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야설 '5분전']'법사위원장이 뭐길래?' 국회 공전 상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위원장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가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하반기 국회가 출범한 지 보름이 넘었지만, 원 구성조차 마무리하지 못한 채 국회는 사실상 공전 상태다. 법사위원장 자리를 둘러싼 양측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협상의 실마리도 좀처럼 보이지 않고 있다. 국회 의석 과반을 확보한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30일 법사위원장을 비롯한 11개 상임위원장을 단독으로 내정하고, 나머지 7개 상임위원장 자리를 제1야당인 국민의힘 몫으로 남겨뒀다. 민주당은 법사위원장 자리에 4선의 서영교 의원을 내정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일방적인 원 구성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민주당이 야당 몫으로 배정한 교육위원회, 외교통일위원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보건복지위원회, 국토교통위원회, 정보위원회, 성평등가족위원회 등 7개 상임위원장 자리도 모두 거부했다. 국회 일정 전면 보이콧을 선언한 국민의힘의 요구는 단 하나다. "법사위원장은 야당이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형 상원'이라 불리는 법사위법사위원장 자리를 둘러싼 갈등은 단순한 자리다툼이 아니다. 미국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분리된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상원은 각 주에서 2명씩 모두 100명의 의원으로 구성돼 법안 심의 과정에서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나라는 단원제 국회다. 18개 상임위원회에서 의결된 대부분의 법안은 본회의에 상정되기 전, 반드시 법사위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 때문에 법사위는 '한국형 상원' 또는 국회의 '최종 관문'이라 불린다. 법사위가 막강한 이유는 국회법 제86조가 규정한 '체계·자구 심사권' 때문이다. 법안이 기존 법체계와 충돌하지 않는지, 법률 용어와 문구가 적절한지를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권한이다. 명목상으로는 형식적 심사이지만 현실에서는 법안 처리를 늦추거나 추가 심사를 요구할 수 있어 사실상 입법 속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법사위는 국회 상임위원회의 '상왕'이라는 별칭까지 갖고 있다. ◆DJ때부터 법사위는 야당 몫법사위원장을 야당이 맡는 관행은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자리 잡았다. 당시 집권 여당은 국회의장을 맡는 대신 법사위원장은 야당에 넘겼다. 국회의장이 본회의 운영 권한을 가진 만큼 법사위원장은 야당이 맡아 입법 과정에서 견제와 균형을 이루자는 취지였다. 이후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도 이 관행은 상당기간 유지됐다. 여야 모두 의회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라는 데 공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대 양당 체제가 굳어지고 과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두 차례 국회에서 법사위를 포함한 주요 상임위원장을 대부분 차지했고, 이번 하반기 국회에서도 법사위원장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럴 만한 복심(腹心)도 있다. 대통령에 대한 공소(公訴) 취소 특검법 등 집권 여당이 통과시키려는 법안들이 법사위에서 야당에 의해 저지 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법사위 둘러싼 진흙탕 공방여야의 공방도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정점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민주당이 법사위원장을 고집하는 이유는 이재명 대통령의 재판 취소를 위한 공소취소 특검범 등 관련 법안을 일방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승수 원내운영 수석부대표도 "민주당이 배정한 7개 상임위원장을 모두 거부하고 대여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역시 법사위원장 자리는 협상의 대상이 아님을 천명하고 있다. 한병도 원내대표는 "일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법사위를 민주당이 맡아야 한다"며 "법사위원장을 요구하는 것은 민생을 볼모로 한 국회 파업 선언과 다름없다"고 맞받았다. 이어 "새 정부 출범 이후 야당이 상임위를 정쟁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며 국민의힘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타협은 실종…국회 정상화는 언제법사위원장을 둘러싼 대치는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미 서영교 법사위원장 내정자를 중심으로 법사위 운영에 들어갔고, 국민의힘은 국회 일정 전면 보이콧으로 맞서고 있다. 한 국민의힘 다선 의원은 "시간이 지나면서, 야당이 민생에 발목을 잡는다는 역풍이 커질 수 있다"며 "현재로선 출구 전략이 마땅치 않은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4년 전에도 민주당이 11곳 상임위원장을 단독 선출하자, 국민의힘은 전면 보이콧으로 대응했지만 결국 2주 만에 백기를 들고, 국회 상임위로 복귀한 바 있다. 여야 모두 '법사위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 한, 하반기 원 구성도 상당기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2026-07-17 14:30:00
[금주의 이슈] 프랑스의 쇠락-리더가 국가 흥망을 좌우한다
프랑스는 시민 혁명(1789~1799년) 이후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은 뒤 프랑스 제1제국을 개국하고 통치할 때 유럽의 강자로 떠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주요 참전국이자 승전국이었던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프랑스 식민제국은 1938년에 정점을 이루었으며 당시 세계 인구의 5%가 프랑스 영토에 거주했다. 현재의 프랑스는 샤를 드골 대통령 등이 1958년에 세운 프랑스 제5공화국이다. 프랑스는 유럽연합(EU) 설립 시부터 독일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세계 5~6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소프트파워에서도 세계적인 문화 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또 전 세계 1억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세계적인 관광 대국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현재 모습은 '유럽의 병자'라 불릴 정도로 경제적 위상이 떨어지고 중·하층민들의 삶은 고달퍼졌다. 20세기까지 잘 나가던 경제대국을 단 5년 만에 몰락시킨 프랑스의 리더는 프랑스아 올랑드 대통령이다. 그가 사회주의 정책을 밀어붙이고, 포퓰리즘을 남발하면서 프랑스 기업과 기업인들이 탈출하고, 경제 토양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정태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유럽 일부 국가나 중남미 국가에서 보듯 한 국가의 리더가 어떤 사상을 갖고 정책을 실현하는 가에 따라 국운이 좌우된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사회주의 정책과 포퓰리즘을 간파하는 국민들의 집단지성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쇠락을 초래한 리더의 역정 올랑드는 2012년 우파인 니콜라 사르코지를 누르고 제24대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됐다. 프랑수아 미테랑 이후 17년 만에 사회당으로의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그는 이비인후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른바 극우 성향, 어머니는 좌파 성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루앙 시의회 선거에서 국가장 우파적인 국민전선의 후보로 출마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로마 가톨릭교회 교도로 정치적 성향은 기독교 좌파였으며, 2008년 칸 시의회 선거에 사회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저녁 식탁에서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집안 분위기가 싸늘했다. 부모가 서로 다른 정당을 따랐다. 올랑드는 아버지의 사상이 너무 싫었고 좌파 복지사인 어머니 노선을 따랐다. 아버지를 미워하며 자란 올랑드는 반발 심리로 좌파의 길을 걸었다. 올랑드는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파리경영대학, 파리정치대학, 국립행정학교(에나, ENA)를 졸업했다. 이 세 학교를 모두 졸업한 정치인은 지금도 찾기 힘들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는 모교인 파리정치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우파인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 실업률이 높아지고 고물가 현상이 지속되며 경제가 악화되자 사회당 후보로 나선 올랑드에게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가 쏠렸다. 그는 프랑스 사회당 지지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올랑드의 이상적인 정책들로 프랑스 실물경제가 망가지자 지지율도 함께 급락했다. 결국 프랑스 사회당과 올랑드의 지지율은 임기말 20% 이하로 떨어졌으며, 극우파 마린 르펜의 지지율이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레임덕이 극에 달했던 2016년에는 올랑드의 지지율이 4%까지 추락했다. 결국 그는 차기 대선에서 사회당 소속으로 출마하지 못했다. ◆나라 망친 사회주의 정책과 포퓰리즘 2012년 5월 대통령이 된 사회당 출신 프랑수아 올랑드의 선거운동 구호는 강력했다. 그는 '금융은 나의 적'이라 선언했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가난한 자들을 살리겠다고 했다. 국민들은 열광했다. 드디어 정의가 온다고 믿었다. 올랑드가 권좌에 오르자마자 한 일은 충격적이었다. 부자들에게 매기는 세금을 무려 75%까지 올렸다. 일해서 번 돈 4분의 3을 세금으로 때린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정책들이었다. 심지어 회사 매각 차익까지 세금을 매기는 법을 만들었다. 회사 매각 수익의 60%를 징수하는 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그러나 '선한 의도'속의 사회주의 정책들은 시한폭탄이 됐다. 프랑스 최고부자들이 결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배르나르 아르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중의 하나다. 루이비통, 디올 등 세계 최고 브랜드의 CEO로 프랑스 경제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2012년 벨기에 국적을 신청했다. 이유는 부자세금 75%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삼성전자 회장이 세금이 무서워 옆나라 국적을 신청한 격이다. 이건 신호탄이었다. 다른 기업회장들과 스포츠 스타, 유명 가수, 은행 임원 등 부유층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민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는 러시아 국적을 신청했다. 푸틴 대통령이 국적 신청서를 들고 직접 환영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부자들이 세금이 적은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런던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이 30만명을 넘어섰다. 런던이 프랑스의 6대 도시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프랑스를 탈출한 이들은 부유층만이 아니었다. 