 일축하고 있다. 두 세력의 계파 다툼 속에 6·3 지방선거 정치적 존재감이 커진 오세훈 서울시장(5선)도 차기 대권을 염두에 두고 당내 친오(親吳)계를 만들기 위해 자주 국회를 찾고 있다. 한동훈 의원은 계파 정치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2년 전 당 대표로서 총선에서 공천권을 행사하며, 친한(親韓)계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현재 원내에서는 15명 안팎의 소수 세력에 머물고 있다. 교섭단체 구성 기준인 20석에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다. 무소속으로 여의도에 입성한 후 '보수 재건'의 기치는 내걸고 있지만, 보수 세력 내 다수 계파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정치적 장벽은 높디 높다. 이런 가운데 안철수 의원이 뜬금없이 한동훈 의원의 복당을 반대하고 나선 것도 당내 주류가 되기 위한 몸부림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계파'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전문가들은 계파 자체를 없애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본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일본 자민당, 영국 노동당과 보수당 등 주요 민주주의 국가들도 모두 다양한 계파와 정치그룹이 존재하며, 지도부 선출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문제는 계파의 존재가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고 운용하는 방식이다. 정책과 비전을 중심으로 경쟁하는 계파는 민주주의를 활성화하지만, 공천권 독점과 보복성 공천, 줄 세우기 정치로 이어질 경우 정당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정치 불신을 키울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계파정치의 사슬을 끊는 해법은 계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공천의 투명성을 높이고 당내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있다는 것이 정치학계의 공통된 견해다.계파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계파가 국민을 위한 정책 경쟁의 도구가 될지, 권력만을 위한 생존 경쟁의 수단이 될지는 정치권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

    2026-07-24 16:30:00

  • [털보기자의 '그사람']전 세계와 소통하는 박수관 명창

    [털보기자의 '그사람']전 세계와 소통하는 박수관 명창

    박수관 명창은 동부민요를 국내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전파하는 소리 전도사다.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국립오페라하우스 초청으로 동부민요 공연회를 갖고, 제자들과 함께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한국을 알리는 공연을 펼쳤다. 그는 몇몇 국가에서는 최고지도자로부터 VIP 대접을 받을 정도로 유명 셀럽이기도 하다. 해외에서도 수상이력도 이채롭다. 2000년 러시아 국립글링카 음대 명예 음악학 박사 및 명예교수 임명, 2004년 프랑스 IRMA(세계전통음악가 임명사전)에 등재, 2005년 러시아 타워상을 받았으며, 2009년에는 아프리카 54개국과 중동 6개국으로 구성된 왕족 포럼 명예대사로 위촉되었으며, 2010년에는 델픽세계무형문화재 동부민요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2011년 '한국의 소리, 메나리'는 베를린 국제델픽예술영화제에서 그랑프리(대상)를 수상했다. 2009년에는 제프 블레터 전 FIFA 회장과 함께 아프리카 로열 어워드를 공동 수상하기도 했으며, 2005년에는 조지 W 부시가 주는 미국 대통령상도 받았다. 해외 유명인사들과 인맥도 놀랍다. 박 명창은 미국 헐리우드 톱스타 배우인 밀라 요보비치를 비롯해 애릭 로버트, 피트 호프만과도 현지에서 한국적인 정(情)을 나눴으며, 세계적인 성악가 쥬세페 타데이(이탈리아)와도 음악적인 교류를 나눴다. 또, 2000년 미국 카네기홀 초청 공연 뿐 아니라 미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700여회의 국내·외 공연을 열었다. 그는 "동부민요는 지역의 소리가 아니라 전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의 언어이며, 마음을 전하는 길"이라며 "국경과 장벽을 넘어 한국의 정서를 세계에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앞으로도 돈을 추구하는 삶은 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박 명창의 버킷리스트는 북한 개마고원이나 부령, 청진에서 멋드러지게 동부민요을 한번 불러보는 것이다. 그는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들에게도 동부민요의 진수를 보여주고 싶다"며 "소리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다"고 밝혔다.

    2026-07-24 15:30:00

  • [털보기자의 '그사람']'소리와 공학' 이도류, 기술과 예술 잇는 박수관 명창

    [털보기자의 '그사람']'소리와 공학' 이도류, 기술과 예술 잇는 박수관 명창

    공학박사이자 대한민국 명장, 동부민요 명창. 좀처럼 접점을 찾기 어려운 두 분야를 평생 함께 걸어온 사람이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투타를 겸업하는 오타니 쇼헤이의 별명인 '이도류(二刀流)'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 박수관 동부민요 명창이다. 원래 이도류는 일본 검술에서 양손에 각각 다른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검법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전혀 다른 두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성과를 거두는 사람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널리 쓰인다. 박 명창은 공학과 국악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모두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스스로를 "직업은 공업인이고, 본업은 소리꾼"이라고 소개한다. 산업 현장에서는 첨단 정밀기술을 연구하는 공학자이지만, 무대에 오르면 동부민요의 맥을 잇는 명창으로 변신한다. 그는 한양대 산업공학 석사 시절인 1990년 4월 20일 조선일보 1면에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대통령상 수상자로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또,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대구에 '갑우정밀'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지역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기구한 운명, 유복자로 태어난 기인(技人) 박 명창의 삶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경남 김해읍 전하동에서 2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그가 세상에 나오기 전 세상을 떠났다. 유복자로 성장한 그는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안정적인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기를 바랐지만, 어린 박수관의 마음은 늘 소리를 향해 있었다. 동네에서 상여행렬이 지나갈 때마다 상여소리를 하는 소리꾼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으며, 동네 장터에서 각설이패의 한바탕 놀음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그의 귀는 삶의 소리와 민중의 가락을 향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막내 아들의 소리꾼 기질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초등학교 6학년 때, 무협지 같은 기인(奇人)을 만났다. 그가 바로 동부민요의 창시자라 불리는 김로인(金路人). 스승 김로인은 소리를 좋아하고, 잘 하는 어린 아이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소리의 깊은 내공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백발가부터 시작해 전쟁가, 동해 뱃노래 등 구전을 통해 전해 내려오던 동부민요의 진수를 전했다. 소리뿐만 아니라 삶의 철학도 함께 남겼다. 김로인이 제자에게 남긴 가르침은 세 가지였다. 첫째, 자연에 가깝게 노래하라. 둘째, 목이 아닌 가슴으로 노래하라. 셋째, 남 앞에 나서지 마라. 모든 것을 전한 스승은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그는 "김로인을 만난 건, 지어낸 얘기 같을 정도로 영화보다 더 극적"이라며 "이제 제가 그 동부민요를 체계적으로 만들고, 전수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전국 최장수 문화원장 "서구에 문화의 향기" 대구광역시문화원연합회 회장이기도 한 박 명창은 지역 문화 발전에도 남다른 애정을 쏟고 있다. 대구 서구문화원 원장을 14년째 맡고 맡아, 기초자치단체 문화원장으로는 전국 최장수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임기 후에는 자연인 소리꾼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재임 기간 내내 서구에 문화의 향기를 전파하겠다는 생각 뿐이다. 박 명창은 밤낮없이 서구 주민들에게 멋진 공연을 향유할 기회를 줄 수 없을까 고민한다. 이번달 16일에는 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을 초청해 '잎은 피어 청산되고, 꽃은 피어 화산되니' 공연을 선사했다. 또, 다음달 5일에도 대한민국 국보급 임동창 풍류 피아니스트를 모시고 '내 사랑 대구, 風流'라는 제목으로 토크 콘서트를 연다. 서구문화원장으로서 가장 큰 역할은 자신의 인맥으로 저비용 고효율의 공연을 기획하는 것이다. 물론 동부민요 무형문화재인 본인의 재능기부는 말할 것도 없다. 임동창 명인의 초청 대강연 역시 막역한 관계인지라, 정상적인 출연료를 초월해 성사시켰다. 그는 "임기를 마친 뒤에도 주민들의 문화 향유권 확대를 위해 계속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상복 터져, 평생 한번 받기 힘든 상 휩쓸어 박 명창의 공장인 갑우정밀 뒷편 야산에는 동부민요 전수관이 멋드러지게 자리잡고 있다. 건물 안에 들어가면, 각종 상들이 사방 벽면 뿐 아니라 천장까지 잘 전시되어 있다. 누구라도 이를 둘러보면, "이 분의 정체성은 뭔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학자 & 기업인, 문화예술인으로 걸어온 그의 삶이 그대로 기록돼 있는 셈이다.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대통령 국민포장, 서울전통공연예술 경연대회 대통령상, 석탑산업훈장,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홍보대사, 해외에서 받은 각종 훈장까지 분야도 다양하다. 과학자 & 공학도이자 소리꾼. 이질적인 듯 보이는 두 분야에서 그는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대한민국 최고이자 세계로 뻗어가는 문화 기업인으로 우뚝 섰다고 요약하면 될 듯하다. 그는 "지인들이 저에게 '기인'이라고 하는데 "제가 그런가요"라고 반문하며, "소리꾼의 재능을 갈고 닦고, 기업인의 제 본분을 다한 것"이라고 겸손했다. 3년 전부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는 현재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위촉한 첨단과학 및 나노정밀기기 연구분야의 저명한 방문학자(Distinguished Visiting Scholar)로 위촉되어, 관련 공동 연구에도 참여하고 있다. 박 명창은 마지막으로 아내 장은실 여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나는 늘 오늘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여보,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박 명창의 소리와 공학, 전통과 현대,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삶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2026-07-24 15:30:00

