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장마+폭우+태풍+폭염 일제히 시작? [금주의 이슈]
6월 대한민국 여름 날씨는 비교적 점잖게 지나갔다. 여름 초입이면 나타나는 집중호우와 태풍에 따른 피해 소식은 없었다. 그러나 과거 기록을 보면 7월은 늘 긴장감을 높여야 하는 시기였다. 아울러 올해는 '슈퍼 엘니뇨'라는 한국 뿐 아닌 전 지구적 기상 변수도 주시해야 한다. 지나간 여름(6월)보다 더 많이 남은 올해 여름의 기상은 어떤 모습일까? ◆태풍 무풍 끝나나 지난 6월 말 한반도 남쪽 멀리 태평양 바다에서는 7호 태풍 메칼라와 8호 태풍 히고스가 동시에 활동했다. 이어 7월 3일 낮 기준으로는 9호 태풍 바비와 10호 태풍 마이삭이 역시 태평양 바다에 함께 있다. 태풍 발생이 점차 잦아진다는 신호다. 태풍 2개 또는 3~4개가 함께 움직이며 이 중 한반도행 태풍도 예상된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이 바로 매년 7월이다. 다만, 지난해 국민들은 태풍 뉴스에 시큰둥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해 모두 27개의 태풍이 발생했지만 우리나라에 영향을 준 태풍은 없었다. 모두 일본이나 동남아시아로 비껴간 것. 2009년 이후 16년 만에 다시 기록된 '영향 태풍 0개'의 해였다. 그러나 2024년엔 8월에 9호 태풍 종다리와 10호 태풍 산산, 2023년엔 7월 6호 태풍 카눈이 한반도에 상륙하거나 영향을 주는 등 태풍은 거의 매년 이즈음부터 전 국민을 초긴장 모드로 만들었다. 실제로 기상청 평년 통계상 태풍은 7월부터 발생 수와 우리나라 영향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늘어난다. 1991~2020년 평균으로 7월에 태풍 3.7개가 발생하고,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태풍도 1.0개로 증가한다. 일명 '가을태풍'이 오는 시기인 8~9월은 이 흐름이 더 강해지는 시기다. 통계 작성 이래 2년 연속으로 한국이 태풍 무풍 지대였던 적은 없었으니, 올해 7월부터는 한반도행 태풍 소식에 귀를 좀 더 기울여야 한다. 물론, 태풍이 반드시 상륙해야만 위험한 건 아니다. 태풍이 남쪽 바다의 수증기를 밀어 올리고 북태평양고기압 가장자리의 바람길을 바꿔 정체전선과 만나면 강수대를 강화할 수 있다. ◆7월 폭우의 기억 7월부터는 집중호우 가능성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최근 늦은 봄부터 여름까지의 강수는 특정 시점에 몰아 내리는 경향을 보였다. 계절 단위나 월 강수량 평균 통계가 사실상 무의미하게, 엄청난 시간당 강수량 및 누적 강수량의 비가 도시 배수시설, 지하차도, 반지하 주택, 하천변 산책로, 산사태 취약지를 때렸다. 지난 2년 기록을 살펴보자. 2024년 7월과 2025년 7월 두 해 다 비가 여름 전체에 고르게 흩어지지 않고 장마철 또는 7월 중순 전후에 강하게 몰리는 경향을 보였다. 사실 2024년 여름 전국 강수량은 평년보다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장마철만 따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름철 강수량 대부분이 장마철에 집중됐고, 장마철 전국 강수량은 평년보다 많았다. 좁은 구역에 강한 비가 쏟아지는 사례가 잦았다. 7월 10일 전북 군산 어청도에서 시간당 146.0mm의 비가 관측됐다. 7월 17일에는 경기 파주와 의정부 등 수도권 북부에 시간당 100mm 안팎의 많은 비가 내렸다. 7월 24일에는 부산 사하에도 112.5mm의 비가 내렸다. 7월 내내 전국이 비에 잠긴 게 아니라, 강력한 집중호우가 반복됐던 셈이다. 2025년 7월은 좀 더 극단적인 사례다. 월 전체 강수량만 보면 평년과 비슷하거나 다소 적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상·하순에는 비가 거의 없었고, 중순에 비가 몰렸다. 그해 7월 16~20일 북서쪽 찬 기압골과 북태평양고기압 가장자리의 덥고 습한 공기가 맞물리며 전국적으로 200~700mm의 매우 많은 비가 내렸다. 7월 17일 충남 서산에 1시간 만에 114.9mm가 내렸고, 같은 날 1시간 동안 광주에도 76.2mm가 내려 도심이 침수됐다. 국민들에겐 좀 더 앞선 2022년 8월 8일 서울 동작에서 1시간 최다강수량 141.5mm가 측정되는 등 서울 강남을 비롯한 중부권에서 폭우 사태가 발생한 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상청은 올여름 기온은 평년보다 높고, 6~7월 강수량이 평년보다 대체로 많을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나라 주변 해역의 해수면 온도 역시 평년보다 높을 가능성이 크다. 더운 공기와 많은 수증기, 북태평양고기압 가장자리의 변동성이 겹치면 국지적으로 짧은 시간에 예측 수준을 넘어서는 많은 비가 내릴 수 있다. 단순히 비가 많이 오는 게 아니라 비가 몰려 온다는 점이 중요하다. 장마철 전체 강수량이 평년과 비슷해도, 하루나 며칠 사이에 쏟아지면 곧장 재난이 된다. 초여름이 건조하고 더웠더라도, 한반도를 둘러싼 기압계가 바뀌는 순간 대기 중 수증기는 전국 어디든 때리는 폭우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장마 공식의 변화 이쯤에서 독자들의 관심이 향하는 키워드는 '장마'일 것이다. 기상청이 장마철 시작을 알리면 생활 속 호우에 대한 대응 수준을 높이는 게 한반도에서 여름을 나는 오랜 습관이었다. 이 습관은 기상청이 2009년부터 장마 시작일과 종료일을 사전에 공식 예보하지 않으면서 변화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 기상 변화로 장마의 디테일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장마는 남쪽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와 북쪽의 상대적으로 차고 건조한 공기가 만나 정체전선을 만들고, 그 전선의 영향으로 비가 지속적 또는 반복적으로 내리는 현상을 뜻한다. 하지만 최근 여름비는 이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체전선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저기압, 대기 불안정, 북태평양고기압 가장자리의 수증기 유입이 겹치며 강한 비가 내린다. 장마철 한가운데에도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길어지고, 장마가 끝난 뒤 더 강한 폭우가 쏟아지는 일도 잦아졌다. 그래서 장마의 시작과 끝만 알면 되는 게 아니라, 수시로 좁고 강한 비구름대가 어느 지역에 걸리는지, 시간당 강수량이 얼마나 증가하는지, 같은 지역에 비구름이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 등을 파악해야 한다. 과거에 비해 예측도 어렵고 확인 역시 어려운 정보다. ◆호우 뒤 폭염 '이중고' 비가 온 뒤 폭염의 습격도 최근 한반도 여름 날씨를 체험한 국민들이 주시하는 부분이다. 지난해 7월에도 폭염, 집중호우, 다시 폭염의 순서로 여름 날씨가 진행됐다. 7월 상순 이른 무더위가 이어졌고, 중순에 기록적 호우가 발생하더니, 다시 하순에 극심한 무더위와 열대야가 나타났다. 비가 온다고 더위가 누그러지는 게 아니라, 비가 그친 후 습한 공기와 높은 해수면 온도가 더위를 되살리는 구조다. 이렇다보니 취약계층의 이중고가 우려된다. 호우 기간엔 침수와 산사태가 문제이고, 비가 그친 뒤엔 높은 습도의 폭염과 열대야가 문제다. 그래서 냉방 취약계층, 야외 노동자, 고령자, 만성질환자 등은 두 위험을 연달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올여름부터 재난성호우 긴급재난문자, 폭염중대경보, 열대야주의보가 도입되는 등 기상 특보 체계가 한층 강화된다. 재난성호우 긴급재난문자는 기존 호우 긴급재난문자 발송 기준(1시간 강수량 50mm 이상이면서 3시간 누적 강수량 90mm 이상일 때 또는 1시간 강수량이 72mm 이상)보다 극단적인 상황(1시간 강수량이 85mm 이상이면서 15분 동안 25mm 이상의 폭우가 내리거나 1시간 강수량이 100mm 이상)일 때 발송된다. 단순 기상정보가 아니라 즉각적인 대피 신호로 받아들이라는 얘기다. 폭염중대경보는 그간 폭염 특보 단계에서 운영해 온 폭염주의보·경보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이다. 일 최고 체감온도가 38도 이상 또는 최고기온 39도 이상이 하루 이상 이어질 것으로 예상될 때 발령된다. 폭염중대경보가 발효되면 야외활동을 자제해야 한다. 농촌 고령층이 폭염경보에도 야외에서 일을 하다 사망하는 사례가 이어지자 제도를 손 본 뉘앙스도 감지된다. 열대야주의보는 열대야(밤 사이 최저기온이 25도 이상 유지되는 현상)에 따른 온열질환 위험을 줄이고자 지역별 특성을 반영해 발효될 예정이다. ◆슈퍼 엘니뇨 변수 올해 폭염·폭우 수준과 관련해서는 엘니뇨 변수도 더해졌다. '슈퍼 엘니뇨'라는 키워드가 언론 보도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엘니뇨가 전 세계 기온과 강수량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쳐 폭염과 폭우 등 극한 기상 위험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제기됐는데, 한국만 따로 떼어 따질 수 없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은 지난 6월 11일 올해 엘니뇨 발생을 공식 발표했다. NOAA 산하 기후예측센터(CPC)는 이번 엘니뇨가 겨울로 갈수록 강화돼 매우 강한 수준을 보이며 1950년 이후 역대 가장 강력한 엘니뇨로 기록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엘니뇨는 적도 인근 태평양 중앙부 및 동쪽의 특정 감시구역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0.5도 이상 높은 상태가 5개월 이상 지속되면 선언된다. 슈퍼 엘니뇨는 학술 용어는 아니지만, 매우 강한 엘니뇨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2026-07-03 12:30:00
◆판교, 기업이 기업을 부른 도시 경기 성남 판교테크노밸리는 한국에서 산업 집적이 도시의 체질을 바꾼 대표 사례다. 수도권 남부의 입지, 정부와 경기도의 조성 전략, IT·게임·소프트웨어 기업의 이전과 창업, 청년 인재의 이동이 겹친 성과다. 판교의 힘은 건물 수가 아니라 기업이 기업을 부르고, 인재가 일자리를 따라 모이며, 다시 창업과 투자가 생기는 순환 구조에 있다. 2012년부터 IT 기업들의 입주가 이어지며 '한국판 실리콘밸리'라는 별칭이 붙은 이 사례의 대성공에 정부는 아예 '판교형 테크노밸리'라는 이름을 내세워 대구를 비롯한 지방 대도시에 도심융합특구를 꾸리는 계획을 세웠다. 대구 수성알파시티가 AI·SW 집적지로 성장하려면 눈여겨볼 대목이다. 유치의 목표는 기업 명단이 아니라, 다음 기업이 스스로 오게 만드는 생태계여야 한다. ◆선전, 특구가 기업을 낳은 도시 중국 선전은 유치와 제도 실험이 도시를 폭발적으로 바꾼 사례다. 1980년 중국의 첫 경제특구 가운데 하나로 지정된 선전은 당시 경제력이 크게 앞서 있던 홍콩과 가까운 입지, 개혁·개방 정책, 외국인 투자, 제조업 집적, 민간기업 성장에 힘입어 세계적 기술도시로 성장했다. 오늘날 선전은 화웨이, 텐센트, DJI, BYD 같은 기업의 거점이다. 이 사례를 단순히 특구 유치 자체가 도시를 살린 것으로 해석하면 틀렸다. 핵심은 특구 지정 이후 규제 실험, 금융·토지·노동시장 개혁, 제조 생태계, 수출 네트워크, 창업 문화가 함께 작동했다는 점이다. ◆대전, 연구로 혁신하는 도시 대전은 대덕연구단지로 도시의 정체성을 바꿨다. 1973년 대덕연구단지로 출발한 이곳은 정부출연연구기관, 대학, 기업 연구소가 모여 한국 과학기술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이후 대덕연구개발특구는 단순한 연구기관 집적지를 넘어 기술창업, 특허, 연구소기업, 첨단기술기업이 함께 움직이는 혁신 클러스터로 진화했다. 연구가 기업으로 이어지고, 기업이 일자리로 이어지며, 일자리가 다시 도시의 정체성을 바꿀 때 유치라는 단어가 완성된다. 대구경북도 DGIST와 포스텍 등 대학과 구미·포항 제조 현장을 AI산업과 연결하려면 대전을 스승으로 모셔 청출어람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RTP, 대학·기업·정부 삼각편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리서치트라이앵글파크(RTP)는 해외 대표적 연구개발 클러스터다. 1959년 조성된 이곳은 듀크대,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라는 3곳 연구대학의 지리적 중심에 만들어졌다. 대학의 연구 역량, 주정부의 경제개발 전략, 기업의 연구소 입지가 결합해 지역 경제의 방향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구경북의 대학·연구기관·산업 현장을 한 장의 전략지도 위에 올려놓으려면 참고할 사례다. AI산업 유치전에서 필요한 건 개별 기관의 이름값이 아니라, 대학·기업·정부(지방정부와 중앙정부 모두)가 함께 움직이는 삼각편대의 단단함이다. ◆부산, 축제를 산업의 언어로 부산은 1996년을 시작으로 부산국제영화제(BIFF)를 도시 브랜드로 키운 뒤, 영화의전당 건립과 영화진흥위원회 부산 이전, 유네스코 영화 창의도시 지정을 잇따라 이루며 영화도시의 이미지를 굳혔다. 처음엔 행사가 도시를 알렸고, 이후 시설·기관·인재·네트워크가 따라붙었다. 축제가 산업의 언어로 바뀐 대표 사례다. 문화시설과 문화행사는 유치와 개최 때 '반짝' 조명 받고 끝나면 일회성 이벤트가 되지만, 교육·관광·창작·산업과 연결되면 장기 브랜드가 된다. 유치는 단순히 행사를 따오는 일이 아니라, 도시가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지 설계하는 일이다. ◆빌바오, 이미지를 경제 효과로 스페인 빌바오는 구겐하임미술관으로 도시 이미지를 바꾼 사례다. 1997년 문을 연 미술관은 쇠퇴한 산업도시 빌바오를 문화관광 도시로 세계에 각인시켰고, '빌바오 효과'라는 표현까지 만들었다. 매력적인 건축물도 중요하지만, 도시재생 전략과 관광 인프라, 지속적인 전시 운영이 잘 맞물려 가능한 성과였다. 대구경북에도 같은 미션이 던져진다. 다양한 문화예술이 경쟁력을 갖고 이어지며 관련 시설을 예술인과 주민들을 위한 인프라로 꾸준히 업그레이드시키는 가운데, 도시 이미지를 바꾸는 수준까지 높이는 것. 이게 도시는 물론, 그 도시가 펼치는 산업에도 호감을 갖게 하는 브랜드로 구축되는 것이다.
2026-07-03 12:13:00
◆TK표 AI산업 인프라 사실 지금 대구경북 경제를 뒷받침하는 기반이 다양한 유치 성공 사례들이고, AI산업 인프라 후보들이기도 하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는 대구가 잡은 독특한 산업 기반이다. 달성군 대구국가산단 안에 조성된 물산업클러스터는 물기업 집적과 실증, 해외 진출 지원을 목표로 한다. 물산업은 요즘 뜬 반도체나 AI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기후위기가 심각해지고 산업용수 수요가 커질수록 중요해지는 분야다. 대구가 '물'을 산업 언어로 치환하고 있는 사례다. 대구경북첨단의료복합단지는 대구 신서혁신도시 일대에 의료 연구개발과 기업 지원 기능을 묶고자 마련된 거점이다. 단기 성과보다는 장기적인 성장을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곳이다. 신약, 의료기기, 임상, 규제, 기업 지원이 연결돼야 비로소 힘을 낼 수 있어서다. DGIST(디지스트)와 대구테크노폴리스는 과학기술 특성화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 부지를 묶은 연구개발 거점이다. 대구테크노폴리스의 국가로봇테스트필드 유치는 로봇산업 실증 기반을 키울 수 있는 성과다. 대구 수성알파시티는 비수도권 최대 규모 소프트웨어 기업 집적지라는 점을 앞세워 디지털 혁신거점으로 선정됐다. 또 경북 포항에 철강과 이차전지 산업, 포스텍과 방사광가속기가 있고, 경북 구미에는 전자·제조 기반과 반도체 소재 특화단지가 있다. 이 기반들을 AI산업 관점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정부와 시장에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 물산업클러스터는 데이터센터 냉각, 산업용수 관리, 스마트 물관리 기술과 연결될 수 있다. 첨단의료복합단지는 AI를 활용한 의료, 신약 개발, 의료기기 데이터, 임상·규제 지원의 실험장이 될 수 있다. DGIST와 대구테크노폴리스는 AI 인재 및 로봇·모빌리티 실증의 기반이고, 수성알파시티는 관련 소프트웨어와 서비스를 구현할 기업 집적지다. 포항의 철강·이차전지·방사광가속기 인프라는 소재 개발과 제조공정 AI의 수요처가 될 수 있고, 구미의 전자·제조·반도체 소재 기반은 AI 반도체, 스마트팩토리, 산업용 AI 적용 현장이 될 수 있다. 결국 대구경북의 AI산업 유치는 빈 땅에 새 공장을 짓자는 게 아니다. 쌓아온 산업 기반을 AI라는 새 언어로 다시 연결하는 작업에 가깝다. ◆세계가 본 AI 입지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4년 7월 '에너지와 인공지능'(Energy and AI) 보고서에서 데이터센터가 특정 지역에 집중될수록 전력망 부담이 커진다고 분석했다. AI 인프라를 이미 전력 수요가 집중된 수도권에서 전력 기반은 물론 산업용지와 제조 현장을 갖춘 비수도권으로 분산해야 한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경북은 울진 한울·신한울, 경주 월성·신월성 원전을 보유한 국내 최대급 원전 집적지다. 원전 설비용량만 12.8GW로 국내 원전 설비용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해, 대규모 전력이 필요한 AI 산업 인프라 유치의 강한 근거가 된다. 세계은행이 2023년 11월 낸 '친환경 데이터 센터: 기회와 도전'(Green Data Centers: Opportunities and Challenges) 보고서도 입지 선정에서 재생에너지, 물, 냉각 여건, 기후 리스크가 중요하다고 짚었다. AI산업 유치에서 지역이 여유를 가진 전력·물·냉각·송전망 계획이 강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리적 인프라만 중요한 게 아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2024년 2월 발표한 '기업 간 AI 확산에 발맞춘 포용적 디지털 전환 촉진'(Fostering an Inclusive Digital Transformation as AI Spreads Among Firms) 보고서에선 AI 도입 효과가 경영 역량, 인적 자본, 정보통신기술 같은 보완 자산에 달려 있다고 본다. AI 채택이 대기업 위주로 집중될 경우 생산성 격차가 더 커질 수 있다는 경고도 있다. 지역 중소기업, 병원, 대학, 연구기관이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AI산업 유치의 과실이 일부에 머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은 해외 데이터센터 허브들이 비슷한 숙제를 이미 맞닥뜨리고 있다. 대규모 투자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지역일수록 전력망 접속, 물 사용, 냉각 방식, 주민 수용성, 지역 일자리 효과를 둘러싼 질문과 갈등이 커지고 있다. 반걸음 늦은 대신 앞선 사례들의 시행착오를 공부할 수 있는 대구경북의 AI산업 전략도 이 지점에서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대구의 물산업·의료·로봇·모빌리티·소프트웨어기반, 구미의 제조·반도체 소재 기반, 포항의 철강·이차전지·연구개발·에너지 기반, 그리고 대규모 전력을 감당할 수 있는 원전 등 전력 인프라를 각각의 성과로 흩어 놓지 말고 ▷AI를 적용할 현장 ▷AI를 돌릴 기반 ▷AI를 키울 사람으로 재배열해야 한다.