회사를 일으킨 창업가들과 재능있는 젊은 인재들마저 프랑스를 버리기 시작했다. 올랑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집값까지 강제로 묶는 법을 만들었다. 임대료를 올리지 못하게 하는 법이었다. 세입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갔다. 임대 시장 자체가 얼어 붙었다. 집주인들이 세를 놓지 않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민들은 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파리시민들과 젊은 층들은 집을 구하지 못해 파리 외곽으로 쫒겨났다. 또 교원 6만명을 더 뽑아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공무원 일자리가 생기니 젊은층이 박수를 치고 부모들도 좋아했다. 재원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자들이 해외로 빠져 나가면서 세금이 이전보다 덜 걷혀 이 공약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올랑드가 한국에 던지는 교훈 올랑드는 부잣집 자제로 엘리트중의 엘리트였고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었다. 대중을 사로잡는 말솜씨도 뛰어났다. 프랑스 국민들은 이런 사람이 정치를 하면 잘 할 줄 알았다. 올랑드는 현실에서 왜 무너졌을까? 올랑드는 회사 하나 운영해본 적 없었고 가게에서 손님 하나 받아본 적 없었다. 책으로만 경영을 배웠고 교실에서만 정치 토론을 했다. 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고, 실물 경제현장은 더더욱 어두웠다. 국가가 시장을 통제하면 모두가 행복해진다고 믿으며 머리 속은 사회주의 교리로 가득 찼다. 그는 현실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채 교과서 속의 이상만 좇았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한 나라의 지도자가 '금융은 나의 적'이라며 기업과 부자들을 적으로 치부했다. 이는 재벌과 대기업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 좌파와 일부 정치인들의 사고와 닮았다. 올랑드의 부동산 정책과 이재명 정부의 부동산 대책도 유사점이 있다. 집값을 강제로 묶은 올랑드의 정책처럼 이재명 정부도 주택공급을 늘리는 대신 대출규제와 세제강화를 통해 집값을 잡으려 하다보니 전세가 사라지고 월세인상을 가져와 청년층과 서민들이 더 고통받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프랑스 헌법재판소가 부자세금 75%를 위헌 판결했지만 올랑드 정부는 순순히 따르지 않고 편법을 썼다. 이름과 적용방식을 살짝 바꿔 그대로 시행했다. 올랑드는 부자세금 75%로 세금을 더 걷어 자신의 공약을 실천할 계획이었지만 기업과 부자들이 해외로 빠져 나가면서 세금은 이전 보다 더 줄었다. 공장이 하나 둘 문을 닫았고 청년들이 거리로 나 앉고 중년들도 일자리를 잃었다. 올랑드 집권이 후 2013년 실업률이 10%에 달했고 특히 청년실업률은 25%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올랑드 정부 안에서도 동요가 일기 시작했고 급기야 정권까지 잃었다. 이정태 교수는 "'선한 의도'로 포장된 급진적 사회주의 정책이나 좌파 정책들이 한 순간은 약발이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성공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며 "올랑드의 사례는 국가 리더의 정책이념과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2026-07-17 13:20:00
[창간 80년, 격동 80년]1974 육영수 여사 피살과 한국 현대사의 회오리
◆광복절 기념식장에 울린 총성 1974년 8월 15일 오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각계 인사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복절 기념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낭독하던 순간,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이 권총을 꺼내 연단을 향해 여러 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화를 면했지만,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는 총탄에 쓰러졌다. 육 여사는 곧바로 서울대학교병원으로 후송돼 장시간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같은 날 오후 7시 끝내 숨을 거뒀다. 저격당한 육영수 여사의 서거는 단순한 영부인의 사망을 넘어, 박정희 정권의 통치 기반과 남북관계, 한일관계에 큰 파장을 남긴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향년 48세, 꽃다운 나이에 운명 육영수 여사는 충북 옥천 육씨 집성촌에서 태어난 24세 손이다. 1925년 11월 29일생, 향년 48세의 나이로 운명이 달리 했기 때문에 그 슬픔이 더했다. 처음에는 육 여사가 가벼운 총상만 입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장에서 상당한 출혈과 함께 쇼크 상태로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육 여사는 안타깝게도 병원에서 몇 시간 만에 사망 판정을 받았다. 공식적인 사망시간은 8월 15일 오후 7시경이다. 총알이 좌뇌의 가장 큰 정맥을 손상시킨 탓에 다시 깨어날 수는 없었다. 박 대통령은 그날 수술 회복실을 찾아가, 20~30분 동안 작별 인사를 했다. 육 여사는 생전에 고아원과 양로원 방문, 여성복지 사업, 음성 나환자촌 지원 등 사회복지 활동으로 국민적 호감을 얻었던 인물이었다. 전 국민은 국모(國母)를 잃은 큰 슬픔에 빠졌다. 단아한 외모에 늘 소외된 곳을 돌보던 영부인이었던 탓에 온 국민이 비통함에 빠졌다. 당시 본지 16일자 1면에는 박정희 대통령 피격 소식을 전했으며, 17일자 1면에는 육영수 여사 사망 뉴스가 타전됐다. 갑작스런 사망소식에 청와대와 빈소에는 전국에서 조문객이 몰렸으며, 사상 최초로 1974년 8월 19일 국민장이 거행됐다. 수많은 시민들이 영결식장 주변과 거리에서 슬픔을 함께 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육 여사 사망 이후 큰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로, 겉으로는 안 그래 보여도 속으로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육 여사에게 의지하던 부분이 많았던 터라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작은 일에도 조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퍼스트레이디' 박근혜 등장과 영애 정치 어머니의 비극적 서거 직후, 당시 유학중이던 장녀 박근혜가 귀국하면서 22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대신해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기 시작했다. 외교적 무대와 공식 행사에 대통령의 동반자로서 참석하며 대중의 시선 속에 각인되었고, 이는 수십 년 뒤 그가 정치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있어 뿌리 깊은 정치적 자양분이 되었다. 당시 고교 1학년이었던 장남 박지만은 깊은 방황으로 학교 성적이 하락하며 원래 목표였던 서울대 진학 대신 육군사관학교로 진로를 변경했다. ◆ 안보 정국·한일 급랭 육 여사의 피살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유신 정권의 성격과 한일관계 등 향후 정국 운영 방식에도 많은 파장을 가져왔다. 한일 관계도 급속도로 경색됐다. 합동수사본부는 테러를 가한 문세광이 일본내 조총련계 지원을 받아 위조된 여권을 이용하여 밀입국한 뒤,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탈취한 권총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합동수사본부는 밝혔다. 일본인 공범이 있었다는 뉴스까지 보도되면서,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경색됐다. 한동안 한일 관계는 단교 직전의 파국 위기로 치달았으며, 다나카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이번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깊은 유감과 애도의 뜻을 전하고 나서야 간신히 수습됐다. 육 여사의 피살 사건은 국내 정치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박정희 정권은 안보 정국을 더욱 강화하고, 야당 및 민주화 운동 세력에도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박 대통령 뿐 아니라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는 박근혜와 차녀 박근령, 장남 박지만 등 가족에 대한 경호도 극도로 강화했으며, 경호처의 임무가 막중해졌다. 또, 유신 체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긴급조치도 계속 됐다.
2026-07-17 12:12:00
[산업유산 '문화로 꽃피다']'상주 함창의 자랑' 명주 길쌈 허씨비단직물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리는 경북 상주. 쌀과 곶감, 그리고 누에고치가 상주의 세 가지 흰 보물이다. 이 가운데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실과 명주는 한때 상주 경제를 떠받친 대표 산업이었다. 그 영광의 역사를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곳이 바로 함창의 허씨비단직물이다. 허씨비단직물은 단순한 직물 공장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전통 명주길쌈을 계승하며 상주의 산업과 문화를 함께 지켜온 살아 있는 산업유산이다. 현재는 5대째 가업을 이어오며 전통 명주의 생산은 물론 체험과 교육을 통해 우리 전통 섬유문화를 알리고 있다. 현재의 허씨비단직물로 이어지는 가문의 명주길쌈 가업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함창에서 이어져 왔으며, 허씨비단직물이라는 사업체는 1988년에 설립됐다. ◆명주의 역사를 지켜온 사람들 대표인 할아버지 허호(67) 씨, 아들 허담 씨, 손자 허조·허율이 명주를 짜는 자동화 베틀 앞에 섰다. 할머니 민숙희 씨와 며느리 박미진 씨도 함께 일하고 있다. 3대가 한 공간에서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비짓땀을 흘리고 있다. 허 대표의 집안은 5대째, 아내 민 씨 가문은 4대째 명주로 대를 이어오고 있다. 부부는 명주실 만큼이나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운명적 만남이었다. 허씨비단직물은 역사가 말해주듯 상주 함창의 자랑거리다. 3천300여 평의 토지에 공장과 함께 전시장, 판매장, 체험장도 운영하고 있다. 공장에서는 누에고치에서 명주 실타래를 가공하여, 옥사명주, 토주, 손 누비 명주 등 100여종의 명주를 직조하여, 스카프, 배내옷, 가방, 수의 등의 제품을 만들어낸다. 제조 및 염색 방법 등 10건의 특허와 1건의 실용신안도 보유하고 있다. ◆명주 명콤비가 된 허호-허담 부자 현재 허호·허담 부자는 허씨비단직물의 명맥을 잇기위해 의기투합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아들 허담은 서울 명문대를 졸업한 후 문경에서 공무원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 아들에게도 항상 가업승계에 대한 마음의 부담은 늘 갖고 있었다. 명주로 인연을 맺은 부모가 하는 일을 '나몰라라' 할 수도 없는 또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누가보다 잘 읽고 있던 허담 부대표는 "공무원 시절에 명주와 관련해 일본에 출장을 가게 됐다"며 "사전교육 자료 사진에 아버지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뿌듯함을 느꼈다"고 밝혔다. 또 "실크 산업유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보고, 가업을 잇기로 결심했다"고 털어놨다. 현재는 가업을 시대에 맞도록 더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아들의 노력에 허호 대표는 마음이 놓일 뿐 아니라 든든하기까지 하다. 허 대표는 "아들이 저보다 더 많이 연구하고, 허씨비단직물이 현 시점에서 나아갈 방향을 더 잘 알고 있다"고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허 부대표의 성균관대 문학사·경북대 섬유공학 석사·서울대 인류학 석사 과정의 3편의 졸업 논문은 모두 명주과 관련된 주제였다. ◆전국 최고의 전통 방식 명주 길쌈 명주길쌈은 긴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작업이다. 누에를 기르고, 고치를 삶고, 실을 뽑아 여러 번 꼬고, 날실과 씨실을 맞춘 뒤 베틀에 앉아 천을 짠다. 단 한 필의 비단이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손길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허씨비단직물은 모계(母系) 중심의 가내 수공업 형태(당시의 전통기법)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생산기술을 접목해 명주의 품질을 높여 왔다. 부부가 합쳐서 9대째 이어오는 가업인 탓에 명주로 말하자면 따라올 자가 없다. 온갖 시행착오를 다 겪고, 각종 노하우를 갖고 있어 타 제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품질에서 앞서있다. 그러나 허씨비단직물은 산업의 명맥을 잇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넓혀 가고 있다. 전통 명주길쌈 체험과 천연염색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명주문화를 지역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경상북도는 2019년 허씨비단직물을 '향토뿌리기업'으로 지정했고, 누에를 기르던 전통 잠실(蠶室)은 산업유산으로 선정했다. 또한 허호 대표는 전통 명주길쌈의 계승과 산업화,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13년 경상북도 명장 장인 선정, 2018년 경상북도 문화상 수상, 202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2026-07-10 13:27:00