  • [산업유산 '문화로 꽃피다']누에의 희생을 기리다…상주 '잠령탑'

    [산업유산 '문화로 꽃피다']누에의 희생을 기리다…상주 '잠령탑'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리는 경북 상주. 쌀과 곶감, 명주를 상징하는 '세 가지 흰 것' 가운데 명주의 뿌리를 찾아가면 누에를 기리는 특별한 산업유산과 마주하게 된다. 지난 회 허씨비단직물(7월 10일자 15면)에 이어 이번에는 1930년 세워진 상주 잠령탑(蠶靈塔)​을 찾았다. 함창명주테마파크 잠사곤충사업장 주차장 한편에는 거대한 돌탑 하나가 방문객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대형 바위에는 '蠶靈(잠령)' 두 글자가 깊게 새겨져 있다. '누에 잠(蠶)', '영혼 령(靈)'이라는 뜻으로, 누에의 희생을 기리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상징물이다. 기단 위에 우뚝 선 비석과 그 위의 거대한 자연석은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탑에서는 마치 누에의 넋을 위로하는 엄숙한 분위기가 감돈다. ◆대구에서 시작해 상주로 옮겨온 산업유산 비단 한 필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누에고치가 필요하다. 인간은 누에가 뽑아낸 실로 옷을 짓고 전통 복식을 이어왔으며, 오랫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잠령탑은 이러한 누에의 희생에 감사하고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세워진 상징물이다. 현재 상주에 있는 잠령탑은 1930년 3월 대구 수성4가에 처음 건립됐다. 이후 1962년 상주시 복룡동으로 이전됐으며, 1986년 상석과 경계석을 보강했다. 2014년 4월 28일 현재의 함창명주테마파크로 다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탑의 규모는 기단부 높이 1.85m, 비신(머릿돌) 높이 1.7m로 전체 높이가 3.55m에 이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잠령탑은 1926년 서울 동대문 밖 용두동 선농단(농사의 신에게 올리는 국가 제사 제단) 경내에 세워진 '잠령공양탑'이다. 당시에도 누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됐다. 다만 일제강점기 전국에 세워진 잠령탑은 일본의 풍습이 유입된 사례로 평가된다. ◆누에 영혼 달래려, 매년 5월 풍잠기원제 잠령탑 자체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지만, 풍잠기원제(豊蠶祈願祭)​는 우리 고유의 전통 제례다.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온 풍잠기원제는 누에와 뽕나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고, 누에의 신인 잠령에게 제를 올리며 희생된 누에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이다. 경북도는 2022년 이곳 잠령탑 앞에서 전국 양잠 관계자들을 초청해 전통 제례의 원형을 살린 풍잠기원제를 재현했다. 매년 5월 초 제례를 올리는 것은 누에 사육 시기에 맞춰 한 해의 풍잠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경북은 전국 최대의 양잠 생산지이기도 하다. 2020년 기준 전국 누에 사육량의 79%, 건조누에와 생누에 생산량의 72.9%, 동충하초 생산량의 77%를 차지하고 있으며, 79종의 다양한 누에 유전자원도 보유하고 있다. ◆한때 국가 수출을 책임졌던 양잠산업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양잠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출산업이었다. 그 중심에는 경북 상주가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일본의 생사 수입 규제를 계기로 산업이 위축되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는 중국산 생사와 원단이 대량 유입되면서 국내 양잠산업은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걸었다. 21세기 들어 양잠농가는 크게 줄었지만, 함창명주는 여전히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장인들은 명주실을 물에 적셔 손베틀로 짜는 전통기법을 통해 결이 곱고 촘촘한 최고급 명주를 생산하고 있다. 함창 명주는 전통방식을 고집하는 만큼 생산량은 많지 않지만 그 가치만큼은 더욱 높아졌다. 현재 함창지역 50여 농가가 연간 12만 필 가량의 명주를 생산해 전국 생산량의 약 30%를 담당하고 있으며, 연간 소득은 72억 원에 이른다. ◆명주문화의 산 교육장으로 거듭나다상주 잠령탑은 2013년 산업유산으로 지정됐다. 경북도와 상주시는 함창명주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잠령탑 인근에 명주박물관과 함창명주테마파크를 조성했다. 명주박물관에는 상설전시실과 체험전시실, 영상관 등이 마련돼 양잠과 명주의 역사, 전통 직조기술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김남일 경북관광공사 사장은 "잠령탑의 산업유산 지정은 옛 잠실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며 "누에치는 마을과 함창명주테마파크를 연계해 미래세대가 양잠문화와 전통산업을 체험할 수 있는 문화교육 공간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때 대한민국 수출을 이끌었던 양잠산업은 쇠퇴했지만, 잠령탑은 지금도 묵묵히 그 영광의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누에의 희생 위에 피어난 명주의 역사와 장인들의 손길은 오늘도 상주 함창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2026-07-24 13:17:00

  • [정치야설 '5분전']'법사위원장이 뭐길래?' 국회 공전 상태

    [정치야설 '5분전']'법사위원장이 뭐길래?' 국회 공전 상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위원장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가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하반기 국회가 출범한 지 보름이 넘었지만, 원 구성조차 마무리하지 못한 채 국회는 사실상 공전 상태다. 법사위원장 자리를 둘러싼 양측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협상의 실마리도 좀처럼 보이지 않고 있다. 국회 의석 과반을 확보한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30일 법사위원장을 비롯한 11개 상임위원장을 단독으로 내정하고, 나머지 7개 상임위원장 자리를 제1야당인 국민의힘 몫으로 남겨뒀다. 민주당은 법사위원장 자리에 4선의 서영교 의원을 내정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일방적인 원 구성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민주당이 야당 몫으로 배정한 교육위원회, 외교통일위원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보건복지위원회, 국토교통위원회, 정보위원회, 성평등가족위원회 등 7개 상임위원장 자리도 모두 거부했다. 국회 일정 전면 보이콧을 선언한 국민의힘의 요구는 단 하나다. "법사위원장은 야당이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형 상원'이라 불리는 법사위법사위원장 자리를 둘러싼 갈등은 단순한 자리다툼이 아니다. 미국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분리된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상원은 각 주에서 2명씩 모두 100명의 의원으로 구성돼 법안 심의 과정에서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나라는 단원제 국회다. 18개 상임위원회에서 의결된 대부분의 법안은 본회의에 상정되기 전, 반드시 법사위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 때문에 법사위는 '한국형 상원' 또는 국회의 '최종 관문'이라 불린다. 법사위가 막강한 이유는 국회법 제86조가 규정한 '체계·자구 심사권' 때문이다. 법안이 기존 법체계와 충돌하지 않는지, 법률 용어와 문구가 적절한지를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권한이다. 명목상으로는 형식적 심사이지만 현실에서는 법안 처리를 늦추거나 추가 심사를 요구할 수 있어 사실상 입법 속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법사위는 국회 상임위원회의 '상왕'이라는 별칭까지 갖고 있다. ◆DJ때부터 법사위는 야당 몫법사위원장을 야당이 맡는 관행은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자리 잡았다. 당시 집권 여당은 국회의장을 맡는 대신 법사위원장은 야당에 넘겼다. 국회의장이 본회의 운영 권한을 가진 만큼 법사위원장은 야당이 맡아 입법 과정에서 견제와 균형을 이루자는 취지였다. 이후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도 이 관행은 상당기간 유지됐다. 여야 모두 의회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라는 데 공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대 양당 체제가 굳어지고 과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두 차례 국회에서 법사위를 포함한 주요 상임위원장을 대부분 차지했고, 이번 하반기 국회에서도 법사위원장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럴 만한 복심(腹心)도 있다. 대통령에 대한 공소(公訴) 취소 특검법 등 집권 여당이 통과시키려는 법안들이 법사위에서 야당에 의해 저지 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법사위 둘러싼 진흙탕 공방여야의 공방도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정점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민주당이 법사위원장을 고집하는 이유는 이재명 대통령의 재판 취소를 위한 공소취소 특검범 등 관련 법안을 일방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승수 원내운영 수석부대표도 "민주당이 배정한 7개 상임위원장을 모두 거부하고 대여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역시 법사위원장 자리는 협상의 대상이 아님을 천명하고 있다. 한병도 원내대표는 "일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법사위를 민주당이 맡아야 한다"며 "법사위원장을 요구하는 것은 민생을 볼모로 한 국회 파업 선언과 다름없다"고 맞받았다. 이어 "새 정부 출범 이후 야당이 상임위를 정쟁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며 국민의힘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타협은 실종…국회 정상화는 언제법사위원장을 둘러싼 대치는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미 서영교 법사위원장 내정자를 중심으로 법사위 운영에 들어갔고, 국민의힘은 국회 일정 전면 보이콧으로 맞서고 있다. 한 국민의힘 다선 의원은 "시간이 지나면서, 야당이 민생에 발목을 잡는다는 역풍이 커질 수 있다"며 "현재로선 출구 전략이 마땅치 않은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4년 전에도 민주당이 11곳 상임위원장을 단독 선출하자, 국민의힘은 전면 보이콧으로 대응했지만 결국 2주 만에 백기를 들고, 국회 상임위로 복귀한 바 있다. 여야 모두 '법사위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 한, 하반기 원 구성도 상당기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2026-07-17 14:30:00