2026-07-03 12:12:00
[커버스토리] 만약 대구가 수도였다면? 달구벌 천도에서 AI산업 유치전까지
만약 신라 수도가 서라벌(경주)에서 달구벌(대구)로 옮겨졌다면 어땠을까? 689년 신문왕은 수도를 달구벌로 옮기려 했다. 갓 통일된 신라의 국가 규모에 맞춰 좀 더 넓은 분지와 강이 있는 곳으로. 역사는 그 구상을 현실로 만들지 못했다. 대구는 1601년(조선 선조 34년)이 돼서야 경상감영이 설치된 걸 계기로 영남 내륙의 큰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수도 유치 실패 1천년 후 감영 유치 성공'이라는 역사다. 이 기록은 33년째 17개 광역시·도 가운데 1인당 GRDP(지역내총생산) '꼴찌' 신세인 대구의 역사를 다르게 상상케 한다. 만약 달구벌 천도가 이뤄졌다면, 대구는 고대 국가의 행정·군사·교통·물류가 모이는 도시가 됐을 수 있다. 신라가 발원한 경주는 왕조의 기억을 품은 문화 수도, 신라 수뇌부가 좀 더 국토의 중앙으로 서진한 대구는 국가 운영의 실질 거점이라는 역할을 각각 맡았을 수도. 물론 역사는 가정법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의 미래를 논할 때 가정법은 쓸모가 있다. 어떤 도시는 기회를 잡아 길을 바꾸고, 또 어떤 도시는 기회를 놓친 후 오랜 시간 와신상담을 한다. 대구경북의 역사는 이 두 갈래가 겹쳐진 역사다. 지금 대구경북 앞에 다시 큰 유치전이 놓여 있다. 6.3 지방선거 직후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은 반도체 팹(생산라인)과 데이터센터를 필두로 AI(인공지능)산업 유치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AI 생태계를 누가 먼저 지역에 심느냐의 대결이다. 이를 포함한 다양한 유치 경쟁이 상시로 이어지는 게 지방분권시대다. 대구경북은 크고작은 유치 경쟁에 임하기 앞서 과거 사례들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위천이 남긴 20년 공백 대구경북의 유치 실패사를 거론할 때 지역 오피니언 리더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위천국가산업단지다. 1990년대 대구는 달성군 위천 일대에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려 했다. 섬유산업 다음 성장 동력을 찾는 절박한 카드였다. 산업용지가 부족했고 대기업과 첨단산업을 유치할 공간도 필요했다. 자동차, 전자, 생명공학 같은 산업군이 대구의 미래로 거론됐다. 하지만 위천은 낙동강 수질 문제를 가리킨 하류 부산·경남의 반발과 중앙정부의 신중론 속에서 끝내 현실화되지 못했다. 지역 대결 구도에서 밀린 패배로도 기억된다. 대구경북은 2009년 달성군 구지 일대 대구국가산업단지 유치로 긴 공백을 일부 메웠지만, 무려 20년 뒤의 성과였다. 즉, 놓친 건 부지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산업은 제때 모여야 생태계가 된다. 큰 기업은 주변에 작은 기업군을 부르고, 인재는 일자리를 따라 움직이며, 대학과 연구기관은 산업 현장 수요에 맞춰 진화한다. 위천이 좌절된 뒤 대구가 잃은 건 섬유 다음 산업으로의 전환 속도였다. 그래서 위천은 지금도 대구경북 언론과 정치권이 대형 국책사업 유치전 때면 자주 인용하는 사례다. "그때 놓친 20년"이라는 표현은 지역사회가 체감한 상처의 요약이다. 현재 AI산업 유치전에서 위천은 재소환된다. AI데이터센터와 AI컴퓨팅센터, AI반도체 후공정 시설, 제조AI 실증단지, 로봇 테스트베드, 의료AI 플랫폼 등은 모두 이름은 다르나 공통점이 있다. 제때 잡지 못하면 다음 단계의 생태계가 다른 지역에 먼저 굳어진다는 것. 그래서 위천의 교훈은 단순히 "이번엔 무조건 따오자"가 아니라, "부지와 명분, 환경과 주민 수용성, 기업 수요와 운영 모델을 함께 확실히 준비하자"가 된다. ◆자동차 도시 대구도 좌절 위천의 좌절은 자동차 산업 벨트 구상과도 맞물렸다. 1990년대 대구는 삼성상용차, 쌍용자동차 구지공장, 위천국가산업단지를 잇는 산업 지도를 꿈꿨다. 섬유도시에서 기계·자동차 부품도시의 변신을 내다봤다. 대구 성서~구지~달성을 연결하는 산업축이 만들어졌다면 지역 중소 부품업체와 기술 인력이 동반 성장하는 기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가 이 구상을 흔들었다. 쌍용차 구지공장 계획은 무산됐고, 삼성상용차도 1996년 대구에 설립된 본사가 2000년 파산하는 길을 걸었다. 두 회사가 살아남았다면, 대구는 훨씬 일찍 미래차와 모빌리티 부품 도시의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2007년 로봇랜드 유치전도 따져볼 사례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함께 유치에 나섰으나 인천과 경남 마산(현 창원)이 사업을 차지했다. 당시엔 아쉬움이 컸는데, 시간이 흐른 뒤 두 지역 로봇랜드는 운영난과 재정 부담을 겪으며 사업 자체가 표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간이 꽤 지나고 보니 로봇을 주제로 테마파크와 연구 기능을 결합한 콘셉트에 짙은 물음표가 향한다. 지금 로봇산업은 피지컬AI 시대로 향하며 테마파크보다는 로봇이 데이터를 학습할 다양한 산업군 공장을 가까이에 두는 게 정답이기 때문이다. 두 사례가 주는 교훈은 엇갈리면서도 하나로 모인다. 자동차 산업 벨트는 대구가 잡았다면 지역의 산업 체질을 더 일찍 바꿨을 기회였다. 반면 로봇랜드는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잡지 못한 게 오히려 부담을 피한 선택처럼 보인다. 결국 유치 경쟁력은 모든 사업을 따오는 능력이 아니라, 지역의 미래와 맞는 사업을 골라내는 판단력이다. 반드시 잡아야 할 기회는 놓치지 않아야 하고, 유행어만 앞세운 사업은 걸러낼 수 있어야 한다. AI산업도 마찬가지다. 대구경북에 필요한 것은 이름만 그럴듯한 AI 사업이 아니라, 지역의 제조·의료·물류·로봇·소프트웨어 기반과 실제로 연결돼 다음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사업이다. ◆유치 성공 뒤엔 늘 숙제가 대구혁신도시와 김천혁신도시는 공공기관 지방 유치라는 큰 성과를 냈다. 그 평가는 유치한 기관들의 이름값 합산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역 언론이 꾸준히 던지는 "기관은 왔지만 사람은 남았나?"라는 질문이 더 큰 배점의 평가 문항이다. 여러 공공기관·공기업이 왔지만 지역 기업과 제대로 연결됐는지, 이전한 기관 직원들의 생활이 지역에 뿌리내렸는지 등의 질문들 앞에서 혁신도시는 성과와 한계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대구경북 내에서 이뤄진 일이기는 하지만 경북도청신도시도 비슷한 숙제를 남기고 있다. 경북 북부권 균형발전의 상징으로 경북도청을 안동·예천으로 옮겼지만, 현재 인구 2만3천명대에 머무르며 계획인구 10만명 규모 자족도시까지 가는 길은 여전히 멀다. 행정기관에 기업과 대학, 상권과 문화가 함께 와야 도시가 완성된다. 도시를 옮기는 일은 청사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생활의 밀도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닮은꼴 과제가 AI산업을 유치한 해외 지자체에서 나타나 분석 대상이 됐다. 미국 버지니아 주의회 산하 조사기관인 공동입법감사검토위원회(JLARC)는 2024년 12월 '버지니아의 데이터센터'(Data Centers in Virginia) 보고서에서 데이터센터 산업의 경제효과가 주로 운영 단계보다 초기 건설 단계에서 나온다고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통상 25만ft²(제곱피트) 규모 데이터센터는 상시 근무 인력이 50명 수준이지만, 공사 절정기에는 1천500명이 투입된다. 데이터센터 1개 동을 짓는 데 12~18개월이 걸리고, 이 기간 토목·전기·냉각·배관·통신·보안 설비 공사가 한꺼번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지역 언론이 혁신도시의 탄생부터 10년 넘게 지켜본 기록과 묘하게 겹쳐 보인다. 혁신도시 역시 조성 과정에서는 토지 보상, 기반시설 공사, 청사 건립, 아파트와 상가 개발로 지역에 돈이 돌았다. 그러나 개발 과정의 활기가 곧 정착 이후의 생태계를 보장한 건 아니었다. 공공기관 건물은 들어섰지만 직원 가족의 정주, 지역 대학과의 협력, 지역 기업과의 상생, 청년 일자리 창출 같은 게 충분히 따라붙지 않으면 효과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조성 초기 대규모 투자가 지역에 돈을 돌게 만드는 건 두 팔 벌려 반길 일이지만, 그것만 있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 없다. ◆브랜드도 인프라 대구경북에 유치 실패 사례 내지는 애매한 성과만 있는 건 아니다. 상징적인 유치 성공 사례도 꾸준히 이어졌다. 대구간송미술관이 대표적이다. 간송미술관의 첫 지역 분관이자 상설 전시 공간이 대구에 문을 연 것은 단순한 문화시설 개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구는 2021년 이건희미술관(이건희기증관) 유치전에선 고배를 마셨다.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상회의 출발지, 이건희 회장의 출생지, 한국 근대미술의 한 축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과는 서울의 승리였다. 이 기억만 남았다면 대구의 문화예술 인프라 유치 이력은 수도권 집중 앞에서 좌절한 기록으로 굳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구간송미술관이 다른 결을 만들었다. 건립 협약(2015년)부터 실제 개관(2024년)까지 불확실하고도 긴 시간이 걸렸지만, 대구는 국보급 문화자산을 서울만큼 품을 수 있는 도시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문화유산은 공장처럼 곧바로 매출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방문의 이유를 형성하며, 관광과 교육의 결합 가능성도 남긴다. 지역 예술가와 시민들의 자부심도 한층 높인다. 미술관 유치 성과를 단기 경제효과로만 재단하면 보이지 않는 자산이다. 경주 APEC 정상회의 유치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경주는 천년고도라는 오래된 서사를 국제 외교 무대로 연결시켰다. 역사도시는 과거에 머무는 공간이라는 통념을 넘어 세계 정상과 기업인들이 찾는 회의 도시의 이미지를 드높였다. 마침 미중갈등이 첨예한 시기에 행사가 열리며 경주가 더 주목받은 건 좋은 덤이었다. 이 역시 행사 기간의 경제효과보다 앞으로 구축할 보이지 않는 자산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된다. 두 사례는 AI산업 유치전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기업과 인재는 전력과 부지만 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도시 이미지, 생활환경, 문화적 매력, 국제적 인지도도 투자와 정착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그래서 대구간송미술관과 경주 APEC은 산업 인프라를 뒷받침하는 도시 브랜드 인프라 대표 사례라고 얘기할 수 있다. 더 있으면 좋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체급이 비슷한 후보지끼리는 여기서 당락이 갈릴 수도 있다.
2026-07-03 12:11:00
巨人 이병철의 두 유산 '반도체'와 '미디어'…AI 시대에 갈라진 명암 [금주의 이슈]
올해 6월,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1910-1987)이 남긴 유산의 희비가 강렬히 엇갈렸다. 하나는 반도체 기업 삼성전자다. 데이터센터 구축 붐을 필두로 하는 AI(인공지능) 혁명의 수혜 기업이 돼 세계 산업의 자본을 빨아들이는 중심에 섰다. 삼성전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한 AI반도체 수요를 기반으로 최근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넘어섰고, 반도체 부문은 역대급 실적을 경신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미디어 기업 중앙그룹이다. 중앙일보는 220억원 규모 기업어음 최종 부도 처리 후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동양방송의 후예를 자처한 JTBC도 360억원 규모 기업어음 1차 부도 사태를 맞았다. JTBC, 중앙홀딩스, 콘텐트리중앙, 메가박스중앙 등 중앙그룹 계열사들은 무더기로 회생절차를 밟는다. 한국 언론 역사에서 대형 언론 그룹이 이처럼 본체와 핵심 계열사가 함께 흔들리는 유동성 위기에 빠진 건 초유의 사례다. 같은 창업자에 의해 출발한 반도체 기업과 미디어 기업은 AI 시대에 정반대의 이름을 얻었다. 반도체는 미래의 인프라가 됐지만, 미디어는 '레거시 미디어'라는 쇠락의 꼬리표를 달았다. 한쪽은 AI를 등에 업고 질주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플랫폼·OTT의 압박과 광고시장 붕괴, 그리고 무리한 사업 확장의 역풍으로 멈춰 섰다. ◆이병철의 '종합' 매스컴 이병철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중앙일보 설립(1965년)과 동양방송 개국(1964년) 배경을 두고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한 끝에 종합 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눈에 띄는 말은 '종합 매스컴'이다. 1960년대의 종합 매스컴은 지금의 문어발식 확장과 성격이 달랐다. 당시 신문 지면과 라디오 주파수, TV 전파는 모두 희소 자원이었다. 매체를 가진다는 건 곧 정보 유통망을 가진다는 뜻이었고, 이는 일종의 여론 권력을 갖는다는 뜻으로도 충분히 해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병철에게 반도체와 미디어 둘 다 근대화 산업이었다. 반도체가 물질 문명의 인프라라면, 미디어는 여론과 정보의 인프라. 이후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은 신문과 방송을 묶은 국내 대표 종합 미디어로 자리 잡았다. 이병철이 기본 방침을 세우고, 홍진기(홍석현 중앙그룹 회장의 부친, 홍정도 부회장의 조부)가 운영을 맡는 구조였다. ◆두 산업의 엇갈린 시간표 반세기가 흐르며 두 산업의 시계 속도는 큰 격차를 보이게 됐다. 1969년 설립된 삼성전자는 1970년대 한국반도체 인수와 1980년대 D램 개발을 거쳐 1983년 반도체 산업 진출을 공식 선언, 세계 시장으로 나갔다. 반도체는 막대한 설비 투자와 기술 축적, 공정 관리, 글로벌 고객망이 필요한 산업이다. 실패하면 손실이 크지만, 성공하면 진입장벽 우위와 가격 결정력을 갖는다. 삼성전자는 이처럼 길고 긴 투자의 결과로 AI 시대 핵심 수혜 기업이 됐다. 1999년 중앙일보와 보광그룹 계열사가 삼성그룹에서 분리됐다. 이후 중앙그룹은 홍씨 가문의 미디어 그룹으로 독자 노선을 걸었다. 중앙그룹이 몸집을 키우는 발판이 된 사건은 2011년 종합편성채널(종편) JTBC 개국이다. 드라마, 예능, 뉴스에서 존재감을 키우며 각종 평가와 조사에서 4개 종편 중 1위를 곧잘 차지했다. 이후 중앙그룹은 신문과 방송 말고도 드라마·영화 등 영상 제작과 영화관 운영, 스포츠 중계권 관리 등 스포츠 비즈니스, 각종 출판, 리조트 사업 같은 레저 영역을 아우르는 종합 미디어 그룹으로 확장했다. 중앙그룹의 미디어 사업은 언론 특성상 국내 영향력 시장에 오래 머물렀다. 신문은 의제를 만들고, 방송은 대중문화를 움직였다. 그 수익 기반은 광고와 구독, 시청률, 콘텐츠 흥행, 중계권 확보 등에 묶였는데, 사회적 영향력은 컸으나 반도체처럼 글로벌 수요와 기술 장벽이 고부가 수익으로 연결되는 구조는 아니었다. ◆AI가 가른 운명 그러다 두 산업의 명암을 가른 요소가 바로 AI다. 삼성전자는 세계 AI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기업이다. 과거 있었던 반도체 사이클(수요 증가)과 비교해 더욱 길고 강력한 '슈퍼 사이클'이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의 유례 없는 호황이 전망된다. 반대로 미디어 기업 내지는 언론사 입장에서 AI는 기회보단 위기를 더 많이 던져주는 모습이다. AI가 기사와 콘텐츠 생산 효율을 높여줄 순 있지만, 동시에 검색 유입과 광고 수익을 잠식한다. 독자들이 언론사 홈페이지나 방송 채널에 접속하지 않고도 포털, 유튜브, SNS, 그리고 AI 검색을 통해 뉴스를 소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언론사가 제작한 콘텐츠에 대한 유통과 광고의 주도권을 AI 기반 플랫폼이 가져가는 형국이다. 1960년대의 종합 매스컴은 매체가 희소하던 시대의 통합 전략이었다. 신문과 방송을 함께 갖는 게 곧 유통망과 광고망도 장악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60년이 흐른 지금 매체는 많고 콘텐츠는 넘치며, 그걸 소비하는 독자의 시간은 점점 쪼개진다. 이런 환경에서 종합이 반드시 시너지를 뜻하는 건 아니다. 자칫하면 큰 몸집이 비용과 부채를 한 몸에 엮는 약점이 될 수 있다. ◆종합? 문어발? 중앙그룹의 위기가 이 지점에서 설명된다.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진용은 겉으로는 수직계열화된 콘텐츠 생태계처럼 보였다. 전통적인 신문·방송이 영향력을 유지하며 신뢰를 구축하는 가운데, 제작사들이 생산하는 드라마·영화·예능 IP(지적재산)에 스포츠 중계까지 더해 다채로운 엔터테인먼트가 흐르고, 이걸 극장 유통망과 레저 사업으로도 소화하는 구조. 이 시너지 구조는 시장 상황이 나빠지면 되려 독이 퍼지는 경로가 될 수 있다. 종이신문 구독 부수가 급감하고 TV 광고 시장도 쪼그라들며 신문·방송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다. OTT 경쟁은 제작사 콘텐츠 제작 비용을 높였다. 코로나19 때 OTT의 효능을 맛 본 사람들은 극장행 발길을 줄였다. 스포츠 중계권 사업은 대형 이벤트의 흥행 가능성과 무관하게 막대한 선투자를 요구한다. 이 위험은 중앙그룹이 단독 확보한 2026 북중미 월드컵 중계권 재판매 협상에서 난항을 겪으며 결국 이번 유동성 위기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콘텐츠, 영화관, 방송 광고 등이 함께 현금 흐름을 만들지 못하는 자금 경색을 보일 경우, 그룹 전체는 차입과 보증, 계열사 간 자금 지원에 기대게 된다. 바로 중앙그룹이 지난 수년간 겪은 일이다. 이병철이 얘기한 '종합'이란 희소 매체를 묶어 영향력을 키우는 데 방점이 찍혔다. 그러나 후대 중앙그룹의 '종합'은 과잉 경쟁(레드오션) 속 콘텐츠 사업들을 하나의 재무구조 안에 묶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영향력의 통합, 후자는 위험의 통합. 선대가 남긴 경영철학을 후대가 잘못 이해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대목에서 중앙그룹의 확장은 과거 한국 재벌 비판 담론에서 흔히 썼던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표현과도 맞닿는다. ◆호암 어록이 던지는 질문 〈strong style="user-select: auto !important;"〉"장기적인 사업에 있어서는 신용이 제일이다."〈/strong〉(서울경제신문 '재계회고', 1976년 6월) 중앙그룹의 위기는 그간 쌓아온 대형 언론사의 존재감과 상관없이, 시장 내 금융 신용이 무너진 사건이다. 기업어음 부도와 회생 절차는 언론의 영향력도 상환 능력을 대신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strong style="user-select: auto !important;"〉"경영의 과학화, 경영의 합리화야말로 중대한 문제다."〈/strong〉(서울경제신문 인터뷰, 1970년 1월) 중앙그룹이 신문·방송·제작·극장·레저를 묶은 종합 전략은 시너지처럼 보였다. 하지만 합리적 현금 흐름과 부채 관리가 따르지 않으면 확장은 곧 위험의 통합이 된다. 〈strong style="user-select: auto !important;"〉"기술혁신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strong〉('한국인' 지 기고문, 1982년 10월) 삼성전자는 반도체 기술을 축적해 AI 시대의 인프라 그 자체가 됐다. 반면 중앙그룹은 콘텐츠 영향력은 키웠으나 플랫폼과 유통 기술의 주도권은 갖지 못하며 경영 위기도 자초했다. 〈strong style="user-select: auto !important;"〉"10년 이상, 50년 정도의 장기 안목 위에서 세워야 한다."〈/strong〉(삼성조선(현 삼성중공업) 건설현장, 1977년 6월) 장기 비전과 장기 부채는 다르다. 스포츠 중계권, 영화관, 콘텐츠 투자가 미래 수익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장기 안목은 외형 확장의 명분에 그칠 수 있다.