[털보기자의 '그사람']'공연기획의 달인' 김희철 대구문화예술회관 관장
"대구는 공연창작의 전초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김희철 대구문화예술회관 관장의 지역 예술발전을 위한 철학이자 나아가야 할 방향이 담긴 얘기다. 올해는 문화예술 특히 공연기획에 발을 들여놓은 지 39년째인 김 관장은 대구의 공연시장과 제작여건을 고려해 다양한 창작물을 실험하고 생산하며, 젊은 예술 인재를 육성 지원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해야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진취적 사고로 카카오 바이크를 타고, 매일 출퇴근을 한다. 대구문화예술회관의 연간 자체 공연기획비는 6억원 안팎. 이 돈으로 제대로 된 공연 작품 하나 올리기에도 버거운 수준이다. 이런 열악한 예산 탓에 김 관장은 외부로 눈을 돌렸다. 2023년부터 2025년까지 약 60억원에 달하는 국비 예산을 확보했으며, 서울의 국립예술단체들과 협업을 통해 지역에서도 좋은 작품을 선보이는데 앞장 섰다. 김 관장은 문화예술경영인이 고려해야 할 4가지 측면을 제시했다. ▷콘텐츠 제작기획 능력 ▷인프라 운영 능력 ▷네트워크 관리 능력 ▷리더십. 더불어 문화예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대에서 가장 빛나는 예술인들 그리고 작품을 만드는 창작진과 무대 뒤 스태프들이 일할 만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관객을 확보하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3년 6개월 동안 이룬 3가지 업적 2022년 12월에 대구문화예술관장에 취임한 그는 지난 재임기간의 목표에 대해 3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대구문화예술회관의 이미지 변신과 정체성 확립을 통해 지역 문화예술을 선도하는 리더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재구축하고자 노력하고, 새 시장 취임과 함께 회관의 새 명칭 변경을 추진하는 것이다. 둘째는 창작 콘텐츠 생산과 예술인 육성지원 시스템 정착이며, 셋째는 대구시립예술단의 안정적 운영이다. 관장 취임과 함께 내건 캐치 프레이즈는 "다시 시민 속으로". 그는 좋은 작품을 대구시민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내고, 시립예술단원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더불어 회관 직원들이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무대에 서는 아티스트들과 그들을 뒷받침하는 스태프들과 행정 지원부서가 다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공연 작품입니다." 김 관장은 대구문화예술회관의 미래 10년을 위한 중장기 발전계획도 수립했다. 중장기 발전계획 안에는 조직이 나아가야 할 장기적 비전과 함께 앞으로 회관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그것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구조와 매뉴얼을 만드는 작업이 포함됐다. ◆화려한 이력 "KBS→삼성→충무→세종→정동" 김 관장의 문화예술계 경력은 더 이상 화려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다. 서울에서 첫 직장인 KBS(한국방송공사)에서 7년 동안 88올림픽 문화예술축전사업을 포함해 다양한 문화예술사업을 담당했다. 이후 퇴사해 삼성영상사업단으로 이직해 뮤지컬, 클래식, 해외 팝 공연 등 다양한 공연 제작사업을 시도하며 경험을 축적했다. 잘 나가는 인생에도 실패란 늘 있는 법. 그는 KBS와 삼성에서는 경험을 바탕으로 쇼 비즈니스 중심의 민간 엔터사업 로 민간 엔터사업 기획사 '유투피아'를 설립하고, 대중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도전했지만 2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KBS와 삼성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일을 진행할 때와 민간에서 맨 땅에 헤딩하듯 하려 하니 계획한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했던가.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서울 중구청에서 운영하는 충무아트센터 개관 멤버로 합류해 뮤지컬 전문 극장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며, 서울을 대표하는 극장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뮤지컬 대작 '프랑켄슈타인'을 기획·제작해 공전의 히트를 쳤다. 공공극장에서 대극장 창작물을 제작해 민간사업자에게 이양한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손꼽힌다. 그는 자신을 지지해줬던 고(故) 이종덕 전 예술의 전당 사장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공연예술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재임기간 동안 9개 서울시립예술단의 관리와 공연장 운영을 총괄했다. 그런 다음 정동극장 대표로 옮겨가 '국립' 명칭 및 재건축 예산 300억원 확보, 정동극장만의 창작 역량 강화 등의 성과를 냈다. ◆미싱링크→설공찬전→피아노의 숲 김 관장은 취임 이후 회관의 이미지 변신을 위해 창작, 인큐베이팅, 실험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설정하고, 매년 대구시립극단, 딤프(DIMF) 와의 새로운 창작 뮤지컬을 1편 이상 지속적으로 개발해오고 있다. 2024년 미싱링크, 2025년 설공찬전, 올해는 피아노의 숲. 세 작품 모두 공통점은 외부와의 협업이다. 올해 선보이는 '피아노의 숲'은 대구문화예술회관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과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이 공동 기획하고, 대구시립극단이 직접 주도적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700만부가 팔린 일본 만화 원작을 바탕으로 기획됐으며, 영국 웨스트엔드의 저명한 연출가와 작곡가 참여했다. 그는 "대구시립극단을 중심으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전국구 실력파 배우들이 합류해 순수 대구발 뮤지컬로 만들어졌다"며 "실현하는데 난관이 많지만 대구가 낳은 멋진 작품을 보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달 3일부터 선보이는 유료 전시 기획전 '앤디 워홀, 예술을 팔다' 역시 대구시민들에게 보다 수준높은 전시회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13관에 이르는 전시관을 일반 예술인을 위한 대관으로만 채울 수는 없다"며 "1~5관은 자체 기획 전시회를 하고, 6~12관은 일반 대관, 13관은 미술교육 아카데미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26-07-10 12:12:00
[털보기자의 '그 사람']김 관장의 화려한 발자취와 수상이력
김희철 관장은 한국 공연계에서 큰 족적을 남긴 기획 및 제작자로 명성이 높다. 이 세계에서는 그만큼 내공이 쌓였으며, 39년 동안의 문화예술계 인적 네트워크를 자랑하고 있다. 특히 인적 네트워크는 어떤 작품을 만들어내고, 성공시키는 토대가 되기 때문에 그의 역량은 더 높이 평가받고 있다. 김 관장이 기획한 두 작품은 대한민국 공연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2014년 제작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상업적인 대히트를 친 스테디셀러 작품이며, 국립 정동극장에서 제작한 뮤지컬 '쇼맨'은 제7회 한국뮤지컬어워드 대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배우 송승환과 함께 만든 연극 '더 드레서'도 공연계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딤프(DIMF) 어워드에서 공연기획자로서의 그동안의 큰 공로를 인정받아, 아성크리에이티브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사실 저는 어릴 적부터 무대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대에 설 수 있는 재능을 갖추지 못했기에, 무대 위에 사람들을 빛내는 역할로 활동하고 있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서울에서 고향 대구로 내려온 후에도 대중성을 바탕으로 한 화려한 기획력은 계속되고 있다. 2024년에는 대구 최초로 6개 시립예술단 300명이 참가한 통합극 '울어도 첫사랑'을 기획했으며, 올해는 데뷔 70주년을 맞이한 백건우 선생의 초청공연을 시민들에게 선사했다. '앤디 워홀, 예술을 팔다' 대형 전시회 역시 시민들에게 더욱 다가가고자 하는 미술관 역할 확대를 위해 마련했다. 한편, 김 관장은 1962년생으로 대구 성광고를 거쳐, 경북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별명은 추진력이 남달라 '게르만 병정'이다. KBS 근무 시절에 결혼한 아내 역시 백화점 제품 디스플레이 등에서 뛰어난 미적 역량을 가진 업계의 셀럽이다.
2026-07-10 12:12:00
[털보기자의 '그사람']소통·헌신·봉사의 달인 이재갑 시의원
이재갑 의원의 속은 매일매일 부글부글 끓는다. 정치를 하다보니 뜻대로 되는 일이 잘 없을 뿐더러 안동시정에는 늘 불만이 많다. 게다가 지역구에 많은 민원들을 처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보면 자신의 시간도 별로 없다. 이런 상황이 36년 동안 반복됐지만 그는 강력한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바로 인내심이다. "제가 화는 많지만 잘 참는 편입니다. 한발 물러나 생각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현명할 지가 보이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인생은 하나하나 쌓여서 뭔가 이뤄진다고 확신합니다. 4년 또 4년 또 4년 이렇게 열정과 헌신으로 의정 생활을 하다보니 10선이 되었죠. ㅎㅎㅎ." 이 의원의 소통 능력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것도 큰 장점이다. 외손녀 김다온 양과 벤치에 앉아 뭔가를 약속하며 눈빛을 마주치는 모습만 봐도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벤치 팔걸이에는 외손녀를 위한 분홍색의 뽀로로 캐릭터가 새겨진 음료수가 눈에 띈다. 외손녀와 놀아줄 때도 철저히 고객 우선주의를 실천한다. 대민(對民) 봉사에는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이다. 산불이나 수해 복구 현장에 이재갑 시의원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지인들은 그가 보이지 않으면 "해외에 있냐?", "어디 편찮은가?"고 얘기할 정도다. 또 계절에 바뀔 때마다 하는 짜장면 급식, 삼계탕 대접, 김장 담그기 등의 봉사활동도 당연한 일과이자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관내 청소년들을 위한 장학활동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 우당장학생 장학증서 수여식에는 그가 늘 있다. 허동진 선생의 아호를 딴 우당장학재단은 40년 동안 녹전초·중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전달하다, 녹전중학교가 폐교되면서 안동시내 중·고·대학생을 상대로 확대해 지급하고 있다.