  • [금주의 이슈] 프랑스의 쇠락-리더가 국가 흥망을 좌우한다

    [금주의 이슈] 프랑스의 쇠락-리더가 국가 흥망을 좌우한다

    프랑스는 시민 혁명(1789~1799년) 이후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은 뒤 프랑스 제1제국을 개국하고 통치할 때 유럽의 강자로 떠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주요 참전국이자 승전국이었던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프랑스 식민제국은 1938년에 정점을 이루었으며 당시 세계 인구의 5%가 프랑스 영토에 거주했다. 현재의 프랑스는 샤를 드골 대통령 등이 1958년에 세운 프랑스 제5공화국이다. 프랑스는 유럽연합(EU) 설립 시부터 독일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세계 5~6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소프트파워에서도 세계적인 문화 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또 전 세계 1억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세계적인 관광 대국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현재 모습은 '유럽의 병자'라 불릴 정도로 경제적 위상이 떨어지고 중·하층민들의 삶은 고달퍼졌다. 20세기까지 잘 나가던 경제대국을 단 5년 만에 몰락시킨 프랑스의 리더는 프랑스아 올랑드 대통령이다. 그가 사회주의 정책을 밀어붙이고, 포퓰리즘을 남발하면서 프랑스 기업과 기업인들이 탈출하고, 경제 토양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정태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유럽 일부 국가나 중남미 국가에서 보듯 한 국가의 리더가 어떤 사상을 갖고 정책을 실현하는 가에 따라 국운이 좌우된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사회주의 정책과 포퓰리즘을 간파하는 국민들의 집단지성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쇠락을 초래한 리더의 역정 올랑드는 2012년 우파인 니콜라 사르코지를 누르고 제24대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됐다. 프랑수아 미테랑 이후 17년 만에 사회당으로의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그는 이비인후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른바 극우 성향, 어머니는 좌파 성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루앙 시의회 선거에서 국가장 우파적인 국민전선의 후보로 출마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로마 가톨릭교회 교도로 정치적 성향은 기독교 좌파였으며, 2008년 칸 시의회 선거에 사회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저녁 식탁에서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집안 분위기가 싸늘했다. 부모가 서로 다른 정당을 따랐다. 올랑드는 아버지의 사상이 너무 싫었고 좌파 복지사인 어머니 노선을 따랐다. 아버지를 미워하며 자란 올랑드는 반발 심리로 좌파의 길을 걸었다. 올랑드는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파리경영대학, 파리정치대학, 국립행정학교(에나, ENA)를 졸업했다. 이 세 학교를 모두 졸업한 정치인은 지금도 찾기 힘들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는 모교인 파리정치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우파인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 실업률이 높아지고 고물가 현상이 지속되며 경제가 악화되자 사회당 후보로 나선 올랑드에게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가 쏠렸다. 그는 프랑스 사회당 지지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올랑드의 이상적인 정책들로 프랑스 실물경제가 망가지자 지지율도 함께 급락했다. 결국 프랑스 사회당과 올랑드의 지지율은 임기말 20% 이하로 떨어졌으며, 극우파 마린 르펜의 지지율이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레임덕이 극에 달했던 2016년에는 올랑드의 지지율이 4%까지 추락했다. 결국 그는 차기 대선에서 사회당 소속으로 출마하지 못했다. ◆나라 망친 사회주의 정책과 포퓰리즘 2012년 5월 대통령이 된 사회당 출신 프랑수아 올랑드의 선거운동 구호는 강력했다. 그는 '금융은 나의 적'이라 선언했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가난한 자들을 살리겠다고 했다. 국민들은 열광했다. 드디어 정의가 온다고 믿었다. 올랑드가 권좌에 오르자마자 한 일은 충격적이었다. 부자들에게 매기는 세금을 무려 75%까지 올렸다. 일해서 번 돈 4분의 3을 세금으로 때린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정책들이었다. 심지어 회사 매각 차익까지 세금을 매기는 법을 만들었다. 회사 매각 수익의 60%를 징수하는 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그러나 '선한 의도'속의 사회주의 정책들은 시한폭탄이 됐다. 프랑스 최고부자들이 결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배르나르 아르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중의 하나다. 루이비통, 디올 등 세계 최고 브랜드의 CEO로 프랑스 경제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2012년 벨기에 국적을 신청했다. 이유는 부자세금 75%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삼성전자 회장이 세금이 무서워 옆나라 국적을 신청한 격이다. 이건 신호탄이었다. 다른 기업회장들과 스포츠 스타, 유명 가수, 은행 임원 등 부유층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민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는 러시아 국적을 신청했다. 푸틴 대통령이 국적 신청서를 들고 직접 환영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부자들이 세금이 적은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런던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이 30만명을 넘어섰다. 런던이 프랑스의 6대 도시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프랑스를 탈출한 이들은 부유층만이 아니었다. 회사를 일으킨 창업가들과 재능있는 젊은 인재들마저 프랑스를 버리기 시작했다. 올랑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집값까지 강제로 묶는 법을 만들었다. 임대료를 올리지 못하게 하는 법이었다. 세입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갔다. 임대 시장 자체가 얼어 붙었다. 집주인들이 세를 놓지 않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민들은 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파리시민들과 젊은 층들은 집을 구하지 못해 파리 외곽으로 쫒겨났다. 또 교원 6만명을 더 뽑아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공무원 일자리가 생기니 젊은층이 박수를 치고 부모들도 좋아했다. 재원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자들이 해외로 빠져 나가면서 세금이 이전보다 덜 걷혀 이 공약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올랑드가 한국에 던지는 교훈 올랑드는 부잣집 자제로 엘리트중의 엘리트였고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었다. 대중을 사로잡는 말솜씨도 뛰어났다. 프랑스 국민들은 이런 사람이 정치를 하면 잘 할 줄 알았다. 올랑드는 현실에서 왜 무너졌을까? 올랑드는 회사 하나 운영해본 적 없었고 가게에서 손님 하나 받아본 적 없었다. 책으로만 경영을 배웠고 교실에서만 정치 토론을 했다. 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고, 실물 경제현장은 더더욱 어두웠다. 국가가 시장을 통제하면 모두가 행복해진다고 믿으며 머리 속은 사회주의 교리로 가득 찼다. 그는 현실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채 교과서 속의 이상만 좇았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한 나라의 지도자가 '금융은 나의 적'이라며 기업과 부자들을 적으로 치부했다. 이는 재벌과 대기업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 좌파와 일부 정치인들의 사고와 닮았다. 올랑드의 부동산 정책과 이재명 정부의 부동산 대책도 유사점이 있다. 집값을 강제로 묶은 올랑드의 정책처럼 이재명 정부도 주택공급을 늘리는 대신 대출규제와 세제강화를 통해 집값을 잡으려 하다보니 전세가 사라지고 월세인상을 가져와 청년층과 서민들이 더 고통받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프랑스 헌법재판소가 부자세금 75%를 위헌 판결했지만 올랑드 정부는 순순히 따르지 않고 편법을 썼다. 이름과 적용방식을 살짝 바꿔 그대로 시행했다. 올랑드는 부자세금 75%로 세금을 더 걷어 자신의 공약을 실천할 계획이었지만 기업과 부자들이 해외로 빠져 나가면서 세금은 이전 보다 더 줄었다. 공장이 하나 둘 문을 닫았고 청년들이 거리로 나 앉고 중년들도 일자리를 잃었다. 올랑드 집권이 후 2013년 실업률이 10%에 달했고 특히 청년실업률은 25%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올랑드 정부 안에서도 동요가 일기 시작했고 급기야 정권까지 잃었다. 이정태 교수는 "'선한 의도'로 포장된 급진적 사회주의 정책이나 좌파 정책들이 한 순간은 약발이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성공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며 "올랑드의 사례는 국가 리더의 정책이념과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2026-07-17 13:20:00