2026-06-27 12:48:00
[음읽남] 우리 가락은 어떻게 그루브를 얻었나 ⓛ재즈, 아리랑을 번역하다
브라질엔 보사노바가 있다. 재즈의 화성과 브라질 삼바의 리듬, 리우데자네이루 해변의 공기가 만나 세계적 음악 언어가 됐다. 아르헨티나에는 탱고가 있다. 유럽 춤곡의 문법, 아프리카계 리듬, 이민자들의 애환이 항구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서와 뒤섞여 만들어진 장르다. 음악은 오래 전부터 스미고 섞였다. 한국에선 어땠을까.우선 재즈와 우리 가락이 만났다. ◆한국형 재즈 첫 시도 기념비적 출발이 된 음반이 이판근과 코리안 째즈 퀸텟 '78의 '재즈로 들어본 우리 가요 민요 팝송'(1978)이다. 편곡을 맡은 이판근을 비롯해 손수길, 김수열, 강대관, 최세진, 이수영 등 우리나라 선구자격 재즈 연주자들이 참여한 이 음반의 핵심은 민요 재즈다. 민요 '아리랑' '가시리' '한오백년'이 재즈 편곡으로 실렸다. 중요한 것은 이 음반이 단순히 민요 멜로디를 재즈 악기로 연주한 수준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민요가 재즈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재즈가 민요 안에 숨어 있던 흔들림과 여백을 발견한 것에 가깝다. ◆재즈클럽의 아리랑 이후 재즈와 우리 가락의 만남은 두 방향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대중화, 또 하나는 실험이다. 재즈 보컬리스트 박성연은 재즈클럽 야누스에 모인 연주자들과 함께 'Jazz At The Janus Vol.1'(1985)을 발표, 2번 트랙으로 '밀양아리랑'을 수록했다. 한국 민요의 선율은 유지한 채 리듬, 화성, 악기 운용을 완성도 높은 재즈의 언어로 구현한다. 상징적 장면이다. 민요는 원래 마당, 들, 지역 공동체 안에서 불렸다. 그랬던 마당의 노래가 재즈클럽의 한 넘버로 손색없이 연주된다. 이 곡의 편곡도 이판근이 담당했다. ◆날것의 협연과 실험 대중화의 길이 있었다면, 조금은 거친 실험도 있었다. 길옥윤, 류복성, 이생강, 이성진이 함께한 '민속악과 째즈'(1987)는 제목 그대로 민속악과 재즈의 정면 충돌이다. 색소폰(길옥윤), 봉고(류복성), 대금(이생강), 장구(이성진)라는 재즈 악기와 국악기들이 만나 긴 호흡의 연주를 펼친다. 세련된 크로스 오버라기보단 날것 그대로의 조화를 드러내는 시도에 가깝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연주자들이 같은 녹음실 안에서 즉흥적으로 대화하는 느낌이 강하다. 어떤 대목은 투박하고, 또 어떤 대목은 긴장감이 넘친다. 그 어색함이 귀하다. 완성된 장르가 아니라 가능성을 확인하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흐름은 1990년대로 이어져 좀 더 풍성해졌다. 타악기 주자 김대환의 '흑경'(1993) 앨범은 그가 신기의 경지로 다루는 각종 타악기에 피아노, 색소폰, 해금을 아우른 프리재즈적 실험이었다. 특히 김대환은 야마시타 요스케, 우메즈 가즈토키, 강은일과 함께 'ARIRANG'을 연주하며 우리 민요를 재즈의 자유로운 즉흥성 안에 던져넣기도 했다. '민속악과 째즈'가 국악과 재즈의 정면 충돌이었다면, '흑경'은 그 충돌을 더욱 추상적인 프리재즈의 세계로 끌고 간 사례다. 비슷한 시기 김덕수패 사물놀이와 오스트리아 색소폰 거장 볼프강 푸쉬닉이 이끈 4인조 재즈 밴드 Red Sun의 협업도 중요하다. 이들은 사물놀이의 장단과 재즈의 즉흥연주를 합쳤다. 'Then Comes The White Tiger'(1994)와 'Nanjang A New Horizon'(1995) 같은 음반에 결과물을 담았다. 이들은 함께 수십년 동안 유럽 등지 해외 공연을 펼치며 세계화의 문을 두드렸다. ◆좀 더 대중 속으로 대중가요계에서도 흐름이 이어졌다. 우선 김동률이 수행했다. 전람회 시기부터 수준 높은 재즈 가요를 여러 곡 선보인 그는 자신의 2집 희망(2000)에서 '염원'과 '님'을, 3집 귀향(2001)에서 '우리가 쏜 화살은 어디로 갔을까' '구애가' '자장가' 등을 선보이며 대중가요 안에서 우리 가락의 멜로디 감각을 어떻게 세련되게 운용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가요를 부르던 인순이는 돌연 미국으로 유학을 가 재즈를 배워오더니 자신의 첫 재즈 앨범 '재즈'(2003)를 내놨는데, 우리 민요 가사를 스캣(흥얼거림)으로 구성지게 구사하는 재즈 민요 두 곡 '사설난봉가'와 '창부타령'이 백미다.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의 '강원도 아리랑'(2010)과 '아리랑'(2013)도 함께 나열해야할 사례다. 우리 민요를 유럽 재즈의 미니멀하고 섬세한 어법으로 재구성해 들려줘 호평을 받았다. 나윤선은 평소 공연에서 아리랑을 빼놓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2013년 강원도 아리랑 홍보대사로 위촉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한국 재즈가 우리 가락 가운데 가장 먼저, 또 가장 꾸준히 붙잡아온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다. 재즈는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아리랑을 번역했고, 그때마다 아리랑은 오래된 민요가 아니라 새롭게 들리는 노래가 됐다. 〈2편에 계속〉
2026-06-26 13:13:00
[커버스토리] '녹지율→체류율' 대구 도심 공원의 과제
도시는 늘 바쁘다. 사람들은 출근하고, 약속 장소로 이동하고, 소비하고, 다시 떠나기를 반복한다. 도심은 그렇게 사람을 빠르게 흘려보내는 장치처럼 작동한다. 거리의 속도는 빨라지고, 상점의 간판은 더 밝아지지만, 정작 잠시 앉아 숨을 고를 틈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좋은 도심은 사람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잠시 붙잡고, 앉히고, 쉬게 한다. 마치 침실처럼 편히 눕히기도 한다. 빌딩숲 사이 작은 잔디밭 하나가 도시의 표정을 바꿀 수 있다. 이제 공원의 가치는 초록의 면적만으로 따지기 어렵다. 얼마나 많은 나무가 심겼느냐보다, 그곳에서 시민이 얼마나 오래 또 편안히 숨을 고를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도심의 잔디는 풍경이기 전에, 바쁜 하루 중 굳어진 몸과 마음을 잠시 풀어주는 공간이다. 이 질문은 대구 도심 공원을 향해서도 던져볼 수 있다. 도쿄와 교토, 뉴욕의 작은 잔디공원들이 보여준 장면은 대구에도 유효한 질문을 남긴다. 도심 공원은 이제 보는 녹지를 넘어, 머무는 장소가 될 수 있을까. ◆도심 속 무장해제 평일 낮이었던 지난 4월 21일 오후 방문한 일본 도쿄 이케부쿠로역 인근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학교 운동장 만한 크기 공원에서 점심시간 또는 업무 중 휴식을 즐기는 학생과 직장인들, 하원·하교한 자녀를 데리고 여가를 즐기는 부모들, 그리고 겉모습만 봐서는 어떤 목적으로 공원을 찾았는지 알 수 없지만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분명한 시민들까지. 더욱 놀라운 건 돗자리를 깔거나 아예 몸 그대로 잔디밭에 앉고 누운 사람들이 상당수였다는 점이다. 한국이라면 평일 일과 후 또는 주말에나 인기 공원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 공원 주변은 같은 도쿄의 신주쿠역·시부야역과 함께 일본 최상위권 혼잡도를 보이는 이케부쿠로역을 비롯한 대형 건물로 가득한 빌딩숲이다. 그 속의 라운지 같은 공원이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이다. 낮이면 도심을 채우는 수많은 인구가 일과 중 틈을 내 이 공원을 찾아 잔디밭 위에서 무장해제를 하는 셈이다. 한달 뒤였던 5월 31일 오후 찾은 일본 교토 릿세이광장에서도 똑닮은 풍경을 확인했다. 역시 학교 운동장 규모의 공원 인조잔디 위에 남녀노소 교토 주민들이 앉거나 누워 있었고, 관광지 교토 도심 한복판에 있는 만큼 여행 중 들러 아무렇게나 몸을 뉘이고 인증샷을 촬영하는 관광객들도 볼 수 있었다. 불과 몇 걸음 밖은 주민과 관광객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뒤섞이지만, 이곳은 비록 인조잔디이기는 하나 땅도 푸르고, 뻥 뚫린 하늘도 푸르며, 광장 바로 옆에 흐르는 하천인 다카세가와의 푸르름까지 더한, 도심 속 오아시스였다. 이들 장면을 이름 붙이면 '도심형 짧은 피크닉'이다. 텐트를 치고 하루를 보내는 주말 나들이가 아니다. 점심시간 30분, 업무 중 빈틈, 여행 동선 사이 잠깐의 휴식이다. 잔디 위에 앉거나 눕는 행위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도심 생활의 일부가 된 풍경이다. ◆보는 녹지→쓰는 녹지로 두 공원은 도쿄와 교토 도심 한복판 '작지만 똘똘한 도심 공원'의 대표 사례다. 공통점은 단순히 잔디의 존재에 있지 않다. 공원이 도심 생활권 한복판에 있다. 공원 중앙에 사람들이 앉거나 누울 수 있는 잔디광장이 있고 공원 가장자리에는 카페·벤치·보행로·그늘·상업시설이 붙어 있다. 즉 '보는 녹지'가 아니라 '사용하는 녹지'다. 학계 표현을 빌리면 빽빽한 나무가 그늘과 산책로를 만드는 수림형 공간이라기보다는, 중앙부가 열린 잔디 공간이 휴식과 모임을 받아내는 오픈론(open lawn) 또는 퍼블릭 그린(public green)에 가깝다. 같은 도시 내 대형 수림형 공원과 구분된다. 도쿄의 경우 신주쿠교엔·요요기공원은 넓은 숲을 산책이나 정적 휴식의 용도로 쓰는 성격이 강하다. 반면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은 역세권 도심의 일상 속에서 잠깐 들어가 쉬기 좋은 공간이다. 교토 릿세이광장 역시 관광도시 교토의 번잡한 상가와 골목 사이에 있는 작은 마당이다. 1951년 문을 연 도쿄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은 부지 면적 7천818.5㎡의 작은 도심 공원이다. 2016년 4월 리뉴얼 오픈 후 '도심의 거실' 같은 장소로 자리 잡았다. 처음부터 이런 공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 노숙인들이 머물고 치안 이미지도 좋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자 도쿄 도시마구는 공원다운 공원을 다시 만드는 것은 물론, 공원 관리비 증가와 이케부쿠로역 동쪽 노상 자전거 문제까지 함께 풀고자 대규모 리뉴얼에 나섰다. 지상에는 잔디광장과 카페를 배치했다. 카페 수익 일부는 공원 유지 관리에 쓰고, 구청·주민·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을 좋게 하는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공원 지하에는 변전소를 유치하고 대형 자전거 주차장을 마련해 수익성과 지역 문제 해결을 결합했다. 그러면서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은 치안, 상권, 유지 재원 등의 문제를 함께 풀어낸 도심 공원 경영 모델이 됐다. 교토 릿세이광장은 폐교 운동장 도시재생 사례이기도 하다. 1869년 개교한 옛 릿세이초등학교는 1993년 문을 닫았다. 이후 지역 행사 거점으로 쓰이다 2020년 '릿세이 가든 휴릭 교토'라는 복합시설로 재탄생했다. 전체 부지 약 4천900㎡에서 옛 학교 건물은 호텔과 도서관, 상업·문화시설로 재생됐고, 운동장은 인조잔디가 깔린 열린 광장이 됐다. 주민들은 폐교 부지를 큰 마당으로 선물 받은 셈이고, 관광객에게는 교토 도심의 숨은 쉼터다. ◆원형은 브라이언트 파크 두 시설의 더 유명한 원형을 탐색하면 미국 뉴욕 맨해튼 한복판 약 3만9천㎡ 규모의 공원, 브라이언트 파크가 나온다. 뉴욕공립도서관과 고층 업무지구 사이 녹색 가득 잔디광장이 상징인 이 공원은 1970년대만 해도 범죄와 방치의 이미지가 강했다. 반전은 1980년대에 추진된 공원 재생에서 나왔다. 재정비 후 1992년 다시 문을 연 브라이언트 파크는 높은 울타리와 시야를 가리던 요소들을 걷어내고 음식점을 배치했다. 이제는 공원의 상징이 된 2천개 이동식 의자도 들였다. 브라이언트 파크 역시 같은 뉴욕 도심의 센트럴 파크와 구분된다. 센트럴 파크가 맨해튼 북쪽의 거대한 수림형 도시공원이라면, 브라이언트 파크는 미드타운 업무지구의 짧은 쉼을 제공하는 오픈론형 공원이다.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 릿세이광장, 브라이언트 파크 셋 다 일상 동선 안에서 잠깐 들어가 앉고 눕기 편리한 공원이다. 잔디는 조경 장식이 아니라 몸을 놓는 바닥이고, 가장자리는 벤치와 그늘과 카페가 있는 생활의 테두리다. ◆녹지율→체류율 필요한 대구 이어 살펴본 대구 도심의 공원들은 아쉬움을 남긴다. 대구 도심에도 나무와 녹음은 있다. 문제는 시민들이 잠시 앉고 눕고 먹고 쉬는 도심의 거실은 좀 부족하다는 점이다. 도심 공원이 과거 나무 심기에 치중하며 '녹지율'의 시대를 상징했다면, 지금 요구받는 건 '체류율'의 시대다. 물론 대구에도 두류공원 코오롱야외음악당, 수성못, 신천 둔치처럼 돗자리를 펴고 쉴 수 있는 야외 휴식 공간은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목적지형 공간에 가깝다. 주말이나 평일 저녁에 시간을 내 이동해야 한다. 해외 사례들이 보여준 건 다르다. 앞서 말한 도심형 짧은 피크닉, 즉 점심시간 30분, 약속 전 20분, 장을 보거나 출근하는 길의 빈틈에도 가능한 잔디 위 휴식이다. 문제는 잔디밭을 좋아하느냐, 숲길을 좋아하느냐에 그치지 않는다. 대구 도심, 특히 동성로 일대가 요즘 직면한 난제가 공동화와 상가 공실, 유동인구 감소다. 상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건 더 많은 간판과 이벤트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도심에 와서 곧장 소비만 하고 떠나는 게 아니라, 잠시 머물고 쉬고 기다리고 만나는 시간을 뒷받침하는 기반시설, 바로 공원이다. 잘 설계된 도심 공원은 상권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다. 각종 상점들 사이에 작은 잔디와 그늘, 의자와 물길이 놓이면 도심 방문의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다. 체류가 늘어야 산책이 생기고, 산책이 생겨야 우연한 소비와 만남도 생긴다. ◆대구도 '오픈론' 활성화? 사실 대구 안에서도 바뀐 도심 공원 트렌드를 반영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대구 남구 옛 캠프워커 헬기장 반환부지에 조성 중인 '대구평화공원'이 최신 사례가 될 전망이다 오는 8월 준공이 목표인 이 공원은 조감도에서도 드러나듯이 2만8천374㎡ 면적의 핵심인 4천600㎡ 규모의 잔디광장이 공원과 도서관 이용객, 주변 유동 인구를 모아 머물게 하며 오픈론형 공원의 면모를 강조할 전망이다. 최근 젊은층의 이용 문화와 도심 체류 수요를 보면, 그리고 해외 성공 사례도 참고하면, 오픈론형 공간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 대구평화공원은 역시 과거에 비해 확장된 잔디광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구 서구 이현공원 등과 함께 그러한 변화를 대구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진행형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실은 2.28기념중앙공원도 지난해 재단장을 통해 공간 일부를 나무를 줄여 탁 트인 잔디광장으로 조성, 오픈론형 공간에 대한 요구를 소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만 공원 내 잔디광장은 컬러풀대구페스티벌 등 행사 땐 인파가 몰리지만 평소엔 여전히 관상용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2026-06-26 12:12:00
[커버스토리] 현대인이 원하는 '작지만 똘똘한 도심 공원'