2026-06-26 14:31:00
[털보기자의 '그사람']전국 최초 연속 10선 이재갑 안동시의원
"10전 10승의 신화를 쓴 10선 이재갑 안동시의원" 6·3 지방선거는 많은 이변을 연출했고, 또 새로운 기록들을 써냈다. 그 신기록 중 하나가 전국 최초 10선 시의원 탄생이다. 지방 의회는 연임 금지조항이 없기에 가능했다. 안동에서 1991년 첫 전국지방선거부터 시작해 올해까지 연속으로 10번이나 당선됐다. 주간매일 취재진은 그 주인공을 만나러 지난 17일 오후 안동시의회를 찾았다. 안동시의회 건물 가장 오른 편에 위치한 3~4평 남짓한 의원실에 들어서자, 이재갑 10선 시의원이 반갑게 맞아줬다. 이번 지방선거의 주목받는 스타로 무려 10선의 이재갑 시의원이다. 이 의원은 "이리 먼길을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말을 건넨 후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10선 비결이 뭐냐구요? 다른 건 없습니다. 오직 고향 발전을 위한 생각과 주민 소통." ◆'녹전의 박근혜'라고 들어보셨나요? 10선 당선 비결은 이 인터뷰의 핵심 질문이다. 때문에 언론과 세간에 돌고 있는 이 의원의 별명 '녹전의 박근혜'를 첫 화두에 올렸다. 추가 설명을 하자면, "녹전면에서는 박근혜(호칭 생략)가 나와도, 이재갑에게 못 이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대답을 할 지 사뭇 궁금하기도 했다. "뭘요? 과분한 별명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여기서 왜 나옵니까? 제 인생의 딱 절반이 의원 생활입니다. 지금도 안동 발전과 우리 동네 돌보기에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주민들이 원하면 11선도 할 수 있겠죠? ㅎㅎㅎ." '지역 유권자들과 어떻게 소통하냐'는 한발짝 더 들어간 질문에 번뜩일 만한 해답이 들어 있었다. 이 의원은 "리어카나 무거운 짐을 들고가는 분들을 만나면, 차에서 내려 밀어주거나 들어주고, 밤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어르신을 만나면 집까지 모셔다 준다"고 당연한 듯 얘기했다. 공약 남발이 아닌 진심 소통에 유권자들은 감동해 선거 때마다 지지로 화답한 것이다. 특히 이 의원을 잘 아는 주민들은 선거 때마다 한결 같이 찍어준 분들이다. 한마디로 탄탄한 지지층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번 선거를 포함해 8번이나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당선 직후 더불어민주당 입당 이유 두번째 질문은 무소속 당선 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한 이유였다. 무려 8번이나 무소속, 2번은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으로 당선됐는데, 지역 정서와는 다소 괴리가 있는 현 집권여당 소속이 된 것은 그동안의 정치 행보를 볼 때, 다소 의아한 대목이었다. 두번째 궁금증에 대한 해답도 명쾌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고향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대통령이 된 후 1년 동안 조상 산소를 찾는 것을 빼고도 3번이나 안동을 찾았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를 안동으로 초청한 것도 그랬구요. 집권 여당을 통해 안동 발전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인연도 깊었다. 5선 의원 시절에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을 고향에서 초청 강연회에 부르기도 하고, 성남시와 안동시의 문화예술단 교류에도 각별한 공을 들였다. 이후 이 대통령이 경기도지사, 당 대표를 역임하던 시절에도 고향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왜 그리 갔냐?" 야당 성향의 지역 주민들로부터 많은 핀잔도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소신과 철학은 분명했다. "안동의 현실을 냉정하게 보십시오. 65세 이상은 계속 늘어나고, 40세 이하는 더 줄고 있습니다. 일자리가 없어, 젊은 세대는 떠나는데 막을 방법도 없습니다. 안동 출신 대통령이 도움이 된다면 여야를 초월해야죠." ◆7-7-3-1→7-8-2-1 구도 "큰 문제 없어" 이 의원의 더불어민주당 입당으로 안동시의회는 집권여당과 제1야당이 동수에서 여당이 1명 더 많아졌다. 하지만 나머지 무소속 2명이 제1야당 성향이라 각종 안건에 대해 팽팽한 줄다리기가 예상된다. 또 1명은 녹색당 소속의 허승규 당선인으로 비교적 합리적인 편이라 여야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 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이 의원의 의정철학은 '현장에서 답을 찾자'. 안동의 미래를 위해 사안사안마다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으며, 여야를 가리지 않고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는 반기를 들 수 있음을 예고했다. "안동 발전에 저해된다고 생각하면, 절대 타협할 생각이 없습니다. 안동댐 인근의 지나친 개발 제한과 36사단 해체 후 41만평 공터 활용계획, 지지부진한 공공기관 이전 등 해야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 여당 소속 시의원이 되었지만 잘못된 방향이라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 큰 문제가 된 중앙선관위의 투표용지 부족사태에 대해서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생긴 것"이라며 "선관위의 해명을 들으며, 더 화가 치민다"며 해체 수준에서 선관위를 개혁할 것을 당부했다. 더불어 이번 선거에도 여당에 악재로 작용한 이 대통령의 공소취소 특검법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72년 인생에 시의원만 37년째, 11선 도전? 1954년생, 이 의원 인생의 거의 절반이 시의원이다. 이력서 직업란에 '시의원'이라고 적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향후 4년이 더 보장되어 있다.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만 40년을 채우게 된다. 아내는 늘 "이제 그만 해도 된다"고 하지만 그는 "지역 주민이 원하면 또 나올 수도 있다"고 마음을 열어둔 상태다. 그가 본격 현실 정치에 뛰어든 것은 자녀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37세에 시작해 37년째 시의원을 하고 있다. 안동고를 졸업한 그는 가톨릭상지대에서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리더십을 키웠으며, 공동체가 함께 잘 되는 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또 농촌 청소년 교육 및 지도자 4H(Head, Hands, Health, Heart) 운동을 통해 지역 청년들과 소통도 지속하고 있다.
2026-06-26 14:30:00
[산업유산 '문화로 꽃피다']시골 작은 성당이 웬 산업유산? 예천 용문공소
경상북도가 지정한 관내 산업유산 목록에는 19곳이 등재돼 있다. 그 중에 2017년에 지정된 천주교 안동교구 내 예천군 대축공소(용문공소)는 다소 생경하게 다가왔다. 예천군에 위치한 작은 성당이 산업유산에 지정된 이유는 뭘 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18일 늦은 오후 이곳을 찾았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길 91번지. 그야말로 시골 호젓한 곳에 자리잡은 작은 성당이었다. 금곡천이 감싸고 있는 이 마을에는 이 작은 성당 뿐 아니라 대한불교 무량회 수월사를 비롯해 상금교회가 자리잡고 있었다. 3대 종교시설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그 옛날 큰 마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주민들이 일궈낸 '양잠산업' 산실 예천성당 용문공소가 경상북도 산업유산에 지정된 데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극복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6·25 전쟁 이후 이곳 주민들이 일궈낸 양잠산업(누에고치)의 전초기지가 바로 이 작은 성당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었다. 공소가 단순한 기도처를 넘어 지역주민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지역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작은 성당은 그 시절을 그대로 품고 있어, 산업유산이 된 것이다. 특히 누에가 고치를 짓는 시기가 되면 온 집안이 분주해졌다. 누에가 만든 하얀 고치는 현금 수입으로 이어졌다. 자녀 학비와 농기계 구입비, 집수리 비용 상당 부분이 누에고치 판매 대금에서 나왔다. 그래서 당시 농촌에서는 "누에가 대학 보낸다"는 말까지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0~60년대, 예천군 대축마을 주민들은 극심한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정부 장려 사업이었던 양잠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누에를 전문적으로 치고, 고치를 생산할 공동 작업장이 필요했다.1960년도 당시 예천본당 제6대 주임이었던 노광명 로제리오 신부가 용문공소를 설립해 기도처이며 작업장으로 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이끌었으며, 주민들에게 일자리도 제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새마을 운동 이전에 마을 주민들이 앞장 서 자발적 공동 일터를 만들고, 함께 잘 살기 위해 협동정신을 발휘했다. 현재의 모습을 보면 작은 공소에 불과하지만 당시 대축공소는 마을 주민들이 직접 돌을 나르고, 흙을 이겨 지은 건축물이다. 당시 농촌 지역의 건축 방식과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근대 건축 자산으로서의 가치도 높다. 건물 주변은 전원주택 정원처럼 잘 가꿔져 있다. 당시 양잠산업을 하기 위한 야외 작업공간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상이 마당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신앙 결사체와 경제 공동체의 만남 천주교 안동교구는 현재도 이 공소에서 미사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미사가 없는 날은 입구를 닫아, 내부 출입을 막고 있다. 때문에 밖에서 건물과 정원을 바라보며, 아주 오래 전 이 건물이 '양잠산업의 산실이었구나!' 상상하면 된다. 마을에서 만난 80대 한 할머니는 "조용한 마을이라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고, 신부님이 와서 미사를 드리는 날만 10명 남짓 모인다"고 소개했다. 그 시대, 이 공간엔 신앙 결사체와 경제 공동체가 공존했다. 평일 낮에는 주민들이 모여 누에를 치고 고치를 고르며 생계를 이어가는 '산업공간', 저녁이나 주말엔 함께 모여 기도를 드리는 '종교공간'이었다. 하나의 공간이 지역 사회의 경제적 번영과 종교적 공동체 역할을 동시에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보존 가치가 높다. 안동교구 관계자는 "작은 성당이 지역 공동체 발전을 했다"며 "현재도 작은 예배당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예천군도 이 공간에 대한 이용은 안동교구에 맡기고 있지만 소중한 산업유산으로 분류해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계획도 갖고 있다. 주변에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갖고, 맛집과 카페 등이 들어설 경우 용문공소는 더 많은 관광객이 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예천문화관광재단 관계자는 "예천은 조용하고 아늑한 곳들이 많은 선비의 고장"이라며 "용문공소도 소중한 관광자원의 하나"라고 자랑했다. 한편, 예천군에는 2곳의 산업유산이 있다. 용문공소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양잠산업을 통해 지역 공동체의 일자리를 제공한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용궁면에 위치한 합동양조장도 65년 전통의 산업유산이자 향토 뿌리기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2026-06-26 13:21:00
김주석 대영산업 대표, 2026 자랑스러운 신지식인 선정
김주석 대영산업 대표(매일 탑리더스 아카데미 17기)는 22일 국회의사당 헌정관에서 (사)글로벌신지식인인증협회로부터 2026 자랑스러운 신지식인(국방분야)에 선정됐다.