  • [창간 80년, 격동 80년]1974 육영수 여사 피살과 한국 현대사의 회오리

    [창간 80년, 격동 80년]1974 육영수 여사 피살과 한국 현대사의 회오리

    ◆광복절 기념식장에 울린 총성 1974년 8월 15일 오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각계 인사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복절 기념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낭독하던 순간,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이 권총을 꺼내 연단을 향해 여러 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화를 면했지만,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는 총탄에 쓰러졌다. 육 여사는 곧바로 서울대학교병원으로 후송돼 장시간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같은 날 오후 7시 끝내 숨을 거뒀다. 저격당한 육영수 여사의 서거는 단순한 영부인의 사망을 넘어, 박정희 정권의 통치 기반과 남북관계, 한일관계에 큰 파장을 남긴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향년 48세, 꽃다운 나이에 운명 육영수 여사는 충북 옥천 육씨 집성촌에서 태어난 24세 손이다. 1925년 11월 29일생, 향년 48세의 나이로 운명이 달리 했기 때문에 그 슬픔이 더했다. 처음에는 육 여사가 가벼운 총상만 입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장에서 상당한 출혈과 함께 쇼크 상태로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육 여사는 안타깝게도 병원에서 몇 시간 만에 사망 판정을 받았다. 공식적인 사망시간은 8월 15일 오후 7시경이다. 총알이 좌뇌의 가장 큰 정맥을 손상시킨 탓에 다시 깨어날 수는 없었다. 박 대통령은 그날 수술 회복실을 찾아가, 20~30분 동안 작별 인사를 했다. 육 여사는 생전에 고아원과 양로원 방문, 여성복지 사업, 음성 나환자촌 지원 등 사회복지 활동으로 국민적 호감을 얻었던 인물이었다. 전 국민은 국모(國母)를 잃은 큰 슬픔에 빠졌다. 단아한 외모에 늘 소외된 곳을 돌보던 영부인이었던 탓에 온 국민이 비통함에 빠졌다. 당시 본지 16일자 1면에는 박정희 대통령 피격 소식을 전했으며, 17일자 1면에는 육영수 여사 사망 뉴스가 타전됐다. 갑작스런 사망소식에 청와대와 빈소에는 전국에서 조문객이 몰렸으며, 사상 최초로 1974년 8월 19일 국민장이 거행됐다. 수많은 시민들이 영결식장 주변과 거리에서 슬픔을 함께 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육 여사 사망 이후 큰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로, 겉으로는 안 그래 보여도 속으로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육 여사에게 의지하던 부분이 많았던 터라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작은 일에도 조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퍼스트레이디' 박근혜 등장과 영애 정치 어머니의 비극적 서거 직후, 당시 유학중이던 장녀 박근혜가 귀국하면서 22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대신해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기 시작했다. 외교적 무대와 공식 행사에 대통령의 동반자로서 참석하며 대중의 시선 속에 각인되었고, 이는 수십 년 뒤 그가 정치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있어 뿌리 깊은 정치적 자양분이 되었다. 당시 고교 1학년이었던 장남 박지만은 깊은 방황으로 학교 성적이 하락하며 원래 목표였던 서울대 진학 대신 육군사관학교로 진로를 변경했다. ◆ 안보 정국·한일 급랭 육 여사의 피살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유신 정권의 성격과 한일관계 등 향후 정국 운영 방식에도 많은 파장을 가져왔다. 한일 관계도 급속도로 경색됐다. 합동수사본부는 테러를 가한 문세광이 일본내 조총련계 지원을 받아 위조된 여권을 이용하여 밀입국한 뒤,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탈취한 권총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합동수사본부는 밝혔다. 일본인 공범이 있었다는 뉴스까지 보도되면서,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경색됐다. 한동안 한일 관계는 단교 직전의 파국 위기로 치달았으며, 다나카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이번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깊은 유감과 애도의 뜻을 전하고 나서야 간신히 수습됐다. 육 여사의 피살 사건은 국내 정치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박정희 정권은 안보 정국을 더욱 강화하고, 야당 및 민주화 운동 세력에도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박 대통령 뿐 아니라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는 박근혜와 차녀 박근령, 장남 박지만 등 가족에 대한 경호도 극도로 강화했으며, 경호처의 임무가 막중해졌다. 또, 유신 체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긴급조치도 계속 됐다.

    2026-07-17 12:12:00

  • [산업유산 '문화로 꽃피다']'상주 함창의 자랑' 명주 길쌈 허씨비단직물

    [산업유산 '문화로 꽃피다']'상주 함창의 자랑' 명주 길쌈 허씨비단직물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리는 경북 상주. 쌀과 곶감, 그리고 누에고치가 상주의 세 가지 흰 보물이다. 이 가운데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실과 명주는 한때 상주 경제를 떠받친 대표 산업이었다. 그 영광의 역사를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곳이 바로 함창의 허씨비단직물이다. 허씨비단직물은 단순한 직물 공장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전통 명주길쌈을 계승하며 상주의 산업과 문화를 함께 지켜온 살아 있는 산업유산이다. 현재는 5대째 가업을 이어오며 전통 명주의 생산은 물론 체험과 교육을 통해 우리 전통 섬유문화를 알리고 있다. 현재의 허씨비단직물로 이어지는 가문의 명주길쌈 가업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함창에서 이어져 왔으며, 허씨비단직물이라는 사업체는 1988년에 설립됐다. ◆명주의 역사를 지켜온 사람들 대표인 할아버지 허호(67) 씨, 아들 허담 씨, 손자 허조·허율이 명주를 짜는 자동화 베틀 앞에 섰다. 할머니 민숙희 씨와 며느리 박미진 씨도 함께 일하고 있다. 3대가 한 공간에서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비짓땀을 흘리고 있다. 허 대표의 집안은 5대째, 아내 민 씨 가문은 4대째 명주로 대를 이어오고 있다. 부부는 명주실 만큼이나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운명적 만남이었다. 허씨비단직물은 역사가 말해주듯 상주 함창의 자랑거리다. 3천300여 평의 토지에 공장과 함께 전시장, 판매장, 체험장도 운영하고 있다. 공장에서는 누에고치에서 명주 실타래를 가공하여, 옥사명주, 토주, 손 누비 명주 등 100여종의 명주를 직조하여, 스카프, 배내옷, 가방, 수의 등의 제품을 만들어낸다. 제조 및 염색 방법 등 10건의 특허와 1건의 실용신안도 보유하고 있다. ◆명주 명콤비가 된 허호-허담 부자 현재 허호·허담 부자는 허씨비단직물의 명맥을 잇기위해 의기투합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아들 허담은 서울 명문대를 졸업한 후 문경에서 공무원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 아들에게도 항상 가업승계에 대한 마음의 부담은 늘 갖고 있었다. 명주로 인연을 맺은 부모가 하는 일을 '나몰라라' 할 수도 없는 또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누가보다 잘 읽고 있던 허담 부대표는 "공무원 시절에 명주와 관련해 일본에 출장을 가게 됐다"며 "사전교육 자료 사진에 아버지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뿌듯함을 느꼈다"고 밝혔다. 또 "실크 산업유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보고, 가업을 잇기로 결심했다"고 털어놨다. 현재는 가업을 시대에 맞도록 더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아들의 노력에 허호 대표는 마음이 놓일 뿐 아니라 든든하기까지 하다. 허 대표는 "아들이 저보다 더 많이 연구하고, 허씨비단직물이 현 시점에서 나아갈 방향을 더 잘 알고 있다"고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허 부대표의 성균관대 문학사·경북대 섬유공학 석사·서울대 인류학 석사 과정의 3편의 졸업 논문은 모두 명주과 관련된 주제였다. ◆전국 최고의 전통 방식 명주 길쌈 명주길쌈은 긴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작업이다. 누에를 기르고, 고치를 삶고, 실을 뽑아 여러 번 꼬고, 날실과 씨실을 맞춘 뒤 베틀에 앉아 천을 짠다. 단 한 필의 비단이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손길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허씨비단직물은 모계(母系) 중심의 가내 수공업 형태(당시의 전통기법)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생산기술을 접목해 명주의 품질을 높여 왔다. 부부가 합쳐서 9대째 이어오는 가업인 탓에 명주로 말하자면 따라올 자가 없다. 온갖 시행착오를 다 겪고, 각종 노하우를 갖고 있어 타 제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품질에서 앞서있다. 그러나 허씨비단직물은 산업의 명맥을 잇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넓혀 가고 있다. 전통 명주길쌈 체험과 천연염색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명주문화를 지역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경상북도는 2019년 허씨비단직물을 '향토뿌리기업'으로 지정했고, 누에를 기르던 전통 잠실(蠶室)은 산업유산으로 선정했다. 또한 허호 대표는 전통 명주길쌈의 계승과 산업화,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13년 경상북도 명장 장인 선정, 2018년 경상북도 문화상 수상, 202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2026-07-10 13:27:00

