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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잊혀진 10월, 우리가 밝혀야

정욱진 뉴스국 국장석 부장.
정욱진 뉴스국 국장석 부장.

농사일 마치고 집으로 왔다가 경찰에 포박돼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 집에서 식사 중 연행돼 총살 추정, 아침 출근길 정체 모를 사람이 붙잡아간 뒤 연락 두절, 남편 행방을 찾는 형사들에게 끌려갔다가 풀려난 뒤 사망,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등굣길 경찰에 체포돼 실종, 시위를 주도했던 남편 대신 끌려가 사라진 아내….

매일신문이 최근 연재하고 있는 대구경북 '10월 항쟁'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들이다. 목격자 증언과 미군정 문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보고서, 연구자들의 저서 등을 토대로 그날의 대구경북을 재조명한 결과는 참혹했다.

그러나 일방적인 구타·총살·행방불명에도 7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잊혔다. 대구경북의 1946년 10월은 그동안 '좌익폭동'으로 규정돼 철저하게 외면받아 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폭동'으로 치부됐던 대구경북의 10월은 2000년대 들어서야 겨우 '사건'으로 격상돼 정부 차원의 조사가 일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제는 '항쟁'으로 재평가를 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제주에 4월(1948년)과 광주의 5월(1980년)이 있다면, 대구경북은 10월(1946년)이 있다는 것이다.

일부에선 대구경북의 10월을 '미완의 시민혁명'이자 '현대 사회운동의 원형'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김상숙 성공회대 교수는 "대구 10월은 규모로 봤을 때 해방 직후 대구 지역사회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고, 동학농민운동이나 3·1운동 수준의 전국적 항쟁이었다. 하지만 의미와 실상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울린 총성은 메아리처럼 경북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같은 달 2~6일 경북 22개 군 대부분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1949년 발간된 '조선중앙연감'을 바탕으로 정해구 교수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대구와 경북에서 시위와 봉기에 참여한 연인원은 77만3천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구경북 인구(317만8천 명)의 24%에 달할 정도였다.

대구경북 10월의 여파는 그해 12월까지 전국을 뒤흔들었다. 소작제에 반대하는 농민들과 결합해 경남(10월), 충남과 충북(10월), 경기도와 황해도(10월), 강원도(10~11월), 전남(10~11월), 전북(12월) 등 전국 73개 시·군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전교조 대구지부는 "1946년 10월 1일 시작된 대구 10월 항쟁은 해방 이후 대구에서 일어난 가장 아픈 역사"라며 "하지만 아직까지 대구 시민들, 특히 교사들이 대구에서 일어난 10월 항쟁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당연히 학교에서도 10월 항쟁에 대한 교육이 안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연구자들도 대구경북의 10월을 '폭동'이나 '사건'이 아닌 '항쟁'으로서 의미를 부여하고, 2·28민주운동, 국채보상운동 등과 같이 지역사회에서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군불은 지폈다. 이제 관(官)과 학(學) 등이 중심이 된 지역사회 전체가 대구경북 10월의 명예 회복에 나서야 한다.

"세월호 참사나 광주 5월 민중항쟁이 만약 대구에서 벌어졌다면 지금처럼 큰 이슈나 울림으로 평가받았을까?" 매일신문이 연재하고 있는 '10월 항쟁' 기사를 읽던 한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10월 항쟁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긍정적 요소를 찾는 과정은 우리 지역에서만 할 수 있는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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