2026-06-25 19:51:46
[창간 80년, 격동 80년]국토의 대동맥, 7월7일 완전 개통
"서울→ 대전→ 대구→ 부산" 1970년 7월7일 국토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됐다.경부고속도로는 단순한 도로 건설 사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끌기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수출 중심의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수단은 철도와 국도였지만, 도로 사정이 매우 열악했다.공장에서 생산한 물품을 항구로 운반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물류비도 높았다. 정부는 산업 발전을 위해 전국을 신속하게 연결하는 대동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경부고속도로는 수도 서울에서 출발해 대전을 지나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뻥 뚫린 고속도로가 놓인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들어간 비용은 총 429억원, 1㎞당 약 1억원의 공사비가 들었다.1970년 우리나라 예산 규모가 약 3,000억 원 수준이었으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는 국가예산의 약 14%에 해당하는 거대한 사업비였다.전체 공사에 들어간 철근만 4만8천여t, 시멘트 663만여 포 등 엄청난 자재가 대량 투입된 초대형 국책 사업이었다. 가장 어려운 공사는 현재 유명한 휴게소가 있는 추풍령 구간었다고 한다. 특히 당재터널을 뚫을 때는 많은 인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朴 대통령, 1967년 대선 승리 후 건설 강행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서독 방문 길에 아우토반(고속도로)을 둘러보고, 독일 경제부흥의 배경에 고속도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설명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고 전국을 잇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꿈을 갖게 됐다. 이후 1967년 제6대 대선을 앞둔 4월 29일 서울 장충단 공원 유세에서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라 일컬어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재선에 성공한 박 대통령은 그 해 10월에 국토개발 전문가인 주원 건설부 장관을 발탁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본격 추진하게 된다. 12월에는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와 산하 계획조사단을 설치하고, 청와대 파견단까지 보내 직접 챙겼다. 1968년 2월 1일 기공식이 열렸으며, 대역사의 서막이 올랐다. 당시 야당에선 반대가 심했다. 김영삼 신민당 원내대표는 나라 재정 파탄과 경제적 비효율성을 문제 삼아 반대 당론을 정했으며, 김대중 국회의원은 국가 균형발전 차원에서 반대 깃발을 들었다. 김 의원은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이 대륙 진출을 위해 남북종단 철도와 도로에 치중했기 때문에 시급한 것은 동서를 뚫는 교통망"이라고 반발했다. 국민 여론도 나빴다. 일부 소수만이 자동차를 소유했을 뿐더러 부유층 일부 사람들만 누릴 호화 시설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많았던 것. 당시 IBRD 보고서도 "자동차 보유 대수가 얼마 안 돼, 경제성이 적다"며 경부고속도로 시기상조론을 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관점에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경제발전에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였다. ◆동양 최장 428km, 전국 '1일 생활권' 1970년 6월 30일자 본지 3면에 실린 경부고속도로 건설 관련 기사의 제목이 이채롭다. '한숨에 돌관(突貫)한 남북천리(南北千里)'. 한자 '돌관'은 돌파하고, 관통한다는 뜻이다. 이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은 7일 7일 정오 대구종합운동장에서 열렸다. 개통식이 대구에서 열린 것은 고향이 구미인 박 전 대통령의 뜻이 반영됐다. 개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 5만여 명의 시민이 참석해 국토의 대동맥 연결을 축하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축사에서 "경부고속도로는 우리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로 다져진 민족적 예술작품"이라며 "국가 경제발전과 산업발전에 큰 공헌을 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7월 8일자 본지 1면 톱기사는 '경부고속도로 완전 개통, 번영의 동맥 1일 생활권' 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이날 개통식에는 경북여중 학생 2천여 명의 카드섹션이 펼쳐지고, 계성고와 신명여고(현 신명고) 학생들이 합창으로 '대통령 찬가'를 부르기도 했다. 축하 공연과 함께 고속도로 건설유공자 190여 명에 대한 표창도 했다. 이날 밤에는 대구시민들과 함께 한 불꽃놀이 행사도 진행됐다. 한편, 이날 대구종합운동장 동문 쪽에는 시민들이 입장하던 중 경찰이 갑자기 제지하면서, 사람들이 밀리고, 넘어지고, 밟히는 사고가 발생해 당시 23명의 시민이 중경상(18명 중상)을 입는 압사사고가 발생했다.
2026-06-19 12:26:00
[산업유산 '문화로 꽃피다']1930년 상주에 고급 백화점, 실화?
일제강점기(1910~1945년) 우리나라에는 일본 자본과 민족 자본이 운영한 여러 백화점이 있었다. 당시 백화점이라 하면 서울의 화신백화점, 미츠코시 경성점, 조지야 백화점과 대구의 미나카이 백화점 등 주로 대도시에 집중돼 있었다. 상주백화점은 당시 지방 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근대 상업시설이었기 때문에 "상주의 명물"로 불리기도 했다. 1930년대에 건립돤 상주백화점은 당시 상주가 경북 내륙 교통의 중심지이자 농산물 집산지였기에 근대적 상업시설로서 들어설 수 있었다. 최근에 지어진 현대식 건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련된 건축 양식을 자랑하고 있다. 2층과 3층 사이에는 기하하적 꽃문양 대리석이 장식되어 있으며 내부 계단과 창문도 고풍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상주백화점→우체국 →개인 소유 건물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근대식 상가로 지어졌으며, 당시 지방 도시에서는 드물게 '백화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는 오늘날의 대형 백화점이라기보다 여러 상품을 취급하는 종합상점의 성격이 강했다. 당시 백화점은 부자들이 고급 상품을 소비하던 부의 상징이자, 근대 시대의 서구적인 장보기를 경험할 수 있는 신세계였다. 상주백화점은 당시 상주시의 위상도 보여준다. 건물주 장 씨(82세)는 "이 건물의 역사가 100년 정도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 당시 상주에 인구도 많았고, 작은 백화점이었지만 만남의 장소이자 당시 부자들의 자주 들리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상주백화점 인근에는 일제시대 대리석 건물인 식산은행 상주지점(SC제일은행 상주지점)이 그 시절 모습 그대로 자리잡고 있다. 1950년 경부터는 이 건물에 상주우체국이 입주했다. 기존의 상주우체국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소됐기 때문에 새 청사를 지을 때까지 상주백화점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한국 우체국 역사 기록에 따르면 상주우체국은 1905년 6월 부산우체국 상주출장소로 시작해, 1907년에 상주우체국으로 승격됐다.흥미로운 점은 상주백화점이 단순히 "백화점 건물"로만 남지 않고,백화점 → 우체국 → 상업시설 등으로 용도가 바뀌며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근대 상주의 번영과 꿈을 담아내고 있다. ◆9년 전 산업유산 지정, 향후 활용 계획은? 상주백화점 건물은 2017년에 경북 산업유산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아직은 어떤 식으로 활용할 지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민간 건물주인데다 3,4층에 주인이 2대에 걸쳐 살고 있는데다 건물 가치가 높아 상주시에서 적지 않은 예산을 확보해야만 일단 매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1,2층에는 상업적인 용도로 임대를 주고 있다. 상주시는 이 일대를 근대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한 곳으로 조성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상주백화점과 식산은행 상주지점 등 일제시대에 건립된 건물을 문화체험 및 관광명소로 만들어 상주를 방문하는 이들의 필수 코스로 만들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다. 이 백화점은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동서남북으로 쉽게 접근이 가능한 곳이다. 김진형 상주시 문화예술과 국가유산팀장(학예연구사)는 4일 기자와 만나 이 건물을 함께 둘러본 후 "시 예산으로 이 건물을 매입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며 "100년이 된 건물치고는 외관도 깨끗하고, 현 시점에서 봐도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 한편, 당시 상주백화점은 고급 잡화들이 많이 팔려 나갔으며, 전통 시장과 달리 지역의 상류층들의 만남의 장소로도 자주 이용됐다고 전해진다. 유럽풍 양식의 근대 건물인데다, 큰 창문 위 아래로 꽃 문양 대리석들이 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2026-06-12 13:40:00
곽대훈 인수위원장의 삶에 또다른 반쪽은 바로 사랑하는 아내 이남옥 씨다. 늘 공직 생활에 바쁘다보니 함께 여행할 시간조차 없었다. 곽 위원장은 그래도 전 세계 40여개국을 업무차 또는 지인들과 다녔지만, 아내는 해외 여행을 좀처럼 다닐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곽 위원장은 지난해 5월 단 둘이 오붓하게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을 다녀왔다. 부부는 인생 말년에 제대로 탄력을 받았다. 다음 번엔 그리스와 로마 등 서유럽 쪽으로 계획도 잡고 있으며, 호주와 뉴질랜드도 가려고 한다. 곽 위원장은 내 인생에 가장 혹독한 시절을 "국회의원 재선 도전 실패"라고 꼽았다. 당시 그는 경선 결과에 승복을 하지 못해 무소속 출마를 결심했다. 거의 매일 같이 홧병이 날 정도로 정신적 충격이 컸던 시절이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는 아내 역시 괴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주변에서도 무소속 출마를 만류했지만 아내는 남편에게 나즈막히 한마디를 건넸다. "여보, 그렇게 억울하면 무소속으로 나가서 최선을 다해 함 뛰어보세요. 저도 있는 힘을 다해 도울게요." 결과는 예상한대로 낙선이었지만 아내의 진정한 사랑을 느낀 인생 승자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선거에서 대구시장에 도전하려는 의지를 꺾은 것도 아내였다. 자신의 마지막 꿈, 대구시장에 함 도전하려고 시동을 걸고 있던 차에 또 아내의 한마디가 귓가에 전해졌다. "여보, 무소속 출마 한번이면 됐어. 더 안해도 돼." 한편, 곽 위원장은 현풍 곽씨(玄風 郭氏) 곽재우 의병장의 후손으로 문중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특히 지역 행사나 종친회 모임에서 충신·효자·열녀를 기리는 정려(旌閭)를 한곳에 모아 놓은 현풍 곽씨의 대표 유산인 '십이정려각'을 언급한다며 후손들이 항상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할 것을 강조했다.
