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천하는 선비정신 心山 김창숙] ⑩칩거

"창씨개명, 개 돼지와 다를 바 뭐냐"…해방정국 민족분열도 개탄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당시 김창숙(우측)과 동지들. 사진제공 성균관대학교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당시 김창숙(우측)과 동지들. 사진제공 성균관대학교
김창숙이 이회영, 신채호 등과 무장활동을 추진하던 베이징 후고루원 마을 전경. 사진제공 성균관대학교
김창숙이 이회영, 신채호 등과 무장활동을 추진하던 베이징 후고루원 마을 전경. 사진제공 성균관대학교
1923년 11월 김창숙이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던 보합단의 조직 상황을 조사한 일제 보고서. 사진제공 성균관대학교
1923년 11월 김창숙이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던 보합단의 조직 상황을 조사한 일제 보고서. 사진제공 성균관대학교

울산 백양사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심산의 육체는 이미 늙고 병든 상태였다. 일제도 늙고 병든 심산이 더 이상 일을 도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풀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독립의 꿈과 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백양사에서 심산은 70여 편의 시를 지었다. 심산이 남긴 시에서 음풍농월식의 글귀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 시국을 생각하고 민족의 장래와 나라의 앞날을 우려하는 내용이었다. 심산이 남긴 270여 수의 시는 추상적이고 감성적이지 않다. 그가 살던 시대의 구체적 사례들에 대한 생각을 담았다. 나라를 걱정하는 그의 마음은 상해 망명시절이나 감옥에 갇혔을 때나 언제나 한결같았다.

◆창씨개명

고향에 돌아온 심산에게도 창씨개명의 열풍과 압박은 예외가 아니었다. 명망이 높은 유림의 인사들도 어쩔 수 없이 창씨를 하는 상황이었다. 서민들이나 일제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늦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일경이 그를 찾아와 전 조선의 사람들이 창씨를 하고 있는데 왜 아직도 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쳤다. 심산은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멀지 않았는데 죽더라도 응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일경은 몇 번이나 찾아와 달래기도 하고 겁주기도 하면서 창씨를 촉구했다. 그러나 심산의 뜻은 흔들리지 않았다. '스스로 돌아보아 곧으면 천만 사람이 쳐들어오더라도 마땅히 혼자 나가서 맞는다'는 옛말을 들어 일제의 협박에 굽히지 않았다.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너나없이 창씨를 하더라도 대세에 따라 불의에 빠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심산의 확고한 뜻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일제는 결국 심산의 창씨개명을 포기하고 말았다.

심산은 창씨의 열풍에 너도나도 나서는 당시의 세태를 학문적 후배이자 독립운동의 동지인 손후익에게 보낸 편지에서 질타했다. '을미년의 단발은 황제의 명으로 위압한 것이나 오히려 목이 잘렸으면 잘렸지 머리털은 깎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항거하였는데 지금의 창씨는 아직 엄한 벌로 다스리지도 않았는데 팔도가 이미 풍미했다. 그중에도 영남이 가장 심하거니와 아직 어디에서도 목이 잘렸으면 잘렸지 성을 바꿀 순 없다는 의리의 항거를 듣지 못하였다'고 개탄했다.

심산은 특히 상당수 유림들의 창씨 대열을 꾸짖었다. 손후익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심산이 유림의 창씨를 얼마나 마음 아파했는지 알게 된다. '사대부란 자들이 머리털은 보존하면서 창씨에는 마음이 편하니 머리털에 부끄럽지 않은가. 성현의 글을 읽고 의를 높이 지껄이던 자가 오히려 이와 같으니 무지한 사람들의 잘못을 꾸짖을 수 있는가. 씨를 만들고 성을 버리면 아비를 배반하고 할아비를 버리는 것이니 개, 돼지와 다를 바 무엇이냐.' 상투는 보존하면서 창씨에는 앞다투어 나서는 일부 유림의 행태는 심산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벽옹 김우

심산에게는 우(어리석을 우), 벽옹(앉은뱅이 노인)이라는 별호가 있다. 자서전의 첫머리에 심산은 별호가 생긴 사연을 적어 놓고 있다. '내가 어려서 몹시 미련하더니 늙어서 더욱 어리석었다. 사람들이 자네 이름을 우라고 부르세 하기에 나는 본명인 창숙을 두고 우가 좋다고 하였다. 또 내가 잔병이 많더니 늙어서 앉은뱅이가 되었다. 사람들이 자네 호를 벽옹이라고 부르세 하기에 나는 그것도 좋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나를 벽옹 김우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의 표현대로 감옥서 풀려나와 고향으로 돌아온 심산의 겉모습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리석고 병든 앉은뱅이 노인이었다. 그러나 심산의 존재는 그 자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조국을 생각하게 하고 독립을 염원하게 했다. 고향에서의 칩거는 창씨개명의 소동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조용히 지나갔다. 독립에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무런 활동도 할 형편이 아니었다. 간혹 찾아오는 사람들과 술잔을 나누고 동지 친지들과 가끔씩 편지를 주고받는 게 다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심산은 독립의 상징이었다.

◆해방을 감옥에서 맞다

해방 직전 심산은 다시 감옥살이를 했다. 1945년 8월 7일 밤 갑자기 들이닥친 일경은 그를 왜관경찰서에 가두었다. 국내의 혁명동지들이 비밀운동 기관으로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그를 남한 책임자로 추대하였는데 이 사실이 발각된 까닭이었다. 그렇게 옥살이를 하고 있던 중 8월 15일이 되었다. 정오쯤 한국인 경관이 와서 정전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다고 전했다. 심산은 같이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이는 일본이 패망하였다는 소식이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정전을 자청한 것은 결국 항복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감옥 안이 술렁거렸다. 일본인 경찰들이 와서 제지하였지만 위세가 이전과는 달랐다. 밤이 되자 옥문이 활짝 열리고 정치범이 석방됐다. 석방된 사람들이 너무 기뻐 잠을 자지 못하던 깊은 밤에 일경은 그들을 다시 붙잡아 가두었다. 혹시라도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옥문을 나섰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니 일가친척이 길에서 만세를 부르며 환영했다. 그 다음 날은 심산의 67번째 생일이었다. 친지들이 모여 잔치를 열었다. 술잔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기쁜 생일이었다.

심산은 잘 걷는 사람 10여 명을 성주군의 각 면에 보내 대표자를 모이게 했다. 사월리 청천서당에 모인 성주군의 대표들에게 심산은 치안유지회를 조직하도록 했다. 창졸간에 맞은 해방인지라 정부가 설립되려면 시일이 걸리므로 그때까지 자체적으로 치안을 책임지자는 제안이었다. 고향 성주군에 치안유지회가 조직된 다음날 심산은 상경 길에 나섰다. 성주군청 앞 거리에는 심산의 상경을 전송하러 헤아릴 수 없는 인파가 몰렸다. 성주 군민 모두가 나온 듯했다. 심산이 차에 오르자 사람들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심산이 이제 신생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해 줄 것으로 믿은 사람들의 성원이었다.

서울에서는 심산의 상경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올라오라고 아우성이었다. 해방 정국은 일찌감치 요동치고 있었다. 신생 정부 수립에 주도권을 잡으려는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상경 전 대구에 들른 심산은 건국준비회 조직을 놓고 김관제와 서상일이 서로 다투는 것을 타일러 보았으나 둘 다 양보하지 않았다. 자리나 권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선비 심산은 권력 다툼으로 인한 민족분열의 우려를 떨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해방정국은 타협하지 않는 원칙론자 심산에게는 또 다른 형극의 길이었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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