◆작을수록 더 치밀해야 '잔디광장'을 킬러 콘텐츠로 배치한 '작지만 똘똘한 도심 공원' 사례는 선진국 곳곳에 있다. 미국 보스턴 금융가의 포스트 오피스 스퀘어는 지하 주차장 위에 만든 작은 잔디광장이자 주변 직장인들의 점심 쉼터다. 일본 오사카 덴노지공원 입구 덴시바(TEN-SHIBA)는 역세권 잔디광장 주변에 카페와 식당, 편의시설을 붙였다. 일본 도쿄 시부야 한복판 미야시타파크는 1953년 만들어진 공원을 1966년 주차장 위 공원으로 탈바꿈시켰으나 시간이 지나며 노후화한 걸 2020년 옥상에 잔디 공간을 깔고 스포츠, 쇼핑, 휴식 기능을 층층이 배치한 사례다. 미국 댈러스 클라이드 워렌 파크는 도심을 관통하는 고속도로 위에 공원을 얹은 독특한 구조다. 여기에 푸드트럭과 주민 대상 무료 제공 프로그램 등의 콘텐츠를 가미했다. 이들 사례가 말하는 건 하나다. 도심 공원은 면적이 작을수록 더욱 치밀해야 한다는 것. 잔디만으로는 부족하고, 나무만으로도 부족하다. 사람들이 앉는 방식, 먹는 방식, 이동하는 방식, 그늘을 찾는 방식, 낮과 밤의 이용 방식까지 하드웨어와 콘텐츠 가리지 않고 완성도 높게 설계돼야 한다. 그래서 현대 도심 공원은 '녹색으로 남겨둔 땅'이 아니라 '시민의 시간을 받아내는 장치'에 가깝다. ◆서울 도심 곳곳 오아시스 실은 서울 도심에 비슷한 풍경이 연속으로 펼쳐진다. N서울타워가 보이는 남산 백범광장, 롯데월드타워 아래 월드파크 잔디광장,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열린송현녹지광장,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 등은 모두 잔디와 피크닉, 인증샷과 체류가 결합되는 공간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을 흐르는 하천인 청계천도 사례로 곁들일 수 있다. 청계천은 잔디광장 형태는 아니지만, 도심 속 일상에 작은 피난처를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은 계열이고 좀 더 높은 효능을 보이고 있다. 서울 도심을 관통하던 고가도로를 걷어내고 물길과 보행 공간을 되살린 청계천은 사무실과 상가와 도로 사이에서 단 몇 계단만 내려가면 물소리와 그늘, 산책로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꼭 잔디가 아니어도 도심 속 오아시스가 가능하다. 중요한 건 자연의 형식이 아니라 바쁜 도시 생활 중 잠시 몸과 시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체류의 틈을 만드는 일이다. 청계천 물길은 일본 교토가 잘 보존해 관광 요소로는 물론 도심의 숨통으로도 활용하고 있는 시라카와·다카세가와·오카자키 같은 물길도 떠올리게 하고, 콘크리트로 덮을 때 훗날 복원에 대해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은 대구의 여러 복개천들도 떠올리게 한다. ◆숫자가 말하는 도심 체류 수요 작지만 똘똘한 도심 공원에 대한 수요는 각종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서울도서관에 따르면 서울광장, 광화문광장, 청계천을 책 읽고 쉬는 야외공간으로 바꾼 서울야외도서관은 2024년 4월 18일~11월 10일 약 7개월간 300만명의 방문객을 모았다. 2022~2024년 누적 방문객은 약 500만 명으로 집계됐다. 서울야외도서관을 찾은 시민 5천521명을 대상으로 한 만족도 조사에서는 91.3%가 '만족한다'고 답하는 등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 1권 이상 책을 읽은 독서자 비율은 85.4%였다. 한국리서치가 2024년 11월 8~11일 전국 만 18세 이상 1천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공원 인식 조사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주 3회 이상 가는 공간으로 산책로는 34%, 근린공원은 21%를 꼽았지만, 규모가 큰 공원은 12%에 그쳤다. 일상적으로 가기 쉬운 작은 공원의 이용 빈도가 높다는 뜻이다. 접근성도 차이를 보였다. 소규모 공원에 대해서는 도보로 이동한다는 응답이 80%나 됐고, 자신의 주거지 등에서 10분 이내 접근 가능하다는 응답이 49%였다. 반면 대규모 공원은 자동차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간다는 응답이 70%, 이동 시간에 10분이 넘게 소요된다는 응답이 88%였다. 최근 공원 이용 트렌드는 '산책'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구글맵 리뷰를 활용한 한강공원의 이용자 인식과 공간 매력도 연구'(2025, 한국조경학회지)는 서울 망원·반포·여의도·잠실 한강공원의 이용 행태와 공간 인식을 분석했다. 연구는 한강공원이 여가 활동, 휴식, 경관 감상 등이 함께 이뤄지는 대표적 도시여가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봤다. 특히 리뷰 분석에서는 산책, 자전거, 운동 같은 일상적 이용뿐 아니라 돗자리, 텐트, 치킨, 맥주, 라면, 전망, 야경, 일몰 같은 키워드도 함께 나타났다. 공원은 걷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복합적 체험 공간이 됐다. 이 변화는 한강공원만의 특수한 상황으로 볼 수 없다. 연구에선 공원별 이용 행태와 공간 인식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도 짚었다. 결국 좋은 공원은 실제 이용자의 경험과 공간별 매력을 읽어 맞춤형 운영 전략을 세울 때 만들어진다. 추가 조건도 분명하다. '1·2기 신도시 공원 이용자의 만족도와 인식 분석'(2024, 한국조경학회지)은 분당·일산·동탄·광교·운정 등 수도권 1·2기 신도시 9개 공원 이용자 1천800명을 조사했다. 공원 이용자들은 대부분 도보로 접근했으며, 보통 1~2시간 이내로 이용했다. 공원 전체 만족도에는 보행시설, 수목 및 식재, 수경시설, 휴게시설, 문화시설 등이 영향을 미쳤다. 이는 도심 공원을 잔디 중심 체류 공간으로 바꾸자는 말이 곧 아무 데나 돗자리를 펴게 하자는 게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더 정교한 관리가 필요하다. 밤에도 안전해야 하고, 사방으로 시야가 열려야 하며, 화장실부터 크고작은 시설 하나하나가 잘 관리돼야 한다. 앞서 살펴본 브라이언트 파크와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이 노숙인 체류와 치안 이미지를 개선한 사례이고, 릿세이광장이 오후 8시까지만 개방하며 음주를 전면 금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이 머무는 공원으로 도심 한복판의 잔디 공간은 사치가 아니다. 그늘과 의자와 작은 물길도 마찬가지다. 매일 도시의 번잡함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시민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쉼표로 볼 수 있다. 덴마크 건축가이자 도시설계가 얀 겔은 자신의 대표 저서 '삶이 있는 도시 디자인'(Life Between Buildings: Using Public Space)에서 도시설계의 출발점은 건물이나 도로가 아니라 사람의 생활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삶이 먼저, 공간이 다음, 건물은 마지막"이라고 요약했다. 도심 공원의 성패도 같은 기준으로 따질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나무가 심겼는지보다, 그 나무와 잔디와 길 사이에서 시민의 일상이 실제로 머무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머무르기 좋다는 특징이 주로 잔디광장에 매개되고 있는 건 그런 맥락일 터다. 미국 도시사회학자 윌리엄 H. 화이트는 자신이 쓴 '작은 도시 공간의 사회 생활'(The Social Life of Small Urban Spaces) 및 동명의 다큐멘터리에서 뉴욕의 작은 광장과 공원을 관찰한 결론을 밝혔다. 그는 "사람을 가장 끌어당기는 것은 다른 사람"이라고 짚었다. 좋은 공공 공간은 조형물이나 장식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앉고, 보고, 먹고, 대화하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느끼는 순간 비로소 살아난다. 브라이언트 파크 운영 경험을 정리한 앤드루 M. 맨셸은 한층 실무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는 책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배우다'(Learning from Bryant Park: Revitalizing Cities, Towns, and Public Spaces)에서 브라이언트 파크의 성공을 거창한 설계 한 번의 결과로 보지 않았다. 맨셸은 1991년부터 10년 간 브라이언트 파크 복원 업무에서 공연, 영화 상영, 공원 임대 등 주요 프로그램을 직접 추진한 인물이다. 그가 보기에 공공 공간을 살리는 일은 완공식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된다. 어떤 의자가 편한지, 잔디가 얼마나 잘 관리되는지, 화장실이 깨끗한지, 음식과 행사가 공원 이용을 방해하지 않고 끌어들이는지 등을 계속 살피고 조정해야 한다. 실제 브라이언트 파크의 성공담에는 프랑스식 녹색 이동식 의자를 고르는 과정, 중앙 잔디를 시험과 실패 끝에 관리해낸 과정, 꽃과 클래식 음악이 있는 화장실, 영화 상영과 공연 같은 프로그램이 모두 포함된다. 설계도면 위의 공원이 아니라 매일 관리되고 운영되는 공원이 사람을 붙잡았다는 얘기다. 맨셸이 전하는 교훈은 잔디광장을 만든다고 곧장 도심의 거실 기능을 수행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시민이 다시 찾는 공원이란 의자 하나, 그늘 하나, 화장실 하나, 프로그램 하나를 계속 손보는 운영의 결과다.
2026-06-26 12:11:00
드라마 '참교육' 속 '교권보호국' 현실화 가능? [금주의 이슈]
요즘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이 던진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드라마는 무너진 교권을 비롯해 학교폭력, 악성 민원, 선을 넘은 학생과 학부모 문제를 가상의 국가기관 '교권보호국'이 해결한다는 설정이 골자다. 극 중 나화진(김무열 분) 등 교권보호국 구성원들은 학교 현장에 직접 들어가 교육 질서를 회복한다. 우선 액션이 화려해 눈길을 끌고 서사도 통쾌한데, 더 중요한 건 학교폭력 피해자와 교권 침해에 지친 교사들이 가졌을 법한 울분을 드라마가 대리 해소한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여러 논제가 파생된다. 현실의 학교에서 피해 학생과 교사가 너무 자주 혼자 남겨졌다는 감각, 문제 학생과 악성 민원 앞에서 학교가 무력해졌다는 불안, 공교육 질서가 사적 갈등의 장으로 밀려났다는 분노를 드라마가 건드렸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은 명백히 판타지다. 그러나 현실의 공백이 그만큼 컸기 때문에 이 판타지가 힘을 얻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판타지가 현실을 흔들다 드라마 속 판타지를 현실 정책으로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 민주연구원은 지난 12일 '교육부 교육활동보호국' 신설 방안을 제안했다.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처럼 물리력으로 학교에 개입하자는 취지가 아니라, 교사나 학교가 중대 교육활동 침해 사안과 반복 민원을 혼자 떠안지 않도록 국가와 각급 교육당국이 책임을 나눠 맡자는 구상이다. 교육부에 컨트롤타워를 두고, 시·도교육청에는 법률·심리 지원 기능을 강화하며, 그 아래 교육지원청 단위에는 실무를 맡을 현장지원팀을 운영하자는 내용이다. 우리나라 학교 현장에는 이미 교육활동 침해 대응 절차가 있다. 교육활동 침해가 발생하면 교사는 침해행위 중단을 요구하고, 관리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어 사안에 따라 교육지원청 보고나 경찰 신고로 이어질 수 있다. 피해 교원 보호를 위한 특별휴가, 병가, 상담 지원 장치도 마련돼 있다. 문제는 절차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현장의 체감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점이다. 민원 대응, 증거 확보, 학부모 설득, 학생 지도, 신고 이후 관계 악화, 소송 가능성까지 학교와 교사가 감당해야 할 부담은 여전히 막대하다. ◆교사 혼자 두지 않는 법 그래서 현실판 교권보호국의 핵심은 통쾌한 '응징'이 아니라 확실한 '분담'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교사를 민원과 분쟁의 최전선에 계속 세워두지 않는 것, 중대 사안이 발생했을 때 학교 관리자의 재량이나 개인 교사의 인내심에 맡기지 않는 것, 학생의 문제행동을 징계 하나로만 처리하지 않고 교육·복지·상담·사법 체계가 힘을 합쳐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해외 사례를 봐도 드라마식 교권보호국과 똑같은 기관은 찾기 어렵다. 대신 학교가 감당하기 어려운 청소년 문제를 다기관 체계로 나눠 처리하는 모델은 적지 않다. 대표적 사례가 영국의 소년비행예방팀(YOT, Youth Offending Teams)과 청소년사법서비스(YJS, Youth Justice Service)다. 이들 조직은 교권보호 전담기관이라기보다 법적 문제에 휘말렸거나 범죄 위험이 있는 청소년을 다루는 지역 단위 다기관 조직이다. 지방정부가 중심이 돼 경찰, 보호관찰, 보건, 교육, 아동복지, 지역사회 서비스를 연결한다. 청소년이 왜 문제행동에 이르렀는지 배경을 살피고, 재범을 막기 위한 감독과 지원을 병행한다. ◆누가 혼낼 것인가, 누가 개입할 것인가 학교폭력, 교권 침해, 촉법소년 문제, 반복적 비행은 서로 완전히 분리된 현상이 아니다. 가정의 방임, 정신건강 문제, 또래집단의 압력, 지역사회 환경, 온라인 폭력, 약물과 범죄 노출이 뒤섞일 수 있다. 이를 담임교사 1인,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하나, 경찰 신고 한 건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영국식 모델의 특징은 '누가 혼낼 것인가'가 아닌 '누가 함께 개입할 것인가'로 읽힌다. 미국의 학교 위협평가팀(STAT, School Threat Assessment Team)도 참고할 만하다. 학교 안팎 폭력 위험, 협박, 흉기 반입, 심각한 괴롭힘, 자해·타해 위험 등을 조기에 평가하기 위한 다학제 팀이다. 학교 관리자, 상담교사, 심리상담사, 사회복지사, 법집행기관 관계자 등이 참여한다. 모든 문제를 경찰로 넘기는 방식이 아니라, 위험 수준을 분류해 즉각 대응이 필요한 사안과 상담·지원이 필요한 사안을 구분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특징이다. 선진국 사례는 더 있다. 미국 일부 지역의 소년평가센터(JAC, Juvenile Assessment Center) 또한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문제 학생을 법정에 세우기 전에 가정환경, 정신건강, 학교 적응, 약물 문제, 비행 위험을 평가하고 적절한 프로그램에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 모델은 드라마 '참교육'에 앞서 2022년 화제가 됐던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이 좀 더 구체적으로 가리켰던 한국의 촉법소년 연령 논쟁과도 연결된다. 처벌 연령을 낮추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따지는 논의는 문제를 단순화할 수 있다. 핵심은 위험 청소년을 언제, 누가, 어떤 기준으로 발견하고, 처벌 이전에 어떤 개입을 할 것인가다. ◆처벌보다 먼저 필요한 회복 네덜란드의 할트 프로그램(HALT programme)은 '책임 회복' 개념에 초점을 맞춘 사례다. 경미한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에게 피해자 사과, 손해배상, 과제 수행, 부모 참여 등을 통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한다. 이어 프로그램을 성실히 마치면 전과가 남지 않는다. 피해자는 사과와 보상을 받고, 가해 청소년은 낙인 대신 책임을 배운다. 그러면서 사회는 재범 가능성을 낮추는 효과를 기대한다. 근절되기 힘들어 관리가 중요해 보이는 학교폭력 사안에도 이 원리는 시사점을 남길 수 있다. 피해자가 원하는 건 가해자의 순간적 굴욕만이 아니라 안전 회복, 재발 방지, 진정한 사과, 관계와 공간의 회복일 수 있어서다. 뉴질랜드 청소년사법 가족집단회의(FGC, Youth Justice Family Group Conference)는 회복적 사법의 성격이 더 짙다. 청소년, 가족, 피해자, 관계기관이 모여 피해와 책임을 논의하고 재발 방지 계획을 세운다. 호주 퀸즐랜드의 청소년 공동대응팀(YCRTs, Youth Co-Responder Teams)은 경찰과 청소년 사법 인력이 함께 거리와 지역 현장을 찾아가 위험 청소년을 찾고, 가족·주거·교육·보건 서비스와 연결한다. 이들 사례의 공통점은 문제 학생을 학교 안에 방치하지도, 곧장 형사처벌 대상으로 올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조기 발견, 위험 평가, 피해 회복, 재범 방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시스템이다. ◆학교를 다시 세우는 기준 한국형 교육활동보호국 논의가 현실성을 가지려면 조직의 이름보다 역할의 경계가 먼저 정리돼야 한다.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은 학교 현장에 직접 들어가 질서를 회복하는 판타지에 가깝지만, 현실의 전담기구는 더 복잡한 문제를 다뤄야 한다. 교사를 악성 민원과 분쟁의 최전선에서 분리하되, 문제 학생을 단순히 배제하지 않고, 피해 학생의 회복까지 함께 설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방향은 드라마의 흥행 이후 갑자기 나온 주장이 아니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2024년 펴낸 '교원의 교육활동 피해 실태조사 및 법·정책적 개선방안 연구(I): 초등학교를 중심으로'는 교육활동 피해를 좁은 의미의 교권 침해로만 보지 않았다. 연구진은 교육활동 피해를 학교 교육현장에서 교사 개인이 경험하는 교육활동 침해행위와 그로 인한 정신적·신체적 피해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다뤘다. 교권 보호가 단순히 교사를 대신해 민원인을 상대하는 문제가 아니라, 교육활동 침해가 남기는 피해와 그 이후의 회복까지 포함하는 문제라는 의미다. 다만, 교권 보호를 교사와 학생의 권리 충돌로만 이해하면 논의는 다시 좁아진다. 교사에 대한 보호가 학생을 더 세게 처벌한다는 뜻이 아니라, 수업이 가능한 질서와 안전한 관계를 회복한다는 뜻에 가까워야 한다. 교육활동 침해가 발생했을 때 교사의 피해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일, 피해 학생의 안전을 회복하는 일, 문제를 일으킨 학생에게 책임을 배우게 하는 일은 서로 분리된 과제가 아니다. 결국 질문은 '누구 편을 들 것인가'가 아니라 '무너진 학교 공동체를 어떤 기준으로 다시 세울 것인가'로 옮겨간다.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의 대표 연구자인 하워드 제어 미국 이스턴 메노나이트대 갈등학 교수는 2015년 이 대학 인터뷰에서 학교의 징계 문제를 언급하며 "교육의 절반은 교육과정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고 말했다. 처벌 중심 형사사법적 접근만으로는 학생들에게 갈등을 다루고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드라마 '참교육'이 보여준 통쾌함은 현실의 분노를 건드렸지만, 제도가 도달해야 할 곳은 응징의 장면이 아니다. 교사가 다시 가르칠 수 있고, 피해 학생이 안전을 회복하며, 문제를 일으킨 학생이 자기 책임을 배우는 학교. 현실의 교권 보호는 결국 학교를 다시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드라마도, 해외 사례도, 전문가들의 조언도 공통되게 발신한다.