2026-06-12 12:30:00
[털보기자의 '그 사람']곽대훈 대구시장직 인수위원장 "내 꿈 이뤄낸 추 당선인"
"고려대 선·후배 관계인데, 학창시절에는 서로 잘 몰랐죠. 2018년 추 당선인이 달성에 출마할 때, 달성 현풍과 다사에 2번이나 지원유세도 갔죠. 개인적으로는 호형호제(呼兄呼弟) 하는 친한 사이입니다. ㅎㅎㅎ"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선출된 추경호 대구시장 당선인은 지난 5일 아침에 곽대훈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오후 4시쯤 함 만나시죠. 2·28 기념사업회 사무실로 찾아가겠습니다." 이날 오후 만남에서 추 당선인은 정중하게 대구시장직 인수위원장을 맡아 주기를 요청했고, 곽 회장은 법률적인 검토를 거쳐 그 자리를 수락했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정치판에 뛰어든 둘은 성격부터 일하는 스타일 등 척척 맞다. 8일 인수위 현판식을 시작으로 본격 업무가 시작됐다. ◆"내 마지막 꿈이 대구시장인데…." 곽 위원장은 일생의 마지막 공직으로 대구시장을 꿈꿨다. 하지만 2020년 총선에서 재선에 실패하면서 그 꿈은 서서히 멀어져갔다. 무소속 출마까지 강행했지만 낙선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또다른 사명이 이어지고 있다. 새마을운동 중앙회 회장에 이어 현재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다. "제가 사실 국회의원 3선 후 대구시장에 도전하려 했습니다. 그 꿈을 이룬 건 제가 아니라 추경호 당선인입니다. 사실 부럽기도 합니다. 한편 잘된 일이죠. 모든 것은 시대적 흐름과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구 현안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기에 추 당선인을 위해 열심히 도와야죠." 추 당선인과의 일 호흡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척척 맞아 들어간다. 인수위 규모도 '초미니 실무형'으로 출범시켰다. 대구시 각종 현안들을 잘 파악하고 있는 만큼 향후 2주 내에 인수위 주요 임무를 정리한 후 이달 말까지 대구시정에 관한 업무 인수·인계를 완성할 계획을 짜고 있다. 현재 인수위에는 추 당선인 측에서 한동엽 공보실장, 하중환 대변인, 이은정 정책실장이 참여했고, 대구시에서는 김정기 행정부시장, 오준혁 기획조정실장, 안중곤 행정국장, 한응민 정책기획관이 들어갔다. 추 당선인과 곽 인수위원장은 "직접 실무까지 챙기겠다"고 효율적인 일처리를 강조하고 있다. ◆전임 시장 때 문제점 개선에 주력 "전 시장 때 드러난 여러 가지 대구시정의 문제점을 시정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TK 신공항, 대구경북 행정통합, 대구시 신청사 건립 등 굵직한 현안 사업들은 거의 다 지지부진하고,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대구행복진흥원 등 무리한 기관 통폐합으로 인한 부작용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전 시장은 당선 후 3년 동안 본인 스타일대로 시정을 이끌다 1년 임기를 남겨두고 사퇴를 했다. 이로 인해 지난 1년 동안 김정기 대구시장 권한대행 체제로 운영되다보니, 대구시의 각종 현안을 강력하게 추진할 원동력이 약했다. 김 권한대행은 사실상 그동안 해오던 일을 잘 관리하고, 수습하는 일에 주력했다. 추 당선인의 인수위는 기본적으로는 전 시장들이 잘한 일들은 계승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운다는 방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준표 전 시장 본인의 대권 가도(중앙 정치에 관여) 를 위해 독선적인 운영을 한 부분에 대해서는 시민 참여와 소통 쪽으로 시정 방향을 바꾼다는 방침이 섰다. 곽 위원장은 "공정한 인사관리도 필요하고, 무리한 예산 삭감도 없어야 하며, 문화예술 쪽도 부흥시켜야 한다"며 "특히나 고층 아파트 때문에 망가진 도심 경관(스카이라인)을 살릴 방안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88올림픽 조직위 사무관 "큰 보람" 곽 위원장의 공직 생활은 40년이 훌쩍 넘었다. 행정고시 합격 후 달서구 부구청장을 하다 선출직인 달서구청장에 도전해 3선, 국회의원 초선에 새마을운동 중앙회 회장을 거쳐 현재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다. 누가봐도 국가 발전과 지역 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왔음을 그 이력이 증명하고 있다. 그런 삶을 살아왔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대뜸 물었다. "언제가 가장 보람이 있었죠?", 다소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구청장, 국회의원 시절이 아니구요. 행정고시 합격 후 1985년부터 89년까지 88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활동할 때입니다. 경기 기획을 담당했는데, 올림픽 기간(16일)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곽 위원장은 그때 당시를 회상하며 "88올림픽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대전환의 기회였고, 우리나라는 성공적으로 잘 해냈다"며 "고생하면서, 참 많은 일들을 배웠고, 성공적인 개최 이후 마음 한켠에 이 나라에 대한 뿌듯함과 공직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고 특유의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대구시민의 바람 잘 읽어야 '성공' 곽 위원장은 추 당선인이 다음달에 취임하면, "대구시민들의 바람을 잘 읽어야 성공한 시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대구시민들은 집권 여당에 대한 막연한 기대(예산 전폭 지원)보다는 '미워도 다시 한번, 그래도 야당에 힘을 실어주자'는 여당 심판론이 더 강하게 작용한 것을 잘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추경호 대구시장 당선인과 이진숙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선인이 대구시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현 정부로부터 탄압받은 인사'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 "김부겸 바람이 거셌지만, 결국 보수의 심장은 파란색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만큼 대쪽 같은 시장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또, 그는 이번 선거에서 투표 용지 부족 등 부정 선거 논란을 자초한 중앙선관위에 대해서도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며 "이번 기회에 선관위를 거의 해체 수준에서 다시 개편하고, '민주주의의 꽃' 선거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관리하도록 재탄생시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편, 곽 위원장은 이달 말에 인수위원장으로서의 사명을 끝내고, 다시금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 자리로 돌아온다. 그는 "더이상 공직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대구를 위해 한없이 봉사하려는 마음 뿐"이라고 밝혔다.
2026-06-12 12:30:00
[청라언덕-권성훈] '점입가경'(漸入佳境) 초입, 여권 내 권력 다툼
"정권은 짧고, 국민은 영원하다."(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10일 의원총회 발언) 6·3 지방선거가 끝나고 여권 내 권력 다툼이 점입가경(漸入佳境)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야말로 '친명'(親明)과 '친청'(親淸)의 정치적 생명을 건 파워 게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양쪽 공히 목표는 2년 후 총선 공천권이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총선 승리 후 차기 대권까지 넘보고 있는 상황이다. 1차 전쟁터는 8월 17일로 확정된 민주당 내 전당대회. 정 대표는 연임에 사활(死㓉)을 걸어야 할 입장이다. 실패할 경우 현 권력의 핵심 친명파로부터 공천 학살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차 하면, 지난 당 대선 경선에서 대장동 의혹을 제기한 이낙연 전 국무총리처럼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이미 양쪽 모두 선전포고는 끝났다. 이재명 대통령은 유럽 해외 순방을 나가기 전, 당 지도부의 공항 영접을 먼저 사양했다. 아예 오지 말라고 부탁한 셈이다. 대신 김민석 국무총리가 영접을 담당했다. 게다가 이 대통령은 취임 1주년을 앞두고, 김 총리를 향해 '짧은 시간 안에 가시적 성과를 냈다'고 공개 칭찬을 했다. 김 총리는 이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당 권력 장악에 총대를 멨다. 상대는 정청래 현재 당 지휘관이다. 정치 내공만으로 볼 때 만만치 않은 상대다. 향후 두 달여 동안 여권 내 권력 다툼이 어떤 양상으로 치달을지는 섣불리 예측하기 쉽지 않다. 양 계파의 중간 지대에 있는 의원들이 어느 쪽에 줄을 설지도 흥미진진하게 볼 대목이다. 진보세력의 핵심 계보를 들여다보면, 이번 여권 내 파워 게임은 분명 친노·친문으로 대표되는 '구주류'와 뉴(New) 이재명으로 분류되는 '신주류'가 한판 승부를 펼치는 치킨 게임 양상을 띠고 있다. 신주류는 지방선거 후 곧장 사퇴한 이언주 전 최고위원을 비롯해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정원오 서울시장 후보, 박찬대 인천시장 당선인, 부산 북갑 하정우 후보 등으로 봐도 무방하다. 과거 열린우리당의 흥망(興亡)은 진보 내 권력 다툼의 속성을 잘 보여 준다. 제17대 총선에서 전체 299석 중 절반이 넘는 152석을 확보했다. 하지만, 2006년부터 참여정부의 지지율 급락과 함께 위기가 찾아왔다. 2007년 초에는 110석으로 줄어들면서, 제1당 자리마저 한나라당(127석)에 내주고, 창당 4년여 만(2003~2007)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3 지방선거가 끝난 현 시점에서 분당의 위기마저 감지되는 쪽은 제1야당 국민의힘이 아니라 거대 여당 민주당이다. 이번 선거에서 이기고도 진 여당 쪽에 분열의 위기가 교묘하게 파고들고 있다. 지고도 이긴 제1야당에 오히려 큰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다. 모처럼 보수가 상대의 분열로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다. 정청래 대표의 '정권은 짧고, 국민은 영원' 발언을 반추해 보면 참으로 도발적이다. '(진보 쪽이) 단결하면 승리했고, 분열하면 패배했다'는 역사적 교훈을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의 정치생명 연장을 위해서는 친명계를 대표하는 김민석 총리와 이리 떼나 승냥이 떼처럼 처절하게 싸워야 할 판이다. 국민들은 여당 내 권력 다툼의 결말이 자못 궁금하다. 집권 여당은 국민의 관심이 2년 후 공천권을 향한 양쪽 계파의 치열한 다툼의 결과보다는 '어느 쪽이 올바른 길을 지향하느냐' '국민을 위한 진정성 있는 정치를 하느냐'임을 명심해야 한다. 권력 아귀다툼은 곧 자멸이다.
2026-06-11 17:35:55
메이저뷰티 아카데미 '글로벌 K-뷰티 스쿨 in 히로시마'
메이저뷰티 아카데미(대표 황시안)와 수성관광재단은 4일 히로시마 영사관 초청으로 히토마치 플라자 4층에서 2026 한·일 경제 교류 행사의 일환으로 '글로벌 K-뷰티 스쿨 in 히로시마' 메이크업 시연 및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황시안 대표는 "지난해에는 삿포로에서 진행했으며, 매년 일본 여성들의 호응이 뜨겁다"고 밝혔다.