  • [털보기자의 '그사람']'공연기획의 달인' 김희철 대구문화예술회관 관장

    [털보기자의 '그사람']'공연기획의 달인' 김희철 대구문화예술회관 관장

    "대구는 공연창작의 전초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김희철 대구문화예술회관 관장의 지역 예술발전을 위한 철학이자 나아가야 할 방향이 담긴 얘기다. 올해는 문화예술 특히 공연기획에 발을 들여놓은 지 39년째인 김 관장은 대구의 공연시장과 제작여건을 고려해 다양한 창작물을 실험하고 생산하며, 젊은 예술 인재를 육성 지원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해야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진취적 사고로 카카오 바이크를 타고, 매일 출퇴근을 한다. 대구문화예술회관의 연간 자체 공연기획비는 6억원 안팎. 이 돈으로 제대로 된 공연 작품 하나 올리기에도 버거운 수준이다. 이런 열악한 예산 탓에 김 관장은 외부로 눈을 돌렸다. 2023년부터 2025년까지 약 60억원에 달하는 국비 예산을 확보했으며, 서울의 국립예술단체들과 협업을 통해 지역에서도 좋은 작품을 선보이는데 앞장 섰다. 김 관장은 문화예술경영인이 고려해야 할 4가지 측면을 제시했다. ▷콘텐츠 제작기획 능력 ▷인프라 운영 능력 ▷네트워크 관리 능력 ▷리더십. 더불어 문화예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대에서 가장 빛나는 예술인들 그리고 작품을 만드는 창작진과 무대 뒤 스태프들이 일할 만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관객을 확보하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3년 6개월 동안 이룬 3가지 업적 2022년 12월에 대구문화예술관장에 취임한 그는 지난 재임기간의 목표에 대해 3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대구문화예술회관의 이미지 변신과 정체성 확립을 통해 지역 문화예술을 선도하는 리더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재구축하고자 노력하고, 새 시장 취임과 함께 회관의 새 명칭 변경을 추진하는 것이다. 둘째는 창작 콘텐츠 생산과 예술인 육성지원 시스템 정착이며, 셋째는 대구시립예술단의 안정적 운영이다. 관장 취임과 함께 내건 캐치 프레이즈는 "다시 시민 속으로". 그는 좋은 작품을 대구시민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내고, 시립예술단원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더불어 회관 직원들이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무대에 서는 아티스트들과 그들을 뒷받침하는 스태프들과 행정 지원부서가 다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공연 작품입니다." 김 관장은 대구문화예술회관의 미래 10년을 위한 중장기 발전계획도 수립했다. 중장기 발전계획 안에는 조직이 나아가야 할 장기적 비전과 함께 앞으로 회관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그것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구조와 매뉴얼을 만드는 작업이 포함됐다. ◆화려한 이력 "KBS→삼성→충무→세종→정동" 김 관장의 문화예술계 경력은 더 이상 화려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다. 서울에서 첫 직장인 KBS(한국방송공사)에서 7년 동안 88올림픽 문화예술축전사업을 포함해 다양한 문화예술사업을 담당했다. 이후 퇴사해 삼성영상사업단으로 이직해 뮤지컬, 클래식, 해외 팝 공연 등 다양한 공연 제작사업을 시도하며 경험을 축적했다. 잘 나가는 인생에도 실패란 늘 있는 법. 그는 KBS와 삼성에서는 경험을 바탕으로 쇼 비즈니스 중심의 민간 엔터사업 로 민간 엔터사업 기획사 '유투피아'를 설립하고, 대중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도전했지만 2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KBS와 삼성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일을 진행할 때와 민간에서 맨 땅에 헤딩하듯 하려 하니 계획한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했던가.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서울 중구청에서 운영하는 충무아트센터 개관 멤버로 합류해 뮤지컬 전문 극장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며, 서울을 대표하는 극장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뮤지컬 대작 '프랑켄슈타인'을 기획·제작해 공전의 히트를 쳤다. 공공극장에서 대극장 창작물을 제작해 민간사업자에게 이양한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손꼽힌다. 그는 자신을 지지해줬던 고(故) 이종덕 전 예술의 전당 사장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공연예술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재임기간 동안 9개 서울시립예술단의 관리와 공연장 운영을 총괄했다. 그런 다음 정동극장 대표로 옮겨가 '국립' 명칭 및 재건축 예산 300억원 확보, 정동극장만의 창작 역량 강화 등의 성과를 냈다. ◆미싱링크→설공찬전→피아노의 숲 김 관장은 취임 이후 회관의 이미지 변신을 위해 창작, 인큐베이팅, 실험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설정하고, 매년 대구시립극단, 딤프(DIMF) 와의 새로운 창작 뮤지컬을 1편 이상 지속적으로 개발해오고 있다. 2024년 미싱링크, 2025년 설공찬전, 올해는 피아노의 숲. 세 작품 모두 공통점은 외부와의 협업이다. 올해 선보이는 '피아노의 숲'은 대구문화예술회관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과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이 공동 기획하고, 대구시립극단이 직접 주도적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700만부가 팔린 일본 만화 원작을 바탕으로 기획됐으며, 영국 웨스트엔드의 저명한 연출가와 작곡가 참여했다. 그는 "대구시립극단을 중심으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전국구 실력파 배우들이 합류해 순수 대구발 뮤지컬로 만들어졌다"며 "실현하는데 난관이 많지만 대구가 낳은 멋진 작품을 보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달 3일부터 선보이는 유료 전시 기획전 '앤디 워홀, 예술을 팔다' 역시 대구시민들에게 보다 수준높은 전시회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13관에 이르는 전시관을 일반 예술인을 위한 대관으로만 채울 수는 없다"며 "1~5관은 자체 기획 전시회를 하고, 6~12관은 일반 대관, 13관은 미술교육 아카데미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26-07-10 12:12:00