2026-06-20 12:00:00
[내 친구 AI] 상사 답장부터 싸움 중재까지…AI가 대신 말하는 시대
직장인 A씨는 요즘 상사에게 답장하기 전 먼저 챗GPT를 연다. 불쾌한 업무 지시가 와도 바로 답하지 않는다. 카카오톡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 넣고 "너무 감정적이지 않게", "선을 지키면서도 예의 있게" 답장 써달라고 부탁한다. AI가 써준 문장은 대부분 그대로 복붙(복사해서 붙여넣기)된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상사 메시지를 챗GPT에 넣고 답장한다'는 글이 화제가 됐다. 그런데 더 많은 공감을 얻은 건 댓글이었다. "상사도 니가 보낸 메시지에 AI로 답변하고 있을껄" ◆ 공지·민원…말을 대신 써주는 AI 사람과 대화하기 전에 AI와 먼저 대화하는 시대. 생성형 AI가 이제는 검색을 넘어 인간 사이 '말하기' 자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AI에게 가장 많이 맡기는 건 의외로 거창한 업무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 소모가 큰 일상 대화다. "거절 메시지 부드럽게 써줘" "기분 안 나쁘게 항의하는 법 알려줘" "읽씹 안 당할 답장 추천 좀" 서비스업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활용은 빠르게 퍼지고 있다. 대구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이모(36) 씨는 손님 공지나 예약 변경 안내를 보낼 때 챗GPT를 자주 사용한다. 이 씨는 "맞춤법이나 비문 걱정을 안 해도 되고 말이 훨씬 정리돼서 손님들이 이해하기 편한 것 같다"며 "예전에는 공지 하나 쓰는데도 스트레스였는데 지금은 훨씬 수월하다"고 말했다. AI는 단순히 문장을 다듬는 수준을 넘어 관계 속 거리 조절까지 돕는다. 너무 차갑지도, 너무 감정적이지도 않게 표현을 정리해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감정 노동의 외주화"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직접 표현하며 생기는 갈등과 피로를 AI가 완충해준다는 의미다. ◆ "AI 판사님, 누가 잘못했나요" 그런가하면 AI는 인간 관계의 '중재자' 역할도 맡고 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부부싸움 뒤 챗GPT를 함께 활용했다는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됐다. 작성자는 "별것 아닌 걸로 싸웠는데 객관적인 시각이 궁금했다"며 "상담전문의·부부심리 전문가 역할을 부여한 뒤 같은 세션에서 아내와 각자 입장을 입력했다"고 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두 사람 모두 AI의 분석을 읽은 뒤 "서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용자는 "논쟁이 붙으면 챗GPT에게 판사 역할을 시킨다"며 "화가 막 나다가도 AI가 아내 편을 들면 이상하게 수긍하게 된다"고 적었다. 왜 사람들은 인간보다 AI의 판단을 더 쉽게 받아들이는 걸까. 전문가들은 AI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사람은 편을 들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지만, AI는 '중립적'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용자들이 챗GPT를 사용할 때 "객관적으로 봐줘", "중립적으로 판단해줘" 같은 표현을 자주 입력한다. 한 상담심리 전문가는 "AI는 감정적으로 맞서지 않고 말을 끊지도 않는다"며 "사용자 입장에서는 공격받는 느낌없이 자기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 학계에서도 AI의 상담 능력은 이미 인간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경성대학교 경제금융물류학부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 〈중소기업 애로상담에 대한 생성AI의 튜링 테스트〉에 따르면, 인간 전문가와 AI의 상담 답변을 두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한 결과 참가자들은 둘을 거의 구별하지 못했다. 연구진은 "평가자들은 오히려 인간 전문가(13.9%)보다 생성AI의 답변이 더 만족스럽다(32%)고 평가했다"며, "생성AI가 자연스러운 대화문을 생성해 상담 분야에서 인간 전문가를 충분히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 인간 특유의 표현들 사라질수도 문제는 AI를 거친 이러한 말들이 점점 인간의 실제 대화를 대체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요즘 온라인에서는 "AI 냄새 나는 말투"라는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지나치게 정중하고, 논리적이고, 매끈한 문장들이다. 사과문도, 연애 답장도, 업무 메일도 점점 비슷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제 대화하기 전 먼저 AI에게 검수를 맡긴다. 감정적인 표현은 순화되고 갈등은 완충된다. 관계는 부드러워질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 특유의 날것의 감정과 서툰 표현 역시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간단한 대화에도 AI를 활용한다는 김범석(25) 씨는 "AI 도움을 받으면 깔끔한 문장이 나오긴 하지만, 어느 순간 내 언어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며 "하도 도움을 받다 보니 이제는 짧은 문장도 혼자 잘 못 쓰겠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생성형 AI가 인간관계를 보조하는 도구가 될 수는 있지만, 감정 표현 자체를 대신하기 시작하면 관계 능력 자체가 약해질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한다. 직접 부딪히고 표현하며 조율하는 과정 역시 인간 관계의 중요한 부분인데, AI가 갈등을 줄여주는 순기능은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인간 스스로 감정을 표현하고 조절하는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2026-06-19 13:18:00
정청래·장동혁 전후 처리는 어떻게? 정치인 주가 고점은 언제? [시사뒷담]
선거가 끝나면 늘 흔들리는 자리가 있다. 전쟁을 이끌었던 정당 대표 자리다. 승장과 패장의 구분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이겨도 성적표가 기대에 못 미치면 지탄의 대상이 된다. 반대로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평가도 있다. 6.3 지방선거 직후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를 둘러싼 평가도 그런 문법 안에 놓였다. 정 대표에게는 기대보다 결과가 아쉬웠다는 책임론이, 장 대표에겐 명백한 패배에 대한 책임론이 따라붙는다. 구체적으로 보면 정 대표는 서울시장 선거 패배가 치명적이고, 장 대표는 선거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여론에 휩싸여 있다. 지선보다 더 시선이 향한 부산 북갑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선 둘 다 패배해 책임론을 사이좋게 공유하고 있다. 즉 둘 다 패장이 된 꼴인데, 이에 따라 중도 사퇴 압력도 강하게 나오고 있다. 둘 다 자기 정치 인생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와 있으니, 불명예로 내려오기 정말 싫을 거다. 그나마 정 대표는 애초 여름 전당대회가 예정돼 있어 그때까지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면 되지만, 지난해 8월 선출된 장 대표는 2년 임기가 절반 넘게 남아있다. 대한민국 정치사는 패장에게 냉정했다.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 수장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고, 정치 주가는 고점을 찍은 후 우하향 곡선을 그렸다. 어떤 이는 동전주처럼 존재감이 쪼그라들었고, 어떤 이는 사실상 상장폐지됐다. ◆JP 정계은퇴=상장폐지 한국 정치에서 선거 패배 책임론이 정당 수장의 주가를 단숨에 꺾은 사례가 적잖다. 대표 사례가 김종필(JP)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참패했다. '3김 시대'의 한 축이었던 JP는 선거 성적표를 받아든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에게 총선 패배는 단순한 일시 조정장이 아니었다. 그동안 쌓은 시가총액이 0원이 되는, 상장폐지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충청권 기반 정당의 쇠락과 3김 시대의 폐막이 한꺼번에 겹친 점에서 가장 임팩트가 큰 장면이었다. ◆洪 하락장 시작은 2018년? 홍준표(洪) 자유한국당 대표가 치른 2018년 7회 지선도 대표 사례다. 자유한국당은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TK(대구경북)만 겨우 지키며 참패했고, 洪은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물론 洪의 정치 주가는 이후 몇 차례 꿈틀했다. 21대 총선 대구 수성을 무소속 당선 후 국민의힘 복당, 대선 경선 참여, 대구시장 등으로 수차례 재상장에 가까운 반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2017년 19대 대선 후보로 나선 당시의 주가는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2018년 7회 지선 참패를 계기로 장기 하락 차트를 그렸을 뿐이다. 그에게 향후 다시 반등의 기회가 올까? 온다고 해도 2017년 대선 본선에 출전했을 때의 고점을 뚫는 신고가를 쓸 수 있을까? ◆정몽준 '대권주' 급락한 날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의 2010년 5회 지선도 빼놓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 중간평가 격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민주당계 선전'이라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얻었고, 정몽준 대표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때 대권 잠룡과 7선 의원이라는 육중한 타이틀 역시 함께 무게감이 떨어졌다. 정몽준이라는 종목의 주가가 하락장에 접어들었음을 본인은 물론 당도 감지하지 못했던 걸까? 그는 4년 뒤인 2014년 6회 지선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해 낙선했고, 이게 그의 마지막 선거가 됐다. ◆손학규의 처참한 시장 퇴출 손학규 민생당 상임선대위원장의 2020년 21대 총선은 더욱 처참한 경우다. 선거에서 민생당은 원내 의석을 단 1석도 확보하지 못했고, 손 위원장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한때 대권주자로 거론됐던 정치인이 제3지대 실험의 최전선에 섰으나, 결과는 시장에서 외면받은 종목처럼 차가웠다. 지금 민생당도, 손학규도 신문 정치면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강매도 압력 정청래·장동혁 운명은? 4개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다. 선거 패배가 그날 하루의 악재가 아니라, 정당 수장의 정치 주가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당 대표 자리는 그간 여러 정치인에게 최고점이었고, 이와 함께 선거 직후면 매도 압력이 가장 강하게 몰리는 자리였다. 정청래 대표가 맞닥뜨린 상황은 좀 복잡하다. 민주당이 전체적으로 승리했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서울시장 같은 핵심 승부처를 놓쳤으니, 마치 투자자들이 실적의 총액보다 영업이익의 질을 따지듯 선거 성과의 내용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압승을 기대한 지지층이 "왜 더 크게 이기지 못했느냐"고 묻는다면, 특히 큰 주목을 받은 부산 북갑 선거에서 스스로 자초한 '오빠 논란'을 같은 당 하정우 후보의 낙선과 연결짓는 주홍글씨가 굳어지면, 공로패보다는 패장에 대한 손가락질이 먼저 나올 수밖에 없다. 장동혁 대표는 이번 선거에서 제1야당 대표로서 방어력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패장이라는 수식이 점점 짙게 붙고 있고, 이는 당내에서 "이 종목을 계속 보유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도출시킬 수밖에 없다.
2026-06-13 13:30:00
우리 동네 사람들의 1집 앨범이자 유일한 앨범 '하나'(1994)는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 보석처럼 숨겨져 있는 음반이다.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건 아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묘한 감칠맛을 내는 작품이다. 지난 20세기 한국인의 정서와 진하게 결합해 시대를 풍미한 포크를 바탕에 두면서도, 보사노바와 재즈의 리듬, 그리고 코러스의 재치가 자연스럽게 버무러져 있다. 기타는 가볍게 흐르면서도 중심을 잡고, 리듬은 분주히 살랑이며, 젊은 구성원들의 목소리는 앨범 커버에도 그려져 있는 동네 골목 풍경처럼 푸근히 포개어진다. ◆강승원이 만든 음악 동네 이 앨범을 총괄하고 조율한 강승원이라는 이름 세 글자로 글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훗날 김광석의 대표곡이 된 '서른 즈음에'를 만든 싱어송라이터다.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79학번 출신인 강승원은 모교 창작곡 동아리 '에밀레'에서 활동한 걸 시작으로 뮤지션의 길을 걷고 있다. 또한 KBS 2TV 간판 심야 음악 프로그램(현재 '더 시즌즈')의 음악감독으로도 오랜 기간 활동해왔다. 1992~94년 KBS에서 노영심이 진행하던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에 참여한 게 출발점이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강승원을 중심으로 유준열(동물원 멤버), 심재경(에밀레 출신, 2014년 고향 경북 안동을 배경으로 한 1집 '낙동연가' 발표), 김은조, 고은희, 김혜연(에밀레 출신이자 아내) 등이 함께한 음악 공동체였다. 이름만 봐도 거창한 밴드나 기획형 그룹과 거리가 멀다. 팀명 그대로 비슷한 결을 가진 이웃 음악인들이 모여 자신들의 생활과 감정을 노래했다. 그래서 이 앨범은 힘을 과시하는 음반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빼서 오래 남는듯하다. '뜸드 뜸드' '미안해' '지금의 내 나이'는 딱 요즘 늦봄과 초여름 사이 그늘 밑에 앉아 듣기 좋은 곡들이다. 평온하지만 심심하지 않고, 담백하지만 밋밋하지 않다. 슬픔인지 권태인지 알 수 없는 갱년기 같은 일상, 잊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놓은 미안함의 감정, 나이듦에 대한 알딸딸한 소회 등의 주제는 일기 낭독회마냥 정감을 풍긴다. ◆'서른 즈음에'의 또다른 출발점 이 앨범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김광석 하면 떠올리는 곡이기도 한 '서른 즈음에'다. 강승원이 작사·작곡했고, 우리 동네 사람들이 먼저 불렀다. 다만, 김광석이 곡을 받아 4집에 수록해 반년 먼저 발표하면서(김광석 4집은 1994년 6월, 우리 동네 사람들 1집은 같은 해 12월 발표) 대중에겐 김광석의 노래로 깊이 각인돼 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독백의 뉘앙스라면, 우리 동네 사람들 버전은 좀 더 공동체적이다. 다시 말해 혼자 늙어가는 노래라기보단, 계절의 흐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로 들린다. 그 차이가 이 앨범의 성격도 잘 드러낸다. 타이틀곡인 셈인 '야!'도 강승원의 작품이다. 동네 동산에 올라 곡 제목처럼 소리친다는 특별할 것 없는 가사의 노래지만, 잔잔한 바다 같은 앨범에서 마치 물 위로 거듭해 솟구치며 인사를 건네는 고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부드럽게 시작하지만 반복되는 브릿지와 후렴구에서 감정을 확 분출하는 롤러코스터스러운 특징이다. 웬만한 록 장르의 격정 못잖다. 겉은 느슨해 보이지만 속은 치밀하고 단단한 전개를 설계한, 외유내강의 노래다. 이 앨범이 단순한 포크 음반에 머물지 않는 이유를 보여준다. ◆웰컴 투 강승원 월드 강승원은 음악이 등장하는 골목(우리 동네 사람들)이든 무대(음악 프로그램)든 그 바탕을 만드는데 집중해온 음악인이다. '서른 즈음에'의 작가였고, 초코파이 CM송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로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린 음악 마케터였으며, '이소라의 프로포즈' '윤도현의 러브레터'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거쳐 현재 방송 중인 더 시즌즈 시즌9 '성시경의 고막남친'까지 계보가 이어지는 KBS 심야 음악 프로그램의 베테랑 선장이다. 마침 그는 지난 5월 8일 제6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더 시즌즈 음악감독으로 보여준 성과를 인정받아 방송부문 예술상을 수상했다. 이 앨범은 강승원이라는 음악인, 다시 말해 싱어송라이터이자 음악감독인 그의 세계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보여주는 초기 설계도로도 읽을 수 있다. 초기작부터 범상치 않았다. 비록 시끄럽게 시대를 대표하진 못했지만, 누군가에겐 오래도록 그늘 아래 휴식처럼 남을 음반이다. 그가 음악감독을 맡은 더 시즌즈 역시 수많은 현대인의 심야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지 않은가.
2026-06-12 12:12:00
멕시코·체코·남아공, 북중미 월드컵 A조에 담긴 한국 축구사 [금주의 이슈]
2026 북중미 월드컵 A조에서 대한민국이 전개해야 할 이야기를 승점표로만 따지면 꽤 단순해진다. 체코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승점을 따고, 개최국 멕시코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최소한 버티고,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과의 세 번째 경기에서 승점을 얻으며 다음 라운드인 32강 토너먼트를 안정감 있게 준비하는 지혜도 발휘해야 한다. 그런데 지도를 펼치면 이야기는 좀 더 확장된다. 멕시코는 한국의 오래된 축구 대결 상대이자 한국 월드컵사의 출발점이다. 멕시코는 북중미 최강권의 축구 강국이지만 월드컵 우승 후보군으로 분류되는 절대 강호는 아니기에, 한국이 종종 어깨를 견주는 승부를 만들기도 했다. 체코는 비교적 적은 조우 속에서도 한국 축구의 유럽 경쟁력 대련 상대라는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이번엔 연습이 아닌 실전이다. 남아공은 대표팀 자체는 낯설지만 한국 축구의 첫 원정 16강 기억을 품은 지명이라 의미 부여를 할 만한 상대다. ◆멕시코의 두 얼굴 멕시코는 한국 월드컵사에서 너무나 익숙한 상대다. 이번에 조별리그에서 맞붙으면 월드컵 본선에서만 세 번째 조우가 된다. 벨기에, 독일, 스페인, 우루과이와 함께 한국의 월드컵 최다 대결 상대 그룹에 들어가는 셈이다. 월드컵을 포함한 A매치 전적은 한국이 열세다. 2025년 평가전 2대2 무승부까지 포함해 4승 3무 8패를 기록했다. 자주 만났고, 때로는 좋은 장면도 만들었지만, 객관적 지표는 멕시코의 우세를 가리킨다. 첫 기억은 의외로 찬란하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은 멕시코를 5대3으로 꺾었다. 해방 후 국제무대에 나선 한국 축구가 세계에 이름을 알린 초기 장면이다. 멕시코와의 인연은 이렇게 승리로 시작됐지만, 월드컵에선 이야기가 달라졌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한국은 하석주의 왼발 프리킥 골로 1대0으로 앞서나갔지만, 곧바로 하석주가 퇴장당했고 수적 열세 속에 경기는 1대3 역전패로 마무리됐다. 한국 축구사에서 가장 강렬했던 '환희→추락'의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멕시코는 한국에 아픔을 남겼다. 한국은 페널티킥을 허용하고 역습에 실점하며 끌려갔고, 손흥민의 왼발 중거리슛으로 한 골을 만회하는 데 그쳐 1대2로 졌다. 축구 세대가 20년이나 차이 나는 두 월드컵 경기는 공통점이 있다. 멕시코는 한국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느끼게 만들면서도 결국 승점은 내주지 않은 상대였다. 그런 노련한 면모가 지금 멕시코에게도 있다. ◆기록과 기억의 차이 멕시코가 한국 축구에 패배의 이름으로만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주목할 사례가 있다. 8패도 4승도 아닌 3무 중 한 경기다. 2002년 북중미 골드컵 8강전이다. 한국은 북중미카리브축구연맹 대회에 초청팀으로 참가해 멕시코와 0대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이겨 4강에 올랐다. 공식 기록상으로는 무승부지만, 대회 결과상 한국이 멕시코를 넘어선 경기였다. 그것도 북중미에서. 반대로 생각해보자. 월드컵도 아닌 북중미 대회에서 대륙 최강권 멕시코는 8강 탈락이라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이 경기는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둔 대표팀이 북중미의 강호와 부딪히며 버티는 법을 익힌 무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에게 멕시코 축구는 두 개의 층위로 읽힌다. 기록의 층위에서 한국은 A매치 전적 열세, 월드컵 전적 전패다. 그러나 기억의 층위는 결이 좀 다르다. 1948년 첫 승리, 1998년 하석주가 남긴 교훈, 2002년 골드컵 승부차기 승, 2018년 손흥민의 만회골, 그리고 가장 최근 승부인 2025년 평가전 무승부가 있다. 이런 까닭에 2026 북중미 월드컵 멕시코전은 단순한 조별리그 두 번째 경기가 아니다. 한국 축구가 오랜 기간 마주한 북중미 문지기를 다시 만나는 싸움이다. ◆한국 축구가 다시 시작된 땅 멕시코 얘기를 좀 더 해보자. 개최국 멕시코는 상대이기 전에 장소이기도 하니까.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 무대에 본격적으로 복귀한 곳이 바로 1986 멕시코 월드컵이다.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긴 공백을 보낸 한국 축구는 1986년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 불가리아, 이탈리아와 한 조에 묶였다. 아르헨티나는 디에고 마라도나를 앞세워 결국 트로피를 들었고, 이탈리아는 직전 대회 챔피언이었다. 이렇게 거친 조에서 한국은 1무 2패로 탈락했다. 아르헨티나와 1대3, 불가리아와 1대1, 이탈리아와 2대3의 스코어를 기록했다. 숫자엔 담을 수 없는 한국 월드컵사의 첫 장면들이 있다. 박창선은 아르헨티나전에서 한국 월드컵 본선 첫 골을 넣었다. 불가리아전 무승부로 한국은 월드컵 본선에서 처음으로 귀한 승점 1점을 얻었다. 이탈리아전 1골 차 패배는 세계 정상급 팀을 상대로 끈질기게 따라붙어본 경기였다. 멕시코는 한국 축구가 월드컵이라는 무대의 호흡을 처음 배운 장소였다. 이후 한국은 마치 경제성장사처럼 축구 실력도 키운 걸까. 불과 16년 뒤 한국은 대회 4강에 올랐다. 1986년 멕시코 대회는 한국 축구의 월드컵 본선 연속 진출 행진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2026 북중미 월드컵까지 한국은 11회 연속 진출 기록을 쓴다. ◆한국은 2차전이 약하다? 다만 멕시코전에는 또 하나의 불편한 숫자가 따라붙는다. 한국이 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2002 한일 월드컵부터 21세기 6개 대회 기록만 따지면, 미국·프랑스와는 비겼고 아르헨티나·알제리·멕시코·가나엔 졌다. 2무 4패다. 같은 기간 조별리그 1차전에서 3승 2무 1패, 3차전에서 3승 1무 2패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유독 2차전의 성적이 무겁다. 이유를 단정하긴 어렵지만, 2차전은 첫 경기 결과에 따라 계산이 가장 복잡해지는 시점이다. 첫 판을 이기면 무리하지 않으려 하고, 비기거나 지면 반드시 승점이 필요해지며, 그 과정에서 한국은 흔들리고 무너진 경우가 많았다. 이번 대회 멕시코전도 바로 그 맥락에서 열린다. 개최국 이점까지 더한 강한 상대를 만나는 경기이면서, 한국 축구가 풀지 못한 '월드컵 2차전 무승'의 징크스를 대면하는 경기다. ◆체코라는 시험지 A조 첫 상대 체코는 승점 계산의 출발점이면서 유럽 중견급 강호를 상대로 대한민국이 대회 경쟁력을 처음 확인하는 시험지도 된다. 한국은 체코와 그간 3차례 A매치를 펼쳐 1승 1무 1패로 팽팽한 역대 전적을 기록 중이다. 1998년 서울에서 2대2로 비겼고, 한일 월드컵을 1년 앞둔 히딩크호의 2001년 원정에서는 0대5로 대패했다. 이어 2016년 체코 프라하에서 2대1로 이겼다. 3차례 모두 친선전 내지는 연습경기 형식이라 대회에서 작정하고 맞붙는 건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체코는 앞선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엔 1962 칠레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하는 등 유럽 강호의 면모를 보였다. FIFA 랭킹 40위권인 지금은 그래도 여전히 강한 체격, 조직적 압박, 세트피스, 실용적인 경기 운영이 강점인 팀이다. 결국 월드컵 본선보다 통과 자체가 까다롭다고 평가받는 유럽 예선을 뚫고 올라온 팀이기도 하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개최된 월드컵 첫 경기에서 한국은 모두 4차례 만난 유럽 팀을 더는 막연한 공포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폴란드와 그리스를 꺾고 러시아와 비기면서 유럽 중견급 팀을 상대로 첫 판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쌓았다. 그렇지만 2018 러시아 월드컵 때 스웨덴전 패배가 보여주듯 체격 우위와 조직력으로 촘촘한 수비 블록을 짠 팀과의 한 골 싸움은 여전히 조심해야 할 지점이다. ◆낯선 남아공, 3차전의 무게 3차전 상대 남아공은 체코보다 더 낯선 이름이다. 성인 남성 A대표팀 기준으로 한국과 남아공은 아직 맞붙은 적이 없다. 그래서 남아공 전은 상대 선수와 팀 컬러 등에 대한 정보력이 더 중요해 보이는 경기다. 물론 남아공이라는 이름 자체는 한국 축구에 낯설지 않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은 한국이 원정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오른 대회였다. 한국 축구는 비록 16강전에서 루이스 수아레스가 활약한 우루과이에 1대2로 석패했지만, 안방(2002 한일 월드컵)이 아니더라도 토너먼트에 진출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어느 팀에게나 3차전은 토너먼트 진출 당락이 좌우되는 경기인데, 한국은 최근 기록과 기억 모두 좋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을 경기 막판 황희찬의 극적 결승골로 2대1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선 강호 독일을 손흥민의 투혼 가득한 쐐기골로 2대0으로 제압하며 비록 16강엔 오르지 못했지만 유종의 미를 거뒀다. 다만 이런 흐름을 타기 앞서 2014 브라질 월드컵 3차전에선 벨기에에 무기력하게 0대1로 지며 최종 1무 2패의 조별리그 성적으로 '실패한 월드컵'이라는 수식을 만든 바 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당시 사령탑을 맡았던 홍명보 감독이 이번 대회에서 다시 지휘봉을 잡게 됐다. 12년 전 결과에 대한 절치부심(切齒腐心)과 최근 2개 대회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함께 요구되는 상황이다.