2026-06-08 17:12:12
김춘원(95)·이동철(93) 두 참전용사 "다부동·화산 전투에서 생존한 것이 기적"
전쟁은 역사가 됐지만, 기억은 아직 살아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시작된 비극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그 격랑의 시대를 온몸으로 견뎌낸 참전용사들은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부동의 능선에는 아직도 치열했던 전투의 기억이 남아 있고, 영천호국원에는 이름 모를 영웅들이 잠들어 있다.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대구·경북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낙동강 방어선의 중심지였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들을 만나 전쟁의 아픈 기억을 들어본다.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이들의 나이는 100세가 가까워지고 있지만 당시 전쟁터에서의 기억은 너무도 또렷하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나고 반세기가 훌쩍 지났건만 당시의 기억은 어찌 그리도 생생할까. 매일이 일촉즉발(一觸卽發), 생사(生死)를 오갔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들은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바로 옆 전우가 쓰러지고, 시체가 쌓인 참호 속에서 적군과 싸워야 하는 그 처절한 현장을 겪어보지 않고, 어찌 가늠이나 할까. 전쟁터는 일상이 갑작스런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전쟁 세대의 뇌리 속 기억은 강렬하다. 현재 대한민국은 그 호국 영령들의 희생 위에 자유를 누리고, 세계 속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한강의 기적', '낙동강의 기적'은 전쟁의 폐혜를 딛고 일어선 한민족의 저력을 전 세계에 보여준 쾌거다. 본지는 살아 있는 증언을 기록하고, 대구·경북 곳곳에 남겨진 전쟁의 흔적을 찾아 전한다. ♬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대구시지부(지부장 임채환)의 추천으로 지난달 27일 한국전쟁 두 참전용사를 만났다. 1931년생 김춘원 씨와 1933년생 이동철 씨. 백수(百壽, 100세)를 바라보는 노병(老兵)이지만 전쟁 당시를 떠올릴 때의 눈빛만은 혈기왕성한 전장의 전투병이었다. "지금 살아있는 것도 꿈인지, 생시인지…." 2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보여준 두 용사의 애국심은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휴전을 한 지, 73년이 흘렀건만 둘의 기억 속에는 전쟁의 아픈 상흔이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두 용사 모두 화랑 무공훈장을 받고, 국가로부터 매월 참전 영예수당과 무공 수훈수당을 합쳐 55만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현재 나라의 안보관과 군인들의 전투태세에 대해서는 큰 우려를 했다. '신의 가호'인지, 더 큰 기적으로 생각된 것은 두 용사가 수십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아직까지 정정하게 살아계시다는 것 뿐 아니라 총알이 빗발치는 고지전 전투에서도 단 한발도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3701295, 수색병 김춘원 군인에게 군번은 생존 확인증이나 다름없다. 그 때문일까? 김춘원 용사는 주민번호보다 군번을 더 확실하게 외우고 있었다. 자판기처럼 이름만 대면 바로 군번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의 6·25 전쟁 스토리는 한편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고향이 의성인 그는 18세에 결혼을 했다. 1949년에 태어난 김완준 경주 예술의전당 관장이 큰 아들이다. 고향에서 임시 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다가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홍익대 정경학과(정치경제)에 편입시험을 치고, 서울 아현동에서 자취를 하는 중에 전쟁이 터졌다. 북한 인민군은 3일 만에 남하해 서울을 함락시켰다. 뒤늦게 전쟁의 심각성을 깨달은 김씨는 친구들과 고향(의성)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서울을 벗어나자마자 경기도에서 인민군에 붙잡혔다. 하지만 전쟁터에도 휴머니티는 살아숨쉬었다. 인민군은 "학생들인데 그냥 보내줘라"고 풀어줬고, 그 길로 중앙선 철도를 따라 고향까지 한걸음에 도망쳤다. 고향으로 내려온 김 씨는 교편 생활을 그만두고 8월 25일에 군에 입대했다. M1 소총을 몇 차례 분해·결합하고, 간단한 집체교육과 함께 실전 전투에 투입됐다. 이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를 온 몸으로 겪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부터 국군의 북진(서울 수복)과 함께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1·4 후퇴까지. 3번의 죽을 고비도 넘겼다. #1.국군이 북진하다 평북 희천에서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을 때, #2. 묘향산에서 적들에 포위되어 일주일 가량 고립됐다 구사일생, #3. 파라호 전투에서 능선을 횡단하다 집중사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전쟁통에 총알 한발 맞지 않은 행운에 대해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의 각오"라고 회고했다. 그는 매년 6월이 되면 당시 영천 화산전투에서 수색대를 이끌던 홍재익 소령, 홍덕숭 선임하사, 그리고 김재경, 장병국, 현용환, 남상욱, 이규직 등 전우들이 생각난다. 더불어 전쟁터에서 숨진 고향 친구들, 군번조차 받지 못한 채 적의 공격에 숨진 전우들이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 "이제는 6·25 참전용사도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지껏 살아있는 것이 신기합니다. 척추 쪽에 석회가 생겨나 다리 아래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참전용사로서 전쟁의 참상을 전하고, 그 교훈을 후세에 알리는 일에 소홀하지 않겠습니다." ◆9706561, 정보병 이동철 "어리다고 안 받아주나요?" 4남 3녀의 둘째로 태어난 이동철 참전용사는 6·25 발발 당시 18세 청년으로 자원입대를 하려 했다. 하지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모병소에서 받아주지 않자 한달여 후에 다시 찾아가 "나라를 위해 뭐라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떼를 쓰면서까지 결국 군에 입대했다. 기초 군사훈련을 3일 받고, 낙동강 전선에서 가장 치열했던 칠곡 다부동 전투에 실전 투입됐다. 능선을 점령하기 위한 고지전을 펼치고, 적의 후방 교란 작전까지 담당했다. 그는 "시체가 곳곳에 즐비했다. 불도저로 시체를 치울 정도였고,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죽었는지 모른다"고 눈물로 회상했다. 이 용사는 놀랍게도 6·25 전쟁 당시의 기억들을 소환해 일기장 형식으로 다 정리해 놓았다. ▷조국수호를 위한 입대, 1950년 8월 ▷칠곡 다부동에서 영천 신령으로, 8월 말 ▷38선을 돌파한 날, 10월 ▷드디어 평양에 입성, 10월18일 ▷중공군이 공격해오던 그날 밤, 10월25일 등. 그는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신나게 압록강까지 북진을 하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군위에서 시작해 선산→상주→노량진→한강→고양→파주→임진강→고란포→평양→대동강→온산 등을 거쳐 중공군이 개입할 때까지 북녘 땅까지 밟았다. "그 당시에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더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제 다시 가볼 수 없는 곳이죠." 1950년 마지막날도 잊을 수가 없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압록강에서 계속 후퇴하다 임진강 적성면 일대에서 7명의 수색 분대가 적의 기습을 받아, 인근 산으로 도망가 다행히 한 명도 다치지 않고 생존했다. 적으로부터 총알 세례를 그렇게 받았지만, 운 좋게도 아무도 총상을 입지 않았다. 그는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 1사단을 이끈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을 존경한다. 당시 국군 1사단과 미군 병력은 8월 초부터 약 한달 동안 대구 북쪽 약 20km에 이르는 칠곡군 다부동에서 남침하려는 북한군 3·13·15사단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낙동강 방어선을 잘 지켰다. "지금도 다부동 전적기념관 앞에 백선엽 장군 동상을 보면, 또다시 가슴이 뜁니다." 이 용사는 전쟁이 끝나고 결혼해 2남2녀를 낳았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제일모직에 입사해 15년 정도 근무했으며, 윤활유 관련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평탄한 삶은 없고, 늘 도전과 시련이 뒤따랐다"며 "전쟁터에서의 경험은 평생 강렬하게 남아 아직도 생에 힘을 준다"고 말했다. ◆두 용사가 말하는 6·25 전쟁 "생지옥" 두 참전용사가 전하는 한국전쟁의 기억은 "생지옥"이라는 세 글자로 요약된다. 한 생명이 그저 하루 아침의 이슬처럼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적군을 앞에 두고, 죽음을 각오하고 돌격 앞으로를 외쳐야하는 상황이 수시로 발생한다.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총상을 당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전쟁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극적인 일인지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김춘원 용사는 "젊음을 나라에 바쳐 구국 전선에서 초개와 같이 산화한 전우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며 "우리 다음 세대는 다시는 전쟁의 쓰라린 경험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동철 용사도 "전쟁터에서 무명의 용사로 죽은 이들이 너무 많다"며 "우리가 누리는 자유대한민국의 번영과 평화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대구시 교육청(교육감 강은희)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대구시지부가 발간한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참전 대한민국 무공수훈자 전쟁증언록'을 펴낸 김춘원 편집위원장은 "개인이든 국가든 힘이 없으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며 "전쟁을 교훈삼아 경제와 안보를 튼튼히 하고, 국민이 단합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동철 용사도 "요즘 젊은이들이 정신적으로 너무 나약한 것 같다"며 "너무 편한 것만 찾으려 하고, 희생하지 않으려 한다면, 전쟁 중에 누가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겠느냐. 국가도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존경하고, 예우하는 애국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2026-06-06 14:30:00
[커버스토리]월남전 참전용사 이택우(84) 박격포 부사수