  • [털보기자의 '그 사람']김 관장의 화려한 발자취와 수상이력

    [털보기자의 '그 사람']김 관장의 화려한 발자취와 수상이력

    김희철 관장은 한국 공연계에서 큰 족적을 남긴 기획 및 제작자로 명성이 높다. 이 세계에서는 그만큼 내공이 쌓였으며, 39년 동안의 문화예술계 인적 네트워크를 자랑하고 있다. 특히 인적 네트워크는 어떤 작품을 만들어내고, 성공시키는 토대가 되기 때문에 그의 역량은 더 높이 평가받고 있다. 김 관장이 기획한 두 작품은 대한민국 공연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2014년 제작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상업적인 대히트를 친 스테디셀러 작품이며, 국립 정동극장에서 제작한 뮤지컬 '쇼맨'은 제7회 한국뮤지컬어워드 대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배우 송승환과 함께 만든 연극 '더 드레서'도 공연계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딤프(DIMF) 어워드에서 공연기획자로서의 그동안의 큰 공로를 인정받아, 아성크리에이티브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사실 저는 어릴 적부터 무대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대에 설 수 있는 재능을 갖추지 못했기에, 무대 위에 사람들을 빛내는 역할로 활동하고 있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서울에서 고향 대구로 내려온 후에도 대중성을 바탕으로 한 화려한 기획력은 계속되고 있다. 2024년에는 대구 최초로 6개 시립예술단 300명이 참가한 통합극 '울어도 첫사랑'을 기획했으며, 올해는 데뷔 70주년을 맞이한 백건우 선생의 초청공연을 시민들에게 선사했다. '앤디 워홀, 예술을 팔다' 대형 전시회 역시 시민들에게 더욱 다가가고자 하는 미술관 역할 확대를 위해 마련했다. 한편, 김 관장은 1962년생으로 대구 성광고를 거쳐, 경북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별명은 추진력이 남달라 '게르만 병정'이다. KBS 근무 시절에 결혼한 아내 역시 백화점 제품 디스플레이 등에서 뛰어난 미적 역량을 가진 업계의 셀럽이다.

    2026-07-10 12:12:00

  • [털보기자의 '그사람']소통·헌신·봉사의 달인 이재갑 시의원

    [털보기자의 '그사람']소통·헌신·봉사의 달인 이재갑 시의원

    이재갑 의원의 속은 매일매일 부글부글 끓는다. 정치를 하다보니 뜻대로 되는 일이 잘 없을 뿐더러 안동시정에는 늘 불만이 많다. 게다가 지역구에 많은 민원들을 처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보면 자신의 시간도 별로 없다. 이런 상황이 36년 동안 반복됐지만 그는 강력한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바로 인내심이다. "제가 화는 많지만 잘 참는 편입니다. 한발 물러나 생각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현명할 지가 보이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인생은 하나하나 쌓여서 뭔가 이뤄진다고 확신합니다. 4년 또 4년 또 4년 이렇게 열정과 헌신으로 의정 생활을 하다보니 10선이 되었죠. ㅎㅎㅎ." 이 의원의 소통 능력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것도 큰 장점이다. 외손녀 김다온 양과 벤치에 앉아 뭔가를 약속하며 눈빛을 마주치는 모습만 봐도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벤치 팔걸이에는 외손녀를 위한 분홍색의 뽀로로 캐릭터가 새겨진 음료수가 눈에 띈다. 외손녀와 놀아줄 때도 철저히 고객 우선주의를 실천한다. 대민(對民) 봉사에는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이다. 산불이나 수해 복구 현장에 이재갑 시의원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지인들은 그가 보이지 않으면 "해외에 있냐?", "어디 편찮은가?"고 얘기할 정도다. 또 계절에 바뀔 때마다 하는 짜장면 급식, 삼계탕 대접, 김장 담그기 등의 봉사활동도 당연한 일과이자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관내 청소년들을 위한 장학활동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 우당장학생 장학증서 수여식에는 그가 늘 있다. 허동진 선생의 아호를 딴 우당장학재단은 40년 동안 녹전초·중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전달하다, 녹전중학교가 폐교되면서 안동시내 중·고·대학생을 상대로 확대해 지급하고 있다.

    2026-06-26 14:31:00

  • [털보기자의 '그사람']전국 최초 연속 10선 이재갑 안동시의원

    [털보기자의 '그사람']전국 최초 연속 10선 이재갑 안동시의원

    "10전 10승의 신화를 쓴 10선 이재갑 안동시의원" 6·3 지방선거는 많은 이변을 연출했고, 또 새로운 기록들을 써냈다. 그 신기록 중 하나가 전국 최초 10선 시의원 탄생이다. 지방 의회는 연임 금지조항이 없기에 가능했다. 안동에서 1991년 첫 전국지방선거부터 시작해 올해까지 연속으로 10번이나 당선됐다. 주간매일 취재진은 그 주인공을 만나러 지난 17일 오후 안동시의회를 찾았다. 안동시의회 건물 가장 오른 편에 위치한 3~4평 남짓한 의원실에 들어서자, 이재갑 10선 시의원이 반갑게 맞아줬다. 이번 지방선거의 주목받는 스타로 무려 10선의 이재갑 시의원이다. 이 의원은 "이리 먼길을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말을 건넨 후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10선 비결이 뭐냐구요? 다른 건 없습니다. 오직 고향 발전을 위한 생각과 주민 소통." ◆'녹전의 박근혜'라고 들어보셨나요? 10선 당선 비결은 이 인터뷰의 핵심 질문이다. 때문에 언론과 세간에 돌고 있는 이 의원의 별명 '녹전의 박근혜'를 첫 화두에 올렸다. 추가 설명을 하자면, "녹전면에서는 박근혜(호칭 생략)가 나와도, 이재갑에게 못 이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대답을 할 지 사뭇 궁금하기도 했다. "뭘요? 과분한 별명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여기서 왜 나옵니까? 제 인생의 딱 절반이 의원 생활입니다. 지금도 안동 발전과 우리 동네 돌보기에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주민들이 원하면 11선도 할 수 있겠죠? ㅎㅎㅎ." '지역 유권자들과 어떻게 소통하냐'는 한발짝 더 들어간 질문에 번뜩일 만한 해답이 들어 있었다. 이 의원은 "리어카나 무거운 짐을 들고가는 분들을 만나면, 차에서 내려 밀어주거나 들어주고, 밤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어르신을 만나면 집까지 모셔다 준다"고 당연한 듯 얘기했다. 공약 남발이 아닌 진심 소통에 유권자들은 감동해 선거 때마다 지지로 화답한 것이다. 특히 이 의원을 잘 아는 주민들은 선거 때마다 한결 같이 찍어준 분들이다. 한마디로 탄탄한 지지층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번 선거를 포함해 8번이나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당선 직후 더불어민주당 입당 이유 두번째 질문은 무소속 당선 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한 이유였다. 무려 8번이나 무소속, 2번은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으로 당선됐는데, 지역 정서와는 다소 괴리가 있는 현 집권여당 소속이 된 것은 그동안의 정치 행보를 볼 때, 다소 의아한 대목이었다. 두번째 궁금증에 대한 해답도 명쾌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고향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대통령이 된 후 1년 동안 조상 산소를 찾는 것을 빼고도 3번이나 안동을 찾았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를 안동으로 초청한 것도 그랬구요. 집권 여당을 통해 안동 발전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인연도 깊었다. 5선 의원 시절에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을 고향에서 초청 강연회에 부르기도 하고, 성남시와 안동시의 문화예술단 교류에도 각별한 공을 들였다. 이후 이 대통령이 경기도지사, 당 대표를 역임하던 시절에도 고향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왜 그리 갔냐?" 야당 성향의 지역 주민들로부터 많은 핀잔도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소신과 철학은 분명했다. "안동의 현실을 냉정하게 보십시오. 65세 이상은 계속 늘어나고, 40세 이하는 더 줄고 있습니다. 일자리가 없어, 젊은 세대는 떠나는데 막을 방법도 없습니다. 안동 출신 대통령이 도움이 된다면 여야를 초월해야죠." ◆7-7-3-1→7-8-2-1 구도 "큰 문제 없어" 이 의원의 더불어민주당 입당으로 안동시의회는 집권여당과 제1야당이 동수에서 여당이 1명 더 많아졌다. 하지만 나머지 무소속 2명이 제1야당 성향이라 각종 안건에 대해 팽팽한 줄다리기가 예상된다. 또 1명은 녹색당 소속의 허승규 당선인으로 비교적 합리적인 편이라 여야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 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이 의원의 의정철학은 '현장에서 답을 찾자'. 안동의 미래를 위해 사안사안마다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으며, 여야를 가리지 않고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는 반기를 들 수 있음을 예고했다. "안동 발전에 저해된다고 생각하면, 절대 타협할 생각이 없습니다. 안동댐 인근의 지나친 개발 제한과 36사단 해체 후 41만평 공터 활용계획, 지지부진한 공공기관 이전 등 해야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 여당 소속 시의원이 되었지만 잘못된 방향이라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 큰 문제가 된 중앙선관위의 투표용지 부족사태에 대해서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생긴 것"이라며 "선관위의 해명을 들으며, 더 화가 치민다"며 해체 수준에서 선관위를 개혁할 것을 당부했다. 더불어 이번 선거에도 여당에 악재로 작용한 이 대통령의 공소취소 특검법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72년 인생에 시의원만 37년째, 11선 도전? 1954년생, 이 의원 인생의 거의 절반이 시의원이다. 이력서 직업란에 '시의원'이라고 적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향후 4년이 더 보장되어 있다.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만 40년을 채우게 된다. 아내는 늘 "이제 그만 해도 된다"고 하지만 그는 "지역 주민이 원하면 또 나올 수도 있다"고 마음을 열어둔 상태다. 그가 본격 현실 정치에 뛰어든 것은 자녀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37세에 시작해 37년째 시의원을 하고 있다. 안동고를 졸업한 그는 가톨릭상지대에서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리더십을 키웠으며, 공동체가 함께 잘 되는 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또 농촌 청소년 교육 및 지도자 4H(Head, Hands, Health, Heart) 운동을 통해 지역 청년들과 소통도 지속하고 있다.