2026-06-12 09:30:00
리센느 '거제 야호'가 던진 질문 "지역은 어떻게 브랜드가 되는가?" [금주의 이슈]
"거제! 야호~.(거제! 안녕~.)" 걸그룹 리센느 멤버 미나미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경남 거제를 뜻밖의 방식으로 주목시켰다. 일본 국적 멤버 미나미는 거제 출신 멤버 원이와 함께 출연한 유튜브 콘텐츠에서 원이가 자신의 갸루(개성 강한 화장·패션을 선호하는 일본 젊은 여성 문화) 콘셉트를 지적하며 "너 지금 이러고 거제 가잖아? 거제시민들한테 혼나"라고 말하자 임기응변으로 "거제! 야호~."라고 대답했고, 이게 곧장 인터넷 밈이 돼 유행 중이다. '야호'는 일본 젊은이들이 쓰는 '안녕'과 같은 가벼운 인사말. 현재 '거제 야호'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틱톡 등 SNS 세상에서 짧은 영상(숏폼) 문법을 타고 퍼지며 거제라는 지역명을 젊은층의 검색어와 농담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거제시가 이걸 놓치지 않았다. 지난 5월 22일 리센느를 거제시 홍보대사로 위촉한 것. 지역명이 밈이 되고, 밈이 지역 홍보의 소재가 되는 주목할만한 사례가 작성되고 있다. 가령 '갸루와 거제에 왔습니다(거제 1편)' 유튜브 영상은 공개 2주 만인 6월 6일 기준으로 조회수 590만회를 넘겼다. 참고로 거제시 유튜브 동영상 중 최다 조회수 기록이 130만회다. ◆'여수 밤바다' 이후의 여수 거제시는 '거제 야호'의 인기를 바탕으로 급격히 커진 지역에 대한 관심을 여행(관광) 활성화와 특산품 소비, 그리고 지역 브랜드 향상으로 전환시키려 하는데, 그 속도가 관건이다. 밈은 빠르게 번지지만 또한 빠르게 식기 때문이다. 지자체의 역할은 그 짧은 주목을 최대한 붙잡아 브랜드로 형성하는 일이다. 거제가 목표로 삼을 만한 첫번째 사례는 전남 여수다. 가수 버스커버스커가 2012년 발표한 곡 '여수 밤바다'는 지역 이미지 자체를 바꾼 대표적 대중가요 사례로 꼽힌다. 원래 풍부한 해양 관광 자원을 갖고 있던 여수는 노래가 뜬 후 '낭만적인 밤바다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굳혔다. 이후 여수시는 낭만버스킹, 낭만포차, 야간시티투어 같은 콘텐츠로 그 이미지를 관광상품화했다. 노래가 감성을 만들고, 지자체가 그 감성을 관광산업으로 번역한 셈이다. 실제로 여수는 2012년 여수 세계 박람회(여수 엑스포) 개최 전만 해도 연평균 방문객이 700만명 안팎 수준이었지만, 박람회를 개최하고 여수 밤바다가 히트하자 2015~2017년 3년 연속 연 방문객 1천300만명을 넘기며 관광도시의 체급을 높였다. ◆'효리네 민박'이 띄운 제주살이 제주 애월과 소길리가 누렸던 '효리네 민박'(JTBC 예능프로그램) 효과도 빼놓을 수 없다. 여수가 하나의 노래가 도시 전체의 정서를 만든 경우라면, 제주는 유명인의 생활 장면이 특정 생활권의 이미지를 바꾼 경우다. 애월과 소길리는 통상의 관광지라기보다 방송 속 이효리·이상순 부부의 일상을 동경해 '살아보고 싶은 동네'의 감각으로 소비됐다. 이는 실제로 제주 내국인 관광객 증가와 음식업·숙박업 파급 효과를 만들었다. 한국은행 제주본부는 효리네 민박 방송 기간이었던 2017년 6월~2018년 5월 제주 내국인 관광객이 100만7천명 증가한 것으로 파악, 생산 유발효과 6천251억원, 부가가치 유발효과 3천34억원, 취업 유발효과 8천693명 등의 경제 효과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지방소멸 시대에 지자체가 원하는 관광산업 부흥의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관광산업은 더 이상 명승지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특정 장소에 가야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이야기와 이미지, 그리고 그곳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경험을 원한다. ◆노래가 남긴 지역의 기억 사실 대중가요가 지역을 각인시키는 사례는 꾸준히 발생했다. 경북 안동은 진성의 '안동역에서'(2008년 안동사랑노래 버전도 있지만 2012년 편곡 버전이 크게 히트) 효과를 봤다. 안동역 앞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노래는 안동이라는 지명을 오래된 기다림과 애틋함의 이미지로 묶었다. 덕분에 안동은 '양반의 고장' '정신문화의 수도'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 등 진지한 이미지만 가득하던 것에서 벗어나 애절한 로맨스의 매력을 곁들였다. 김태희의 '소양강 처녀'(1970)가 먼저 닮은 효과를 냈다. 노래는 소양강을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대중적 기억을 남겼고, 강원 춘천은 소양강 처녀상과 노래비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경북 포항은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1993)를 지역 홍보와 농특산품 공동브랜드에 활용했다. 노래 제목이 바다 도시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걸 넘어 특산품 이름으로 확장된 경우다. 이런 효과가 같은 강도로 지속되는 건 아니다. 노래의 인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식고, 세대가 바뀌면 체감은 더욱 약해진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지역명이 들어간 가요의 힘은 폭발력보다 잔존력에 있다. 한 번 대중의 입에 붙은 지명은 아주 천천히 옅어질 뿐 쉽게 증발하지 않는다. 이 밖에도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1989),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 밤'(1988), 문성재의 '부산 갈매기'(1982)처럼 지명이 들어간 노래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역 이미지를 만들었다. ◆공무원도 지역 띄운다 흥미를 부르는 부분은 이제 이런 효과가 대형 연예인이나 인기곡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충북 충주시에서 '충주맨'이라는 유튜브 콘텐츠 내지는 캐릭터를 성장시켰던 김선태 전 주무관은 공공기관 홍보의 문법을 바꾼 인물이다. 충주시 공식 유튜브 '충TV'는 딱딱한 시정 홍보 대신 B급 감성과 빠른 편집, 공무원 캐릭터를 앞세운 디테일로 전국적 인지도를 얻었다. 충주맨을 맡았던 김 전 주무관의 영향력은 구독자 수로도 확인됐다. 그의 사직 소식이 전해지기 직전 충주시 공식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97만명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 흐름은 다른 지역으로 번졌다. 경남 양산시는 하진솔 주무관 등이 출연한 '진솔아 나를 믿니?' 등의 숏폼 콘텐츠로 주목받았다. 양산시 SNS 영상들은 누적 조회수 수천만회를 넘기며 공무원 홍보 콘텐츠가 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경기 양주시는 정겨운 주무관의 일명 '진주무관' 캐릭터를 부각시켜 지역 축제와 특산품, 시정 홍보를 과감한 패러디 콘텐츠로 풀어냈다. 이들 모두 '공무원 인플루언서형 지역 브랜딩'이라는 새 유형을 제시했다. ◆거물 스타만 답은 아니다 BTS(방탄소년단) 사례는 이 흐름의 정반대편에 있다. BTS는 여느 스타들과 체급이 다른 글로벌 아이돌이다. 멤버들의 고향은 존재 자체로 관심을 얻고, 뮤직비디오와 앨범 재킷 촬영지는 팬덤의 순례지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거제 야호'가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리센느는 소규모 팬덤을 가진 이른바 중소 기획사 아이돌, 중소돌이다. 그런데도 유튜브 콘텐츠 속 짧은 대화가 밈이 되자 거제라는 지명이 퍼졌고, 지자체는 이를 공식 홍보를 위해 끌어왔다. 지역에 유명세를 불어넣는 힘이 꼭 거물의 이름값에서만 나오지 않는 시대가 됐다는 얘기다. 즉, 중소 아이돌도, 공무원도, 주민 누군가의 우연한 한마디도 지역명을 전국적 밈으로 만들 수 있다. 지역 브랜딩의 문법은 '누가 유명한가'에서 '어떤 말이 반복되고, 어떤 콘텐츠가 따라하기 쉬운가'로 이동 중이다. ◆관심을 소비와 체류로 여기서 비거주자의 지역 방문 활성화, 즉 관광 및 생활인구 확대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2024년 펴낸 '인구감소지역의 여가 소비 현황과 과제'에 따르면 2022~2023년 인구감소지역 전체 소비 지출에서 비거주자의 소비가 40% 이상을 차지했다. 연구원 측은 "일반 지역과 비교해 인구감소지역은 비거주자가 방문해 지출하는 소비금액이 지역 전체 소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인구감소지역 활성화에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여행과 스포츠를 목적으로 방문한 비거주자의 소비가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주목한 것이다. 연구원이 사례로 언급한 생활인구 확대 수단이 지역 축제와 스포츠 대회, 전지훈련 유치라면, 이젠 여기에 대중문화·디지털 콘텐츠를 계기로 한 방문 소비도 함께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수 밤바다'와 '효리네 민박'은 노래와 방송이 지역 이미지를 바꿔 방문 욕구를 키운 사례였고, '충주맨'은 지자체 생산 콘텐츠가 지역명을 전국적 브랜드로 만들어 호감을 높인 사례였다. 이제 막 나온 '거제 야호' 역시 아직 성과를 평가할 단계는 아니지만, 아이돌 콘텐츠에서 출발한 밈이 타지 사람들의 우리 지역에 대한 관심으로 번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관건은 이런 관심을 실제 여행 동선, 체류 경험, 소비 상품 등으로 전환시키는 지자체의 실행력이다. 지방소멸 시대의 지자체는 출생률 회복 같은 대반전과 대기업 유치 같은 큰 호재가 정주인구를 늘려주길 마냥 기다릴 수만 없다. 지역의 이름이 우연히 대중의 입에 오르는 순간을 포착하고, 그걸 방문·체류·소비와 재확산의 구조로 연결해야 먹고살 수 있는 시대가 됐다.
2026-06-06 14:25:00
[내 친구 AI] "주식 과외 좀 해줘"…AI 찾는 개미들
〈strong〉〈편집자주〉 "아~ 이거? AI가 한 거야." 요즘은 증명사진도, 발표 자료도, 상사에게 보낼 메시지도 그렇게 만들어진다. 어느새 AI는 사람들의 일상과 관계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번 연재는 어려운 기술 설명보다, 그렇게 AI와 함께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들의 변화를 기록한다. 참고로 해당 지면의 사진과 그림 역시 AI가 만든다. 다만 사람을 만나고, 질문을 던지고, 끝까지 문장을 고민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 기자의 몫이다.〈/strong〉 "이건 왜 흔들린 거야?", "내 성향에는 이런 종목이 맞아?" 대구 동인동에 사는 주부 김은희 씨(가명·59)는 요즘 새벽마다 스마트폰으로 주식 차트를 캡처해 AI에 올린다. 빨간 동그라미와 메모가 빼곡한 화면 속에는 '갭 하락', '힘겨루기', '저점' 같은 단어들이 적혀 있다 늦은 새벽에도 AI는 곧바로 답을 내놓는다. "거래량이 줄면서 조정받는 흐름입니다", "장기 투자 성향이면 변동성이 큰 종목보다 ETF가 더 맞을 수 있습니다". 김 씨는 그 답변을 노트에 옮겨 적으며 다시 차트를 들여다본다. 코스피가 연일 연고점을 갈아치우고 있다. 인공지능(AI) 열풍과 반도체 상승세가 이어지면서 "이번에 돈 벌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주식 시장이 다시 뜨거워지자 투자 공부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유튜브나 증권방송 대신, 생성형 AI를 '주식 과외 선생님'처럼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 "주식 용어 덜 무서워져" 김 씨는 주식 초보였다. 차트도, ETF도, 배당도 모두 낯설었다. 반도체나 재무제표 같은 용어가 나오면 무슨 말인지 감조차 잡기 어려웠다. 하지만 챗GPT는 질문 수준에 맞춰 설명을 반복했다. "ETF가 뭐야?" "배당은 언제 들어와?" "삼성과 하이닉스 차이가 뭐야?" "왜 AI 시대에 전력이 중요해?"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챗GPT는 단순히 종목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HBM(고대역폭메모리)부터 데이터센터, 반도체, 전력 산업 흐름까지 하나의 흐름처럼 연결해 설명했다. 그는 "예전엔 주식 용어 자체가 무서웠는데 지금은 조금씩 이해하는 느낌"이라며 "사람한테 물어보면 민망한 질문도 AI한테는 계속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생성형 AI의 가장 큰 특징은 '대화'다. 검색엔진처럼 키워드를 입력하고 결과를 읽는 방식이 아니라, 이해될 때까지 질문을 이어갈 수 있다. 실제로 김 씨는 "틀리면 다시 설명해달라고 하고, 내 생각과 맞닿을 때까지 계속 질문했다"고 말했다. 사실 김 씨는 과거 주식 리딩방 사기를 당한 경험이 있다. 이후 한동안 주식 자체를 멀리했다. 하지만 챗GPT와 대화를 이어가며 조금씩 달라졌다. 김 씨는 처음에는 "정말 맞는 말인가" 의심하며 질문했지만, 반복적으로 공부하면서 최소한 왜 오르고 왜 떨어지는지를 스스로 생각하게 됐다. 그는 "예전에는 그냥 남 따라 샀다면 지금은 흐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된다"며 "지금은 적어도 왜 사는지는 알고 들어간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생성형 AI가 일부 사용자들에게 단순 정보 제공을 넘어 '심리적 진입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기존 투자 시장이 전문가 중심의 폐쇄적인 언어로 움직였다면, AI는 초보 투자자들도 질문을 반복하며 시장 흐름을 이해했다고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 내 성향에 맞는 종목…맹신은 금물 그리고 이러한 질문과 답변은 휘발되는 게 아니다. 생성형 AI는 이전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사용자의 관심사와 투자 성향을 조금씩 축적해간다. 마치 개인 과외처럼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과거 개인 투자자들의 공부 방식은 대부분 일방향이었다. 유튜브, 증권방송, 인터넷 카페, 종목 추천방, 지인 추천 등에 의존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생성형 AI는 계속 질문을 주고받으며 이용자의 이해 수준과 관심사를 따라간다. "네 성향에는 OO종목이 더 맞을 것 같아" AI는 질문자의 투자 성향까지 고려하는 듯한 답변을 내놓는다. 하지만 생성형 AI를 맹신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종화 동의대학교 e비즈니스학과 교수는 "생성형 AI가 논리적인 답변을 내놓더라도, 언어모델 특유의 확률적 성격 때문에 재무 지표나 리스크 지표 같은 정량 분석에 있어서는 여전히 신뢰도 확보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신 정보가 반영되지 않거나 사실이 아닌 정보를 생성해 내는 '환각(Hallucination)'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전문가들은 생성형 AI의 답변을 객관적인 정답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같은 질문이라도 어떤 방식으로 묻느냐에 따라 답변 방향과 결론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뉴스나 산업 전망처럼 해석이 필요한 정보는 AI가 그럴듯하게 정리하더라도 실제 시장 흐름과 다를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AI를 '투자 판단을 돕는 참고 도구'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정동균 부경대학교 경영학 박사는 "현재의 AI 기반 분석 결과는 훌륭한 보조적 참고 자료로서 유용하다"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시장 상황에 대한 해석적 판단과 리스크 민감성에 대한 인간(투자자)의 분석이 병행되어야만 실효성 있는 투자 전략으로 발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2026-06-05 14:28:00
6.25·여말선초·후삼국 역사로 읽는 서울·대구·부산 지방선거 [금주의 이슈]
6·3 지방선거의 여러 싸움터 중 전국적 관심이 집중되는 곳을 선별하면 서울시장 선거, 대구시장 선거, 그리고 부산 북갑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맨 앞에 놓인다. 서울시장 선거는 수도권 민심의 중심축을 묻는 선거다. 대구시장 선거는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이곳의 오래된 정치적 성곽이 얼마나 단단한지 또 어디까지 흔들릴 수 있는지 묻는 한판이다. 부산 북갑 선거는 정권심판론과 그 반대 여론이 이례적으로 여의도(국회) 멀리서 충돌하고 있는 전장이다. 그 구도만 따지면 역사책 속에 비유할 만한 상황들이 있다. 서울시장 선거는 6.25 전쟁 때 한강(서울) 전선을, 대구시장 선거는 여말선초(고려 말~조선 초) 변화의 흐름을, 부산 북갑 선거는 후삼국 시대의 막바지를 닮았다. 물론, 역사는 그 결말을 잘 알지만, 투표함 속은 아직 모른다. 그럼에도 수도를 둘러싼 압박감, 오래된 정치 질서와 새로운 명분이 부딪히는 흐름, 3개의 깃발이 한 전장에 꽂힌 다자 대결 등 실제 역사에 있었던 구도는 현재 선거판을 읽는 데 유용한 비유가 될 수 있다. ◆서울=한강 전선 위 수도 심리전 현직 시장 후보에게 서울은 지켜야 할 성이다. 이미 구축해온 행정 경험, 도시 개발과 교통·주거 정책을 둘러싼 익숙한 브랜드, 서울시정의 연속성이 방어선이 된다. 도전자에게 서울은 새로 세워야 할 교두보다. 구청장 행정 경험과 생활정치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골목과 생활권에서 출발한 흐름을 서울 전체로 확장하려 한다. 여기서 서울시장 선거를 6.25 전쟁 초기의 한강 전선에 대입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선거를 전쟁에 그대로 겹칠 수는 없다. 선거에는 점령도, 수복도, 패주도 없다. 후보를 어느 한쪽 군대에 대응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수도라는 공간이 주는 압박감, 한강을 둘러싼 민심의 흐름, 전선이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는 긴장감은 닮은 측면이 있다. 한강 북쪽과 남쪽, 강남과 비강남, 청년층과 중장년층, 부동산 민심과 생활 행정의 평가가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며 표심 차이를 만들 수 있다. 선거 막판 의제 하나, 후보의 말 한마디, 투표율의 미세한 변동은 한강을 타고 부는 강풍이 될 수 있다. ◆약한 방어 고리 노리는 국지전 지속 전선이 팽팽하면 서로 약한 방어 고리를 노리는 전술이 의외로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공교롭게도 선거 막판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는 'GTX 철근 누락' 논란에, 정원오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폭행 전과 거짓 해명' 논란에 휩싸여 있다. GTX 철근 누락 논란의 쟁점은 서울시의 관리 책임이다. 앞서 GTX-A 삼성역 복합환승센터 지하 구조물 기둥 일부에서 철근 누락 사실이 확인됐고, 서울시가 이를 보고받은 후 국토교통부 등에 알리는 과정이 늦어진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정 후보 측은 오 후보 재임 시기 서울시의 안전불감증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 오 후보 측은 시공사인 현대건설의 과실을 강조하면서 서울시의 늑장 보고나 은폐는 없었다고 반박한다. 폭행 전과 거짓 해명 논란은 사건 자체보다 해명의 진실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정 후보 측이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인식 차이로 인한 다툼"이라고 해명하자 국민의힘 측이 거짓 해명이라고 비판하고 나섰고, 더불어민주당은 거짓 해명 의혹을 제기한 국민의힘 김재섭 국회의원과 폭행 피해자 육성 녹취를 공개한 같은 당 주진우 의원을 '낙선목적 허위사실 공표죄' 위반 혐의로 각각 고발했다. 