"목숨을 담보로 걸고, 나라도 위할 겸 돈 벌러 갔죠." 국군 맹호부대 박격포 부사수인 이택우(84) 월남전 참전용사는 1965년 11월 25일 베트남 전쟁터로 떠나, 정확히 1년 만에 돌아왔다. 이유는 간명했다. 독일 파병 광부나 간호사처럼 군인의 신분으로 한달 수입 45달러를 벌기 위함이었다. 당시로서는 생명 수당까지 합쳐져, 꽤나 많은 월급이었다. 2년 정도 있다 돌아오면, 고국에서 집을 살 정도였다. 지난달 28일 주간매일 취재진과 함께 국립영천호국원을 찾은 그는 목숨을 달리한 월남전 참전용사들의 묘지 앞에서 경건한 참배를 올렸다. 한 손엔 태극기, 한 손엔 꽃다발을 들고, 이곳 저곳 참전 용사들의 묘지에서 호국 영령을 위한 묵념을 하기도 했다. 그런 후에 61년 전 치열했던 전장(戰場)의 포화 속으로 잠시 상념에 잠겼다. ◆맹호부대 박격포 부사수 "병장 이택우" "아직도 오른쪽 귀로는 작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이 용사는 베트남 전쟁에 투입된 1년 동안 거의 박격포 부사수라는 직책을 부여받고, 적진을 향해 수천-수만발의 포를 쏘았다. 지축을 울리는 포성을 매일 같이 듣다보니, 노후에 청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 그는 인터뷰 도중에도 가능하면 고함 치듯이 큰 소리로 질문을 해달라고 부탁했고, 다행히 기자의 목청이 높은 터라 의사소통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월남전 당시 생사를 오간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실전 전투에 투입되고 난 후 맹호부대의 명사수 포병으로 베트콩(반정부 게릴라 조직의 통칭) 일당을 섬멸했는데 이후 치밀한 보복이 있었다. 베트콩 특수 부대원들이 아군 진지에 대전차 지뢰를 매설해 놓은 것. 중대장이 이 지뢰를 밟았고, 곁에 있던 소대장과 함께 온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다행히 다른 부대원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창 더웠던 7월 여름에는 부대원 7명이 토벌 작전을 펼치다 베트콩들의 기습 공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져 산악지대에서 생존 투쟁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천운(天運)일까? 7명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아군 진지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는 "우리는 언제 죽을 지 모르고 하루하루를 보냈다"며 "'돌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앞뒤 생각지 않고 진격했다. 살아남은 건 기적"이라고 회상했다. 참고로 이 용사에 따르면, 미국은 당시 월남전 참전용사들에게 병장 기준 월급을 100달러를 책정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각자 개인에게 45달러씩 주고, 나머지 55달러는 국가 경제 재건 등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아들, 대전현충원 안장 "참 모진 것인 인생이라고, 둘째가 군에서 다쳐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 용사의 자녀는 2남1녀. 하지만 1남1녀가 됐다. 둘째 아들인 이현창 씨는 군에서 크게 다친 후 투병 끝에 14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 그는 특수부대 출신인 첫째 아들(이호상) 가족과 함께 현충일(6.6) 다음날인 7일 국립 대전현충원을 찾아갈 예정이다. 첫째 이호상 씨는 "우리 가족은 군대에서 참 많은 일을 겪었다"며 "참 신기하죠? 제 아들 선호가 내 동생 현창이를 꼭 닮았다"고 눈물을 꾹 참았다. 둘째 아들은 군에서 공병부대 내 도하 장비(임시 다리)를 설치하는 특수 임무병으로 활약했는데, 고된 훈련과 함께 부대 내 가혹행위(구타) 등으로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생겼다. 전역 후에는 머리 정수리 쪽 숨골에 뇌종양이 생겨 거의 식물인간으로 지내다시피 했다. 처음에는 장애 5급 판정을 받았다가 국가와 싸워 결국엔 1급 판정을 받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국립 영천호국원에 안장될 예정인 이 용사는 "돌이켜보면, 제가 월남전 파병을 다녀온 것부터 둘째 아들이 군대에서 큰 아픔을 겪은 일들이 우연하게 발생한 것이 아닌 것 같다"며 "분명한 것은 국가를 위해 일하고, 나라가 잘 사는데 보탬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확신했다. 지천명(50세)이 넘은 나이에 늦깎이 결혼을 해 첫째 아들과 함께 아내가 또다른 생명을 잉태 중인 이호상 씨는 "아버지가 예쁜 며느리와 손자 둘을 보면서, 가슴에 사무친 한(恨)을 다소나마 달랠 수 있을 것"이라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2026-06-05 14:30:00
[커버스토리]TK는 호국의 땅, 가볼만한 4곳 '강추'
"6월에는 호국영령을 기리는 곳으로…." 대구경북(TK)은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한 호국의 땅이다. 곳곳에 국군과 UN군이 피흘린 현장이 잘 보존되어 있다. 북한군이 기습 남침을 감행해, 주춤한 곳이 바로 낙동강 전투다. 이 치열했던 전투로 인해 UN군이 참전할 시간적 여유를 벌어줬다. 이후 그 유명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지며, 국군은 압록강·두만강까지 북진(北進)했다. 낙동강 전투에서도 전 세계사에 남을 만한 고지전이 바로 다부동 전투다. 작전지역은 대구 북쪽 22km에 이르는 칠곡군 일대며 303고지, 328고지, 숲데미산, 유학산 등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남북 간의 교전이 펼쳐졌다. 주 저항선에서는 백병전으로 북한군을 저지했다. 그야말로 시체가 쌓여, 작은 야산을 이룰 정도였다. 적군과 아군의 피해가 엄청났던 화산 전투를 기리며, 국립영천호국원을 방문하는 좋을 듯 하다.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 다부동 전적기념관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 호국로 1486 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대구에서는 30~50분 정도 거리라 가족 단위로 나들이 겸 참배하기에도 편리한 곳이다. 중앙고속도로 다부 IC를 빠져나오면 지척 거리에 있다. 기념관 밖에는 탱크와 비행기 등 야외 전시장비를 비롯해 구국용사·구국경찰 충혼비를 비롯해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트루먼 美 대통령, 백선엽 장군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다부동 전투의 생생한 현장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을 뿐 당시 전쟁 유품과 사진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더불어, 6·25 전쟁 최초의 전차전인 '볼링앨리 전투'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려준다. 1950년 8월 21일 저녁,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 전차와 미군 전차들이 맞섰는데, 전차포탄들이 마치 볼링공이 핀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볼링앨리'(Bowling Alley)라는 이름을 붙였다. ◆ 6·25 전쟁 중 폭파, 복원된 '호국의 다리' 일제강점기에 처음 만들어져 6·25 전쟁 중 폭파된 다리다.6·25전쟁이 발발하자 낙동강이 최후의 저지선으로 정해졌다. 북한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너는 것을 막기 위해 철교의 폭파가 불가피했다. 8월 3일 오후 8시 30분 왜관에서 두 번째 교각이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낙동강 전투를 기리기 위하여 '호국의 다리'로 명명했다. 1941년 왜관철교가 가설됨에 따라 철도 교량에서 인도교로 바뀌었다. 현재는 이곳 인근의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하고 있다. 다리 주변에 음악분수와 다목적 광장이 새롭게 신설되어 칠곡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방문하기 전에 미리 호국의 다리를 건너가는 것도 6월 호국 투어 코스로 딱 맞다. 부친이 다부동전투 전사자인 한 가족은 "호국의 땅인 칠곡에서 이곳 호국의 다리를 건너,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방문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며 "아버님 같은 분들의 희생이 있기에 현 세대가 오늘의 평화가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 추모와 힐링이 함께 하는 국립영천호국원 국립영천호국원은 언제가도 추모와 힐링을 함께 할 수 있는 공원묘지로 어딜 봐도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영천시 고경면 호국로 1720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국가유공자를 비롯해 6·25참전 유공자, 월남참전 유공자, 제대군인, 장기재직 경찰·해경·소방 공무원들의 묘역이 곳곳에 안치돼 있다. 영천대첩비는 6·25 전쟁 중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 섬멸함으로써 조국의 자유를 지켜낸 영천대첩을 기념하고, 보병 제8사단을 주축으로 한 참전 장병들의 전공을 높이 현창하기 위해 대첩비를 건립했다. 입구의 홍살문은 호국원 전역을 일반지역과 성역지역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1958년에 세워진 대구 앞산 충혼탑 대구 앞산 충혼탑(忠魂塔)은 6·25 전쟁에 참전한 대구 출신 전몰 용사를 기리기 위하여 1958년 5월 30일 세워졌다. 대구 출신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군경과 민간인 등 5,352위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알리고,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됐다. 충혼탑의 전신은 수성구 두산동 수성못 옆에 건립한 영현봉안탑(英顯奉安塔)이다. 규모가 작은데다 유원지 주변이라 장소가 부적합하다는 여론에 따라 1971년 4월 20일 남구 대명동 앞산 자락(대명동 산 186번지)으로 이전하여 재건립했다.
2026-06-05 14:30:00
[산업유산 '문화로 꽃피다']"구미수출 1억 달러 돌파" 구미 수출산업의 탑
"구미에 웬 작은 에펠탑?" 경부고속도로 구미IC를 빠져나와 구미국가산업단지로 들어가는 광평동 로터리 한가운데에 에펠탑 모양의 하늘로 치솟은 뾰족한 첨탑이 하나 우뚝 서 있다. 구미의 상징이자 수출도시임을 알리는 수출산업의 탑이다. 구미국가산업단지가 건설되고, 1976년 9월 구미공단 연간 수출액이 1억 달러를 달성한 기념으로 건립됐다. 구미수출산업탑은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메카이자 한강의 기적을 이끈 구미국가산업단지의 역사와 성장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랜드마크이며 1970년대 대한민국 경제 발전기의 뜨거웠던 열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념비이다. 현장에서 바라본 수출탑은 타임머신을 타고 1970년대로 여행온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날카로운 탑신은 세계 시장을 향해 끝없이 뻗어 나가는 대한민국의 개척 정신과 수출 의지를 상징한다. 탑의 아랫부분이 사방으로 곡선을 그리며 안정적으로 퍼지는 구조는 공업단지를 기반으로 한 국가 경제의 견고한 기틀을 의미하고 있다. 마치 온 국민의 저력이 하나로 모여 에너지가 분출되는 듯한 역동성을 주어, 70년대 '수출 보국'의 활기찬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산업화 혼이 서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나라의 산업화를 이룬 설계자이자 대한민국을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구세주에 가까운 인물이다. 이 수출탑에 오면 당시 이 나라가 얼마나 경제 발전을 이루고, 매년 경제성장률이 얼마나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는지 그 기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구미시 도로원표의 기준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수출탑의 높이는 40m에 이르며, 지름은 18m 규모다. 탑의 정면을 바라보면,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쓴 휘호인 "輸出産業의 塔(수출산업의 탑)"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글씨체는 힘이 넘치고, 상하좌우의 삐침 붓글씨가 하늘을 날 것처럼 날카롭게 뻗어나간다. 경상북도는 2018년 6월에 이 탑을 산업유산으로 지정했다. 한국산업단지공단이 1991년에 발간한 '구미공단 20년사'에 따르면 이 탑은 700여 평 부지에 조성됐다. 탑신 부분은 세 곳으로 구분이 되는데, 새마을운동 3대 정신인 근면·자조·협동을 나타내며, 건설·생산·수출이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의미를 담았다. 하단부는 육각형의 거북 형상으로 구미(龜尾)를 상징하며, 적벽돌을 쌓아 맞춘 것은 국가 근대화를 위해 단합하자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미래성장 도시 구미 "TK 재도약의 중심" 실제 구미 수출산업의 탑 설립 이후 수출 실적은 당시 세계 속 초고도 경제성장 국가의 위상을 보여줬다. 이듬해인 1977년 구미공단의 연간 수출총액은 3억 달러로 3배 이상 급성장했으며, 국가적으로는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서울이 '한강의 기적'이라면 구미는 '낙동강의 기적'을 이뤄낸 셈이다. 그로부터 반세기(50년)가 흐른 2025년 대한민국 수출 총액은 7천97억 달러에 이른다. 올해는 AI 반도체 수출 호조로 7천4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구미시는 수출산업의 탑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탑 아래 오색 조명을 설치해, 도심 야경을 밝히는 건축물로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해놨다. 더불어 첨단 IT도시 구미를 대표할만한 콘텐츠 개발에도 이 탑을 활용하고 있다. AR(증강현실) 콘텐츠로 구글 플레이나 애플 앱스토어에서 '구미 수출산업의 탑'으로 검색해, 앱을 다운받은 후 핸드폰 카메라로 수출산업의 탑을 비추면 다양한 형태의 증강현실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전천수 구미시 도시건설국장은 "TK의 성장동력이 되는 도시는 단연 구미와 포항 그리고 대구 산단"이라며 "여러모로 어려운 여건이지만 구미는 반도체, 포항은 배터리 등 새로운 엔진을 찾고 있다"며 수출산업의 탑이 상징하는 의미와 향후 활용계획 등을 밝혔다. 한편, 구미시는 구미공단 설립 50주년을 맞이한 2023년 9월 16일, 김장호 구미시장과 윤재호 구미상공회의소 회장과 장훈 한국산업인력공단 경북서부지사장이 구미 발전을 위해 결의를 다진 작은 기념비를 탑 정면에 세워 놓았다.
2026-05-29 13:30:00
댓글 많은 뉴스
주진우, 김혜경 여사 영상 관련 "법적 조치"…대통령실 "악의적 편집"
'한동훈 복당, 보수 재편 도움 안 된다' 57.2%…국힘 지지층도 부정 우세
'속도전' 광주 군 공항 이전 괜찮나? TK 신공항과 형평성은?
[단독] 구미시 '박정희대통령 생가 재단' 설립 추진…내년 7월 출범 목표
[사관학교 통합] "국가안보는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