    2026-06-26 14:30:00

  • [산업유산 '문화로 꽃피다']시골 작은 성당이 웬 산업유산? 예천 용문공소

    [산업유산 '문화로 꽃피다']시골 작은 성당이 웬 산업유산? 예천 용문공소

    경상북도가 지정한 관내 산업유산 목록에는 19곳이 등재돼 있다. 그 중에 2017년에 지정된 천주교 안동교구 내 예천군 대축공소(용문공소)는 다소 생경하게 다가왔다. 예천군에 위치한 작은 성당이 산업유산에 지정된 이유는 뭘 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18일 늦은 오후 이곳을 찾았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길 91번지. 그야말로 시골 호젓한 곳에 자리잡은 작은 성당이었다. 금곡천이 감싸고 있는 이 마을에는 이 작은 성당 뿐 아니라 대한불교 무량회 수월사를 비롯해 상금교회가 자리잡고 있었다. 3대 종교시설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그 옛날 큰 마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주민들이 일궈낸 '양잠산업' 산실 예천성당 용문공소가 경상북도 산업유산에 지정된 데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극복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6·25 전쟁 이후 이곳 주민들이 일궈낸 양잠산업(누에고치)의 전초기지가 바로 이 작은 성당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었다. 공소가 단순한 기도처를 넘어 지역주민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지역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작은 성당은 그 시절을 그대로 품고 있어, 산업유산이 된 것이다. 특히 누에가 고치를 짓는 시기가 되면 온 집안이 분주해졌다. 누에가 만든 하얀 고치는 현금 수입으로 이어졌다. 자녀 학비와 농기계 구입비, 집수리 비용 상당 부분이 누에고치 판매 대금에서 나왔다. 그래서 당시 농촌에서는 "누에가 대학 보낸다"는 말까지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0~60년대, 예천군 대축마을 주민들은 극심한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정부 장려 사업이었던 양잠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누에를 전문적으로 치고, 고치를 생산할 공동 작업장이 필요했다.1960년도 당시 예천본당 제6대 주임이었던 노광명 로제리오 신부가 용문공소를 설립해 기도처이며 작업장으로 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이끌었으며, 주민들에게 일자리도 제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새마을 운동 이전에 마을 주민들이 앞장 서 자발적 공동 일터를 만들고, 함께 잘 살기 위해 협동정신을 발휘했다. 현재의 모습을 보면 작은 공소에 불과하지만 당시 대축공소는 마을 주민들이 직접 돌을 나르고, 흙을 이겨 지은 건축물이다. 당시 농촌 지역의 건축 방식과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근대 건축 자산으로서의 가치도 높다. 건물 주변은 전원주택 정원처럼 잘 가꿔져 있다. 당시 양잠산업을 하기 위한 야외 작업공간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상이 마당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신앙 결사체와 경제 공동체의 만남 천주교 안동교구는 현재도 이 공소에서 미사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미사가 없는 날은 입구를 닫아, 내부 출입을 막고 있다. 때문에 밖에서 건물과 정원을 바라보며, 아주 오래 전 이 건물이 '양잠산업의 산실이었구나!' 상상하면 된다. 마을에서 만난 80대 한 할머니는 "조용한 마을이라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고, 신부님이 와서 미사를 드리는 날만 10명 남짓 모인다"고 소개했다. 그 시대, 이 공간엔 신앙 결사체와 경제 공동체가 공존했다. 평일 낮에는 주민들이 모여 누에를 치고 고치를 고르며 생계를 이어가는 '산업공간', 저녁이나 주말엔 함께 모여 기도를 드리는 '종교공간'이었다. 하나의 공간이 지역 사회의 경제적 번영과 종교적 공동체 역할을 동시에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보존 가치가 높다. 안동교구 관계자는 "작은 성당이 지역 공동체 발전을 했다"며 "현재도 작은 예배당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예천군도 이 공간에 대한 이용은 안동교구에 맡기고 있지만 소중한 산업유산으로 분류해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계획도 갖고 있다. 주변에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갖고, 맛집과 카페 등이 들어설 경우 용문공소는 더 많은 관광객이 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예천문화관광재단 관계자는 "예천은 조용하고 아늑한 곳들이 많은 선비의 고장"이라며 "용문공소도 소중한 관광자원의 하나"라고 자랑했다. 한편, 예천군에는 2곳의 산업유산이 있다. 용문공소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양잠산업을 통해 지역 공동체의 일자리를 제공한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용궁면에 위치한 합동양조장도 65년 전통의 산업유산이자 향토 뿌리기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2026-06-26 13:21:00

  • 김주석 대영산업 대표, 2026 자랑스러운 신지식인 선정

    김주석 대영산업 대표, 2026 자랑스러운 신지식인 선정

    김주석 대영산업 대표(매일 탑리더스 아카데미 17기)는 22일 국회의사당 헌정관에서 (사)글로벌신지식인인증협회로부터 2026 자랑스러운 신지식인(국방분야)에 선정됐다.