전자는 서울시정의 연속성이라는 방어선에 균열 내지는 붕괴를 시도하고, 후자는 도전자의 도덕성·신뢰성 문제를 건드린다. 두 사안을 포함해 여러 크고작은 논란이 두 후보를 때리고 있는데, 이를 투표일 전까지 누가 더 많이 털어내느냐가 승부의 최대 관건이 될 수 있다. ◆대구=고려 말 성 안팎 명분 싸움 서울이 수도의 심리전이라면, 대구는 오래된 정치적 성곽을 둘러싼 역사극에 비유할 수 있다. 대구는 오랫동안 보수 정치의 핵심 공간으로 인식됐다. 국민의힘 후보는 이 본진을 지키고자 한다. 정당 간판을 전면에 부각시킨 가운데 경제 관료 출신 정책 전문가 이미지와 TK(대구경북) 정치 정통성 프레임이 방어선이 된다.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대구는 다시 뚫어야 할 성이다. 대구에서 민주당계 정치인으로 생존하고 성장했던 개인 서사, '대구도 달라질 수 있다'는 구호를 바탕으로 오래된 성곽 안으로 재진입하려 한다. 여기서 대구시장 선거를 고려 말 명분 충돌 상황에 대입해 볼 수 있다. 다만, 이 선거를 고려 말의 정치 격변에 그대로 포개기는 어렵다. 왕조 교체도, 회군도, 충절과 역성혁명의 대결도 아니다. 특정 후보를 정도전이나 정몽주에 대응시키는 것도 무리다. 그러나 오래된 질서가 스스로 정당성을 재증명해야 하고, 신규 명분 또한 성 안에서 시험을 받아야 한단 점에선 분명 그때와 지금이 닮았다. ◆신공항 해법, 유권자 판단은? 사실 고려 말 싸움은 관념의 충돌만은 아니었다. 백성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도 얽혀 있었다. 대구시장 선거도 마찬가지다. 유권자의 생활 내지는 생존 문제가 구체적인 과제를 무수히 도출하고 있다. 지역경제 활성화, 산업 재편, 청년 유출 해결, 도심 활력 증대, 대구경북 신공항 같은 현안이 다소 공중에 뜰 수 있는 명분 싸움을 땅으로 끌어내린다. 특히 선거 막판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추경호 국민의힘 후보는 대구경북 신공항 추진 방식과 재원 대책을 놓고 정책 공약 대결을 펼치고 있다. 김 후보 측은 조기 착공과 정부 지원, 집권 여당과의 밀착을 강조하고 있고, 추 후보 측은 신공항 사업의 국가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누가 더 빨리, 더 확실하게 사업을 본 궤도에 올릴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이 선거의 결말 역시 아직은 성문 밖에 있는 얘기다. 국민의힘 후보가 본진의 성벽을 다시 굳히며 기존 질서를 지켜낼 수도 있고,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오래된 성곽 안으로 들어가 균열을 변화의 통로로 만들 수도 있다. 고려 말의 성문은 역사책 속에선 이미 열렸지만, 6·3 대구의 성문을 여는 쪽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부산=후삼국 말 세 깃발의 전장 6·3 지선과 함께 실시되는 전국 14곳 재보선 중 하나인 부산 북갑 선거는 전국적 관심도만 놓고 보면 결코 작은 전장이 아니다. 하정우 더불어민주당 후보, 박민식 국민의힘 후보, 한동훈 무소속 후보가 맞붙는 구도는 정권심판론과 그 반대 여론, 정당 공천의 명분과 개인 정치의 파괴력 등이 복합적으로 충돌하는 사례다. 후삼국 말기 전장을 떠올리게 한다. 후백제, 후고구려, 고려가 각자의 기반과 명분을 내세우며 한반도의 주도권을 다투던 시기다. 다만 세 후보를 왕건·견훤·궁예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무리다. 후삼국의 결말은 통일 왕조의 탄생이었지만, 부산 북갑의 결말은 국회의원 1석을 둘러싼 유권자의 선택이다. ◆보수 단일화는 변수(變數)? 실수(失手)? 눈여겨 볼 변수는 선거일 전날까지 불을 지필 보수 단일화 가능성이다. 다만 그 성격이 최근 변화했다. 애초엔 박 후보와 한 후보의 두 깃발이 묶일 수 있느냐가 쟁점이었다면, 이제는 상승세를 탄 한 후보가 굳이 단일화 협상장에 들어갈 이유가 있느냐는 질문이 더 커져 있다. 실은 후삼국 말 세력 관계도 고정돼 있지 않았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협상 상대가 되고, 지방 세력의 선택 하나가 전장의 무게중심을 바꾸기도 했다. 힘이 한쪽으로 기울면, 협상의 성격도 달라진다. 대등한 연합 논의가 아니라, 불리해진 쪽이 유리한 쪽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장면으로 바뀔 수 있다. 부산 북갑에서도 비슷한 흐름을 상상할 수 있다. 정당 공천의 명분을 가진 박 후보가 보수 본류의 깃발을 내세우지만, 한 후보가 3자 구도에서 앞서가는 흐름을 굳히는 경우 박 후보 쪽이 점점 절박해질 수 있다. 반대로 한 후보 입장에선 단일화를 승리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 자신의 독자 행군을 흐리는 부담으로 여길 수도 있다. 단일화는 두 후보의 표가 단순히 하나로 합산되는 문제가 아니다. 승복의 명분을 바탕으로 지지층의 감정과 후보 간 체면 문제까지 함께 연동돼야 하는 고도의 정치공학 기술이다. 특히 한쪽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고 판단하면, 단일화 논의는 협력보다 흡수, 연대보다 항복처럼 비칠 위험도 있다. 후삼국 말의 연합과 귀부(항복)가 매끄럽지 않았던 것처럼, 부산 북갑의 단일화 변수도 승부의 셈법을 풀기보다 더 복잡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만일 단일화가 성사되더라도 시너지가 아닌 역효과가 나기를 하 후보는 바랄 터다. 결국 한 후보가 3자 대결 완주를 택할지, 박 후보가 막판 단일화를 요구할지가 마지막 관전 포인트다. 박 후보는 출구전략을, 즉 선거 이후 자신의 정치 인생도 고려해야 한다. 부산 북갑의 승자가 쥘 엑스칼리버는 아직 전장 한복판에 꽂혀 있다. 세 깃발이 끝까지 따로 달릴지, 두 깃발 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 접힐지, 아니면 균열 자체가 승부를 가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2026-05-30 18:30:00
반도체 패권 전쟁은 '21세기판 삼국지'…천하통일은 불가능? [커버스토리]
◆네덜란드 ASML=천하의 공성병기 삼국지에서 전쟁의 승패는 단순 병력 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공성병기와 병참 체계 역시 중요했다. 현재 반도체 산업에선 네덜란드 ASML의 EUV(극자외선) 노광장비가 공성병기 같은 존재다. EUV 장비는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다. 엔비디아의 AI(인공지능) GPU든, 애플의 최신 칩이든, 첨단 미세공정을 구현하려면 EUV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 장비를 전 세계에서 사실상 ASML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건 ASML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기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광원 기술, 독일의 광학 기술, 일본의 소재 기술이 결합돼야 비로소 EUV 장비 한 대가 완성된다. 즉 ASML은 단순한 네덜란드 기업이 아니라, 서방 첨단 공급망 전체가 집약된 전략 자산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이 중국을 EUV 수출 통제로 압박한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첨단 AI 반도체 경쟁에서 EUV는 단순 장비가 아니라 '미래 산업의 성문을 여는 열쇠'로 비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ASML은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 기업들 중 시가총액 1위 기업이기도 하다. 반도체 산업 생태계 내 중요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다. ◆HBM=AI 시대 병참선 군량미 삼국지에선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군량이 끊기면 오래 버티지 못했다. 실제로 관도대전의 승패도 병참 체계 붕괴가 갈랐다. 현재 AI 반도체 경쟁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시장은 엔비디아 GPU를 AI 시대의 핵심 무기로 본다. 그런데 GPU만으로는 AI 시스템이 완성되지 않는다. 대규모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려면 HBM(고대역폭 메모리)이 반드시 필요하다. HBM은 GPU 옆에서 초고속으로 데이터를 공급하는 메모리다. AI 모델 규모가 커질수록 그 중요성도 급격히 커진다. 실제로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와 함께 HBM 시장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HBM 공급망 핵심 기업으로 떠올랐고, 삼성전자 역시 관련 공격적 투자에 나서고 있다. 즉 AI 시대의 핵심 병참선을 한국 기업들이 상당 부분 쥐는 형국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삼국지는 물론 실제 전쟁에서도 군량과 보급선을 장악한 세력이 장기전에 강했던 교훈을 인용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AI 시대의 패권은 단순히 누가 더 강한 칩을 설계하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누가 안정적으로 메모리와 패키징, 전력과 생산 능력을 공급할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즉, 오늘날 AI 패권 구도는 단순 기술 경쟁이 아니라, 현대 산업의 병참 네트워크 전쟁이다. ◆반도체 패권은 왜 '천하통일'이 어려울까? 삼국지에서 조조는 천하통일 직전까지 갔던 인물로 묘사된다. 중원을 제패하고 막대한 병력과 자원을 확보했으며, 후한의 허수아비 천자 헌제를 확보해 정치적 정통성까지 손에 넣었다. 그러나 적벽대전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조조는 압도적 강자였지만, 끝내 천하를 장악하지 못했다. 이후 시대는 위·촉·오로 나뉜 천하삼분 구조로 재편됐다. 현재 세계 반도체 산업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한때 미국은 세계 반도체 산업 전체를 장악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국이 거대한 내수시장과 국가 주도 투자를 바탕으로 독자 공급망 짜기에 나서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국과 대만, 일본과 네덜란드 등의 국가들도 각자 핵심 영역을 쥐고 있다. 즉, 어느 한 나라가 반도체 산업 전체를 완전히 독점하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경제 논리와 함께 안보 논리로도 설명된다. 유비의 책사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떠올리게 한다. 제갈량은 조조가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정면 승부만으로는 천하를 통일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신 장기적으로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구조 속에서 생존과 확장을 모색하자고 유비를 설득했다. 현재 반도체 산업 역시 단순한 1위 경쟁을 넘어 공급망과 기술, 생산 거점이 서로 얽힌 다극 체제로 가고 있다. 미국이 첨단 설계를 장악해도 TSMC가 필요하고, 엔비디아 GPU가 있어도 한국산 HBM 없이는 AI 성능을 극대화하기 어렵다. 반대로 중국 역시 첨단 장비와 글로벌 공급망 없이는 완전한 자립이 쉽지 않다. 그 외 국가들도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기술력을 바탕으로 생태계를, 정확히는 전장(戰場)을 구성하고 있다. 기업 뒤에 반드시 정부가 '뒷배'가 돼야 하는 구도 역시 반도체 패권 전쟁의 특징이다. ◆美, 공급망 동맹 집착 이유는? 조조는 관도대전으로 원소를 무너뜨린 뒤 절대 강자가 됐다. 이어 적벽대전에서 큰 충격을 받았으나 세력이 붕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위나라의 기반을 다지며 삼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로 남았다. 현재 미국이 비슷하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와 AI 플랫폼, 운영체제, 첨단 장비 규칙 등 핵심 영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엔비디아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기업들은 세계 AI 생태계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미국 역시 불안 요소를 안고 있다. 첨단 반도체 생산은 대만 TSMC 의존도가 높고, EUV 장비는 네덜란드 ASML, 소재와 부품은 일본 공급망과 연결돼 있다. 희토류 같은 핵심 자원은 경쟁자 중국의 비중이 크다. 즉, 미국은 가장 강한 세력이지만 홀로 성립하는 제국이 아니다. 그래서 최근 미국 전략의 핵심은 단순한 중국 견제를 넘어선다. CHIPS법(칩스법, 미국 반도체 산업 지원법)으로 자국 반도체 생산기지를 확대하고, 엄연히 타국 기업인 네덜란드 ASML의 EUV 장비 수출까지 조율하려 한다. 좀 더 전방위의 공급망 동맹도 결성한다. 지난해 12월 미국 주도로 출범한 팍스 실리카(Pax Silica)가 대표 사례다. 평화를 의미하는 라틴어 '팍스'와 반도체 소재인 '실리카'를 합친 조어로, AI·반도체 공급망 협력체다. 핵심 광물부터 AI 인프라, 반도체 등을 공동의 전략자산으로 묶어 국가들을 조직화했다. 출범 당시 한국과 일본, 싱가포르, 네덜란드, 영국, 호주, 아랍에미리트(UAE), 이스라엘 등 8개국이 정식 회원으로 참여했다. 대만을 비롯해 유럽연합(EU), 캐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특별 초청을 받았다. 이는 단순히 강해서 굴복시키는 맥락이 아니라, 패권 유지를 위한 관리에 가깝다. 힘으로만 밀어붙여 천하를 차지하려던 수준(적벽대전)에서 병참과 동맹 전체를 관리하는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한국 반도체 전략 가치 '실적 확인' 이러한 과정은 한국에 위기와 기회 둘 다 될 수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계는 미국 투자 확대 압박과 대중국 규제 추세에서 복잡한 선택을 요구받고 있어 한 걸음 한 걸음이 살얼음판이자 가시밭길을 걷는 일일 수 있다. 반면 AI 시대 핵심 병참선이 된 한국 기업들의 전략적 가치 역시 크게 높아지는 등 몸값을 높일 수 있는 건 분명 기회다. 삼성전자는 2026년 1분기 매출 133조9천억원, 영업이익 57조2천억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는데, 반도체 담당 DS 부문 영업이익만 53조7천억원에 달했다. 삼성전자는 AI 수요와 메모리 가격 상승, HBM4·SOCAMM2(차세대 AI 서버용 저전력 D램 모듈) 등 고부가 제품을 성장 동력으로 제시했다. SK하이닉스 또한 2026년 1분기 매출 52조6천억원, 영업이익 37조6천억원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엔비디아 공급망과 AI 메모리 수요에 힘입은 결과라는 분석이다. 이어 한국 반도체 산업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최근 작성됐다. 이 업계 대장이자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 엔비디아가 이달 20일 발표한 2026년 1분기 매출은 816억달러(122조2천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85% 증가했다. 12분기 연속 신기록 경신이다.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130% 증가한 583억달러(87조6천억원). 다음 분기 매출 전망은 더욱 높아진 910억달러로 제시됐다. 엔비디아의 지속적 매출 증가는 AI 반도체 시장의 성장이자 한국 반도체 산업의 먹거리 확대로 볼 수 있다. 젠슨황 엔비디아 CEO는 특히 AI 팩토리 구축 붐을 두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프라 확장"이라고 표현했다. AI 투자가 꺾이지 않는 한, 그 병참선인 HBM과 서버용 메모리 수요도 쉽게 식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어 최근엔 피지컬AI(physical AI, 로봇·자율주행차·스마트 공간 등 자율 시스템이 실제 물리 세계에서 사물을 인지·이해해 복잡한 행동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에 대한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협력이 가시화하며, 이 분야 역시 한국이 주요 병참선이 될 가능성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2026-05-30 14:30:00
반도체 패권 전쟁은 '21세기판 삼국지'…관도대전과 적벽대전 [커버스토리]
세계 반도체 산업은 지금 거대한 패권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 미국은 AI(인공지능) 반도체와 첨단 장비를 무기로 중국을 압박하고, 중국은 자립형 공급망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한국과 대만은 그 틈바구니에서 세계 공급망의 핵심 국가로 떠올랐다. 이 복잡한 흐름을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이하 삼국지)에 비유해 설명할 수 있다. 1980~90년대 미·일 반도체 전쟁은 관도대전(조조 VS 원소)과 유사했다. 당시 미국은 시스템과 규칙을 장악한 조조형 세력이었고, 일본은 막대한 제조 역량과 자원을 앞세운 원소형 세력이었다. 한국은 그 사이에서 살아남으며 성장 기반을 확보한 유비와 비슷한 위치였다. 2020년대 미·중 AI 반도체 전쟁은 적벽대전(조조 VS 손권)에 비유할 수 있다. 미국은 여전히 북방의 초강대국 조조이고, 중국은 강동을 기반으로 장기전에 나선 손권형 세력이다. 그리고 대만은 조조와 손권이 정면 충돌하는 사이 형주를 확보한 유비처럼 세계 공급망의 전략 거점으로 떠올랐다. 여기서 대한민국과 대만을 각각 유비에 대입했는데, 큰 맥락의 처지는 비슷해도 디테일은 서로 좀 다르다. 현실 반도체 전쟁이 삼국지의 결말까지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승패의 최종 결과보다, 각 세력이 충돌하고 연합하며 성장하는 과정과 전략의 구조다. ◆관도대전=미·일 반도체 전쟁 관도대전은 삼국지 초기 최대 규모의 패권 전쟁이었다. 북방의 거대한 세력 원소와 중원을 장악하려던 조조가 정면 충돌한 사건이다. 당시만 해도 원소의 우세가 예상됐다. 원소는 더 넓은 영토와 더 많은 병력, 더욱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병참과 조직력, 전략적 결단에서 앞섰다. 결국 조조가 원소에게 대승을 거둔 관도대전은 단순 병력 규모보다 시스템과 운영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전쟁이 됐다. 1980년대 세계 반도체 산업도 비슷했다. 당시 일본은 NEC·도시바·히타치·후지쯔 같은 기업들을 앞세워 D램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설계와 소프트웨어, 산업 규칙 측면에서 강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미·일 반도체 협정과 통상 압박을 통해 일본 중심 질서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는 마치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원소의 병참선을 흔들며 판세를 뒤집은(조조가 원소의 병참기지 오소를 습격해 대승을 거둔 것) 흐름과 닮았다. ◆美, 반도체 질서 설계 조조형 세력 삼국지의 조조는 단순한 군벌이 아니었다. 병참과 행정, 인재 시스템을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한 세력이었다. 현재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도 비슷한 위치에 있다. 엔비디아와 AMD 같은 AI 반도체 기업, 시놉시스와 케이던스 같은 반도체 EDA(전자 설계 자동화) 기업, 그리고 첨단 장비 공급망과 특허 체계까지 미국은 반도체 산업의 규칙 자체를 통제하는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중국 기업 화웨이에 대한 첨단 장비 수출 제한이나 AI GPU 규제 역시 단순한 무역 갈등이 아니다. 상대의 핵심 병참선을 겨냥하는 전략적 압박 수순이다. 