    2026-06-25 19:51:46

  • [창간 80년, 격동 80년]국토의 대동맥, 7월7일 완전 개통

    [창간 80년, 격동 80년]국토의 대동맥, 7월7일 완전 개통

    "서울→ 대전→ 대구→ 부산" 1970년 7월7일 국토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됐다.경부고속도로는 단순한 도로 건설 사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끌기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수출 중심의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수단은 철도와 국도였지만, 도로 사정이 매우 열악했다.공장에서 생산한 물품을 항구로 운반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물류비도 높았다. 정부는 산업 발전을 위해 전국을 신속하게 연결하는 대동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경부고속도로는 수도 서울에서 출발해 대전을 지나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뻥 뚫린 고속도로가 놓인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들어간 비용은 총 429억원, 1㎞당 약 1억원의 공사비가 들었다.1970년 우리나라 예산 규모가 약 3,000억 원 수준이었으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는 국가예산의 약 14%에 해당하는 거대한 사업비였다.전체 공사에 들어간 철근만 4만8천여t, 시멘트 663만여 포 등 엄청난 자재가 대량 투입된 초대형 국책 사업이었다. 가장 어려운 공사는 현재 유명한 휴게소가 있는 추풍령 구간었다고 한다. 특히 당재터널을 뚫을 때는 많은 인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朴 대통령, 1967년 대선 승리 후 건설 강행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서독 방문 길에 아우토반(고속도로)을 둘러보고, 독일 경제부흥의 배경에 고속도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설명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고 전국을 잇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꿈을 갖게 됐다. 이후 1967년 제6대 대선을 앞둔 4월 29일 서울 장충단 공원 유세에서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라 일컬어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재선에 성공한 박 대통령은 그 해 10월에 국토개발 전문가인 주원 건설부 장관을 발탁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본격 추진하게 된다. 12월에는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와 산하 계획조사단을 설치하고, 청와대 파견단까지 보내 직접 챙겼다. 1968년 2월 1일 기공식이 열렸으며, 대역사의 서막이 올랐다. 당시 야당에선 반대가 심했다. 김영삼 신민당 원내대표는 나라 재정 파탄과 경제적 비효율성을 문제 삼아 반대 당론을 정했으며, 김대중 국회의원은 국가 균형발전 차원에서 반대 깃발을 들었다. 김 의원은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이 대륙 진출을 위해 남북종단 철도와 도로에 치중했기 때문에 시급한 것은 동서를 뚫는 교통망"이라고 반발했다. 국민 여론도 나빴다. 일부 소수만이 자동차를 소유했을 뿐더러 부유층 일부 사람들만 누릴 호화 시설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많았던 것. 당시 IBRD 보고서도 "자동차 보유 대수가 얼마 안 돼, 경제성이 적다"며 경부고속도로 시기상조론을 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관점에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경제발전에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였다. ◆동양 최장 428km, 전국 '1일 생활권' 1970년 6월 30일자 본지 3면에 실린 경부고속도로 건설 관련 기사의 제목이 이채롭다. '한숨에 돌관(突貫)한 남북천리(南北千里)'. 한자 '돌관'은 돌파하고, 관통한다는 뜻이다. 이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은 7일 7일 정오 대구종합운동장에서 열렸다. 개통식이 대구에서 열린 것은 고향이 구미인 박 전 대통령의 뜻이 반영됐다. 개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 5만여 명의 시민이 참석해 국토의 대동맥 연결을 축하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축사에서 "경부고속도로는 우리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로 다져진 민족적 예술작품"이라며 "국가 경제발전과 산업발전에 큰 공헌을 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7월 8일자 본지 1면 톱기사는 '경부고속도로 완전 개통, 번영의 동맥 1일 생활권' 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이날 개통식에는 경북여중 학생 2천여 명의 카드섹션이 펼쳐지고, 계성고와 신명여고(현 신명고) 학생들이 합창으로 '대통령 찬가'를 부르기도 했다. 축하 공연과 함께 고속도로 건설유공자 190여 명에 대한 표창도 했다. 이날 밤에는 대구시민들과 함께 한 불꽃놀이 행사도 진행됐다. 한편, 이날 대구종합운동장 동문 쪽에는 시민들이 입장하던 중 경찰이 갑자기 제지하면서, 사람들이 밀리고, 넘어지고, 밟히는 사고가 발생해 당시 23명의 시민이 중경상(18명 중상)을 입는 압사사고가 발생했다.

    2026-06-19 12:26:00

  • [산업유산 '문화로 꽃피다']1930년 상주에 고급 백화점, 실화?

    [산업유산 '문화로 꽃피다']1930년 상주에 고급 백화점, 실화?

    일제강점기(1910~1945년) 우리나라에는 일본 자본과 민족 자본이 운영한 여러 백화점이 있었다. 당시 백화점이라 하면 서울의 화신백화점, 미츠코시 경성점, 조지야 백화점과 대구의 미나카이 백화점 등 주로 대도시에 집중돼 있었다. 상주백화점은 당시 지방 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근대 상업시설이었기 때문에 "상주의 명물"로 불리기도 했다. 1930년대에 건립돤 상주백화점은 당시 상주가 경북 내륙 교통의 중심지이자 농산물 집산지였기에 근대적 상업시설로서 들어설 수 있었다. 최근에 지어진 현대식 건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련된 건축 양식을 자랑하고 있다. 2층과 3층 사이에는 기하하적 꽃문양 대리석이 장식되어 있으며 내부 계단과 창문도 고풍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상주백화점→우체국 →개인 소유 건물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근대식 상가로 지어졌으며, 당시 지방 도시에서는 드물게 '백화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는 오늘날의 대형 백화점이라기보다 여러 상품을 취급하는 종합상점의 성격이 강했다. 당시 백화점은 부자들이 고급 상품을 소비하던 부의 상징이자, 근대 시대의 서구적인 장보기를 경험할 수 있는 신세계였다. 상주백화점은 당시 상주시의 위상도 보여준다. 건물주 장 씨(82세)는 "이 건물의 역사가 100년 정도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 당시 상주에 인구도 많았고, 작은 백화점이었지만 만남의 장소이자 당시 부자들의 자주 들리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상주백화점 인근에는 일제시대 대리석 건물인 식산은행 상주지점(SC제일은행 상주지점)이 그 시절 모습 그대로 자리잡고 있다. 1950년 경부터는 이 건물에 상주우체국이 입주했다. 기존의 상주우체국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소됐기 때문에 새 청사를 지을 때까지 상주백화점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한국 우체국 역사 기록에 따르면 상주우체국은 1905년 6월 부산우체국 상주출장소로 시작해, 1907년에 상주우체국으로 승격됐다.흥미로운 점은 상주백화점이 단순히 "백화점 건물"로만 남지 않고,백화점 → 우체국 → 상업시설 등으로 용도가 바뀌며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근대 상주의 번영과 꿈을 담아내고 있다. ◆9년 전 산업유산 지정, 향후 활용 계획은? 상주백화점 건물은 2017년에 경북 산업유산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아직은 어떤 식으로 활용할 지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민간 건물주인데다 3,4층에 주인이 2대에 걸쳐 살고 있는데다 건물 가치가 높아 상주시에서 적지 않은 예산을 확보해야만 일단 매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1,2층에는 상업적인 용도로 임대를 주고 있다. 상주시는 이 일대를 근대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한 곳으로 조성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상주백화점과 식산은행 상주지점 등 일제시대에 건립된 건물을 문화체험 및 관광명소로 만들어 상주를 방문하는 이들의 필수 코스로 만들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다. 이 백화점은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동서남북으로 쉽게 접근이 가능한 곳이다. 김진형 상주시 문화예술과 국가유산팀장(학예연구사)는 4일 기자와 만나 이 건물을 함께 둘러본 후 "시 예산으로 이 건물을 매입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며 "100년이 된 건물치고는 외관도 깨끗하고, 현 시점에서 봐도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 한편, 당시 상주백화점은 고급 잡화들이 많이 팔려 나갔으며, 전통 시장과 달리 지역의 상류층들의 만남의 장소로도 자주 이용됐다고 전해진다. 유럽풍 양식의 근대 건물인데다, 큰 창문 위 아래로 꽃 문양 대리석들이 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2026-06-12 13:40:00

  • [털보기자의 '그사람']

    [털보기자의 '그사람']"눈물나게 고마운 울 마누라"

    곽대훈 인수위원장의 삶에 또다른 반쪽은 바로 사랑하는 아내 이남옥 씨다. 늘 공직 생활에 바쁘다보니 함께 여행할 시간조차 없었다. 곽 위원장은 그래도 전 세계 40여개국을 업무차 또는 지인들과 다녔지만, 아내는 해외 여행을 좀처럼 다닐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곽 위원장은 지난해 5월 단 둘이 오붓하게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을 다녀왔다. 부부는 인생 말년에 제대로 탄력을 받았다. 다음 번엔 그리스와 로마 등 서유럽 쪽으로 계획도 잡고 있으며, 호주와 뉴질랜드도 가려고 한다. 곽 위원장은 내 인생에 가장 혹독한 시절을 "국회의원 재선 도전 실패"라고 꼽았다. 당시 그는 경선 결과에 승복을 하지 못해 무소속 출마를 결심했다. 거의 매일 같이 홧병이 날 정도로 정신적 충격이 컸던 시절이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는 아내 역시 괴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주변에서도 무소속 출마를 만류했지만 아내는 남편에게 나즈막히 한마디를 건넸다. "여보, 그렇게 억울하면 무소속으로 나가서 최선을 다해 함 뛰어보세요. 저도 있는 힘을 다해 도울게요." 결과는 예상한대로 낙선이었지만 아내의 진정한 사랑을 느낀 인생 승자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선거에서 대구시장에 도전하려는 의지를 꺾은 것도 아내였다. 자신의 마지막 꿈, 대구시장에 함 도전하려고 시동을 걸고 있던 차에 또 아내의 한마디가 귓가에 전해졌다. "여보, 무소속 출마 한번이면 됐어. 더 안해도 돼." 한편, 곽 위원장은 현풍 곽씨(玄風 郭氏) 곽재우 의병장의 후손으로 문중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특히 지역 행사나 종친회 모임에서 충신·효자·열녀를 기리는 정려(旌閭)를 한곳에 모아 놓은 현풍 곽씨의 대표 유산인 '십이정려각'을 언급한다며 후손들이 항상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할 것을 강조했다.

    2026-06-12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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