중요한 건 미국의 상대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는 점이다. 1980~90년대에는 일본이었고, 지금은 중국이다. 하지만 미국이 '반도체 질서를 설계하는 조조형 세력'이라는 구조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日 반도체 몰락→韓 기회 1980년대 일본 반도체 산업은 세계 최강에 가까웠다. 1988년 기준 세계 반도체 매출 상위 10개 기업 가운데 6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일본은 단순한 반도체 생산국이 아니었다. 소재와 부품, 장비까지 강한 제조 생태계를 구축하며 '반도체 왕국'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미국 내부에서는 이대로 가면 일본이 미래 산업 패권까지 가져간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그랬던 일본 반도체 산업은 1990년대 들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을 통해 일본 기업들을 압박했고, 일본 내부적으로는 버블경제 붕괴 이후 공격적 투자가 위축됐다. 여기에 일본 기업 특유의 수익성 중심 경영과 느린 의사결정 구조도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정반대로 대응했다. 1980~90년대 삼성전자와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는 대규모 설비 투자와 공격적 증설을 밀어붙였다. 수익성이 낮아도 생산 규모를 키우며 점유율 확대에 집중했고, 메모리 가격 폭락 국면에서도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1990년대 후반부터 세계 D램 시장의 중심축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삼국지 속 원소 세력이 압도적 자원과 병력을 갖고도 변화하는 전쟁 형국을 제대로 읽지 못해 무너진 흐름과 닮았다. 또 원소의 내부 분열과 느린 결단은 일본의 관료적 조직 문화, 보수적 투자, 시장 변화 대응 지연에 비유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반면 한국은 그 틈을 파고들며 관도대전 이후의 유비처럼 성장 기반을 확보했다. 사실 관도대전 당시 유비는 전장의 주역이 아니었다. 조조나 원소처럼 거대한 영토와 병력을 가진 세력도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살아남았고, 두 강자의 충돌 속에서 성장의 기반을 마련해 지켜낸 게 중요하다. ◆적벽대전=미·중 반도체 전쟁 관도대전에 이어 적벽대전도 삼국지의 흐름을 바꾼 전쟁이었다. 중원을 통일한 세력 조조가 남쪽으로 진격했고, 그 타깃이 된 손권은 강동 기반의 수군과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맞섰다. 여기서 조조를 미국에, 손권을 중국에 대입해 보자. 현재 미·중 간 AI와 반도체를 포함한 '기술 패권' 경쟁이 비슷한 구도다. 미국은 첨단 기술과 AI 생태계를 장악한 초강대국이다. 반면 중국은 거대한 내수시장과 성숙 공정(구세대 반도체 생산) 골자의 장기 자립 전략을 바탕으로 독자 공급망 구축에 나서고 있다. 물론 현실은 적벽대전과 완전히 같지 않다. 조조는 적벽에서 대패했다. 하지만 현실의 미국은 여전히 기술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다만, 미국이 한때 중국의 기술 굴기를 보고 큰 위기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적벽대전의 조조와 닮은 측면이 있다. 2018년 이후 화웨이의 5G 장비와 중국 기술기업의 급성장은 미국 내부에 강한 충격을 줬다. 미국이 화웨이 제재와 첨단 반도체 수출통제에 나선 배경 역시 단순 견제가 아니라 패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더구나 중국이 희토류 공급망이라는 또 다른 병참선까지 쥐고 있는 점은 미국의 부담을 더욱 키웠다. 반도체를 비롯해 전기차, 첨단무기 등 생산에 필요한 희토류 상당 부분을 중국이 공급하는 구조 속에서, 미국은 공급망 재편과 자국 생산 확대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즉, 현실의 '반도체 적벽대전'은 조조(미국)의 몰락이라기보다는, 패권국(미국)이 처음으로 자기 약점과 공급망 리스크를 절감한 순간이었을 터다. ◆고래 싸움에 성장한 대만 또한 중요한 건 적벽대전의 최대 수혜자는 유비였다는 점이다. 조조와 손권이 정면 충돌하는 동안 유비는 형주를 확보했고, 이후 촉한 건국의 기반까지 마련했다. 대만이 그런 포지션을 취한다. 미·중 충돌이 격화하는 사이 대만 TSMC는 세계 최첨단 파운드리 기업으로 성장했고, 글로벌 AI 산업의 핵심 생산지로 떠올랐다. TSMC는 그 전략적 중요도로 인해 중국과 대만 간 분쟁, 즉 양안관계에서 일종의 안보 방파제 역할도 맡고 있다. 그 성격을 적벽대전에서 삼국이 공통되게 노린 땅 형주에 비유해보자. 삼국지에서 형주는 단순 영토가 아니었다. 북방의 조조도, 강동의 손권도, 그리고 마땅한 근거지가 없는 떠돌이 신세였던 유비 역시 반드시 확보하려 했던 전략 요충지였다. 현재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 TSMC와 대만의 위치가 비슷하다. 애플과 엔비디아, AMD 같은 글로벌 핵심 기업들은 TSMC 생산라인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 역시 첨단 공급망 차원에서 대만을 중시하고, 중국 역시 대만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즉, 대만은 단순한 반도체 생산지가 아니라 세계 첨단 산업 전체의 전략 요충지다. 단, 이 비유는 삼국지의 외교 관계를 온전히 옮겨온 건 아니다. 현실의 미국과 대만은 중국에 맞서는 첨단 공급망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대만의 반도체 산업을 호시탐탐 노리는 압박을 구사하고 있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중 정상회담 직후였던 이달 15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누군가가 '미국이 우리(대만)를 밀어주니 (중국으로부터)독립하자'고 말하는 상황은 원치 않는다"며 대만을 향해 "우리(미국)의 반도체(산업)를 다년간 훔쳐 갔다"고 견제구를 날렸다. 대만의 지정학 리스크와 반도체 산업을 저울질하며 압박하는 맥락이었다. 그래서 중요한 건 적벽대전 속 동맹 구도보다, 조조와 손권의 거대한 충돌 속에서 유비가 형주를 확보하며 가장 큰 전략적 이득을 가져갔다는 점이다. 대만 역시 미·중 패권 경쟁을 발판 삼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으로 부상했다는 점이 유사하다.
2026-05-30 14:30:00
이화(1960-2019, 본명 김현숙)의 1집 앨범 '눈내리던 겨울밤/그대와 나'(1981)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묘한 울림을 주는 앨범이다.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 아니라서 희귀 음반으로 취급되며 일부 애호가 사이에서나 회자됐다. 그러나 참여진의 이름과 그 시대적 맥락을 파헤치면, 이 앨범은 단순한 여성 보컬 작품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당시 청춘들이 빠져들었던 포크와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비롯해 영화음악, 재즈, CM송 문화가 한 장의 음반 안에서 교차하기 때문이다. ◆김도향의 CM송 히로인 이 앨범 프로듀서를 맡은 김도향을 맨 먼저 언급해야 한다. 그는 '바보처럼 살았군요' 같은 히트곡의 가수로 흔히 기억되지만, 실은 1970~80년대 한국 CM송 문화를 만든 핵심 인물이었다. TV 광고가 급속도로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던 시기에 김도향은 자신이 세운 광고음악전문회사 서울오디오를 통해 수많은 광고음악을 제작하며 새로운 감각의 상업음악을 제시했다. 단 몇 초로 사람의 귀를 사로잡아야 했던 CM송은 당연히 가장 트렌디한 사운드 감각이 집약되는 매체가 됐다. 여기서 유난히 맑고 인상적인 목소리를 들려준 인물이 바로 서울오디오 소속 이화였다. 이화는 '코카콜라' '해태팝' '썬듀' 같은 광고 음악을 통해 대중에 익숙한 목소리로 떠올랐다. 이를 포함해 수백곡의 CM송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굴보다 목소리가 먼저 대중에 알려져 스타가 된 경우다. 사실 이화는 평범한 CM송 가수가 아니었다. 윤형주, 이정선, 이연실 같은 가수들의 앨범에 코러스로도 참여하며 우리나라 포크와 언더그라운드 음악 현장에서 한 역할을 차지했다. ◆정성조·김현식·이장희 참여 이런 이력 덕분일까. 이화의 1집 음반 속지엔 당대 한국 음악계의 중요한 이름들이 자연스럽게 적혔다. 우선 정성조가 편곡을 맡고 그가 이끌던 정성조와 메신저스가 연주를 담당한 게 눈길을 끈다. 이 인연은 이화가 처음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앨범이 정성조의 영화음악집 '밤의 찬가/죽음보다 깊은 잠'(1980)인 데 연결고리를 걸 수 있다. 앨범 곳곳에 흐르는 도시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는 재즈·포크·훵크 두루 일가견 있는 정성조의 솜씨다. 정성조는 '그게 나예요' '밤의 찬가2' '꿈과 사랑 사이' 등 수록곡 10곡 중 3곡을 작업했다. 김현식도 3곡을 작사·작곡했다. 타이틀곡 '눈내리던 겨울밤'을 비롯해 '그대와 나'와 '첫사랑'을 이화에게 선물했다. '그대와 나'는 김현식이 1집에서 부른 걸 이화가 다시 노래했고, '눈내리던 겨울밤'은 이화가 먼저 부른 후 김현식이 자신의 3집에 리메이크했다. 이장희가 직접 만들고 불러 히트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도 이화가 다시 열창해 눈길을 끈다. 이장희의 투박한 감성과 달리 투명하고 여성적인 분위기로 곡을 재해석했다. 이장희의 동생인 싱어송라이터 이승희도 '난 알았네'와 '난 오늘' 등 2곡 작사·작곡으로 참여했다. 결국 이화의 1집은 한 명의 신인 가수를 위한 앨범을 넘어 당시 뮤지션들의 느슨하지만 정성 가득한 연대가 응축된 결과물로도 읽을 수 있다. 수식을 하나씩 붙여보자. CM송 업계를 주름 잡던 김도향, 한국 재즈의 흐름을 이끌며 영화음악의 세계도 구축하던 정성조, 청춘문화의 상징이던 이장희, 그리고 막 자신의 시대를 열기 시작했던 김현식까지(김현식도 데뷔 앨범을 이화 1집과 같은 1981년에 발표했다). 서로 장르도, 활동 무대도 달랐던 음악인들이 이화라는 목소리 아래 모여든 맥락이다. 그래서 이 앨범은 지금 다시 들으면 잊혀졌던 추억의 음반 그 이상으로 다가온다.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이 본격적인 산업 체계 안에서 정비되기 전에 재능 있는 아티스트들이 자유롭게 교류하며 참신한 음악을 탐구하던 시절의 공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26-05-29 15:30:00
'IMF 낙관론'에서 '국민배당금'까지…경제는 '말'로도 흔들린다 [금주의 이슈]
이재명 대통령의 "잔인한 금융" "약탈금융" 등 금융 관련 언급과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의 "국민배당금" 제안이 최근 큰 관심을 얻었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 시장도 '깜짝' 반응한 경제 이슈였다. 정책 책임자의 말은 경제의 방향을 정한다. 완성도 높은 말은 순풍을 만들지만, 너무 거칠거나 모호한 말은 역풍을 만들기도 한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직전의 낙관론부터 2026년 국민배당금 논란까지, 대한민국은 정책 책임자의 말이 시장의 신뢰와 불안을 동시에 움직인 사례들을 반복해왔다. ◆ '약탈금융' 직격탄, 금융권 즉각 움직였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자신의 SNS(X, 구 트위터)에 "아직도 이런 원시적 약탈금융이 버젓이 살아남아 서민들의 목줄을 죄고 있는 줄 몰랐다"며 민간 부실채권 처리회사 '상록수'가 2000년대 초반 카드 사태 당시 연체채권을 여전히 추심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공유했다. 이어 당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카드 사태 때 카드회사와 금융기관들이 다 정부 세금으로 도움받지 않았나. 그런데 국민의 연체채권을 지금도 악착같이 추심하고, 연간 수십조원의 영업이익을 내면서도 백몇십억원 배당을 받고 있더라"면서 대책을 주문, "본질이 돈놀이이니 금융이 원래 좀 잔인하기는 한데, 그래도 정도가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자 금융권은 즉각 해당 연체채권 정리에 나섰다. 이 대통령 발언이 나온 당일 신한카드는 상록수 보유 장기 연체채권 중 신한카드 지분(30%)에 해당하는 채권 전액을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새도약기금에 매각한다고 밝혔다. 10% 지분을 가진 하나은행도 채권 매각을 결정했다. 새도약기금으로 이들 채권이 이관되면 해당 차주(채무자)에 대한 추심은 즉각 중단된다. 이후 상환 능력에 따라 채무 조정과 분할 상환이 추진되고, 기초생활수급자 등 상환 능력이 없는 사람은 1년 내 채권이 자동 소각된다. 이걸 언론에서는 금융기본권 추진의 한 갈래로 본다. 또 다른 갈래도 진행형이다. 이 대통령은 앞서 고신용자 대출금리를 높여 저신용자 대출금리를 낮추는 골자의 '저신용자 저리 대출' 역시 주문한 바 있는데, 마침 자신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던 기본대출(국민 누구나 1천만원 10~20년 저리 마이너스 대출)을 닮은 하위 50% 저신용자 1천만원 저리 대출 등을 다루는 금융기본권 도입 연구단이 오는 6월 출범한다. 금융당국도 현재 '포용금융추진단'(가칭) 출범을 위한 분과 구성 등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즉, 총론인 금융기본권의 각론 정책들이 하나 둘 쏟아질 수 있다는 얘기인데, 시장(금융권)이 발빠르게 보조를 맞추는, 정확히는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상황도 이어질 전망이다. ◆ '국민배당금' 파장, 초과세수? 횡재세? 금융기본권이 어느 정도 예상된 정책이었다면, 김용범 실장의 '국민배당금' 제안은 갑자기 떨어진 날벼락 수준이었다. 김 실장은 지난 11일 페이스북을 통해 반도체와 AI(인공지능) 호황으로 예상되는 막대한 이익으로 인한 세수 증가분을 국민에게 돌려주자는 구상을 밝혔다. 그러자 "반기업적 발상" 등 강한 반발 여론이 나타났고 당시 우리나라 증권시장 지수 급락의 배경 중 하나로 외신 등 언론들이 지목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곧장 "내부 검토와 무관한 의견"이라며 선을 그었고, 이 대통령도 직접 나서 13일 SNS로 "김 실장이 언급한 국민배당금은 국가 '초과세수'를 재원으로 삼는 것이며, 기업 '초과이윤 배당'이라는 주장은 본질을 왜곡한 가짜뉴스"라고 지원사격성 해명에 나섰다. 그러나 김 실장의 발언은 늘 몇 단계 뒤 상황을 가늠하고 확대 해석을 해서라도 '리스크'에 철저히 대비하는 시장의 특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즉 정교하지 못한 글이었다. 아울러 학자나 경제평론가가 아닌 정책실장의 입장에서 한 발언이었기에 뒤늦은 청와대의 해명은 '내부 조율 부재'만 드러냈고, 대통령에겐 정치적 부담만 지우는 결과를 만들었다. "코스피 시가총액 458조를 날린 발언"이라는 비판은 김 실장에겐 충분히 억울할 수 있으나, 정책 책임자의 말이 경제를 뒤흔든 과거 전례를 생각하면 "다음엔 좀 더 완성도 높은 말과 글을 구사하자"는 자기 반성 및 교훈으로 삼는 게 더 생산적이다. ◆ 'IMF'부터 '레고랜드 사태'까지 대통령이나 정책실장 등 정책 책임자의 발언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향후 정책, 규제, 과세, 감독 방향 등의 신호로 해석된다. 이게 가격과 투자심리, 기업 의사결정을 생물처럼 움직이게 한다. 그 과정 내지는 결과까지 나빴던 사례들을 살펴보면, 가장 임팩트가 컸던 사례로 YS(김영삼) 정권 때였던 1997년 외환위기 직전 정부 경제팀이 낙관적 메시지를 잇따라 발신한 걸 들 수 있다. 당시 경제 수장들은 한국 경제의 기초여건, 즉 펀더멘털이 튼튼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반복했다. 그러나 시장은 정부의 말과 실제 외환시장 상황 사이의 간극을 더 크게 느꼈다. 결국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신청으로 이어지면서, 이 발언들은 위기 인식 실패와 커뮤니케이션 실패의 상징처럼 남았다. MB(이명박) 정권 시기인 2011년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주장한 초과이익공유제 논란은 최근 국민배당금 논란과 가장 닮았다. 초과이익공유제는 대기업이 예상보다 많은 이익을 냈을 때 협력 중소기업과 나누자는 구상이었다. 명분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그러나 재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사회주의 용어인지 공산주의 용어인지 모르겠다"는 취지로 비판했고, 정운찬 위원장은 색깔론으로 몰지 말라고 맞섰다. 이 사례의 핵심은 제도 자체보다 해석의 충돌이었다. 정책은 상생을 말했지만, 시장은 이윤 배분 개입을 먼저 떠올렸다. 이게 이번에 김용범 정책실장에 의해 반복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文(문재인) 정권 때인 2018년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 발언도 빼놓을 수 없는 사례다. 당시 박 장관은 가상화폐 투기 과열을 우려하며 거래소 폐쇄까지 검토한다는 취지의 강경 발언을 내놨다. 그때 가상화폐 시장엔 20·30대 투자자가 대거 뛰어들어 있었다. 주식시장보다 진입 장벽이 낮고, 모바일 앱으로 24시간 거래할 수 있다는 특성 때문에 젊은층의 관심이 쏠렸다. 그런 상황에서 거래소 '폐쇄'라는 표현은 단순한 규제 검토가 아니라 시장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신호로 풀이되기 충분했다. 투자자들이 받은 충격은 곧 가상화폐 가격의 급등락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확정된 사안이 아니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정책 책임자의 말 한마디가 신흥 자산시장을 뒤흔든 다음이었다. 尹(윤석열) 정권 시기였던 2022년 레고랜드 사태는 시장의 신뢰에 충격을 준 대표 사례다. 당시 김진태 강원지사는 강원중도개발공사 회생절차 추진 방침을 밝혔고, 시장은 이를 강원도가 지급보증한 ABCP(자산유동화기업어음)의 신뢰 문제로 소화했다. 금액은 2천50억원 규모였지만 충격은 지방정부 보증채권 전반으로 번졌다. 이어 자금시장이 경색되자 정부는 50조원이 넘는 규모의 유동성 공급 대책을 내놔야 했다. 한 지방정부의 행보가 전국 채권시장의 신뢰를 흔든 사례였다. ◆진영 넘어 반복되는 '경제 발언 리스크' "경제와 안보는 보수가 잘한다"는 말은 퇴색된지 오래다. 정권마다 다르고, 실은 정권을 시기 및 분야별로 해체해 살펴봐도 평가가 달라진다. 정책 책임자 발언의 효과도 그 말이 보수 정부에서 나왔는지, 진보 정부에서 나왔는지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2023년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은행 '공공재·돈잔치' 발언을 되짚을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은 고금리 속 은행의 성과급과 이자 이익을 비판하며 은행의 공공재적 성격을 강조했고, 금융권은 대출금리 인하와 상생금융 방안을 압박받았다. 이재명 대통령의 "잔인한 금융" "약탈금융" 발언과 큰 차이점을 느끼기 힘들다. 은행의 이자 이익을 질타하고, 금융권의 고통 분담과 취약계층 보호를 앞세우는 언어는 더 이상 특정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좌우 진영의 전통적 경제정책 구분이 흐려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장 친화는 보수, 분배와 개입은 진보라는 도식만으로는 최근의 경제정치 언어를 설명하기 어렵다. 고금리, 가계부채, 청년 투자, 대기업 초과이익 같은 민감한 의제가 떠오를수록 어느 진영이 집권하든 기시감이 느껴지는 발언과 논란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2026-05-23 1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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